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승표(70) 경북 경산시 자인면 아시아 서석문학 시 등단아시아 서석문학 이사영남지회 회원 자인면 번영회장 향토사학가 발자취초록물 떨어지는현성산 도들 양지오색구름 덮힌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나신 분성사원효(聖師元曉) 당신을 찾아걸음걸음 더하여탑곡 천년바위 마애불 앞에서설레임으로 만납니다구도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어젯밤 해골물 한 모금으로“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지요원망도 괴로움도 훌훌 털어버리고걷고 춤추었던무애(無㝵)의 한 자락에 녹인 채연원한 꽃이 되어해동석가로 이름하니감실(龕室) 같은온 세상을 위로하시더이다
송하 전명수 모처럼 봄의 훈기가 감도는 화사한 날 고향에 소재한 절집을 찾아 나섰다. 경산시 용성(龍城)의 주산인 용산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에 매일 쳐다보고 소풍도 자주 갔던 산이다.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 비오재(飛烏岾)를 넘어 청정 미나리 단지를 지나 반룡사로 향하였다. 구룡산 반룡사는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1길 60(용전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무열왕 7년(661)에 경산 출신인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우리나라 삼대 반룡사 중 영남의 고찰로 알려져 있다. 구룡산을 아우르는 반룡산은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경산인 압독국(押督國)이 동반관계를 이루면서 신라 제5대 파사왕, 제6대 지마왕, 제7대 일성왕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곳 반룡사가 소재한 왕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642년과 653년에는 김유신과 김인문이 압량주의 군주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또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압량에 주병을 모아 백제 대 정벌에 참여하였던 입성 통로로 이 고개를 왕재(王峴)라 하였다. 고려시대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운문사를 중창하고 문득 반룡산하에 이르러 빈산의 칡넝쿨을 걷어내고 허물어진 사지(寺址)를 일으켜 신흥사라 하자 전국에 수많은 석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한다. 이때 당대의 석학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선생도 반룡사에서 낙조의 아름다움을 엮은 산거(山居)라는 시를 통하여 산사의 고즈넉함을 애절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1637년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慶州府)에서 복현(復縣)되자 초대 현감인 임선백(任善伯, 1637-1641)은 이 모두가 선현의 공덕이라 하여 옛 조사와 성사의 은덕을 찾아 구룡산 아래 허물어진 사지를 일으키고 인조 14년(1641)에 계운, 명언으로 하여금 선당(禪堂)을 세우게 하여 이로써 60여 년에 걸쳐 27대의 현감에 이르도록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무려 5개의 산내 암자와 26동의 대 가람을 완성하니 이에 반룡이 승천한 격이라 이름하여 반룡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웅장하였던 옛 가람은 소실되었으나 현재 사찰은 1997년 이후 복원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천불전, 산령각, 요사채, 종무소, 누각이 있으며 마당에는 최근에 세운 삼층석탑이 서있고 반룡사 석조유물(石造遺物)이 한자리에 정리되어 있다. 대웅전은 1999년에 건립하였는데 겹처마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특이한 서체로 쓴 대웅전 현판은 현주지 혜해 스님의 스승인 일타 스님의 글씨라 한다. 법당에는 철불(鐵佛)로 개금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옥돌로 개금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데 모두 1999년에 조성하였다. 석가모니불 뒤편에는 영산회상탱이 결려있고 그 좌우에 칠성탱과 신중탱이 걸려있으며 우측 벽면에는 지장탱이 걸려있다. 외벽에는 원효성사의 행적을 담은 당나라 구법의 길인 토감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불전(千佛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익공식 양식인데 단청이 화려한 모습이다. 내부에는 철불로 개금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역시 철불로 조성, 개금한 관음보살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반룡사는 동해의 낙산사와 남해 보리암, 서해의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관음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산령각 뒤편 높은 곳에 백의관음보살 입상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다. 산령각(山靈閣)은 앞면, 측면이 각 1칸의 작은 전각으로 내부에는 1989년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걸려있다. 오래전 대웅전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청도 대운암에 봉안되어 있어 회수코자 노력 중이라 한다. 그리고 보물 제11-1호로 지정된 청하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사인 비구의 작품으로 이곳 반룡사 동종이라 종신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절집의 사연이다. 언제인가는 알 수 없으나 절집 살림이 어려워 주지승이 이 동종을 팔았는데 지금은 보경사에 소장되어 있고 서운암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급 동종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으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대웅전 앞마당 남쪽에는 반룡사지 석조유물(盤龍寺址 石造遺物)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데 대략 70여 점으로 바라보인다. 이 석조부재(石造部材)는 인조 14년(1637)에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복현되자 초대 현감 임선백이 이곳에 선당을 짓게 하였으며 그 후 60여 년 만에 대가람을 조성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석탑과 석등, 당간지주, 부도, 비석 등의 부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석조부재는 반룡사의 번창기와 더불어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마로 모두 부서지고 그 일부가 석축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2008년 천불전을 해체 복원할 때 이를 수습하여 한자리에 정돈해 놓은 것이다. 본 석조물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조각과 조형으로 석면에 새겨진 연화문양과 금석문은 조선중기의 불교미술과 조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 가운데 화문면석 부재 10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산 반룡사 화문면석 부재(慶山 盤龍寺 花紋面石 部材)는 주불전의 기단 면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꽃문양이 새겨진 면석 부재로 17세기 영남지역 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석재로 주목된다. 그 사례가 흔하지 않은 유물로서 통도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등 사격(寺格)이 높은 조선후기 사찰의 주불전 건축에 적용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이 화문면석 부재는 반룡사의 사격이 반영된 중요한 유물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영남지역에서 전개된 화문부조 가구식 기단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화문면석 부재를 살펴보고 대웅전 옆 승방 앞을 지나는데 고려중기의 석학인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선생이 이곳에 와서 남긴 산거(山居)라는 시가 걸려있다. 春去化猶在(춘거화유재) 봄은 가도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고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맑은 하늘 깊은 골에 그늘은 저절로 지네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두견새 맑은 노래 대낮에도 지저귀니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깊은 골에 간직한 마음을 비로소 느끼게 하네. 반룡사는 설총(薛聰) 선생이 성장한 곳이라 구전되어오고 있는데 여러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는 등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관음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영험 도량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 높은 곳에는 백의관음 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설총이 우리 고유의 이두(吏讀)를 만들기 전까지 아직도 신라는 어려운 중국의 문자를 쓰고 있었으며 이를 타파할 새로운 문자의 창안이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아들로 잘 알려진 설총이 이두를 고안해내어 신라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까지 깊이 연구하게 돼 국가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 우리 선인들의 문자 생활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한층 앞당겼다. 이는 원효성사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전 저자거리를 돌며“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즉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세우리라. 고 노래했던 그 의미는 아들을 낳아 나라의 기둥을 삼고자 염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설총이 화왕계를 지어 스스로 백두옹을 자처하고 임금에게 간하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 원효성사의 뜻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동량인 설총을 키워낸 반룡사도 원효 스님과 깊은 인연 때문에 설총의 유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정신적 귀의처인 사찰이 국가의 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신라의 임금과 왕후가 인근 왕재(王峴)를 넘어 이곳에서 설총 모자와 함께 불공을 드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반룡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반룡사는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억불정책과 화재로 인해 쇠락(衰落)을 거듭해 왔다. 일제 격변기를 거치며 거의 멸실되다시피 한 반룡사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제3의 중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하촌인 용전마을까지 모두 반룡사의 사역에 속해있었던 이곳 절집은 고작 480여 평 정도의 공간만 남아있으나 가람을 하나둘 중건하고 구룡산 자락에 작은 길도 내어 평양, 고령, 경산에 소재한‘해동 3 반룡사’라는 명성을 이어가는 토대를 닦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반룡사는 고향에 소재한 절집이며 친구가 이곳 반룡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어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다녀갔지만 반룡사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상세한 문화재에 대하여 살펴보지 못했는데 오늘 구석구석 살펴보니 우리 역사에 걸출한 인물인 원효성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조이며 남편을 그리워하였던 요석공주의 애절한 마음도 읽어 보았다. 반룡사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낙조(落照)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하는데 언제 청명한 날 다시 올라와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해 보고 싶어진다. 그동안 이곳 절집 살림살이가 어려워 보였는데 군데군데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꾸고 다듬은 손길의 흔적이 엿보인다. 수많은 불자와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행복한 웃음을 거두어가길 빌어보며 발길을 돌린다.(2021. 2. 28. 일) * 참고자료: 영남읍지 자인총쇄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21세기는 지식정보사회 또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지식이 새로운 자원으로 인식되고, 문화가 질 높은 삶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는 사회이다. 일찍이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Peter Drucker,1909~2005)는“지식노동자(intellectual worker)”라는 표현을 썼다. 기존의 생산요소의 개념인 자연, 자본, 노동 그리고 기술을 넘어 지식이 생산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시대를 말한다. 지식이 중요한 생산요소라면 문화는 지식이 만들어낸 피조물로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21세기는 지식정보와 문화적인 감각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문화의 근원은 지식에 예술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지식이 세련되게 다듬어져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이 바로 문화라고 볼 수도 한다. 그래서 문화란 곧 인간정신의 산유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가치의 본질은 정신적인 부분에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유의 결과를 수준 높은 예술이나 문화의 형태로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의 의식체계와 삶의 형태를 표현하고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서 반만년 역사를 지닌 문화강국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아 왔지만, 근년에 이르러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주도하는 지식계와 문화예술계가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질 높은 문화상품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이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아가면서 세계인들의 문화수요도 과거에 비해 상당 수준으로 높아지고 늘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K 컬쳐( Korean Culture :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흐름을 창출하고,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 우리국민들에게 자존감을 주며, 나아가 높은 문화적 향수능력을 지닌 한국인들의 행복감을 높이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 K 컬쳐로 표현되는 한국 문화는 한국적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모든 예술·문화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대중예술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고전음악과 한국의 판소리, 사물놀이, 그리고 예술스포츠로 불리는 피켜 스케이트와 영화, 비디오 아트 등 모든 공연예술, 무대예술, 디지털 예술을 포함한다. 이 모든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 한류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대중가요계의 BTS(방탄소년단)의 노래나 스크린의 예술인 영화, 성악, 뮤지컬, 지휘 등은 물론 K 컬쳐로 표현되는 다양한 분야가 세계예술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은 예술스포츠계인 피겨스케이트와 그 밖의 스포츠 문화에도 확대 되고 있다. 문화는 삶의 모습에서 자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거나 좋아졌다고 얘기할 때, 그 의미는 문화적인 수준이 높아졌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문화는 삶의 표현이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만들어내는 산물이기에 삶의 질 및 인간의 행복과도 직결되는 요소이다. 문화는 그 어떤 곳에서나 창의력과 예술 감각을 근거로 하여 사회전반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眞, 善, 美의 가치를 발현하는 수단이자 방편이 되기도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환경이 더욱 보편화 되고, 문화의 국제적 중요성도 더욱 높아졌다. 지구촌의 삶이 고질화 되어 갈수록 문화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이제 문화는 일상적인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기업경쟁력, 나아가 국가경쟁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환경의 재구성, 산업제품의 디자인, 의상 및 생활미술, 건축물의 디자인과, 마케팅을 포함한 쇼핑센터의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문화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드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문화는 상품생산과 소비 등의 경제의 전 분야와 기업의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 필수조건으로 인식되어 온지 오래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각국들은 문화정책의 고도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힘써 왔다. 우리나라도 한때 정부차원에서 문화예술정책을 주요 정치적 과제로 보고, 국가발전을 위한 중심정책으로 제시한 적도 있었다. 박근혜정부가 내걸었던 창조경제란 결국 문화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제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제적 우위의 확보가 나라발전의 요체가 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경쟁력의 확보는 절대적인 요소이고,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국가경영에는 물론 기업 및 산업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며, 그 근원은 문화예술적인 감각과 창의력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들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문적인 분야를 포함해서 모든 산업적인 분야에서도“새로운 아이디어( new idea)”개발을 핵심적인 과제로 인식해 왔다. 결국 국가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경제의 핵심사업의 하나는 문화콘텐츠의 개발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정책의 핵심은 곧 문화 콘텐츠 즉, 문화적 내용을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의 개발인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K 컬쳐라는 말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각 분야에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묵을 받고 있다.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영화, 비데오, 스포츠, 의약바이오,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관련성을 맺으면서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K 컬쳐는 지구촌을 휩쓰는 지구촌 문화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이제 문화는 단순한 즐김의 수준을 넘어서는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경쟁력 있는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에는 반드시 문화의 개념이 내포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재 문화예술계에 새롭게 등장한 우리나라의 문화적 창의성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고, 그것이 곧 새로운 21세기 비젼 코리아의 미래를 여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지금 지식과 정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분야와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소위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향후의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한국어 곡“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으로 사상처음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고, 계속해서 나오는 신작들이 매번 빌보드 차트 1위의 히트곡이 되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올해 7월 9일에 발표한 뮤직비디오 신곡“Permission to Dance”는 지구촌 15억 명의 청각장애인을 위해 안무에 수어를 곁들어 세계인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클래직 성악의 소프라노 조수미를 비롯한 정명훈의 지휘, 김연아의 예술 스포츠 피겨와 스포츠 분야의 축구선수 손흥민, 골프의 박인비와 고진영 등의 코리언 스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는 것도 거대한 한류 즉, K 컬쳐의 파워를 예상하는 한국의 저력이다. 일찍이 한국은 88올림픽과 2002월드컵 축구 등을 통하여 레드 컬쳐의 강한 힘을 경험한 바 있다. 문화는 한 시대와 사회를 이끄는 강력한 에너지이며,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국가적 자산이다. K 컬쳐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예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며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자긍심을 느끼며, 우수한 문화를 생활속에서 넉넉하게 향유할 수 있는 한국인의 삶의 질과 행복감 끊임없이 증가할 것이다. 문화적 감각이 바탕이 되는 생명과학과 반도체를 비롯한 IT 또는 AI분야와 쇼프트웨어를 포함한 지식산업분야에서도 한국의 위상은 이미 세계의 톱 클레스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의료기술 역시 K컬쳐의 산유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많은 외국의 환자들이 한국병원에서 치료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외국의 의료전문가들이 한국에서의 의료연수를 원하는 한국은 오늘날 의료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화와 지식수준이 세계 선두권에 있는 한국인들의 뛰어난 지적, 문화적 능력이 21세기 새로운 국제환경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하여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화적 욕구를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여유로운 삶을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좋은 음악을 듣고, 멋진 영화를 보며,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뮤지컬을 즐기는 등 문화상품의 향수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K컬쳐를 즐기는 한국인들의 행복감은 문화의 향수 량 만큼 커질 것이다. 일찍이 문화를 애호하는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의 무덤과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문화는 삶의 향기이며 생명의 빛이다. 대중음악 BTS의 노래, 영화 <기생충>, <미나리> 그리고 무대예술과 디지털예술로 이어지는 K컬쳐는 한국인의 행복감을 키우는 민족적 자긍심이며, 효율성 높은 행복경제학이다.
경산소방서 119구조구급센터소방장 우희석 우리는 지구 온난화 등으로 환경변화로 인해 앞으로 어떤 기록적인 재해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보내야 하므로 체감 더위가 높아지면서 온열질환 발생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폭염은 일반인도 견디기 힘들지만 고온에 취약한 고령자, 어린이, 임산부 등은 체온조절 기능이 약해지므로 더욱 주의해야 한다. 마스크 착용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무더운 실외에서는 심박수, 호흡수, 체감온도를 상승시켜 신체에 부담이 된다. 따라서 실외에선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게 좋다.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면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한 장소를 찾아 마스크를 벗고 휴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열사병이나 일사병 증상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먼저 119에 신고하고 그늘진 곳으로 옮긴 후 옷을 느슨하게 해 편안한 상태를 유지해준다. 의식이 있다면 물이나 스포츠 음료를 제공하고 의식이 없다면 그늘진 곳에서 119를 기다려야 한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폭염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수칙 준수와 현명한 대처로 우리 모두 건강하게 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길 바란다. 국가안전시스템이 아무리 잘 갖춰진다 하더라도 결국 안전의 주체는 시민 개개인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면 인ㆍ물적 피해를 줄일 뿐 아니라 안전문화 정착과 사회 안전망 구축에 크게 이바지할 거라고 믿는다.
경산경찰서 청문감사관실이 승 환 경장 “우리 아이와 우리 가족을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잘 견뎌 낼게요. 경찰관님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밝은 모습으로 뵙도록 노력할게요.” 얼마 전 강제추행 피해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피해 상황은 끝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아직도 어두운 터널 속을 걷듯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견뎌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피해자전담경찰관은 잘 알고 있다. 아침까지 인사를 하고 나간 내 아이가 갑자기 범죄피해자가 되었다면 어떤 심정일까? 대부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사건에 대한 거부감으로 피해 지원 관련 개입도 반기지 않으며, 급성 스트레스장애(ASD) 혹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보이게 된다. 특히, 강제추행의 경우 눈으로 관찰 가능한 외상보다 피해자와 가족이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초기 정신과적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 사건 피해자와 그 가족 역시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삶의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울음으로 버티고 있어 신속하게 대학병원으로 연계하여 전문적 치료를 받도록 의료지원(200만원)과 일자리조차 잃은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지자체 일자리 지원 연계와 상담 전문기관의 심리상담(12회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의 생계비(300만원),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학자금(90만원) 지원 등 심리적·경제적지원, 재판 과정에서 도움을 줄 국선변호인과 법정 동행 등 법률 지원까지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피해자 가족은 사건 이전의 생활로 차츰 회복하고 있다. 범죄 피해 회복의 궁극적인 목표는‘범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해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여러 분야 즉 경제적, 심리적, 법률적 지원 등 다각적 지원과 함께 주변의 작은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경찰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심리적·경제적·법률적 지원, 전문가의 진단·평가 후 사건기록에 첨부하여 피해자의 입장(Voice)을 형사절차에 반영하는『범죄피해평가제도』, 필요시 112시스템 신변보호 등록, 맞춤형 순찰(생활 패턴 고려), 주거지 CCTV 설치, 스마트워치 지급, 가해자 경고를 하는 신변보호 등 피해자를 위한 다양한 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피해자의 회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 홀로 회복하기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만큼 주변에 범죄피해로 힘들어하는 친구, 동료가 있다면 피해자전담경찰관을 찾도록 안내해 주길 바라며, 끝으로 피해자 곁엔 항상 피해자전담경찰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김이대ㆍ자유문예등단ㆍ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뜰작가협회 회원ㆍ동해 남부시 동인 활동신록신록은 잠이다꿈꾸는 잠이다뭉게뭉게 피어오르는먼 나라의 동화다그리운 연인들이 돌아 왔다가슴이 설레고상처가 곱게 아문다신록은 마음에 써 놓은초록 시집순수한 말이 영혼에 닿고햇빛 드는 정원에 숲이 자란다천지에 가득한 초록의 함성산과 들이 일어서서손짓하며 부른다몸에도 마음에도 초록이 물들고먼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송하 전명수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전)계명문화대학교 출강전)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전)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녹조근정훈장 수훈 대구에서 경산시가지를 거쳐 고향 땅 용성으로 가는 길목인 자인면 소재지 들머리에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고등학생 때와 젊은 시절 자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산책을 즐겼으며 수 없이 드나들었던 숲이라 친숙하기도 하다. 오늘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옛날 생각을 하면서 계정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장군 묘소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길옆에는 경상도 관찰사, 자인 현감을 비롯한 관리들의 송덕비, 공적비, 불망비 등 수많은 비석이 도열해있다. 아마도 이 지역의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비석을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경산 자인계정숲(慶山 慈仁桂亭숲)은 경북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68번지 외 12필지, 43,237㎡의 면적에 이팝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말채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참느릅나무 등 약 500여 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는 천연의 숲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산 자인계정숲은 구릉지에 남아있는 천연 숲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 숲인데 나무의 나이는 10∼250년으로 추정된다. 이 숲은 우리나라 온대 낙엽활엽수림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평지림으로서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나무가 모여서 혼효림(混淆林)을 만들고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경산 자인계정숲은 과거 경산시 일대에 어떤 나무들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자연 유적지이며, 우리 조상들의 자연사랑과 자연을 보호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숲이다. 그래서 천연적인 숲 자체의 가치는 물론 조상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가꾸고 다듬어 나가기 위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계정 숲은 이곳 사람들이 개장지 숲이라 불러왔고 계림(桂林)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650년경의 문헌에 계정서록(桂亭西麓)이란 기록이 있고, 또 금석문에도 계정록으로 기록되어있어 이것을 바탕으로 계정 숲이란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민족 항일기에는 자인면사무소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서림(西林)으로 개칭하였는데 학창 시절에 흔히 서림 숲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군함의 갑판용으로 수많은 노거수가 벌채되었다. 그런데도 지금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일대에는 속칭‘말 무덤’이라 부르는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 숲의 어귀에는 당나무가 서 있으며 오월 단오 전후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금줄이 쳐진다. 숲 전체가 제사 마당이 되는 것이다. 이 숲은 한 장군을 모시는 성지이며 자인 단오굿의 굿판으로서 향토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그래서 이 숲은 생물학적, 역사적, 민속적으로 높은 가치를 담고 있는 곳이다. 누이와 함께 여원무(女員舞)를 추면서 왜구를 물리친 한 장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 자인면 교촌리 북쪽에 자리 잡은 도천산에 왜구가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히자 한 장군이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으로 꾸민 관을 쓰고 도천산 아래 버들 못으로 왜구를 유인한 후 칡 그물로 가두어 검흔석(劍痕石)에 올려놓고 참수시켰다는 한 장군의 묘이다. 1968년 8월 자인중·고등학교 본관 신축을 위해 공사 중 석실묘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한 결과 두개골이 포함된 유물과 은으로 제작된 갑옷과 투구, 녹슨 철제 창 등 수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묘를 한 장군의 실묘(失墓)라 확정하고 출토된 부장품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옮겼으며 유해는 1969. 5. 10 이곳에 옮겨 한 장군 묘를 조성하여 매년 단오절에 한 장군 대제를 올리고 있으며 지금은 그 부장품이 2011. 12. 29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소장하고 있다. 어느 왕릉에 버금갈 정도의 봉분과 봉분의 호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놓았으며 상석과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고 문·무인석이 호위하고 있다. 앞에는‘증 판서한장군묘’라 새긴 비석을 세워 두었다. 계정 숲에 서 있는 진충묘(盡忠廟)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의 주인공인 한 장군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한 장군이 죽은 뒤에 이 지방 사람들이 세운 것이며 정충언 현감이 중수한 바 있다. 애초에 한 장군 신위를 모신 사당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그들이 신사를 세웠다. 광복 후 호장굿과 여원무를 중심으로 한‘한장군놀이’가 복원되면서 북사리에 있던 한당(韓堂)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여 현재의 진충묘가 되었다. 한 장군은 지역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매년 단오절에 제를 올린다. 진충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사당이다. 진충묘 옆에 시중당이 서 있다. 시중당(使衆堂)은 인조 15년(1637)에 자인현이 복현되어 현감 임선백(任善佰)에 의해 자인현의 정청(政廳)으로 자인면 신관리에 세워졌다가 관아가 옮겨짐에 따라 원당리와 북사리로 이건되었다. 지금의 시중당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하양, 자인, 경산이 경산군으로 통합된 후 자인중·고등학교 안으로 옮겨와 교실로 사용하였다. 자인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도서실, 과학실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학생 간부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요산정(樂山亭)이라 하였는데 일명 무금헌(撫琴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뜻있는 자인 지방민들이 건물의 훼손을 안타깝게 여겨 1980년 한 장군 사당 옆으로 이건하였다. 현재 시중당 현판은 목각한 것인데 영조 39년(1762) 정충언(鄭忠彦) 현감이 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넓은 대청과 커다란 방이 곁들어져 굵직굵직한 기둥과 더불어 간결하고 온건한 풍취를 자아낸다. 시중당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현대식 2층 건물의 한장군놀이 전수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자인계정숲은 경산자인단오제의 주 무대이다. 경산자인단오제는 경산시 자인면 일원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단오 행사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고려초기에 왜적이 침입하여 도천산에 웅거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 누이동생과 함께 꽃으로 화려하게 꾸민 관을 쓰고 춤을 추어 버들 못으로 유인하여 의병들과 함께 왜적들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한 장군이 죽은 뒤에 이 고을 주민들이 한 장군의 사당을 짓고 해마다 단옷날에 제사를 지내고 성대하게 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온다. 경산자인단오제는 모두 다섯 가지 연행(演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군을 위해 진충묘에서 지내는 제사인 한 장군 대제, 단옷날 아침 마을의 향리를 비롯한 일행이 한 장군 대제를 지내러 가는 호장장군 행렬, 한 장군과 누이동생이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재현한 춤인 여원무, 한 장군 대제를 지낸 다음에 여흥으로 벌이는 팔광대 춤, 주민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단오 축제 마지막 날 진충묘에서 무당들이 벌이는 단오굿 등으로 짜여있다. 한 장군 대제는 유교의 제례 형식으로 진행되며 한 장군 대제를 올리기 위하여 진충묘로 향하는 호장장군 행렬이 이색적이다. 넓은 잔디광장에서 펼쳐지는 여원무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무형유산이다. 여원무는 한 장군이 여장(女裝)을 하고 누이와 전신을 가린 화관을 쓰고 춤을 추며 잡희(雜희)로 꾸민 여고생 300여 명이 등장한다. 한 장군 남매가 쓰는 화관의 높이가 3m나 되고 종이로 만든 조화가 무려 500여 송이나 달리며 춤사위도 매우 독특해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이다. 축제가 종료되면 관객들은 이 꽃송이를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고 한다. 여원무 화관의 꽃을 집에다 두면 모든 액운이 사라지고 가정이 편안해지며 바라는 바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의 광대놀이는 오광대가 보통인데 이곳에는 팔광대가 무대에 오르며 줄타기는 공중에 줄을 매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줄을 깔아놓고 공중에서 줄타기하는 몸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며 흥미진진하게 광대놀이가 펼쳐진다. 한 장군의 남매를 기리며 올리는 대제나 여원무와 팔광대 놀이 그리고 단오굿 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인지역 주민들이 대대로 이어받아 전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을 전후하여 크게 축제를 열고 있다. 보인동 농악대가 한바탕 풍물놀이를 하고 계정들소리 공연도 빠질 수 없는 프로그램이며 지역 출신 가수들의 열창은 더욱 흥을 돋운다. 그네뛰기, 씨름대회, 줄 당기기는 필수적인 행사이다. 고향길을 오고 가면서 자주 바라만 보며 지나가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자인 계정숲 속으로 들어가 아련한 옛날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한 장군 오누이 이야기와 자인단오제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확실하게 익히고 돌아선다. 경산자인단오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일과는 별도로 여원무와 자인팔광대 놀이는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 각각의 국가나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으면 좋겠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노거수 이팝나무에 하얀 꽃이 지금도 그대로 피어 있다.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문화 예술은 인간의 행복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까? 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도 문화와 경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즉, 문화와 경제는 상극의 관계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문화는 인간정서의 산물인 반면, 경제는 인간의 합리성과 논리에 비탕을 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경제학의 창시자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문화의 향수능력이 경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그는 문화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했다. 그는 금전적 평가기준으로 인간이나 산업을 평가하는 것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경제학은 인간의 비즈니스 행위는 물론, 생산과 생활 등이 모두 돈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금전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산업이나 기업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같은 평가기준이야 말로 인간의 생명, 자연미, 역사적인 문화재의 가치와 인간의 품위를 빼앗아가는 최대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 같은 러스킨의 주장은 당시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며 가치관을 뒤엎는 충격이었다. 그는 금전을 최고로 생각하는 경제학에서, 인간의“생명과 삶”을 최고로 생각하는 경제학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콘힐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썼는데, 독자들의 저항이 물밀 듯 하여 게재를 중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늘날은 생명과 생활이 너무도 당연하게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경제=금전적가치’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으므로, 문화나 예술 가치를 경제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러스킨의 생각은‘돈벌이’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러스킨은 상업적인 비즈니스나 이윤추구 자체를 비판했다기보다는 문화 예술이나 인간성을 존중하는 비즈니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러스킨은 부(富)의 원천을 재화의 내재적인 성질로 보았고, 그것을 그는 고유가치(intrinsic value)라고 했는데 이는 그 재화가 인간의 생활과 생명에 얼마만큼의 공헌을 하느냐를 두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이 교환가치나 희소성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고유가치론에 의하면 문화 예술성이 없고,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재화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고유 가치와 향수능력이 동반될 때 부(富)는 기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한필의 말이라도 탈 수 없거나, 한 폭의 그림이라도 감상할 수가 없다면 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생이 없으면 부가 존재하지 않는다(There is no wealth but life.)”라는 표현으로 부의 생명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화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정신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산물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 예술품을 보고 인간은 경탄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왜 문화의 세기인가? 문화적인 측면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인간의 행복수준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인 향수능력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며, 또한 글로 발 경쟁력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발전과 경제성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안전과 행복이라고 볼 때, 그것의 실현은 문화적인 이해와 발전에 의하여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문화 예술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적 인지능력과 예술적인 향수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문학단체, 연극 오락 단체, 교향악단, 오페라, 무용 그리고 미술관 등은 모두 광범위한 문화적 목적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기구와 조직을 통해서 인간적 소양을 향상 시켜간다.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眞·善·美의 가치와 종교가 추구하는 聖스러움의 가치도 문화적인 소양의 함양을 통해서 성숙한다. 문화가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던 원시적인 삶에서는 인간가치 또한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자하는 행복경제학은 경제적인 여건들이 인간의 행복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경제성장, 실업,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경제발전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자 한다. 문화경제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측정가능하다고 보는 행복경제학은 그 전제를 과거 신고전학파경제학의 분석틀인 서수적 효용이론(theory of ordinal utility)으로 간접적인 행복측정을 시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론체계)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행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다. 경제학은 사실상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부를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이윤을 얻기 위해서, 고용을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어떤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지 연구하고 그 가치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 과거의 과학적 실증주의와 논리적 심미주의에 빠진 현대경제학자들의 논리적 조작주의를 탈피하고 인간의 실체적인 삶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경제의 문제를 보려는 학문이 바로 행복경제학이다.‘행복의 연구가 21세기 경제학의 지평을 바꾼다’라는 케치 플레이즈를 내걸고 있는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을 인간행동의 일환으로 보고 행복을 얻기 위한 인간행동을 분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인간이 행복을 의식하는 데는 문화적인 요소가 상당히 작용한다. 인간은 의식주를 해결하게 되면 여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여가를 보다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고자 한다. 흔히들 행복은 돈으로 사지도 측정하지도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행복은 풍요하고 바람직한 경제생활과 문화적 욕구의 충족을 통해서 실현가능하다. 현대인들의 행복은 결코 경제와 문화에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은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에 의해서 실현된다. 일찍이 사회학자 김경동 교수(“한국경제성장의 사회적이해”,KDI-제도경제학회 세미나 논문, 2010)는 행복한 개인을 위한 조건으로 목적가치를‘자아의 실현’에 두고 이를 위한 하위가치로 자아의 완상(자아실현), 수단적 가치로 삶의 질적 향상과 삶의 기회확대를 들었다. 인간은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을 딛고 사는 존재하고 했다. 머리는 이상과 이성의 대명사이고, 발은 현실과 실존을 상징한다. 행복은 풍요한 문화예술과 경제적인 성과가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가치이다. 세계의 유명한 도시들이 다양한 전략으로 문화예술에 투자해서 지역민들에게 질 높은 삶을 제공한 예는 적지 않다. 프랑스 파리는 퐁피두 대통령(1911~1974)과 미테랑 대통령(1916~1996) 시기에 문화 대프로젝트를 통하여 바스티유감옥 부지에 오페라극장을 세워 음악애호가들을 들였고, 루블 박물과 앞에 세계적인 건축가 아 엠 페이(I. M. Pei)가 세운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를 만들었다. 영국은 1981년 템즈 강 주변에 공해문제로 방치되었던 발전소를 외형은 그대로 둔 채로 내부를 현대미술관으로 바꾸어 한해 4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탈바꿈한 스페인의 빌바오 시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하여 구겐하임 효과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수도인 빌바오(Bilbao) 시는 인구 35만의 소도시였다. 1997년 철광 이외에는 먹거리가 없던 빌바오 시는 미국 구겐하임 미술재단에 부탁하여 1억 달러를 주고 미술관을 짓게 했다. 건축비와 전시미술품을 총합해도 1억 3천 유로 남짓한 돈을 들여 개관 첫해 관람인구가 136만명, 처음 2년간 관람객이 뿌린 돈이 4억 3,300만 유로였는데 이중 2,340만 유로가 미술관에 쓴 돈이다. 국가와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수록 문화와 예술은 부와 행복의 결정에 중요한 팩트가 된다. 행복을 위한 문화기술에는 문화의 비물질적이고 무형적측면에서의 소프트웨어적인 기술과 문화의 물질적이고 유형적 하드웨어적 기술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가 행복실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본다. 경제행복도지수를 소비, 소득, 분배, 그리고 경제안정 등의 요소로 평가 한다면 대체로 경제행복도 지수는 경제성장률지수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지수비교 결과는 경제와 행복이 비례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요즘 새롭게 학문적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는 행복경제학은 문화산업과 환경을 고려한 지속성장을 모색하고 있어 향후 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심리학 등과 통섭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안숙자 지금부터 15년 전 화장품 대리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키가 크고 생활력이 강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판매사원으로 들어왔다. 처음 해보는 일이기 때문인지 그녀의판매 실적은 늘 저조하였으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였다. 그런 부지런함이 가상하여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면서 그녀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더니 나를 무척 따랐고 어느덧 우린 친한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녀 가족으로는 세 살 연하인 남편과 초등 5학년인 아들과 3학년인 딸이 있었다. 남편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라고 했다. 때문에 그녀가 가족을 부양해야할 처지였다. 그녀의 집 형편은 세간이라고는 겨우 밥 끓이는 취사도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단칸 월세에 살고 있었다. 생활이 그녀를 억척으로 만들었을까? 그녀는 지독하다고 할 만큼 성격이 단호했고 자기 방어심이 철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대단히 엄격하여 기가 죽은 듯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아이들 모습은 가엾게 보일만큼 그늘져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새벽으로 신문 배달을 하라고 했다.‘저 어린 것이 어떻게 새벽마다 신문 배달을?’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서 "아직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하고 말해보았지만 화를 버럭 내면서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잔인하게 보일만큼 비정하게 굴었다. 어느 날 남편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자기가 집에 있을 때는 일부러 궁색하게 보이려고 쌀을 한 되씩만 사고, 연탄도 한 장씩 사서 쓴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끼니때면 남편 몫은 남겨 놓지 않고 다 먹어버리고 연탄불에 데워 놓은 세숫물조차도 남편이 쓸 물을 남겨 두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남편 몰래 이사를가버려서 집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겨우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남편에게 소금을 뿌리며 쫓아내더라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지 그녀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았으며 내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내가 화장품 대리점을 정리하고 광고기획사를 할 때였다. 거래처가 어느 정도 확보 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그 친구를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자본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꽃집을 해보라고 권했다. 내 사무실 근처에 가게를 얻어 꽃집을 하게 되면서 거래처를 소개시켜주고 내 차로 배달도 도와주며 적극 협조해주었다. 아무 상식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열심히 하였고 겨우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되는 듯하여 다행스럽게 생각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아는 거래처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무렵부터 그녀에게는 너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표독하고 고집스럽기 짝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말투나 겉모습이 우아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장하는 것부터 달라지더니 표정이며 헤어스타일 또한 우아하게 바뀌면서 말하는 억양도 나긋나긋하게 품위가 철철 넘치고 있었으니 갑작스런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사랑을하면 예뻐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말소리조차 바뀌는 그녀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는데 뒤늦게야 그녀를 그토록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되었다. 친구가 사귄다는 그 남자는 가족이라고는 노모 한 분과 아들 하나 뿐인 독신이었으며 어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그녀에게 쏟는 정성이 지극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꽃집을 하는 그녀의 문 앞에 곱게 포장한 장미 한 송이를 놓고 갔으며 가게에서 심심할 때 들으라고 오디오를 사주고 온갖 시디를 사다 나르는가 하면 읽히고 싶은 책을쉴 사이 없이 사주고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를 사들이고 우유며 빵이며 과일을떨어지지 않게 했다. 장거리 출장을 가면 휴게소에서 별별 군것질을 잊지 않고 사왔으며, 손님과 식사를 할 때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사들고 와 그녀가 먹는 것을 즐겁게 바라본다. 옷이며 머플러 구두 등을 사주며 그녀를 가꾸는 것에도 온갖 정성을 쏟았다. 휴일이면어김없이 그녀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을 갔으며 출퇴근 때면 늘 그녀 집 앞에 또는 가게 앞에 먼저 와서 기다렸다가 태워다 주었다. 아마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그토록 지극한 사랑을 처음 받아보았을 것이며 처음 누려보는 호강이며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나이가 많은 남편 후처로 들어와서 놀고 있는 남편 대신젊을 때부터 시장에서 야채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늘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 대신딸로는 맏이인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시장에 내다 팔 나물을다듬고 삶는 일까지 해야 했다. 성질 사나운 그녀의 할머니는 일을 잘 못한다고 어린 그녀를 늘혹독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녀는 살림 사는 것이 너무도 지긋지긋하여 앞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아들이었던 지금의 남편이 그녀를 좋아하자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집을 도망쳐 나오듯이 얼른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남편이 직장도 없이 놀고 있었으므로 결혼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수차례이사를 다니면서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려왔지만 결국 마약중독자인 남편과는 마음마저 단절 된 채로 고달픈 역경의 나날이었던 그녀의 결혼생활은 마치 여우 굴을피하니 호랑이 굴이 닥쳐온 격이었다. 그렇게 암울한 생활로 지쳐있을 때 공주처럼 떠 받들며 사랑해주는 이의 출현은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의 출현이요 자신은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 아니었겠는가? 그녀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사랑이 불륜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그렇게라도 가여운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음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뭔가 음식을 잘 못 먹은 듯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체한 것 같으니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버티는 그녀를 그 남자가 겨우 설득하여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녀는 위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 때가 15년 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난그 친구를 놀려주려고 전화를 했다. “지금 네 가게 건너편 식당이야.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와있으니까 빨리 와서 먹고 가“라고 거짓말을 했다. "알았어요." 라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지났는데도 속았다고 금방 전화가올 줄 알았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깔깔 거리며 투정을 해야 할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심각하게 들렸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하는 말은 자기와 내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는 먹고 살아야 할 처지이므로 만우절 같은걸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난 무안하기도 하고 민망하여 미안하다는 말만 겨우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나 위암이래요.”“엉? 만우절이라고 그런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하냐? 하하 난 안 속지.”“아니 아무려면 내가 목숨을 가지고 거짓말 하겠수? 정말이라니까. 오늘 병원 갔다 왔어요.“야, 솔직하게 말해, 그런 거짓말은 하는 거 아니야.”이렇게 다그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훌쩍 거리며 우는 것이다.그제야 난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멀쩡한 네가 무슨 암이야? 아니야, 오진일 거야 우리 다른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 받아보자. 절대로 아닐 거야.”다리가 후들 거리며 눈물이 범벅이 된 채 그녀를 데리고 다른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했으나역시 위암이라고 한다. 물론 그의 남편은 까마득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남편에게는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녀는 수술을 받기 위해 영남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녀 연인의 간병은 극진하다 못해 처절했다. 병원비는 물론이며 잠시라도 병마를 잊게 해보려고 코믹한 책과 비디오테이프를 사오기도 했으며 서울로 가서 저명한 암 전문의를 만나 상담하는가 하면 암에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다 구해오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수십 년 같이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는 못할것 같았다. 어느 날은 어딘가 같이 가 달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철학관에 가서 그녀가 몇 살까지 살 수 있는가를 묻는 그를 보면서 '얼마나 간절하면 저럴까? 저런 남정네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술을 했는데 이미 암 3기였다. 수술을 받고 1개월 만에 퇴원하는 날 그 남자는 그녀에게 화사한 드레스를 선물했으며 장미 백 송이를 안겨주었다. 그 순간 죽음을 앞두고 있는그녀의 마음은 안타까움도 컸겠지만 행복도 느꼈으리라. 그녀는 평소에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25평 아파트를 사서 세를 주었는데 아들에게 남겨줄 것이라고는 그 것밖에 없는데 그 마저 남편에게 뺏기게 될까봐 그 남자 앞으로 설정해줄것을 부탁했다. 그의 연인은 쾌히 승낙하고 자기 앞으로 설정을 해두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그녀는 고단한 병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녀의 생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너무 보고 싶다고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자신의 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한사코 만나주지 않았다. 마지막엔 그녀 자신도 살아날 수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 듯 그 남자와내가 얼마간의 돈을 모아 약값으로 쓰라고 주었으나 이제는 필요 없으니 자기가 죽고 난 뒤에부조나 하라고 했다. 내가 만들어간 음식도 가지고 온 정성을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한 숟갈만먹겠다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전등불을 끈 채 겨우 한 숟갈을 떠서 먹던 눈물겨운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기어이 가버리고 말았다. 상여 차를 타고 화장터로 가는 도중 훌쩍 거리며 우는 내 울음소리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곡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더니 갑자기 그녀의 시누이들과 시댁 친척들이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마약 복용으로 수감되어 있는 곳이 지금 막 지나고 있는 바로 곁에있는 구치소라는 것이다. 살아생전 남편 구실 한번 제대로 못하더니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이 미우면서도 한편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연인은 그녀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내 남편인 것처럼 가장하고 화장터까지 따라 갔다.살아 있는 자들의 오열이 뒤엉킨 망자를 보내는 이별 역은 갖가지 죽음으로 복잡했다. 드디어그녀의 앙상한 뼈가 나오는 찰나였다. 아! 애써 먹고 가꾸었던 뜨거운 피, 아름다운 살, 아무 것도 흔적 없는........... 웃음도 슬픔도 행복도 추억도 과거도 미래도 한 점 묻어 있지 않은........다만 스스로의 파란으로 삭아버린 듯한 저 저 하얀 뼈!............ 도저히 볼 수 없었는지 그는 획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의 슬픔과 애틋한 마음의 깊이는어떤 것이었을까? 나 역시 난생 처음 보는, 더욱이 친한 친구가 뼈가 되어 나오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넘을 수 없는 유한의 경계에서 쫓겨나듯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조차 모르게밖으로 나왔다. 장사를 치룬 사흘 뒤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있는 납골당을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제사를 올릴 음식 일체와 빨간 샤쓰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 한장을 가지고 왔다. 그는 사진을 세워놓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채운 다음 내게 종이 한 장을내밀었다. 그녀에게 바치는 헌시였다. 대신 낭송해달라고 한다. 슬퍼하지 말고 아름다운 곳에 미리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으면 꼭 찾아 가겠노라는 애절한사랑의 헌시였다. 내가 울먹이는 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동안 그 남자는 시종일관 엎드려 소리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 후 그 남자는 비오는 날이면 꼭 그녀를 찾아 갔고 그녀의 아들과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돌봐주었으며 졸업 후 두 아이의 직장까지 알선해 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할 무렵 그녀의 집을 그녀의 아들 명의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떤 것을 가리켜 지고지순한 사랑이라일컫는지 몰라도 나는 이들의 사랑이 그야말로 지고지순하게 느껴졌으며 감히 순애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누가 이들의 사랑에 불륜이라고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참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언젠가 그 남자가 내게 들려 준 말이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받고 싶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다”정말 그 남자는 주는 것만으로도 진정 행복했나 보다. 나는 해마다 목련꽃 피는 사월이면 잊을 수 없는 만우절과 함께 잠깐 화사하게 피었다가 몇 겹 해원의 손짓을 털며 허허로이 떨어져버리는 하얀 목련꽃 같은 이들의 사랑을 떠올린다.
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계명문화대학교 출강(전) - 대구·경북범죄예방위원(전) - 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전) - 대구문화재짐이회 회원 -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 녹조근정훈장 수훈 -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 외 다수 기온이 연일 30℃까지 오르내리는 초여름 날씨가 이어진다. 오늘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여 고향으로 달렸다. 언제 어디서 바라보아도 육중하며 넉넉한 용성의 진산인 용산(龍山)를 바라보고 슬픈 전설이 배어있는 비오재(飛烏峴)를 넘어 육동의 대종리에 닿았다. 육동은 구룡산이 뻗어내려 이어진 반룡산이 품고 있는 분지의 마을이다. 부일, 용전, 용천, 괴일, 대종, 가척 등 여섯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육동은 해발 약 250m의 준고랭지이며 오염원이 전혀 없는 오지라 공해가 없으며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청정 미나리가 자란다. 지하 150m에서 암반수를 뽑아 올려 무농약으로 미나리를 재배하므로 생미나리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육동에서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부일리의 옆 계곡에 위치한 육동지 옆으로 난 도로변에는 왕벚나무를 심어 가로수를 조성하였는데 왕벚꽃이 만발할 때는 새로운 볼거리로 명소가 되었다. 또 가족 여행지로 이름난 곳인 산촌생태마을이 조성되어있고 이곳에는 산채 체험장, 해맞이공원, 산촌생태체험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용천리에는 육동 마을 행복센터가 자리 잡고 있어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산촌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용전리에는 신라 천년고찰인 반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많은 육동의 으뜸 동네 대종리(大宗里)에는 특별히 볼거리와 전설이 전승되고 있어 찾아오게 되었다. 구룡산과 반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부일천를 가로지르는 대종2교(大宗二橋) 옆 들판에 진충묘(盡忠廟)가 자리 잡고 있다. 진충묘는 신라 말기에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북쪽의 도천산에 은거하며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왜구의 무리를 한 장군과 그이 누이가 이들을 버들못으로 유인하여 처단하여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는데 주민들은 그의 사후에 한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추앙하는 전각이다. 자인면 서부리의 계정숲에는 한 장군의 묘소와 진충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진충묘에 제를 올린다. 경산 자인 단오제에 한장군놀이를 삽입하여 더욱 성대하고 뜻깊은 단오제가 진행되고 있다. 한 장군 거리행렬과 여원무(女員舞)는 경산 자인 단오제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계정숲의 한 장군 묘소 옆에 마련된 진충묘와 별도로 자인면 원당리, 용성면 가척리와 이곳 대종리, 진량면 마곡리에 한 장군과 그의 누이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한당(韓堂) 또는 한묘(韓廟)라 부르기도 한다. 진량면 마곡리에는 한 장군의 누이동생인 한 낭자를 모시는 사당이며 다른 곳은 모두 한 장군을 모시는 진충묘이다. 전각의 규모는 조금씩 달라도 한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경산 자인 단오 행사 때 각 지역에 소재한 사당에 제를 올린다. 이곳 대종리의 전각은 규모가 작으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앞면 1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이었고 옆에는 눈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아 놓았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전각의 주변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사당 처마에는 초롱을 달아 놓고 금기(禁忌) 줄이 처져 있었다. 앞으로 4일 후면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라 지금부터 주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들이는 모양이다. 신라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진충묘 제례 행사는 또 다른 하나의 우리 전통문화라 하겠다. 자인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백성들을 괴롭혀온 왜구를 무찌른 공로가 지대한 한 장군을 추앙하며 기리는 일은 당연하다 하겠는데 어떻게 하여 용성에 그의 사당이 둘씩이나 세우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곳의 유력한 토호가 현감의 허락을 받아낸 결과라 여겨진다. 장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척리도 그렇고 자인면 원당리와 진량면 마곡리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렇게 진충묘를 살펴보고 그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았다. 대종리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로 향하는 도로변에는‘5연대’와‘4연대’라는 명문의 바위와 비석이 있다. 五連臺(오연대)라 새긴 큼직한 글씨 옆에는 작은 글씨로 崔晩海五兄弟五月五日遊賞之所也(최만해오형제오월유상지소야)라 새겨져 있다. 四連臺(4연대)라 새긴 빗돌 오른쪽에는 張基植四兄弟遊賞之所也(장기식 사형제 유상지소야)라 새겼고 왼쪽에는 1964년 갑신 4월 초 8일이라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의좋은 최씨의 5형제와 장씨의 4형제가 각각 시절이 좋은 봄날에 이곳에 와서 즐겁게 놀다간 흔적을 남겨놓은 듯하다. 이곳 주변은 세나벌이라 알려져 있는데 오지의 산촌치고는 제법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부일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데 개천에는 물고기가 많은지 이름 모를 새들이 연신 물속으로 잠수하는 광경이 바라보인다. 마을 앞에는 300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고 팔각정 정자가 세워져 있다. 부일천 계곡 옆의 산 중턱에는 큼직한 거북바위가 있는데 목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새나벌의 전설이 전승되어오고 있다. 세나벌 전설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를 장자계 전설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이 전설은 조선 중기 때 일이다. 이곳은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작은 동네였는데 마을 앞의 산 중턱에 거북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의 앞산은 구룡산 줄기가 흘러 모여 마을을 지키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명당이라 한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아도 산수가 수려하고 들판이 넓으며 계곡에는 맑고 풍부한 물이 흘러내려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명당이라 전해 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동네 사람들은 거북바위의 덕으로 모두가 넉넉한 살림을 꾸려갔고 그 중 세나벌 바위를 정면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김첨지는 가장 큰 부자였다. 김첨지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도무지 쓸 줄은 모르는 위인이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거느리는 식솔들마저 배불리 먹이지 아니하였으며 소작을 얻은 일가들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일가들의 재산도 김첨지의 돈 모으기에 짓눌려 논과 밭을 하나둘 그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김첨자는 집성촌의 대지주가 되었다. 일족들도 욕심이 많은 김첨지를 지주로 모시며 살아가야 하였다. 이러한 김첨지를 미워했지만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가 부자인 것은 세나벌의 거북바위가 김첨지 집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를 증오하여 세나벌 거북바위를 부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천둥 번개가 일고 비바람이 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인근의 반룡사에 올라가 주지승에게 김첨지가 큰 시주를 하겠다며 거짓으로 알리자 주지승은 믿지 아니하였다. 천하의 구두쇠가 절에 시주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한 탁발승은 세나벌 김부자 집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김부자가 문전을 들어서며“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시주할 거라곤 없으니 돌아 가시요.”하자 탁발승은 재빠르게 김부자를 향해 정중히 예를 올리며 “김부자께서 큰 시주를 하신다기에 이렇게 찾아 뵈옵게 되었습니다.”하니 김부자는 버럭 화를 내며“나는 시주할 것도 없고 시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머슴 막쇠에게 안으로 들어가 쇠똥 구정물을 가져오게 하여 문간에 서 있는 탁발승을 향해 구정물 한 바가지를 냅다 뿌렸다. 시주는 얻지 못하고 구정물 세례만 받은 탁발승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훔치고는 김부자 집을 나서는데 며느리가 스님에게 사과하며 쌀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탁발승에게 매달려 김부자의 나쁜 행실을 고치려면 거북바위를 깨어버리는 일이라며 그렇게 해주기를 간곡히 애걸하자 탁발승은“거북바위를 부수면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못살게 되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의 처신이 너무나 못마땅하여 우리는 못살아도 좋으니 꼭 거북바위를 깨부수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탁발승은 반복하여“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위를 향해“이얍!”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거북바위는 목이 잘려 나갔고 갈라진 바위 사이에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스님은 김부자 집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며느리는 새벽길을 나서 마을을 떠나가다가 뒤에서 큰 소리가 나 뒤돌아본 순간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 후 김부자는 이름 모를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 추운 겨울날 이승을 하직하였다. 그는 홀로 쓸쓸하게 죽어 상여조차 하지 못하고 일꾼의 지게에 얹혀 산으로 올라가 한 평의 땅만 깔고 눕게 되었다. 호화스럽던 김첨지의 집도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김첨지의 집에 불이 나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불을 끄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부자 김첨지의 욕심은 허망함만 낳았는데 욕심을 부리면 그 결과는 허망함을 안겨준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대종(大宗)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풍기는 점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앞뒤 산의 준령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으며 부일천의 맑은 개울 물가에 박혀 있는 너럭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바라보이는데 금방이라도 한 마리의 용이 하늘 높아 승천할 듯 강력한 느낌이 스쳐 지나간다.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난 구룡산의 정기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먼 옛날 왜구들의 약탈과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한 장군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동포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곳 진충묘에서 새롭게 느껴보았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과학의 문명 속에 살아가면서도 천년이 넘게 이어오는 진충묘를 다듬고 지키며 제례를 올리는 정성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게 생각을 하며 가척리에 소재한 한당을 찾아 발길을 돌린다.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행복수준을 나타내는 행복지수는 행복의 중요한 지표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지수의 조사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서도 행복지수는 차이가 있다. 대체적인 행복수준을 판단하는 지수로서 근거는 되지만, 각 지표들이 엄정한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행복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서 행복지수에 포함되는 지표의 항목들이 달라지고 지수의 크기 역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을 나타내는 각 지표 중 어느 지표가 얼마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으며 그 비중의 크기를 측정해 내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엔이 만든 현대적인 행복지수(Happy Planet Index)는 나라별로 1,000명의 사람들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구매력 소득, 사회적 지지도, 선택의 자유, 기대수명, 부정부패, 아량 등 6개 변수로 지수를 내어 행복도를 평가했다. 이 지수에 의하면 1위 핀란드, 2위 덴마크, 3위 스위스, 4위 아이슬란드, 5위 노르웨이 등 북유럽복지국가들이 차지했으며, 독일 17위, 미국 18위, 우리나라는 61위를 나타낸 바 있다. 이 분석은 대체로 서구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복지수들을 고려했다면 순위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생활편의도의 반영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배달의 편의성, 경제생활의 저렴도, 가족관계의 친밀성, 법률서비스나 의료ㆍ문화서비스의 편의성과 충실도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행복수준은 훨씬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옛 부터 五福이라는 얘기를 하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준을 다섯 가지로 들고 이를 잘 실현한 사람을 행복한 것으로 평가해 왔다. 이 五福論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행복을 평가하고 해석하더라도 매우 의미 있고 근거 있는 내용들이다. 이 내용은 유교의 5대 經典(詩經, 書經, 禮記, 春秋, 周易)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書經>에서 지적한 것인데, 이 五福論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壽 즉 오래 사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살고 죽는 生死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끝이다. 사람도 죽음으로 인생은 끝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사 이래로 오래살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래서 역사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어 왔다. 성경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들에는 역사적인 장수인을 밝히고 그 壽가 무려 천수에 가까운 기록들이 있지만, 그 기록들은 대체로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 우리나라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100세를 산 사람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40세도 안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르러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교육수준과 의료수준도 함께 높아지고,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평균수명도 길어졌다. 2021년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약 80 세, 여자 87 세로 나타난다. 평균 수명으로 보면 행복수준이 많이 향상된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을 때 행복의 첫째 조건이 오래 사는 것임을 객관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다. 둘째, 富이다. 부는 살아가는데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채워주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삶을 보면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安貧樂道정신이 강했다. 가난해도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면 불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부자가 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바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물론 행복은 마음이 결정하는 부분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현실적으로 관찰해보면, 산다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 즉 재화를 소비하면서 생명을 연계해 나가는 과정이다. 물질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존재이다. 풍족한 물질의 향수는 생을 유복하게 한다. 그러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재화들은 대부분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물과 공기가 일반적으로 무한히 공짜로 쓸 수 있는 재화로 평가받고 있으나 멀지 않아 그러한 조건도 변화될 것이다. 富나 자산이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필요한 물질을 넉넉하게 향수힐 수가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소위 시장자본주의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재화를 돈을 지불하고 얻는다. 부는 행복을 이루기 위한 기초조건인 셈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끝없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생산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행복실현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富는 행복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셋째, 강령 즉 건강이다. 강령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한다. 요즘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는 추세이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며,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사실 건강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은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행복의 첫째 조건이 건강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넷째, 攸好德으로 남에게 많이 베풀고 덕을 즐기는 마음을 말한다. 남에게 선행과 덕을 쌓는 것을 즐겨 복덕을 쌓는 일이다. 덕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복은 쌓여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인간관계에는 후덕함이 생명이다. 인간관계에서 너무 빡빡하고 인색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남의 어려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남을 돕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 경우가 바르고 이치가 분명하더라도 칼날처럼 이치를 세워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은 출세순도, 지식과 사회적 지위의 문제도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듯이 명문학교를 나오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아무리 잘난 체해도 덕이 부족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검소하면서도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따지지 않고 덕을 실행하는 사람을 세상이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 사람을 복 받은 자로 인정한다. 자신이 베푸는 덕에 의해 자신과 남이 동시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이다. 즉 잘 죽는 복이다. 일생을 건강하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살다가 충분한 壽를 하고 자연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출생이 인생의 중요사이 듯이 죽음 또한 인생의 중대사임은 분명하다. 죽음은 일반적으로 출생보다도 더욱 큰 의미를 갖고 있어, 죽음에 대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건하고 진지하다. 그래서 죽음을 복스럽게 맞이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될 만도 하다. 죽은 사람을 두고 세상이 애통해하고 죽은 자의 인생을 높게 기리는 삶이었다면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도 시대와 사회환경에 따라 조금씩은 변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행복의 조건에는 경제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빈곤국가 이를테면, 부탄. 방글라데시, 에치오피아, 네팔, 캄보디아 등은 행복지수는 높은 나라로 주목받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일 뿐이다. 문화적인 삶에 길들여진 선진국 여러 나라 국민들이 만일 후진국형의 그들 행복국가에 가서 산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전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객관적인 행복지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五福論은 현대사회에서도 설득력을 지닌 행복관이지만, 이들을 여하히 조정하고, 비중과 정도를 객관적 지표로 만들어 갈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이 재 희1949년 경북경산출생(전)역도선수(현)대구 해안농약사 대표 갓바위 부처님 산하리 구름돌아 비켜 앉은 의연합은 긴 세월 하루같이 경을 읽는 자세인데 인간사 백팔번뇌를 네 홀로 지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