최종편집 : 2021-12-09 16:1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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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인의 역사』 출판물  지난 11월 25일 오후 2시, 이팝나무 군락지로 알려진 자인면 계정 숲 내 조선시대 자인현의 정청(政廳)인 시중당(使衆堂) 뜨락에서 한 국문학자(이홍우, 59, 문학박사)가 수년간 각고(刻苦)로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자인의 역사』란 제명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자인면 출신 이태희(61, 대주화학 대표·자인면 명예면장)·황성일(81, 동아P&P 회장)씨의 협찬과 류영태(61) 전 자인면장의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자인의 역사를 적은 서책은 과거 1800년대에 네 번에 걸쳐 읍지 형태로 출간되었으나, 공식적인 기록물은 1888년 자인현감으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默)이 1889년 발간한 『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과 1932년에 출간된 자인 출신 근대 서화가인 희재(羲齋) 황기식(黃基式, 1905~1971) 선생이 집필한 『자인현읍지』가 전부다. 하지만 내용이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출간된 이홍우 박사의 『자인의 역사』는 무려 782쪽에 달하는 자인 사람의 삶과 생활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일 출판기념회에 참석(경산시 기관장 및 자인면민 100여 명)한 인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시중당 앞에서 열린 『자인의 역사』 출판기념회  『자인의 역사』는 지난 2018년 1월부터 저자가 개별적으로 자료수집과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공식적으로는 2021년 3월 자인역사 편찬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향토사 자료를 바탕으로 약 4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귀띔하였다.  이 책은 모두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 중 미세하게 소상(昭詳)과 왜소(矮小)한 부분이 다소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종원 자인역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자인의 역사 편찬을 위하여 애써 주신 자인면민과 출향(出鄕) 인사에게 감사드리며, 과거 자인현 구역에 포함되었던 남산(南山)·용성(龍城)과 진량(珍良)·압량(押梁) 일부 지역을 포함한 자인의 역사서 개정판이 발간되길 희망하며, 훗날 이 책이 새로운 역사서 발간에 유용한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피력하였다.  저자 이홍우 박사는 자인면 신도리 출신으로,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한 후 동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무천극예술학회 회장, 한국드라마학회 이사도 맡고 있다. 연구 저서로는 『한국 희곡과 극적 상황』, 『한국 현대 희곡론』, 『희곡의 이해』, 『희곡 원론』 등이 있으며, 창작 희곡집으로 『캄차카반도 4,750미터 클류체프스카야산의 하얀 웃음(연극과 인간)』이 있다.  한편, 자인면은 오는 12월 6일부터 각 기관, 공공도서관 및 대학도서관 등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책자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자인면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무료 배부할 예정이라 밝혔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12-08 09:56

  재산을 두고 펼쳐지는 웃음과 눈물의 가족 이야기 블랙코미디 ‘아비’, 경산시립극단 제8회 정기공연에 선보입니다.  경산시립극단 제8회 정기공연 ‘아비’가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4시에 경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전석무료 공연으로 펼쳐진다.  이번 정기공연 ‘아비’는 평소 가족 간의 소통과 애정 표현이 서툴며, 모든 일에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아버지가, 어느 날 가족들을 모이게 한 후 “전 재산을 남산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라는 선언을 하게 되고, 이를 뒤엎으려는 가족들과 일어나는 다툼을 표현한 코믹 풍자극이다.  아내와 3남매는 기부하려는 아버지에게 애원하고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아버지의 결심을 바꾸지 못해 가족들의 갈등은 고조된다. 이런 팽팽한 갈등 속에 아버지가 배신감과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가족 간 서로 이해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연극 “아비”는 인간의 돈에 대한 욕망을 풍자한 코믹 풍자극이다. 돈에 대한 집착을 가장 강하게 보인 아버지가, 사실은 가족애가 깊은 사람이었다는 반전은 관객들에게 잊혀 가는 가족애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이자 원로배우 ‘이원종’이 남편 역으로 출연하고 대구·경북의 유명 극단 대표와 배우들이 배우로 대거 출연해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본 공연은 무료공연으로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공연일 전날까지 예매할 수 있다. 또한, 잔여석에 대해 공연당일 경산시민회관에서 공연 시작 90분 전부터 좌석티켓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관광과(810-5359, 6587)로 문의하면 된다.

문화 · 예술 | 김도경 기자 | 2021-11-17 12:21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1-10-26 23:59

▲ 추석을 앞두고 북적거리는 자인 재래시장   오는 21일 추석(秋夕)은 설날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양대 명절(名節)에 귀향(歸鄕)하는 인파를 보고 민족의 대이동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이중 추석은 매년 음력 팔월 보름날로, 이는 신라시대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했다 전승되며, 예로부터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과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님께 차례(茶禮)를 모시는 의례를 갖추게 되며, 이를 다른 말로 가위·한가위 또는 중추절(仲秋節)이라 하기도 한다.   이때는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할 계절이라 음력 팔월 중순은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하다. 절기 또한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 예부터‘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라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라 하였고,《삼국사기》권 지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이사금] 때, 왕이 이미 6부를 정한 후 이를 두 부분(部分)에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에게 각기 부내(部內)의 부녀자를 거느리어 편을 짜고 패를 나누어 7월 16일부터 길쌈을 시작하여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고사(考査)하여 지는 편이 음주(飮酒)를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이에 가무(歌舞)와 온갖 유희(遊戲)가 일어나니,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고, 이에 진 편의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였던 음조(音調)가 훗날 회소곡(會蘇曲)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남아있는 가배(嘉俳)가 곧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가위·한가위고 추석이다.   집안에 따라 다소 달리할 수 있지만, 추석 전에 조상님 산소를 성묘하고 벌초를 마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추석을 맞이하며, 보편적으로 추석날 아침에 첫 번째 행하는 일은 수일 전부터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상님 음덕(蔭德)을 기리는 차례를 모시는 순으로 시작된다.   이때는 설날과는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제일 먼저 올리는 천신(薦新) 의례를 거치는 것이 전통적인 상례(常例)이다. 이는 곧 조상님의 음덕(蔭德)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 그리고 효에 근간(根幹)이 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조상님과 후손들의 교감(交感)은 이를 받드는 후손들에 제의(祭儀) 축문(祝文)에서 그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축문에 수록된 용어와 사자성어 등을 중심으로 이를 서술하고자 한다(본문은 기제사 제의 의례에 국한).한자로 차례(茶禮)는 다(茶)자를 쓴다. 즉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지내는 제사(祭祀)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즉 15일 단위로 4대조까지 모시는 사당(祠堂)에 차[茶]를 올리고 간략한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현상으로 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없지 않으나, 이는 최대한 간소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제사와 차례의 가장 중요한 부문은“독축(讀祝)”이다.  즉 모든 제사상을 아무리 진수성찬을 올렸다 해도 제주(祭主)가 마음으로 받치는 축문(祝文)이 있어야 성대한 제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사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 신(神)도 제주(祭主)의 애달픈 문장과 목소리에 마음을 연다는 데 진정성을 두고 있다.   축문의 문장 구성에도 어딘가 모르게 절절하고 효가 묻어나 있다.  이를테면 제를 알리며 조상님께 알린다는 문장도‘효자 ○○ 감소고우(敢昭告于)’라는 사자성어로‘제주○○이 삼가 밝게 고한다’하였고, 돌아가신 분을‘현고·현비(顯考·顯妣)’라 높이고, 부군(府君)이라 하였으며, 해가 바뀌었다 하여‘세서천역(歲序遷易)’으로 조상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기일(忌日)을 휘일부림(諱日復臨)이라는 애통(哀痛)함을 표했다.  또한 덧붙여 그 그리움을‘추원감시(追遠感時)’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난다고 하였으며, 그 감정을‘호천망극(昊天罔極)’‘불승영모(不勝永慕)’라 하여 넓고 하늘 같은 조상님의 음덕을 기렸다.   이와 아울러‘근이(勤以)’‘청작서수(淸酌癙羞)’라하여 정성을 다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공신전헌(恭伸奠獻)’이라 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제사를 올린다고 하였으며, 종결문에‘상향(尙饗)’이라 하였으니 부디 조상님께서 흠향하시라는 간절함이 있다.  이 밖에도 축문에는 유시보우(惟時保佑), 실뢰신휴(實賴神休), 세천일제(歲薦一祭), 예유중제(禮有中制), 이자상로(履玆霜露) 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기제사의 축문은 다음과 같이 후손들의 애틋함이 글귀마다 묻어나 있다.  먼저 기일을 일깨우면서‘유세차(維歲次)’, 이는 애절한 마음을 여는 문장으로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는 발단부로 돌아가신 애통함 해를 맞이한다는 첫머리 문장이다.  이어지는 간지(干支)는 돌아가신 해를 의미하며, ○월 간지, 삭(朔)은 그달의 초하루 간지, 이후는 기일과 간지를 적는다.  이는 돌아가신 해와 돌아가신 날의 달과 그달의 초하루 간지를 적고, 이어 기일 날짜와 간지를 적은 후, 제주의 이름을 쓴다.  독축(讀祝)은 제주가 읽거나 대신 읽는 대축(大祝)이 있으나, 기제사나 제주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처럼 제의(祭儀)는 곧 후손들을 훈도하는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전통 축제를 통하여 효와 충을 일깨워 왔고, 이로써 반만년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연면히 이어왔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09-11 19:50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경산시(시장 최영조)는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의 3종이 지나달2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65호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은 1489년(성종 20)에 윤호, 임원준, 허종 등이 왕명을 받아 8권 8책으로 편찬 간행한 의학서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구급방서(救急方書) 중에서 가장 정리가 잘 된 책으로, 질병을 중풍, 두통 등 127종으로 나누어서 그 치료 방문을 모아 엮었다. 현재 전하는 중간본은 권1, 권2, 권3, 권6, 권7의 다섯 책이다. 이들은 동일한 판본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권7>은 원간본인 을해자본의 번각본이며, 대체로 원간본의 면모를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국어학적으로 원간본의 어휘, 문법, 음운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문원문, 현실한자음, 한글언해, 방점, 고유어, 약명 등은 한의학, 국어학, 서지학, 번역학, 한문학 등 다방면의 연구에서 가치가 크다. 『천로금강경』은 송나라 임제종의 승려인 천로 도천(川老 道川, 일명 冶父)이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금강반야바라밀경』에 주석을 달고 송(頌)을 붙인 목판본으로, 13세기 중엽의 간본으로 추정된다.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중국에서 처음 전래된 형태를 그대로 번각한 것이며 고려에서의 간행은 13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후 1387년에 간행한 것은 한 세기 전에 간행되었던 책을 일부 고쳐서 번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래되거나 소장된 천로(川老) 야부(冶父)의 계열본 중에서는 그 간행시기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추정되며, 한국의 불교사와 인쇄문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료이다.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  당나라 종밀(宗密, 780~841)이 저술한『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疏論纂要)』에 대하여 송나라의 혜정(慧定)이 그 요지를 다시 해설[助顯]한 것이다.「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下券)은 1378년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전본(傳本)이 매우 드문 희귀본으로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책은 경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고려 말 사찰 간행 불서 연구에도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불교사와 인쇄문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최남수 문화관광과장은“이번에 도문화재로 지정된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전적 3종을 포함한 우리시 지정문화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 속에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전적 3종이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경산은 국가지정문화재 15건, 도지정문화재 28건, 국가등록문화재 1건 등 모두 44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지난해 국가등록문화재로 신청한 대구대학교 점자박물관 소장품인「한글학습 점자교재」는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동산분과)에서‘국가등록문화재 신청’으로 의결하여 문화재청 심의를 앞두고 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 1898년에 뉴욕 점자를 기초로 하여 한글점자(이른바 평양점자)를 창안하고 학생을 가르친『점자교재』로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심의되었다.

문화 · 예술 | 김도경 기자 | 2021-09-11 19:34

▲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  8월 5일(목요일) 13:30~17:30분까지 무려 3시간 30여 분(휴시시간 제외)에 걸쳐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사)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무형문화연구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소재, 원장 함한희)이 주관한 행사로, 최재해 보존회장은‘지금까지 여러 번 학술대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발표 때마다 학자들 간에 여러 이견이 분분하여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를 함축시켜서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다시 시도하였다.’라며‘경산자인단오제를 문화재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경산 자인 고을에 있는 지역 공동체(共同體)의 큰 행사, 제사(祭祀)로 봐주셨으면 한다’라고 피력하였다.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는 어디까지나 경산자인단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한 장군 오누이에 대한 향토 사랑과 충절(忠節), 그리고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기 위한 제의(祭儀)를 근본으로, 이는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따른 여느 단오절(端午節) 행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역축제(地域祝祭)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은,‘어디까지나 우리 것이 가장 한국적이요, 세계적이라 하듯, 자인 지방 단오 속에는 한 장군이란 지역 수호신(守護神)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의 충절(忠節)이 이 고장을 지켜왔다는 점만으로도 축제(祝祭)로서의 독창성(獨創性)은 여느 단오절 제의 의례에 본이 된다고 자평하였다.  이를테면, 제의(祭儀) 이전에 지역에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진충묘(盡忠廟)에 이르는 호장행렬(戶長行列) 또한 제의(祭儀)를 앞두고 지역 수호신(守護神)인 한 장군 오누이를 맞이하려는 서막(序幕)이다. 이는 전날 도천산(到天山) 아래 검흔석(劍痕石) 부근에서 연행(演行)되는 영신의례(迎神儀禮)와는 차별화되고 있다.  이는《동국세시기》에 수록된 군위단오편에도 주신인 김유신(金庾信)과 부신인 소정방(蘇定方)·이무(李茂) 장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대제(大祭)에 앞서 고을 이방이 대신한 호장행렬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곧 강신례(降神禮)를 의미하는 행렬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강릉단오의 경우도 그 형식은 달리하고 있지만, 유사성은 없지 않다.  여기서 자인단오와 한 장군제 유래를 살펴보면, 그 출발점은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자인읍지(慈仁邑誌)》에 따르면, 9세기 전후 신라 시대에 왜구(倭寇)들이 자인의 도천산(到天山)에 성(城)을 쌓고 기거하면서,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 오누이가 버들못[柳提]에서 여원무(女圓舞)와 배우잡희(俳優雜戱)의 놀이판을 벌여 이들을 유인(誘引), 섬멸(殲滅)하였다는 데서 설화적 발단부(發端部)와 전개부(展開部), 결과부(結果部)가 성립된다.   이에 증시부(證示部)는 한 장군의 충의(忠義)를 추앙(推仰)하여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단옷날에 추모제를 모신 후 여원무와 배우잡희, 무당굿, 그리고 단옷날 행사인 씨름, 그네 등, 다양한 놀이를 3~4일에 걸쳐 연행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이른바 완벽한 설화적 4단 구조가 갖춰진 셈이다.  이와 같은 축제 전통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전승력(傳承力)이 약화(弱化) 되었으나, 1971년 한장군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 한장군문화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뒤 1991년에 한 장군을 추모하는 한묘대제(韓廟大祭), 여원무(女圓舞), 호장굿, 자인팔광대(慈仁八廣大), 무녀 굿이 자인 단오절에 본격 연행되면서 1996년부터는 경산시의 후원으로 경산자인단오 한장군축제로 개칭되어 오다가 2007년 3월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名稱)이 변경되었다. 이러니 자인단오의 뿌리는 곧 한 장군 축제이고, 한 장군 오누이가 중심 신체(神體)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역 전통 축제가 단오(端午) 세시풍속(歲時風俗)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단오(端午)라는 큰 틀 속에 한 장군의 존재가 동일선상에 종속된 축제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한 장군을 추모(追慕)하는 제의를 단옷날에 향사(享祀)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곧 기일(忌日)과 무관한 단옷날이 한 장군 신위(神位)를 받드는 날이란 뜻이 된다. 이날에 오신(娛神)과 유신(遊神) 행위로 등장하는 여원무와 자인팔광대, 자인 큰 줄다리기, 무녀 굿 등은 한 장군을 추모하는 종속(從屬)된 하나의 제의 의례의 진행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축제적 일련의 행위에 그간 학계에서까지 설왕설래하며 결론을 얻지 못한 부분을 이번에 무형문화연구기관에 의뢰하여 큰 틀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이다.  이에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회장 최재해)는 문화재라는 측면보다 자인의 큰 어른 한 장군에 대한 캐릭터를 부상(浮上)하고 이를 기리고자 하였던 것, 그 구상이 이른바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이다. ▲ 학술대회 개최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는 최재해 보존회장   그 방안(方案)은 모두 6편의 논문(論文)을 통해 6명의 발표자와 6명의 토론자를 통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먼저 제1주제는, 무형문화재 정책과 경산자인단오제(발표 한국예술종합학교 허용오 교수)로, 발표자는 ①경산자인단오를 보는 두 시선, ②흥미로운 대상으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③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④경산자인단오제 앞에 놓인 세 갈래 길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본고에서도 종래와 차별화된 논증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결론 부분에서 ①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 ②현재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제기된 문제점을 섬세하게 개선, ③현재의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토론자(목포대학교 이경엽 교수)는, 보존회 앞에 놓은 세 갈래 길이 타당한 제안인지, 이런 식의 제안을 받을 이유가 있는지, 어떤 길을 수용할 것이지 등등, 보존회로써 선택하고 응답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지역 공동체 유산으로서 경산자인단오제로(발표 영남대학교 이은정 교수), 본고는, 서론 부분에서 자인단오와 연계한 구 자인현 내에 읍면을 달리한 마을 단위 당산제(堂山祭) 또는 동제(洞祭) 형식의 개별 한당을 지역공동체적 측면에서 진충묘(盡忠廟) 내 통합 흡수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발표자는 발표문 끝부분에 보존회가 경산자인단오제 내에서 한당 제사의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수용하고, 각 마을에서 한당 제사(祭祀)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유연하게 포섭(包攝)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발표자의 제안에 반박하고 나선 최주근 교수  이에 토론에 나선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 교수는, 마을 단위 개별 사당은 지역단위 독창성(獨創性)과 개별 신앙적(信仰的) 개념(槪念)으로 존속되고 있는 바, 이를 단순 문화재적 한계로 보고 향후 통합 또는 포섭하는 방안은 바람직하지 못한 제안이라 지적하였다.  세 번째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호장장군행렬의 운용과 놀이 구현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제언(발표 진주문화연구소 남성진 교수, 토론 한양명 교수) 이다.  발표자는 본 발표에서 한 장군의 출현 시기를“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하였고, 호장행렬은 전설의 역사화 현상 즉, 자인단오의 의역사적(擬歷史的) 접속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과거의 전설적 인물을 현재의 실존적 시간 속에 불러와서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한양명 교수는, 호장(戶長)을 장군행렬로 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호장행렬을 단오를 선전하는 길놀이로 보거나 단선적인 일회성 행렬 정도로 보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재현이 이루어진 것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네 번째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 연구이다. 발표자(발표 계명대학교 이종희 교수)는 본고를 통해 경산자인단오제의 유래와 역사를 피력하고, 여원무와 여원화, 여원무의 특징, 여원무의 구성과 변천을 논하고, 이어 여원무의 전승 보존과 문제점 개선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전성희 교수는, 여원무와 여원화의 본질에 대한 의식 부족과 여원무 원형 연구 및 재창조 과정의 당위성 입장이라는 표현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다섯 번째 발표에 나선 석대권 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장은, 국가무형문화재 범주로서 자인팔광대의 전승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석 소장은 본고에서 특히 자인팔광대의 명칭과 대본의 문제를 제시하고 보존회의 적극적인 검토를 주문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는, 3가지 질문을 통해 발표자가 제시한 자인팔광대에 대한 문제 사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것을 요구하였으며, 자인팔광대에는 발표문에 지적되어 있듯이 이야기와 시대에 대한 통찰과 영남의 춤과 음악이 응집된 인간 위무의 종합예능인데 이 부분이 자인단오제에서 가볍게 다뤄지는 것 또한 경산자인단오제 성격을 잘못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마지막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큰굿의 방향성 탐색이다. 이에 발표에 나선 경상대학교 홍태한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자인단오제 큰굿의 가치와 방향성, 향후 보존회의 역할 등을 역설하였고, 토론에 나선 윤동환 전북대학교 교수는, 자인 단오 큰굿의 제의적 복원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자인의 큰굿 형식에 대한 개인적 사견과 이를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전승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였다.▲ 종합토론에 나선 박승표 자인면 번영회장  본 발표를 마친 종합토론 시간에 무려 150분(주제당 25분)에 걸친 발표자와 토론자의 토론에 열중해온 자인면 번영회 박승표(향토사학가) 회장이 종합 토론자로 나서면서, 그간 답답한 심경을 대략 10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발표자의 진정성 있는 학술적 해명과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경산자인단오제는 개별적 연행이 아닌 5마당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②자인단오축제를 조선 시대 고을 축제로 표현함은 신라 시대부터 전승해 온 경산자인단오 축제에 대한 극단적 편견이다. ③호장행렬은 신라말부터 한 장군 제의를 최초 봉행한 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조선시대로 표기함은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④호장행렬은 단순 가장행렬이고, 길놀이 문화의 행렬로 치부하는 것은 경산자인단오축제의 위상을 저해하는 극단적 표현이다. ⑤호장행렬은,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勝戰)을 알리는 행렬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다. ⑥여원무 연구에서 한 장군은 구비전승되는 인물로, 이는 자인중학교 증축 시 고분발굴 시기로부터 추정된다는 의견은 근거를 왜곡한 발상이다. ⑦여원무 복제에 있어 설왕설래한 발표 내용은 발표자가 주장하는 발전적 방안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⑧팔광대에 등장하는 인물 소개가 갈팡질팡하였음은 체계적인 연구라 할 수 없다. ⑨한장군의 등장 시기를 이미 여러 읍지에 수록된바 같이“나대지유풍”즉, 신라 시대 풍속이라 하였는바, 이에 발표자가 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굳이 지칭함은 무슨 의미인지? ⑩팔광대를 유교적 바탕에서 생성된 1980년대 창작품이다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연구한 것인지, 이로써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은 무엇이란 말인가 등, 요목 조목 질의를 하였으나, 종합토론을 위한 시간적 제약 때문에 종합토론의 답변도 없이 끝마치게 되어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며. 이에 대한 토론자의 구체적인 답변을 요약하여 보존회측에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 진행팀을 주목하게 하였다.  필자(김종국 박사)는, 본고를 정리하면서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에서 제출한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을 표본으로,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가 이를 어디에서 어디까지 원용할 것인가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의 통찰력을 기대해 본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08-08 18:24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1-07-15 10:23

▲ 여원무 연행 장면(비대면 연행)  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경산자인단오제”가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의 여파로 비대면 방식으로 연행되면서, 경산시와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는 좀처럼 주춤하지 않는 코로나19에 정면 도전, 새로운 트렌드(trend)인 온택트 문화 기법을 활용하여 경산자인단오제의 산실인 경산시의 역사문화와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한“자인단오TV”를 개발, 경산시민과 함께 전국의 문화애호가가 온라인을 통하여 소통하는 방식을 시도함으로 연일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평을 받았다.▲ 경산자인단오제 최재해 보존회장  본 온택트 방식을 기획한 최재해 보존회장은 경산자인단오제 연행의 최소한의 필수 요원과 영상 촬영 스텝만 참여한 가운데 철저한 거리두기와 비대면 수칙을 준수한 채 이를 총 3회에 걸쳐 온라인 형식의 유튜브 방송을 시도하였다고 회고하면서 내년에는 경산자인단오제의 원형과 예술적 가치를 보다 승화시킬 수 있는 빛나는 지역축제로 이끌어나가겠다 다짐하였다.▲ 신주 빚기와 숙성과정 안치  본 기획은 모두 3회에 걸쳐 주로 현장 중심으로 편집하여 유튜브 자인단오 TV로 방영하였다. 그 첫날은 한장군놀이의 발상지인 도천산 아래 버들 못[유제지]에 영신제를 올리고, 이어 한 묘(한 장군 사당)를 영상답사, 한 장군 꽃관 지화(紙花) 만들기, 향토 출신 가수 노래, 경산시 농특산물 소개 등 방송인 한기웅씨 진행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였고, 둘째 날에는 방송인 이도현 진행으로, 단오장 이모저모와 신주(神酒) 빚기 등을 소개하고, 박인태 이수자의 한장군놀이 유래 소개, 경산특산물 알리는 순으로 진행하면서, 중간중간에 향토 출신 가수들이 주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자인면 원당리 진충묘(盡忠廟)의 한장군 영신(迎神) 의례  셋째 날인 단옷날에는 호장장군 행렬, 진충묘 한 장군 대제 봉행(초헌관 최영조 경산시장), 한 장군 묘소 참배, 보인 농악 풍물 한마당 등으로 이어졌고, 오후에는 계정들소리, 자인팔광대놀이, 한 장군 큰굿 순으로 실시간 중계형식으로 유튜브 영상이 방영된 후, 본 경산자인단오제 온텍트 유튜브 자인 단오 TV가 종영(終映)되자 전국의 많은 문화애호가의 환영 댓글과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에 시도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온택트 방식의 영상기획은, 2억 5천만 원의 경산시 예산지원으로 추진되었는데, 여기에는 현 보존회 최재해(69) 회장과 안명욱(86) 전임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향토애와 협력으로 가능하였다는 후문이다.▲ 전통 신주 빚기 재현 현장을 지도하는 안명욱(86) 전 보존회장  안명욱 전 회장은 최재해 현 회장과 함께 재임 중 경산자인단오제를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을 이루어온 인물들이다. 그 중 안명욱 전 회장은 이전 경상북도 도의원, 자인농협장 등을 거친 지역에 큰 어른으로, 경산자인단오제의 역사와 지역문화에 자타공인의 노하우(know-how)가 있다는 정평과 함께, 그는 이번에 기획한 유튜브( YouTube) 방송 촬영을 위해 구순(九旬)을 앞둔 연세도 아랑곳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며 격려와 고증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평을 받았다.▲ 진충묘 한 장군 추모 대제와 한 장군 묘소 참배  경산자인단오제는 강원도 강릉단오제와 더불어, 경산시 자인면과 강릉시 대관령 일대는 국내 대표적인 단오 축제의 현장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범일(梵日) 국사를 추앙하는 강릉단오제에 비해, 경산자인단오제는 한 장군과 그의 누이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축제로, 이 지방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구 자인현에 5개소(용성면 대종, 가척리, 자인면의 원당리, 진량읍 마곡리, 계정숲 진충묘)의 한 장군 사당(祠堂)을 짓고, 장군과 한 낭자의 충의와 애향심을 길이는 실존했던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장군 대제 봉행 후 오는 2022년을 기약하는 최재해 회장 인사  요약하면, 경산자인단오제의 한 장군놀이는, 신라 말경 자인지역에 왜적이 침략(侵略)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웅거(雄據)하면서 밤마다 지역의 양민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자, 어느 날 한 장군이 도천산 아래 버들지 앞에서 왜구(倭寇)를 섬멸할 것을 맹세하고, 지역에 의병을 모아 버들지로 유인 섬멸하였다는 전승유래로, 당시의 설화 현장에는 왜구를 참한 참왜석(또는 검흔석)이 있고, 버들지가 남아 있었으나, 급격한 산업화로 버들지는 자인공단 내로 편입되어 당시의 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단 입구에 이를 축소한 모형만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 장군의 활동상은 자인 지방의 단오놀이로 승화되면서 당시 한 장군 오누이가 지역 의병들이 이 왜구를 유인하면서 꽃을 들고 화관(花冠)을 쓴 춤이 여원무(女圓舞)로 인정, 이를 국가 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 보존되면서 경산자인단오제 한장군놀이 연행이 본격화되면서 경산지방의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06-29 21:06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1-05-31 14:29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1-05-31 14:28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1-05-28 16:54

  경산인의 정신적 지주이신 삼성현(원효·설총·일연) 가운데 한 분이신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선생을 기리는 신축년(辛丑年) 춘향제(春享祭)가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소재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엄숙히 봉행 되었다.  이날 제의(祭儀)는 최근 코로나19의 극성으로 방역 마스크 착용과 개인 거리두기 등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하에 초헌관에 정정호(77, 도동서원 원장), 아헌관 이희문(76, 유생), 종헌관 김재희(75유생), 집례 이순기(76, 유생), 축 최선교(76, 유생), 알자 김영구(61, 유생) 등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3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천기찬(千基燦) 성균관 전의(典儀)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제의에 참례한 자인지역 유생들  특히 이날 제의에는 이 고장 출신(남산면 하대리) 영화배우 이원종(75)씨가 자리를 함께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홍유후 설총 선생은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조부는 신라 17관등 중 11관등이던 내마(奈麻) 담날(談捺), 부(父)는 서당(誓幢), 모(母)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공주이다.  선생은 육두품 출신으로,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삼국사기』에“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삼국유사』에는“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또한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삼국사기』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화왕계」는「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동문선』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타계 이후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진주 남악서원 제향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불과 서쪽 1km 지점에 삼성현을 기리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설총 선생의 배향 또한 본 역사공원으로 옮겨 세워 경산시민들이 함께 참례할 수 있는 제의 공간으로 조성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이기도 하였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04-26 19:07

  지난해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소재 육영재(育英齋)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면서, 그간 소원(疏遠)하였던 하양읍 교리 소재 하양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가 명실상부한 조선 시대 하양지역의 지방 선비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도장이었던 사실이 가시화되고 있다.▲ 하양향교 전경  하양읍 한사리 출신 최재림(85, 전 하양향교 전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명종 10년(1555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이 세워지면서, 하양읍 사기리 소재 환성사의 사전(寺田)이 임고서원에 관리권이 넘어갔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하양현(河陽縣) 유생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하여 마침내 하양향교에 귀속되게 윤허 받았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재림 전 전교는, 당시는 조선 조정의 억불숭유 정책이 팽배한 시기라, 큰 사찰에 대한 사전(寺田) 관리는 이 밖에도 임고서원이 무려 5개 사찰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양 유생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환성사 관리권이 하양향교로 돌아왔다며 당시의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실제 당시 임고서원 소장(所藏) 전적 중, 환성사를 비롯한 5개 사찰과 임고서원과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과 당시 하양향교와 임고서원의 유림이 환성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상소한 결과, 조정으로부터 그 판결을 받은 기록문서인‘환성사결송문(環城寺決訟文)’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하고 있다.  하양향교에 관한 문헌은, 태학지(1785년,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와 경산군지(경산군, 1971),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등을 다음과 같이 축약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과 2005년에 편찬한 하양향교지를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하양향교 대성전  이 기록에 의하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길20길 12-5에 소재한 하양향교는, 1580년(선조 1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에 대성전을, 1622년(광해군 14)에 명륜당을 각각 중건하였다 하였고, 그 뒤 1803년(순조 3)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1862년(철종 13)에 진사 손상봉(孫相鳳)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했다.  이 밖에도 1903년, 도유사 김상룡(金象龍), 지현(知縣) 윤규선(尹奎善)이 교궁(校宮)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 도유사 조학기(曺學璣)가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4칸의 전사청(典祀廳), 기물고(器物庫),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내삼문·외삼문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다.  동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의 위치는 명륜당 앞이어야 하나, 이 향교는 출입도를 정면으로 하고, 경사가 완만한데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명륜당(明倫堂) 뒤에 위치하는 특이한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대성전에는 5성위와 신라 2현, 송조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7호로 지정된 하양향교는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焚香)하고 있으며, 운영은 전교 1명과 장의 18명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허광열(75) 현 하양향교 전교는, 하양향교는 하양읍 소재지 중심권에 다소 벗어나 있지만, 하양 유생들은 임진왜란 때나 이후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엿하게 일어나 향토를 수호하여왔다 강조하면서, 최근에도 이들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청소년 충효 교실 등을 확대 추진하고 있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하양읍 동서리에 소재한 하양 육영재(育英齋)는, 하양현의 영재교육을 위하여 조선 순조 23년(1823년)에 하양 현감 이태승(李台升)이 하양지역 향내 유림과 함께 기부금 등으로 당시 환성사(環城寺)에 축조되어 있던 안양실(安養室)을 옮겨와 세운 하양향교 부속 서당이라 설명하였다.▲ 육영재 전경  이에 허광열 전교는, 당시 육영재는 향내에 수학하는 수재(秀才)들을 선발하여 진학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학생 선발과 운용지침에 관한 건은 하양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또한, 훈장은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분을 추대하여 강학(講學)을 맡겨, 성균관(成均館) 진학과 과거에 응시토록 양성하였다고 피력하였다. 또, 숙식과 학자금은 지역 유림에서 육영계(育英契) 및 보인계(輔仁契) 등을 결성하여 재정적인 어려움을 없애고, 학문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육영재는 중간에 한때 양사재(養士齋), 모성재(慕聖齋)라 지칭했다면서, 이는 오로지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육영재는 하양의 자랑이며, 교육도시 경산의 위상을 부상(浮上)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강조했다.  이밖에 육영재는 <육영재기(育英齋記)>, <육영재 상량문(育英齋上樑文)>, <육영재 중수기(育英齋重修記)>, <모성재기(慕聖齋記)> 등 현존하는 관련 자료를 통해 창건과 변화, 그리고 운영 실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한편, 하양 육영재는 경상북도에 조선 후기 양사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 민관이 함께 창건하고, 현재까지 그 구조와 규모가 큰 변화 없이 남아있어 고건축물로, 건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학·교육사·사회사 연구에도 중요 자료로 평가돼, 지난 7월 3일 열린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건축문화재분과)에서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육영재 현장에서 증언하는 최재림 전 전교  이와 동시에 경산시는 지난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5월 30일까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특별전시실에서“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란 주제로 다양한 서책, 교지, 현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여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1-02-23 20:42

▲ (사) 담수회 경산지회 교양강좌와 수강 장면  (사)담수회 경산지회(지회장 박영수, 75)는 지난 11월 18일 오전 10시,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校村里) 소재 자인향교 명륜당에서 2020년 (사)담수회 경산지회 단합 및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이날 행사에는 경산·자인·하양향교의 전·현직 전교와 임원 70여 명이 회원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특히 본행사는 코로나19에 대비한 철저한 방역수칙과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등이 엄격히 준수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강좌에는 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종국 박사가“담수회 정신의 계승과 발전방안”이란 주제 발표를 하였다.▲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 아래 묵언으로 진행된 자체 오찬 행사  이에 김종국 박사는 강좌를 통해 본래 담수회는 윤리 도덕 선양과 인간성 회복, 유학(儒學)의 현대화와 대중화 실천, 도덕과 윤리 사상을 고취 앙양하며, 젊은 세대의 충효 정신을 함양하고, 올바른 인재 육성을 위한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 앞장선다는 설립목적을 바탕으로, 근본 취지는 영남 학통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겨레의 위난에 순절(殉節)함을 최고의 의(義)로 삼는 선비정신의 선양을 목적으로 한다고 피력하고 예부터 경산지방은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연(毅然)하게 일어나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지역 유생들이 자리매김하였다고 역설하면서 그 예로 신라 시대 압량주(押梁州)의 주병(州兵)과 조선 시대 임란 발발 시 창의(倡義)를 주도하였던 지방 유생들의 의병(義兵) 활동이 금자탑(金字塔)이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진 회원 단합회에는 미리 준비한 자인향교 전정 오찬장에는 지그재그식 좌석 배치를 통해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수칙을 준수와 함께 시종일관 묵언(默言) 속에 진행된 오찬 행사가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0-12-13 23:58

  지난 호에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불렀던 무애가와 무애춤에 대한 진정성을 짚어보았고, 이번 호는 이를 마무리하는 1~2차에 걸친 입당 구법 시도와 당항성 부근 한 토감(土龕)에서 깨달았던 일체유심(一切唯心), 그리고 신라 백고자회(百高座會)에서 그가 소리쳤던‘서까래와 들보’는 무엇을 의미하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어제와 오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유심”  본고는《삼국유사》권4, 의해5〈의상전교(義相傳敎)〉에 수록된 원효의 1차 입당 구법 시도와 송나라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 북송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 그리고 북송의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지은 임간록(林間錄)을 일연(一然)이 찬술한《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먼저 원효의 1차 입당 구법에 대하여《삼국유사》〈원효 불기〉에는 이를《당고승전》에 의존하였고, 동 유사〈의상전교〉에서는 의상의 청에 의하여 입당(入唐) 중 수나라의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되어 1주일여 구금당한 후 풀려나 환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송(北宋)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종경록》에는 원효의 1차 구법에 대한 기록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661년에 다시 시도한 2차 구법행만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요약)‘원효와 의상 법사가 함께 당나라에 와서 스승을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우연히 밤이 들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 머물게 되었다. 원효 법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마침 왼편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는 몹시도 달게 그 물을 마셨다. 다음날 원효는 그 물을 확인하였는데, 원래 그것은 시체의 썩은 물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불편해 토하려 하다가 크게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내 듣기에 부처가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했다. 좋고 싫은 것은 내게 있으며, 물에 있지 않구나.”하고, 마침내 고국에 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 하였다.’  북송의 혜홍각범 승이 찬술한 《임간록》 또한 다음과 같이 앞의 《종경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요약)‘당나라 때 승려 원효가 처음에 배를 타고 와서는 장차 명산에서 도를 찾고자 하였다. 홀로 거친 비탈을 가다가 무덤 사이에서 잠을 잤다. 몹시 목이 말라 손으로 굴속에 있는 물을 움켜쥐고 달고도 시원하게 마셨다. 날이 밝을 무렵에 보게 된 것은 해골이었다.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홀연 깊이 깨달아서 탄식해 말하였다.“마음이 생겨나면 이리저리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三界)가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하며, 마침내 그는 다시 스승을 찾지 않고 그날로 해동(海東)으로 돌아갔다. 그는“화엄경(華嚴經)”을 풀이하고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을 널리 폈다 하였다.’  하지만, 앞의《종경록》〈당신라국의상전〉,《임간록》에 표현된 원효의 토감 속의 깨달음은 사뭇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이를 구체화하면,《송고승전》〈의상전〉에는 원효와 의상의 토감(土龕) 속 경험에 대하여, 본국의 해문(海門)이자 당으로 들어서는 지경에 이르러, 그들은 큰 배를 구하여 거친 바다 물결을 넘으리라 계획하여 길을 가던 중,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어 길옆의 토감 사이에 몸을 숨겨 습하게 몰아치는 비를 피했다 하였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보니 그곳은 오래된 무덤의 해골 곁이었고, 땅 또한 질퍽한 진흙 길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덤 앞에 머물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또 그 무덤 굴 벽 가운데 기대어 있었다. 밤은 깊지 않아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였다. 원효가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에는 무덤을 토감이라 생각하고 잤는데도 편안히 잘 수 있었고, 오늘 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도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 토굴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 또 무슨 진리가 있으리오. 나는 당으로 건너가지 않겠다.”하고 원효는 짐을 메고 다시 신라로 향해 돌아섰다 하였다.  하지만, 원효가 비를 피하였던 장소가 곧 토굴이고, 그가 무덤 속에서 목이 말라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그것이 해골 물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하였음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조건반사이다.  그러나 이미 원효의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아(自我)의 본능(本能), 즉 초자아적(超自我的)인 두 개의 마음에서 하나를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 자리에서 삼계는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 하였고, 여기서 원효는 무애(無&#14197;)와 일심(一心)을 깨닫고, 무애도인(無&#14197;道人)으로써 스스로 환국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깊은 속내는 위 벽화 ①~③과 같이 그곳이 무덤이든, 토감(土龕) 이든 그것마저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과 화쟁(和諍)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라는 대승적(大乘的) 경지에 이르렀다.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 나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금강삼매경론과 백고좌회 강론 부문은 삼국유사에는 언급한 바 없지만, 오히려 중국 송나라에서 찬술한《송고승전》에는 이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신라의 백고좌회(百高座會)는 그 본을 구국(救國)에 두었으나, 갑작스러운 신문왕 왕후가 뇌종양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한 무당의 권고로 사신이 구했다는《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책이 모두 흩어진 낱장으로 이를 합철하여 강론할 사람이 없게 되자, 당시 초개사(初開寺)에 수행 중인 원효(元曉)가 천거되었으나, 이전에도 백고좌회에 대덕(大德)들이 모두 나서 참소(讒訴)하여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왕명으로 그 소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라 제31대 신문왕과 숙질 관계이다. 즉, 부왕인 문무왕과 요석궁주와는 형제요, 요석궁주는 신문왕의 고모로, 엄격히 말하면 고모부가 된다.   당시 원효의 백고좌회 수용은 신라 대덕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나 다툼에 앞서 먼저 강력한 왕권과 병으로 고통받는 중생심에 의한 선택으로, 그는 금강삼매경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심 사상을 논하고자 하였다.《송고승전》원전에서 다음과 같이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용왕이 부한 조건이 있었다.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 亦不過是”  그것은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대신 용왕(龍王)은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하라는 것과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반드시 대안 성자가 전차(銓次) 하여 꿰매게 하고, 이에 원효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원효에게 그동안 여러 차례 백고좌(百高座) 회에 대덕(大德)들의 참소(讒訴)로 들지 못한 데 대한 굴레를 왕비의 병을 고치는 조건으로 용왕이 원효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용왕 검해(鈐海)의 존재와 그 금강삼매경을 신라 대덕들의 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효를 선택하게 종용한 당사자는 당연히 대안(大安) 성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적 배경은 개인적으로 대안이 원효를 사문(沙門)에 입문하도록 이끌어 준 최초의 스승이요, 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이란 데 있다.  이러한 대안의 의도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왕비의 병이 차도 없자 이를 무당(巫堂)에게 청하여 얻은 비법으로 곧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영약을 구하도록 하였다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신이 남쪽 바다[溟漲]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서서 사신을 바다로 안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로 신약을 구하기 위해 뱃길에 오른 신라의 사신을 중도에 마중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 중심에는 대안 성자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된다.  또한 본문에서 수중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 여기에서 용왕(鈐海)과의 만남은 곧 에 왕비의 병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국(新羅國)을 구하는데, 호국용이 등장하게 되고, 그 호국용을 검해라 하였음은 바다에 빗장을 꽂아 굳건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 사신에게 도중에 마사(魔事)를 우려한 나머지 용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종아리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랍으로 채웠다는 점은 이 일에 철저한 보완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승하 후 죽어 해룡(海龍)이 되어 주변국의 간교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동해 산골(散骨) 유명(遺命)과 앞에 동해의 호국용 등장과는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근본적 의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는 본문에서 왕비를 청제(靑帝)의 딸이란 표현과《금강삼매경》은 곧 굳건한 신라의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대안 성자는 국왕의 흔들림 없는 판단을 위해 다음과 같이 그의 천거에 대하여 원효를 불러 주석을 지어 강론하면 왕비의 병이 치유될 것은 의심한바 없을 것이라[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하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고는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安得經, 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즉,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론하게 하라, 다른 사람은 아니 된다고 다시 한번 이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대안 성자의 청에 일차적으로 차례를 묶은《금강삼매경》을 대덕(大德)에 공개한 후 주석을 청했으나,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하고, 원효의 참여를 참소(讒疏)하자, 이를 왕명으로 초개사에 기거하는 원효에게 주석을 명했다 하였다.  이에 원효가 왕명으로《금강삼매경소》를 탈고하였으나, 참소(讒疏) 대덕들의 농간으로 도둑질당하였다 하였다.  당시 신라불교의 소승불교론자는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원효가 수행할 수 없다고 도모하고, 갖은 방법으로 기간 내 탈고를 무력하게 하는 한편, 급기야는 이를 제삼자에게 훔쳐내게 하여 원효의 강론을 저지하였던 것이라 하였다.  원효는 자신이 해석한 금강삼매경론을 도난당하자 황당해하며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3일간 연장을 받고, 3일간 밤낮으로 원효는 3권의《약소》를 완성하였고, 이에 원효는 준비한 황소의 두 뿔 위에 벼루를 얹고 왕성까지 가는 중, 강론할 약소를 집필하여 백고좌회에 참석하게 되고, 원효가 자리에서“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모든 유명한 고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 평생을 무애실천 도인으로, 후대에는 보살로서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성사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삼국유사》찬자인 일연선사는〈원효불기〉의 끝 부문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남겼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무호(舞壺)로 세상을 교화하였으나,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는 돌아다보는 소상만 쓸쓸하다.”하였다.  이는 찬자 일연(一然)이 성사(聖師) 원효(元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는 굴레가 아니라는 불기(不羈)란 제명(題名)으로 집필 당시의 평가를 그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그만의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0-12-13 22:25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0-12-01 13:50

  본고는 지난호에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에 이어, 요석궁을 떠난 원효가 문득 까만 모자를 쓰고 속복(俗服)을 갈아입고 저잣거리에 나서 큰 박을 들고 괴상한 춤을 추면서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데, 이번 호는 당시 그가 추었다는 무애 춤의 진정성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 제1부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 645년을 65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까만 고깔모자 쓰고 속복 입은 원효”  본고는 이 부분 역시 《삼국유사》의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원효불기〉 편에 향전을 인용하였으나, 이를 두고 송나라 찬녕(贊寧)이 적은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사문 원효〉편에는 당시 원효의 행동거지를 이렇게 적었다.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여기에 원효는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나타냄이 어그러지고 거칠었으니, 거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지공(誌公) 법사처럼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된 석장(錫杖)을 가지고 있으면서,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화엄경]를 강론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염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였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하였다.  이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행동거지로 찬술자인 찬녕마저도 찬술(纂述)에 중심을 잡지 못하였다는 표현이다. 《삼국유사》〈원효불기〉에서도, 기이한 행동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仍作歌流于世”  원전에 의하면,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하였고,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이로써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일체(一切)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文句)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하였다. 원효 성사의 저잣거리 무애춤[無㝵舞] 가상도(○내 춤추는 원효)  이는 앞의《송고승전》 기록과 표현양식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으나, 그 속에 담긴 근본만은 걸림 없다는 뜻으로, 이른바 여기서 원효의 무애(無㝵)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이어지는 동《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陁之號, 咸作南無 之稱, 曉之化大矣哉”  이를테면,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옹유(桑枢瓮牖) 확후(玃猴)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는 평가로, 이는 곧 원효의 기이한 노래가 민중들에게는 걸림 없는 무애가(無㝵歌)가 되고, 그의 그침 없는 행동은 곧 무애무(無㝵舞)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효의 걸림 없는 무애행은 곧 가난하게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민중들과 무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이름을 익혔다는 것으로, 이는 저잣거리 민중 속에 신라불교의 대승(大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또한, 향전을 인용한《삼국유사》〈원효불기〉의 몰가부와 여기 무애가는 당시 태종 무열왕과 원효 간 모종(某種)의 언약이 실천되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과 백제와의 전쟁상황을 미루어 볼 때, 원효의 무애춤과 무애가는 신라불교의 대개혁을 암시하는 하나의 메아리와 같은 원효의 아우성이요, 당시 신라의 소승불교에 맞선 대 저항일 수도 있다.  앞의 원효의 몰가부(沒柯斧)는 그가 세상 앞에서 자신이 파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노래하였다면, 여기에 무애가(無㝵歌)는 이전의 몰가부에 대한 소명(召命)을 실천하는 또 다른 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몰가부가 스스로 승려로서 계(戒)를 어기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굴레라면, 무애가는 스스로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면서 저잣거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신라불교가 나라를 구한다는 호국 사상을 과감히 저잣거리 곳곳에 봉기하게 하였다. 이것이 원효의 일심(一心)이요, 무애(無㝵)요, 화쟁(和諍) 사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는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칠 대로 지친 신라 정국에는 원효의 일련의 행각이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되었다. 그도 그를 것이 원효가 무애무(無㝵舞)을 통하여 민중들 앞에서 절절하게 외쳤던 무애가(無㝵歌) 속에는 곧 신라를 구하기 위한 나라 사랑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모두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나라 사랑의 의지가 되었고, 이로써 모두 하나 되는 일심(一心) 사상이 그들로부터 싹트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순교적 정신으로 신라를 구하는 대열에 자신을 불태우면서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계율(戒律)에서 벗어났고, 그 굴레를 걸머진 원효는 고깔모자에 속복을 입고 뭇 신라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였고, 또 그들을 위하여 군승(軍僧)으로써 다시 그들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원효의 군사 자문도  훗날 삼국 간에 전쟁이 모두 끝이 나고 원효는 전국의 전장 터를 두루 섭렵(涉獵)하며 그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외로운 넋을 위로하고 추선(追善)하였던 그곳에는 무려 100여 개소에 달하는 원효사·원효암이 곳곳에 세워진 것 또한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0-11-18 21:25

  지난 7일 코로나로 인해 관객과의 대면공연이 어려워진 가운데 한국아이국악협회는 경산의 대표 공간인‘경산향교’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비대면‘퐁퐁퐁 국악한마당’을 기획하여 국악공연 영상을 촬영하여 송출했다.  어린 시절 비눗방울 놀이는 누구나 경험했을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놀이 재료로 현재는 전문가에 의해 다양한 도구와 기술들이 결합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아동들에게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예술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날 국악과 버블아트가 융합된‘퐁퐁퐁 국악한마당’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국악은 낡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어나 흥겨운 공연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장르의 결합을 통해 창의ㆍ융합 예술을 경험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퐁퐁퐁 국악한마당’은 허재윤(지부장/기획), 권태룡(연출), 경기민요 박효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우주경(한국무용), 여윤아(해금), 정연준(피리), 함연수(가야금), 등의 청년예술가와 버블아티스트 하마쌤(조동식), 김희준(블루노트 대표/촬영)이 함께했다.  한국아이국악협회 지부장 허재윤은“아동들을 위한 국악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전통을 매개로 주체가 되어 예술적 동반 성장을 함께하고, 타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소통 시너지를 창출”하여“국악과 버블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경산의 특징적인 공연으로 거듭나며 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대표 공연물이 되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본 공연은 2020 경산시지방보조금 선정 작품이다.  공연관람 ☞ https://youtu.be/BYsx4763ZB0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0-11-15 16:28

  경상북도와 독도재단(이사장 이철우)은 10월 독도의 달을 새기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선보인다.  먼저,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이 독도자료 보존을 위해 손을 맞잡는다. 10월 13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 울릉군이‘디지털 독도 아카이브 협약식’을 통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지도 등 독도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경북도가 후원하는 학술행사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연이어 개최된다. 21일 포스텍 국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재)독도재단)가 개최되고, 22일 영남대학교 법학도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개최된다.  또한, 23일에는 경북대학교에서‘해양생태 및 섬 생물학 국제학술대회’(주관 경북대학교 울릉도ㆍ독도연구소) 열려 독도와 해양생태에 대한 방향을 모색한다. 10월 말에는 대구한의대 등과 공동으로‘독도지킴이 안용복 조명 좌담회’도 마련한다.  경북도는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독도 사진전, 독도상품 비즈페어 등 다양한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12일간 경북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지역출신‘원로 사진작가 김재도 독도 사진전’를 개최하며, 24일에는‘독도 민간단체 워크숍’을 갖고 민간단체 대표들과 독도 수호 활동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독도관련 고지도 DB 구축 사업에 대한 성과를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11월 7일에는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학습용 교재, 문구류, 의류 등 독도관련 상품을 온ㆍ오프라인 동시에 전시 판매하는‘제2회 독도상품 비즈페어’도 진행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독도 상품의 산업화ㆍ생활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종 이벤트도 함께 진행한다. 독도재단에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제작, 해외 한인교육기관이나 재외동포, 독도단체에 배부해 대한민국의 땅! 독도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또한,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사업이 어려워짐에 따라 독도 이미지와‘Dokdo of Korea’가 새겨진 독도마스크를 제작해 미국, 일본 등의 국내외 독도 관련단체에 지원할 계획이다.  경북도와 (재)독도재단은 모든 행사장내 코로나19 방역 예방지침을 준수토록 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화, 손소독제 비치, 관람객 발열체크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등 단계별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갈 방침이다.  김성학 경상북도 해양수산국장은“올해는 대한제국 칙령 반포 12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로 독도가 평화로운 우리 땅이라는 국제적 위상제고를 위해 데이터 구축사업에 앞장서겠다”면서,“앞으로도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서 꼭 필요한 이벤트나 학술대회 위주로 개최하여 독도영토주권을 위해 내실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0-10-19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