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0-22 15:05 (금)
기사 (343건)

  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계명문화대학교 출강(전)          - 대구·경북범죄예방위원(전)       - 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전)     - 대구문화재짐이회 회원                                   -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 녹조근정훈장 수훈            -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 외 다수    기온이 연일 30℃까지 오르내리는 초여름 날씨가 이어진다. 오늘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여 고향으로 달렸다. 언제 어디서 바라보아도 육중하며 넉넉한 용성의 진산인 용산(龍山)를 바라보고 슬픈 전설이 배어있는 비오재(飛烏峴)를 넘어 육동의 대종리에 닿았다. 육동은 구룡산이 뻗어내려 이어진 반룡산이 품고 있는 분지의 마을이다. 부일, 용전, 용천, 괴일, 대종, 가척 등 여섯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육동은 해발 약 250m의 준고랭지이며 오염원이 전혀 없는 오지라 공해가 없으며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청정 미나리가 자란다. 지하 150m에서 암반수를 뽑아 올려 무농약으로 미나리를 재배하므로 생미나리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육동에서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부일리의 옆 계곡에 위치한 육동지 옆으로 난 도로변에는 왕벚나무를 심어 가로수를 조성하였는데 왕벚꽃이 만발할 때는 새로운 볼거리로 명소가 되었다. 또 가족 여행지로 이름난 곳인 산촌생태마을이 조성되어있고 이곳에는 산채 체험장, 해맞이공원, 산촌생태체험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용천리에는 육동 마을 행복센터가 자리 잡고 있어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산촌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용전리에는 신라 천년고찰인 반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많은 육동의 으뜸 동네 대종리(大宗里)에는 특별히 볼거리와 전설이 전승되고 있어 찾아오게 되었다. 구룡산과 반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부일천를 가로지르는 대종2교(大宗二橋) 옆 들판에 진충묘(盡忠廟)가 자리 잡고 있다. 진충묘는 신라 말기에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북쪽의 도천산에 은거하며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왜구의 무리를 한 장군과 그이 누이가 이들을 버들못으로 유인하여 처단하여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는데 주민들은 그의 사후에 한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추앙하는 전각이다. 자인면 서부리의 계정숲에는 한 장군의 묘소와 진충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진충묘에 제를 올린다. 경산 자인 단오제에 한장군놀이를 삽입하여 더욱 성대하고 뜻깊은 단오제가 진행되고 있다. 한 장군 거리행렬과 여원무(女員舞)는 경산 자인 단오제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계정숲의 한 장군 묘소 옆에 마련된 진충묘와 별도로 자인면 원당리, 용성면 가척리와 이곳 대종리, 진량면 마곡리에 한 장군과 그의 누이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한당(韓堂) 또는 한묘(韓廟)라 부르기도 한다. 진량면 마곡리에는 한 장군의 누이동생인 한 낭자를 모시는 사당이며 다른 곳은 모두 한 장군을 모시는 진충묘이다. 전각의 규모는 조금씩 달라도 한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경산 자인 단오 행사 때 각 지역에 소재한 사당에 제를 올린다. 이곳 대종리의 전각은 규모가 작으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앞면 1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이었고 옆에는 눈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아 놓았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전각의 주변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사당 처마에는 초롱을 달아 놓고 금기(禁忌) 줄이 처져 있었다. 앞으로 4일 후면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라 지금부터 주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들이는 모양이다.  신라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진충묘 제례 행사는 또 다른 하나의 우리 전통문화라 하겠다. 자인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백성들을 괴롭혀온 왜구를 무찌른 공로가 지대한 한 장군을 추앙하며 기리는 일은 당연하다 하겠는데 어떻게 하여 용성에 그의 사당이 둘씩이나 세우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곳의 유력한 토호가 현감의 허락을 받아낸 결과라 여겨진다. 장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척리도 그렇고 자인면 원당리와 진량면 마곡리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렇게 진충묘를 살펴보고 그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았다. 대종리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로 향하는 도로변에는‘5연대’와‘4연대’라는 명문의 바위와 비석이 있다. 五連臺(오연대)라 새긴 큼직한 글씨 옆에는 작은 글씨로 崔晩海五兄弟五月五日遊賞之所也(최만해오형제오월유상지소야)라 새겨져 있다. 四連臺(4연대)라 새긴 빗돌 오른쪽에는 張基植四兄弟遊賞之所也(장기식 사형제 유상지소야)라 새겼고 왼쪽에는 1964년 갑신 4월 초 8일이라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의좋은 최씨의 5형제와 장씨의 4형제가 각각 시절이 좋은 봄날에 이곳에 와서 즐겁게 놀다간 흔적을 남겨놓은 듯하다.  이곳 주변은 세나벌이라 알려져 있는데 오지의 산촌치고는 제법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부일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데 개천에는 물고기가 많은지 이름 모를 새들이 연신 물속으로 잠수하는 광경이 바라보인다. 마을 앞에는 300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고 팔각정 정자가 세워져 있다.  부일천 계곡 옆의 산 중턱에는 큼직한 거북바위가 있는데 목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새나벌의 전설이 전승되어오고 있다. 세나벌 전설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를 장자계 전설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이 전설은 조선 중기 때 일이다. 이곳은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작은 동네였는데 마을 앞의 산 중턱에 거북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의 앞산은 구룡산 줄기가 흘러 모여 마을을 지키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명당이라 한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아도 산수가 수려하고 들판이 넓으며 계곡에는 맑고 풍부한 물이 흘러내려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명당이라 전해 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동네 사람들은 거북바위의 덕으로 모두가 넉넉한 살림을 꾸려갔고 그 중 세나벌 바위를 정면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김첨지는 가장 큰 부자였다.  김첨지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도무지 쓸 줄은 모르는 위인이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거느리는 식솔들마저 배불리 먹이지 아니하였으며 소작을 얻은 일가들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일가들의 재산도 김첨지의 돈 모으기에 짓눌려 논과 밭을 하나둘 그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김첨자는 집성촌의 대지주가 되었다. 일족들도 욕심이 많은 김첨지를 지주로 모시며 살아가야 하였다. 이러한 김첨지를 미워했지만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가 부자인 것은 세나벌의 거북바위가 김첨지 집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를 증오하여 세나벌 거북바위를 부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천둥 번개가 일고 비바람이 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인근의 반룡사에 올라가 주지승에게 김첨지가 큰 시주를 하겠다며 거짓으로 알리자 주지승은 믿지 아니하였다. 천하의 구두쇠가 절에 시주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한 탁발승은 세나벌 김부자 집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김부자가 문전을 들어서며“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시주할 거라곤 없으니 돌아 가시요.”하자 탁발승은 재빠르게 김부자를 향해 정중히 예를 올리며 “김부자께서 큰 시주를 하신다기에 이렇게 찾아 뵈옵게 되었습니다.”하니 김부자는 버럭 화를 내며“나는 시주할 것도 없고 시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머슴 막쇠에게 안으로 들어가 쇠똥 구정물을 가져오게 하여 문간에 서 있는 탁발승을 향해 구정물 한 바가지를 냅다 뿌렸다.  시주는 얻지 못하고 구정물 세례만 받은 탁발승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훔치고는 김부자 집을 나서는데 며느리가 스님에게 사과하며 쌀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탁발승에게 매달려 김부자의 나쁜 행실을 고치려면 거북바위를 깨어버리는 일이라며 그렇게 해주기를 간곡히 애걸하자 탁발승은“거북바위를 부수면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못살게 되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의 처신이 너무나 못마땅하여 우리는 못살아도 좋으니 꼭 거북바위를 깨부수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탁발승은 반복하여“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위를 향해“이얍!”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거북바위는 목이 잘려 나갔고 갈라진 바위 사이에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스님은 김부자 집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며느리는 새벽길을 나서 마을을 떠나가다가 뒤에서 큰 소리가 나 뒤돌아본 순간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 후 김부자는 이름 모를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 추운 겨울날 이승을 하직하였다. 그는 홀로 쓸쓸하게 죽어 상여조차 하지 못하고 일꾼의 지게에 얹혀 산으로 올라가 한 평의 땅만 깔고 눕게 되었다. 호화스럽던 김첨지의 집도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김첨지의 집에 불이 나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불을 끄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부자 김첨지의 욕심은 허망함만 낳았는데 욕심을 부리면 그 결과는 허망함을 안겨준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대종(大宗)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풍기는 점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앞뒤 산의 준령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으며 부일천의 맑은 개울 물가에 박혀 있는 너럭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바라보이는데 금방이라도 한 마리의 용이 하늘 높아 승천할 듯 강력한 느낌이 스쳐 지나간다.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난 구룡산의 정기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먼 옛날 왜구들의 약탈과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한 장군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동포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곳 진충묘에서 새롭게 느껴보았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과학의 문명 속에 살아가면서도 천년이 넘게 이어오는 진충묘를 다듬고 지키며 제례를 올리는 정성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게 생각을 하며 가척리에 소재한 한당을 찾아 발길을 돌린다.

전문가 | 송하 전명수 | 2021-06-29 21:48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행복수준을 나타내는 행복지수는 행복의 중요한 지표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행복지수의 조사처가 어디였느냐에 따라서도 행복지수는 차이가 있다. 대체적인 행복수준을 판단하는 지수로서 근거는 되지만, 각 지표들이 엄정한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행복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서 행복지수에 포함되는 지표의 항목들이 달라지고 지수의 크기 역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을 나타내는 각 지표 중 어느 지표가 얼마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으며 그 비중의 크기를 측정해 내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엔이 만든 현대적인 행복지수(Happy Planet Index)는 나라별로 1,000명의 사람들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구매력 소득, 사회적 지지도, 선택의 자유, 기대수명, 부정부패, 아량 등 6개 변수로 지수를 내어 행복도를 평가했다. 이 지수에 의하면 1위 핀란드, 2위 덴마크, 3위 스위스, 4위 아이슬란드, 5위 노르웨이 등 북유럽복지국가들이 차지했으며, 독일 17위, 미국 18위, 우리나라는 61위를 나타낸 바 있다. 이 분석은 대체로 서구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복지수들을 고려했다면 순위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생활편의도의 반영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음식배달의 편의성, 경제생활의 저렴도, 가족관계의 친밀성, 법률서비스나 의료ㆍ문화서비스의 편의성과 충실도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행복수준은 훨씬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옛 부터 五福이라는 얘기를 하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기준을 다섯 가지로 들고 이를 잘 실현한 사람을 행복한 것으로 평가해 왔다. 이 五福論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행복을 평가하고 해석하더라도 매우 의미 있고 근거 있는 내용들이다. 이 내용은 유교의 5대 經典(詩經, 書經, 禮記, 春秋, 周易)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書經>에서 지적한 것인데, 이 五福論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壽 즉 오래 사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살고 죽는 生死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끝이다. 사람도 죽음으로 인생은 끝이다. 그래서 인간은 유사 이래로 오래살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래서 역사가 발전하면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어 왔다. 성경을 비롯한 동서양의 고전들에는 역사적인 장수인을 밝히고 그 壽가 무려 천수에 가까운 기록들이 있지만, 그 기록들은 대체로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 우리나라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100세를 산 사람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40세도 안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르러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교육수준과 의료수준도 함께 높아지고,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평균수명도 길어졌다. 2021년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 약 80 세, 여자 87 세로 나타난다. 평균 수명으로 보면 행복수준이 많이 향상된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을 때 행복의 첫째 조건이 오래 사는 것임을 객관적으로 부정할 이유는 없다.  둘째, 富이다. 부는 살아가는데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채워주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삶을 보면 정신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安貧樂道정신이 강했다. 가난해도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면 불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부자가 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바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물론 행복은 마음이 결정하는 부분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현실적으로 관찰해보면, 산다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 즉 재화를 소비하면서 생명을 연계해 나가는 과정이다. 물질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절대적 존재이다. 풍족한 물질의 향수는 생을 유복하게 한다. 그러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재화들은 대부분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물과 공기가 일반적으로 무한히 공짜로 쓸 수 있는 재화로 평가받고 있으나 멀지 않아 그러한 조건도 변화될 것이다. 富나 자산이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필요한 물질을 넉넉하게 향수힐 수가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소위 시장자본주의사회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재화를 돈을 지불하고 얻는다. 부는 행복을 이루기 위한 기초조건인 셈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끝없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생산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행복실현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富는 행복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셋째, 강령 즉 건강이다. 강령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한다. 요즘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는 추세이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며,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이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은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한다. 사실 건강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은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행복의 첫째 조건이 건강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넷째, 攸好德으로 남에게 많이 베풀고 덕을 즐기는 마음을 말한다. 남에게 선행과 덕을 쌓는 것을 즐겨 복덕을 쌓는 일이다. 덕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복은 쌓여진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인간관계에는 후덕함이 생명이다. 인간관계에서 너무 빡빡하고 인색한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남의 어려움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남을 돕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 경우가 바르고 이치가 분명하더라도 칼날처럼 이치를 세워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행복은 출세순도, 지식과 사회적 지위의 문제도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했듯이 명문학교를 나오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아무리 잘난 체해도 덕이 부족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검소하면서도 남의 인격을 존중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따지지 않고 덕을 실행하는 사람을 세상이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 사람을 복 받은 자로 인정한다. 자신이 베푸는 덕에 의해 자신과 남이 동시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다섯째는 고종명考終命이다. 즉 잘 죽는 복이다. 일생을 건강하고 고통 없이 편안하게 살다가 충분한 壽를 하고 자연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출생이 인생의 중요사이 듯이 죽음 또한 인생의 중대사임은 분명하다. 죽음은 일반적으로 출생보다도 더욱 큰 의미를 갖고 있어, 죽음에 대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건하고 진지하다. 그래서 죽음을 복스럽게 맞이하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될 만도 하다. 죽은 사람을 두고 세상이 애통해하고 죽은 자의 인생을 높게 기리는 삶이었다면 그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도 시대와 사회환경에 따라 조금씩은 변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행복의 조건에는 경제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행복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빈곤국가 이를테면, 부탄. 방글라데시, 에치오피아, 네팔, 캄보디아 등은 행복지수는 높은 나라로 주목받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일 뿐이다. 문화적인 삶에 길들여진 선진국 여러 나라 국민들이 만일 후진국형의 그들 행복국가에 가서 산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전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객관적인 행복지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의 五福論은 현대사회에서도 설득력을 지닌 행복관이지만, 이들을 여하히 조정하고, 비중과 정도를 객관적 지표로 만들어 갈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전문가 | 대구대학교 명예교수_박천익 | 2021-06-29 21:44

송하 전  명 수ㆍ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ㆍ계명문화대학교 출강ㆍ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ㆍ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ㆍ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ㆍ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ㆍ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ㆍ저서 : 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ㆍ녹조근정훈장 수훈  신록의 계절이 다하고 유월에 접어드니 제법 여름 맛이 나는데 오늘은 비가 내린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길동무 삼아 집을 나섰다.  오늘 찾은 곳은 구룡산(九龍山)자락에 자리 잡은 영지사(靈芝寺)이다. 경산, 영천시 대창을 거쳐 영지사로 오르는 시골길은 도로 사정이 신통치 아니한데 빗길이라 천천히 달렸다. 시골 마을 길이 좁기도 하지만 꼬부랑길이 연속으로 이어져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차량이 원활하게 교행할 수 있도록 도로를 확장해야 하겠다. 영지사는 고향마을과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이제야 찾아보게 되었다.  구룡산 영지사는 경북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용호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태종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웅정암(熊&#20028;庵)이라 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지조(智照)와 원찬(元贊)이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영지사로 바꾸었다. 영지사의 경내 전각은 대웅전과 명부전, 범종각, 삼성각, 심검당(尋劍堂), 요사채 2동 등이 있다.  영지사 대웅전은 영지사의 주 불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2년에 중수하였으며 2015년에도 해체 복원하였다. 대웅전의 기단은 자연 장대석으로 축조되었고 자연석 주초석에 둥근 기둥을 사용한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사방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웠는데 건물이 아담하며 소박한 모습으로 바라보인다. 겹처마에 금단청을 하였으며, 다포계 형식으로 짜 넣은 포작이 참으로 화려하다. 외부의 포작보다 법당 안쪽의 포작이 화려하여 대목장의 솜씨가 돋보인다. 전각의 규모에 비하여 처마가 길게 빠져나와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해 활주를 세운 듯하다.   영지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세로 209.1㎝, 가로 207.7㎝ 크기의 방형(方形)에 가까운 비단 바탕에 채색한 작품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모니불 좌상을 크게 그리고,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으며, 그 뒤쪽에는 가섭과 아란, 제자상 2위 등을 배치한 간략한 구성이다. 천공과 배경에는 채운을 장식해 있고, 화면 하단에는 장문의 화기가 기술되어 있다. 화기를 통해 건륭 41년(1776)에 양공(良工) 취징(取澄)을 비롯하여 화사(畵師) 정총(定聰), 도한(道閑) 등이 참여하여 제작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부분적으로 안료의 변색으로 훼손이 심한 편이나,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으며 선명한 색감 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본존 법의의 장식 문양이나, 나한상의 환상 점묘식 문양 등은 18세기 전반기 양식을 이어받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탱화의 원본은 따로 보존되어 있고, 현존 탱화는 영인본이라 했다.  대웅전 법당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좌우편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해 있다. 그런데 이 불상은 한때 수난을 당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에 도난당하였다 했다. 이후 삼존불을 새로이 봉안하였으나, 최근 경내지 인접 산비탈에 당시 불상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중 1점은 찾을 수 없어 당시의 사진을 통해 복제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했다. 이로써 갈 곳이 없는 이전의 불상은 지금 심검당에 봉안되어 있었다.  심검당(尋劍堂)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 하여 심검당이라고 한다. 심검당의 검(劍)은 마지막 무명(無明)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慧明)을 증득(證得)하게 하는 칼을 상징한다.  대웅전 불단 서편 천장에 반야용선(般若龍船)이 매달려있고, 배에서 내려온 밧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보살의 모습에 공연히 용이 쓰인다. 반야용선은 큰 지혜로서 피안의 세계로 용이 이끄는 지혜의 배인데 극락세계 왕생에 대한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상징화한 것이라 했다.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을 놓쳐버려 발을 동동 구르는 중 선장인 관세음보살이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 극락으로 향하는 악착 보살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영지사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없어져 새로 제작한 것이며 1층 지붕돌과 2, 3층 몸돌과 지붕돌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남아 있는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고, 지붕돌 위의 낙수면은 비교적 가파르며, 두터운 2단 각형 받침이 있다. 아랫면의 층급받침은 3단인데,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거친 편이다.  명부전(冥府殿)에 들어섰다. 영지사 명부전에 모셔진 석조지장시왕상은 모두 31구의 존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천 영지사 명부전 석조지장시왕상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와 오른쪽에 무독귀왕이 시립한 지장삼존상이 3단으로 구성된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으며, 불단 좌·우측에 단을 낮춰서 10구의 시왕상과 동자상 10구가 배치되어 있다. 이어서 시왕상이 위치한 끝단 좌우에는 다시 단을 낮춰서 판관상 2구와 귀왕상 2구, 명부사자상 2구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2구의 금강역사상은 바닥에 놓여 있다. 재질은 모두 불석으로 시왕상의 수염이나 지물 등에 일부 보수된 흔적이 있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조상기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양식적으로 볼 때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되었다.  명부전(冥府殿)은 불교 설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10명의 왕인 시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데, 이에 망자는 생전에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가려지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 5시왕인 염라대왕은 업경(業鏡)으로 죽은 자의 죄를 비추어 볼 뿐만 아니라, 경책에 개개인의 죄업(罪業)을 낱낱이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추호의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염라대왕은 경책을 주로 머리 위에 얹어 놓는데 간혹 손에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곳 명부전에는 염라대왕이 경책을 펼쳐들고 있어 그 어느 시왕보다 경외심이 있다.  대웅전 앞 서북쪽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영지사 범종각(永川 靈芝寺 泛鐘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조는 중층 누각에 익공계 팔작집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층은 벽체가 없이 사방이 트여 있다. 현재 범종각 좌우로는 대웅전 영역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있다. 상층의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깐 뒤 법고, 법종,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이 걸려있다. 종각의 구조는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에 겹처마 팔작집이다. 종각의 앞과 뒤편에 범종각 현판이 달려있었다.  한나절 우산을 받쳐 들고 영지사를 찾아와서 많은 상식과 한층 더 깊이 있는 문화재 공부를 한 시간이 되었다. 꼬부랑 시골길을 지나 작은 고개를 넘어 고향인 용성면으로 향하는 필자의 머릿속은 시공을 넘나든 듯 격세지감이다.

전문가 | 수필가 전명수 | 2021-06-08 22:26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행복의 크기를 계량적으로 측정하려고 애를 썼던 18세기 사상계의 뉴턴, 철학자 벤담(Jeremy Bantham 1748~1832)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있다고 보고 행복과 쾌락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즉 그에게서 고통은 불행이고 쾌락은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마땅히 순행복의 크기를 최대화할 수 있는 쾌락의 길을 가야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순행복(net happiness)의 개념은 쾌락에서 고통을 뺀 값이다. 인간의 삶에는 고통과 쾌락이 함께 존재하는데 고통을 행복의 마이너스 값으로 쾌락을 플러스 값으로 계산한다면, 순행복은 곧 순수한 행복의 크기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즉‘최대다수를 위한 최대행복(Greatest happiness for the greatest number)’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행복의 크기를 최대화 하는 사회일수록 이상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행복의 크기를 계산하는 데는 평등한 인간사회의, 유사한 행복관을 가진 사람을 가정한 것이다.  그는 행복계산법이라는 자기만의 방법을 고안하여 쾌락과 고통의 양을 수치화 하려고 했다. 모든 쾌락이나 고통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 1)강도(intensity), 2)지속성(duration), 3)확실성(certainty), 4)근접성(propinquity) 5)다산성(fecundity), 6)불순도(impurity), 7)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도(effect on others)로 나누어 쾌락의 강도를 측정하고자 했다. 그는 고통에 대해서도 강도, 기간, 확실성, 근접성 등으로 나누어 계산하고 각각 측정된 쾌락과 고통의 크기를 플러스, 마이너스 하면 순행복을 측정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는 정말 현대경제학자들이 꿈도 꾸지 못할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과제를 감히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주관적인 개념이 내포된 행복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경제학자들은 다시 행복을 序數的(순서로 표현하는 방법)인 개념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첫 번째로 좋아하는 것,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 등으로 표현하여, 선호의 순서로 복지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순서적 표현이 과연 얼마만큼 행복의 크기를 현실적인 개념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행복감을 결코 서수적 표현으로는 온전하게 나타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과 불행이  비록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 크기의 일정한 값을 갖고 있음은 사실이다. 작은 행복과 큰 행복, 작은 불행과 큰 불행은 각각 특정의 느낌의 크기를 갖고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 크기의 정도를 우리가 정확하게 객관화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삶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복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뭐든 수치로 나타내고 싶어 하는 경제학자들은 결국 복지나 효용이란 말로 행복을 대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복지니 효용이니 하는 말 역시 단순한 화폐적 크기로 객관화하기에는 역시 불완전한 표현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은 모두가 단순한 화폐적 개념만으로 통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만족의 실체인 돈의 크기가 100원이라고 해서 효용과 행복의 크기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돈 100원의 크기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복지와 효용에도 역시 잠재적으로 주관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정치학이나 윤리학의 영역에서 과학으로 발전시킨 근·현대경제학자들은 서수적 표현으로 복지 또는 효용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과연 그것이 현실적인 행복의 크기를 얼마만큼 반영해 줄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 큰 복지나 효용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의 만족이나 행복을 주는 것인지는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100의 복지수준 또는 효용 수준이 현실적으로 얼마의 행복 수준을 나타낼지 가늠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복지나 효용이론이 현실의 복지수준 및 행복 수준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이다지도 무력할 바엔, 아예 복지를 행복의 개념으로 대체하여 현실적인 행복을 경험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종합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증주의의 틀에 입맛을 맞추기 위해  논리적 기교로 무장한 현대의 복지이론은 수량적인 크기를 제외하면 현실적인 복지와 행복의 문제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껍데기 이론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행복학에 관심을 가진 많은 행복학자들은 아예 행복의 주관적인 측면은 인문학이나 도의학에 맡긴 채, 행복지수라는 지표를 사용하여 행복의 객관적인 측정을 시도하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측정하는 지수로서 일찍이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상담사 코언(Cohen)이 만들어 2002년에 발표한 행복공식이 대표한다. 그들은 18년동안 1,000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80가지 상황속에서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5가지 상황을 선택하게 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행복은 1)인생관, 적응력, 유연성 등 개인적 특성을 나타내는 P(Personal), 2)건강, 돈, 인간관계 등 생존조건을 표현하는 E(Existence), 3)야망, 자존심, 기대, 유머 등 고차원의 상태를 의미하는 H(Higher order)등 세 가지 요소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들 조건 중에서도 생존조건인 E가 개인적인 특성 P보다 5배 중요하고, 고차원상태인 H는 P보다 3배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행복지수를 산출하기 위하여 다음 네 가지 항목을 제시하고, 0점에서 10점까지 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①나는 유연하고 변화에 잘 대처하는 편이다. ②나는 긍정적이고, 우울하고 침체된 분위기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며, 스스로 잘 통제하는편이다(P지수). ③나는 건강, 돈, 안전, 자유 등 나의 조건에 만족한다(E지수). ④나는 가가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내일에 몰두하는 편이며, 자신이 세운 기대치를 달성하고 있다(H지수).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1)가족과 친구, 자신에게 시간을 쏟을 것, 2)흥미와 취미를 추구할 것, 3)밀접한 대인관계를 맺을 것, 4)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5)기존의 틀을 벗어날 것, 6)현재에 몰두하거나 과거에 집착하지 말 것. 7)운동하고 휴식을 취할 것, 8)항상 최선을 다하되 가능한 목표를 가질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분석을 근거로 유엔이 2016년 6월23일 발표한‘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158개국 가운데 한국은 10점 만점에 5.984 점으로 세계 47위이다. 2017년 세계행복지수 랭킹은 노르웨이가 1위, 2위 덴마크, 3위 아이슬란드, 한국은 56위이며 5.838점으로 나타났다(네이처 지식백과).  그러나 사실상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하며, 기준에 따라 국가별 행복 순위는 너무도 다르고 획일성 또한 없음이 사실이다. 아시아의 대표적 행복국가 부탄의 국왕이 만든 행복지수에 의하면, 부탄, 오만, 인도 등이 상위를 차지하다가 또 다른 지표에 의하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상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흔히 지구상에서 대표적인 복지국가인 북구의 행복관을 유추해보면 생활 속에 마음의 여유, 자유 등 심리적인 요소와 맑은 햇빛, 깨끗한 공기, 쾌적한 삶의 환경을 포함해서 질 높은 삶의 수준을 고려한 경제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복지수 역시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다양한 행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박천익 | 2021-06-08 22:21

한국복지사이버대학교임승환 부총장  일제강점기독립운동, 6,25전쟁, 베트남 전쟁등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 그리고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과 나라사랑의 정신이 없었다면 이땅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어떻게 존재할수 있었겠습니까.  그분들의 값진희생 고귀한정신 헛되지 않도록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모두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각자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잔악한 일본제국자들에 항거하며 자주독립을 선언하던 날 우리국민들은 손에 손마다 태극기  를 높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제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그들은 인간의 행동은 사고가 지배한다는 정신분석 학자들의 말을 환기시켜가며 전국의 명산을 찾아 다니며 쇠말뚝을 수도없이 박았으며 심지어 애써지어 놓은 농사를 수탈해 갔고 이땅의 젊은 청년을 징용으로 그리고 아리따운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고가 제국주의 소모품 으로 희생시킴으로서 우리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씻지못할 한많은 마음의 쇠말뚝을 박아 이민족을 말살코자 했습니다.  호랑이 를 닮은 이나라 지도형상을 토끼 처럼 생겼다고 교과서에 수록하여 민족의 나약성을 세뇌 시켰는가 하면 급기야 독도를 자기네 땅 이라고 우기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고 있습니다.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가슴에 새긴다면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 피해의식 마음의 쇠말뚝을 뽑아 버립시다.  연이은 일본각료들의 망언에 제대로 응대하며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가집시다.  저들은 36년간 총칼로 우리를 지배했지만 우리는 천년세월동안 일본의 문화를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읍시다.  그리하여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서 온몸을 던져 목숨바쳐 구한 이 나라 우리가 제대로 지키고 잘 보전합시다.

전문가 | 한국복지사이버대학교 임승환부총장 | 2021-06-08 21:51

김미숙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백의개 씨는 남산 전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에서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냈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부모님은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고향을 지켜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농사보다는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사람 많은 도시에서 보란 듯이 일을 해서 성공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죽도록 일을 했지만 지독한 가난은 좀처럼 나아지지가 않았다. “농사도 앞으로는 비전이 있을 게다.”  도시로 떠나는 그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한 마디 던졌다. 농촌도 언젠가는 잘살 때가 있으니 우리가 앞장서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는 농촌이 잘살 길은 막막하다고 여겼고, 아버지의 그런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도시로 나온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파트를 짓는 데 필요한 새시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서른이 되지 않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운이 좋았던지 시작하자마자 번창했다. 여기저기에 아파트가 치솟을 때마다 일감이 밀려들었다. 전국 어디든지 일이 있으면 달려갔다. 일감이 늘어나자 끼니를 굶는 날이 많았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한 명이던 직원이 두세 명으로 늘어났고, 여섯 명이 되었다. 회사의 외형이 커지면서 수입도 몇 배로 많아졌다. 빈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대기업도 부럽지 않을 판이었다.  IMF를 지나면서 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할 때와 마찬가지로 줄어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일감이 줄어들고 그동안 작업해 놓았던 대금마저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벌어 놓았던 돈은 점점 줄어들고 여섯 며이 되는 직원들의 월급마저 걱정이 되었다. 월급날이 되어서 직원들 손에 봉투를 주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 어떻해요?”  러시아에서 일하러 온 직원이 한 말이었다. 빈손으로 집에 가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딸에게 볼 면목이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마으미 서늘해졌고 앞날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까마득해졌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몸과 마음이 지쳐 갔다.  그 즈음 몸에 이상이 생겼다. 가슴이 답답하고 먹은 음식물이 소화가 되지 않았다. 십이지장이 좁아져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위에 혹 하나가 떡하니 붙었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의사는 수술이 잘되었다고 했지만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다시 검사에 들어갔다. 내시경 시술이 잘못되어서 재수술을 하는 고통까지 견뎌야 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고향을 찾았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하늘과 땅은 여전히 그대로 였다. 언제 찾아도 편안한 안신처였다. 그는 15년 동안 일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밀렸던 직원들 월급과 퇴직금을 계산했다. 거래처의 결제를 마무리하니 수천만 원의 빚과 아픈 몸뚱이만 남았다.  고향에 돌아오니 한두 집 짓던 포도 농사는 마을 전체로 번져 대농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성공했다는 친구 몇 명도 회사를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다. 농사에 비전이 있다는 것을 친구들은 먼저 알아챘다. 그는 아버지가 짓던 포도 농장을 훑어보았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고향임을 그때서야 느꼈다. 땅을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지의 농장에는 풀이 무성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일에 유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에 들어서야 아버지의 말씀이 명언임을 깨달았다. 그 옛날 아버지가 고향을 지키면서 농사지으라고 하셨던 말씀을 그때는 왜 귀담아듣지 않았을까 통곡하며 후회했다. 이듬해 그는 포토밭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비 가림을 하기위해서였다. 병충해를 막고 포도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새시 설치하러 다니던 일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웠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새벽동이 트기 전부터 늦은 저녁 때까지 농장에서 살았다.  그렇게 시작했던 농사는 혼자서 하기 벅찰 정도로 늘었다. 세상에 어디 쉬운 게 있을까마는 그는 6년째 3,400평의 거봉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초보 농군에 지나지 않는다. 농사는 한 해 한 해 지을수록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다면 자신보다 먼저 시작한 농부에게 묻기도 하고 기술센터에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천국이 따로 없다.” 농사짓고 있는 고향의 땅이 아름다운 천국이며 휴식처라고 그는 말한다. 시골은 농번기가 되면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힘들지만 농사만큼 마음 편한 직업도 없단다. 까많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니다.

전문가 | 김미숙 | 2021-05-18 22:46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요즘 행복이란 말이 시대적 유행어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 행복세상, 행복마을, 행복학교, 행복문학, 행복동아리, 행복장터, 행복여행, 행복노래모임 등 무슨 일이든 행복과 관련지어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행복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무슨 슬로건이나 인사말에도 행복이란 단어는 애용된다. 행복한 사회생활을 위하여“학생이 행복한 대학”인사말도“행복하십니까?”로 시작하여“행복하십시오?”라고 끝마무리를 한다. 행복이란 단어가 요즘처럼 약방의 감초같이 흔하게 쓰여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불행한 사람이 많아져서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갈급해서일까? 현대인들이 이제야 행복의 중요성을 깨달아서일까? 어쩌면 요즘 우리사회는“행복 갈망증”에 걸린 사람이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세상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가슴을 덜컹 내려 앉히는 끔찍한 사건들이 세상을 행복의 세계에서 와장창 멀어지게 하는 세상이다. 인간윤리를 송두리채 무너뜨리는 가족 살인사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는 청년실업자들이 탄식, 소통의 대상을 찾지 못해 고독에 절망하는 독거노인들의 허탈 등이 모두 세상을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다. 어쩌면 요즘 코로나19로 시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행복이라는 말이 꿈나라의 얘기처럼 아득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더욱 절박하게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현대인들이 행복이라는 말을 생활용어로 크로즈 업 시키는 이유를 대체로 두 가지 사실에서 찾고자 한다.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삶의 궁극적 가치가 행복에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행복한 삶의 실현이 모든 인류의 지상과제임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얘기했다. 문화의 세기라 함은 문화적인 요소가 삶의 중요 비중을 차지하는 세기임을 말한다. 문화란 그것을 향유 함으로써 인간의 궁극목표인 행복감을 증대시킨다. 누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라고 쉽게 대답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실현되는 것일까? 행복의 파랑새 동화이야기는 주인공이 행복을 찾으러 집을 나갔다가 깊은 산과 들, 어디를 돌아다녀도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수가 없어,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안 새장에 있던 새가 바로 행복의 파랑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새장의 문을 여는 순간 파랑새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은 그 만큼 자신의 주위 가까이에 있는 것임을 일깨우는 얘기이기도 하고, 또한 행복의 실체는 그것을 지각으로 알려고 하는 순간 우리에게서 멀리 달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일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행복은 글자 그대로 새겨보면 다행할‘幸’과 복‘福’자로 만들어진 단어로“다행한 복”을 의미한다. 즉 다분히 인간이“자의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어떤 외부적이고 운명적인 요소에 의하여 잘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예부터 행복은 주관적이며, 또한 추상적인 인간의 마음상태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나, 철학, 신학과 같은 인문과학과 같은 주관적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분야에서나 취급할 문제이지 결코 실증적 검증을 통해서 현실의 상황을 설명하는 경험과학이 다룰 분야는 아니라고 보았다. 즉 행복은 결코 수량적으로 그 크기를 표시할 수 있는 문제이거나 계량적으로 측정하여 실증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음으로 체득하는 정신적인 문제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물량적 크기로 상태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경제학이란 학문에서는 아예 행복의 문제를 연구의 범주에 들여놓는 것을 배척해 왔다.  그러나 과연 행복은 경제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전통주의 가치관이 현대인들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를 얻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풍요한 물질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장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다. 일찍이 근대경제학을 창건한 캠브리지대학의 성자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1842∼1924)은“인간은 생존을 위해 두 가지 궁극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종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의 문제라고 했다. 종교의 문제는 믿는 자에게만 중요하나 물질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생존을 위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행복과 유사한 개념, 즉, 복지(welfare, well-being) 또는 효용(utility)이라는 개념을 갖고 인간의 궁극적 과제인 행복을 간접적으로나마 계측하고 싶어 했다. 경제학자들은 일단 잘 사는 것이 간접적이나마 행복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자나 깨나 인간이 잘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사고 못 사는 것을 화폐의 크기로 나타내어 그 크기를 갖고 복지수준을 측정해서 행복의 파이를 알고 싶어 했다. 복지와 행복이 분명하게 동일한 개념은 아님에도 말이다. 경제학은 행복처럼 아예 골치 아픈 주관적인 만족도, 효용 등의 문제는 집어치우고 객관적인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국민후생(national welfare) 또는 경제복지(economic welfare)지표의 크기로 복지수준을 측정하여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한 국민총행복의 크기를 측정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경제학이 근대적인 분석도구로 과학화되기 이전, 18세기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1748∼ 1832)은 행복의 크기를 계량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을 중시여기면서 국민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생의 목적을 쾌락에 있다고 보고 쾌락은 곧 행복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그 쾌락이 개인주의적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여러 사람들에게 연결되는 공중적 쾌락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벤담은 행복을 결정하는 쾌락과 그 반대인 고통을 비교하여 순 행복의 크기를 측정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절망하여 그의 저서들을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벤담에 이어 고전경제학자의 마지막 보루로 일컬어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1873)에게까지 이러한 공리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벤담의 사상은 전수되었으나, 복지의 문제를 경제학의 영역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이른바 복지경제학의 창시자 아더 세실 피구(Ather Cecil Pigou.1877∼1959)였다. 그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대가였으며 공리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복지경제학(The Economics of Welfare,1920)>을 저술하여 국민의 복지를 증가시키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러나 소위 국민분배분(국민소득)의 크기의 변화로 경제적 복지를 측정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당시의 많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로써 현대경제학은 현실적으로 행복을 대신할 수 있는 복지측정의 문제에서 크나큰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현대경제학은 효용측정 문제를 두고 기수적 효용이론과 서수적 효용이론의 방법론적 논쟁만 남긴 채 실증주의의 힘에 밀려, 행복의 경제적 접근 문제를 내팽개친 채 근 100년 동안 잠자고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전문가 | 대구대학교 명예교수_박천익 | 2021-05-18 22:43

김미경  조잘 조잘댄다. 산 속의 시냇물도 봄바람과 한창 수다중이다. 산허리에는 울긋불긋 진달래가 벌써 찾아와 앉았다. 노란 개나리도 빠질세라 양지바른 산비탈에 얼른 자리 잡았다. 매서운 겨울을 견뎌내고 다들 제자리에 용케도 찾아왔다.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온 산자락이다. 오늘따라 그가 유난히 빛난다. 봄이라 그도 설레나보다. 맑은 하늘에 새털구름이 꼬리를 살랑댄다. 시냇가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도 내 옆으로 엉덩이를 비집는다. 수더분한 빛의 그는 내 눈에만 보인다. 자상한 아버지 같기도, 머리 조아리며 수학문제 같이 풀던 오빠 같기도, 신혼 초 다정하게 손잡아주던 남편 같기도 하다. 오늘 마침 잘 만났다며 입에 물었던 재갈을 푼다.  그저 투덜거린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속사포 같이 쏴 붙이다가, 산이 텅텅 울리도록 웃는다. 사람들이 내 맘 같지 않더라 하소연을 해댄다. 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순간 잠에서 막 깬 나뭇잎들이 파르르 떤다. 맑은 시냇물 속 버들치도 시끄럽다며 꼬물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에 꽁꽁 얼어붙었던 울분을 토해낸다. 산 속에는 아무도 없다. 소리 없이 내 옆에 내려앉은 빛줄기 외에는.  지난 겨우내 꼭꼭 걸어 잠갔던 자물쇠가 빗장을 열고 풀려나간다. 가벼워진 마음은 목소리를 한층 더 높인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맑은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마음의 독이 쓰린가보다. 그의 고개가 내려갈수록 그림자도 깊어진다. 진달래가 낯을 붉힌다. 산다는 것이 어디 너만 힘든 줄 아냐며 산새들까지 재잘재잘 나무란다. 태양도 순간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내 얘기만 너무 지껄였나싶어 이번엔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지난날의 사랑을 들려준다. 그에게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여기저기 벌레 먹고 할퀴었던 자국들이 나무둥치 위에 선연하다. 군데군데 옹이도 박혀있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그를 아프게 했단다. 깊은 산 속 나무들도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차가운 흙을 꽉 움켜쥐고 버틴 거란다. 저 진달래도 빨간 꽃물을 퍼 올리기 위해 얼어붙은 땅을 깨어가며 악착같이 핀 거란다. 너만 아픈 게 아니란다. 아픈 것이 삶이란다.  막 올라오던 새싹도 움찔거린다. 개나리가 한 마디 거든다. 따뜻한 봄날이란다. 왜 아직 지나간 겨울에 머물러 떨고 있냐며 얼굴이 노랗게 살랑거린다. 딱딱한 돌 틈을 헤집고 올라온 민들레도 이제야 알겠냐는 듯 고개를 까닥거린다. 가는 겨울은 미련 없이 놓아주어야 비로소 봄이 오는 거란다. 막 깨어난 싹들처럼 기지개를 켜보란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왔기에 봄이 더 따뜻한 거란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흘린 마음의 파장으로 군데군데 그늘이 져있다. 나의 투정이 산을 괴롭히고 있는 줄 그제야 알아차린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아직은 짧은 봄 햇살이 산그늘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 아담한 호수가 보인다. 잔잔한 호수에 얼비친 산이 연초록빛이다. 아직은 파르스름한 수면 위로 나의 모습이 어린다. 불평으로 가득 차있는 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순간 부끄러워 눈을 감는다. 그는 그림자처럼 뒤만 따라오고 있다. 고개 숙인 내가 측은해 보였는가보다. 호숫가에 핀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 안겨 준다. 꽃술싸움을 하잔다. 내가 먼저 뽑으란다. 아무거나 하나 뽑았다. 그도 하나 뽑는다. 번번이 내가 이긴다. 의아해서 한용운의‘꽃 싸움’시를 찾아 읽었다.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 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 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 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살펴보니 오른손에는 붉은 꽃수염이고 왼손은 흰 꽃수염이다. 그는 일부러 나에게 져주고 있었다. 단지 기뻐하는 나를 위해서. 사랑은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기쁘게 해주는 것임을 진달래 꽃 싸움에서 배운다.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산길 푸른 솔가지에 그가 등불 하나를 매달아준다. 자기가 없더라도 더 이상 길을 잃지 말라고. 산길 내려오는 내내 마음에 등불 하나가 켜졌다. 산 아래 도시의 가로등도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꽃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흔들렸기에 더 깊은 땅 속에 뿌리박고 피어난 것이리라. 비탈진 곳에 핀 풀꽃들도 언 땅을 헤집고 나와야만 봄을 알릴 수 있다. 그래, 부딪히고 넘어지다 보면 언젠가는 더 큰 꽃으로 피어나겠지. 아팠던 만큼 더 단단한 열매가 열리리라. 여기저기서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산 밑 도심까지 향긋하게 퍼져나간다.  혹독한 겨울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하지만 길 것만 같던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날 또한 반드시 찾아오지 않았던가. 상처 받고 주저앉은 하루하루가 거름이 되어 오늘이란 숲에 또 이르렀을 터이다. 숲은 산짐승이나 사람들이 이리저리 밟고 지나가도 결코 노여워하지 않는다. 그 발자국까지 덮어주는 게 숲이다. 나의 숲도 그렇게 깊어 가야할 일이겠다. 온종일 조잘대던 숲 속의 대화도 사방 고요해졌다. 모두가 까만 밤 속으로 잠들 채비를 서두른다.  그가 떠나려한다. 그는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또 다른 빛으로 머물 것이다. 그의 눈빛 뒤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온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어느덧 그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산 그림자도 내려와 도시를 끌어안는다.

전문가 | 김미경 | 2021-04-26 20:27

국민연금공단 경산청도지사지역가입팀장 이  상  헌  호모 헌드레드라는 말이 있다. UN 세계인구고령화보고서에서 10년 전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가까운 시일내에 100세 장수 시대가 보편화 될 것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호모 헌드레드를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기존 마라톤 거리보다 50% 이상 더 뛰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늘어난 평균수명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오늘 민원 전화를 받았다. 백천동에 살고 있는 연금수급자셨다. 그는 국민연금을 10년 전부터 받고 있는데, 대뜸 연금을 받지 않는 방법을 물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국민연금을 더 가입하고 더 많은 연금을 받기를 원했다. 매월 연금을 받아보니 좀 더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세가 70세이라 더 이상 국민연금을 가입할 수 없음을 설명드리고, 생활비가 부족한 경우 노인일자리를 활용해 보시라고 권하고 상담을 마쳤다. 국민연금제도 시행 초기에는 연금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 분이 많았는데, 요즘은 연금수급자들까지 연금을 추가 납부를 원하고 있으니 국민연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바뀌었다.  2017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3명 중 1명은 노후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관심 분야도 건강, 소득, 여가, 대인관계 순으로 나타났다. 노후준비 중 소득 관련은 국민연금을 수급은 기본으로 하고 나머지는 다른 상품을 찾아보아야 한다. 나는 노후준비 중에서 건강이나 소득만큼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라 생각한다.  가끔 가까운 가족을 쉽게 대하는 것을 본다. 타인보다 더 함부로 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 분은 가족관계도 친구와 같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인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배려하는 만큼 배려 받는다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배우자나 자녀만큼 고귀한 인연은 없다.  부부는 남남으로 만나 가정을 이루어 한솥밥을 먹는 무촌이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가 아닌가 싶다. 배우자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쉽사리 외면하거나 인연의 끈을 놓을 수도 없다. 때로는 큰 감사로 회환으로 얽히고 설킨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배우자와 자식들이 독립한 빈둥지에서 40여년 동안 함께해야 한다. 그러므로, 긴 세월을 부부가 원만하게 함께하려면 부부관계의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얼마전 2014년 개봉하여 480만의 관객수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님아 그강을 건너지마오”를 다시 보았다. 100세 가까운 노부부의 일상을 그린 영화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 그들은 76년 동안이나 부부생활을 했다. 영화를 보면서 부부란 어떤 관계인가 라는 라는 물음에 해답을 느낄 정도였다.   강한 이벤트에 감동하기 보다는 일상에서 습관처럼 배우자에게 배려하는 장면을 보고 가진 것 없어도 부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함께 마당의 낙엽을 쓸다가 할머니가 힘들다고하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쉬라고 하면서. 노란 국화꽃을 따서 할머니의  양쪽귀에 꽂아주고  할머니도“좋소야 예쁘네요”“인물이 훤하네요”등 감탄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백발 노인들이지만 낙엽이 떨어지면 서로에게 낙엽을 던지고 눈이오면 눈을 던지며 빗소리에 지난 추억을 이야기 하는 장면은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 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밥이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는다. 맛이 있으면 많이 먹고  맛이 없으면 조금 먹으면 되지 그것 가지고 맛이 있다 없다 라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주 작지만 상대방을  배려 하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오랜동안 부부애를 유지 할 수 있었음을 느낄수 있었다.     금술좋은 부부의 공통점은 상호간의 배려이다. 유교식 사고로 일방의 배우자가 명령이나 강압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가까이 있는 배우자에 대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배우자가 최고의 노후준비임을 알려주고 싶다.

전문가 | 국민연금공단 경산청도지사 지역가입팀장_이상헌 | 2021-04-07 23:12

김미숙ㆍ「수필문학 신인」등단ㆍ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영남수필문학회 경산문협 회원ㆍ대통령배 독서경진대회 대상 수상ㆍ원종린 문학상 수상ㆍ수필집『배꽃 피고 지고』2011ㆍ수필집『나는 농부다』2014ㆍ2014 대구문화재단 문화예술진흥회 창작지원금 수혜  경산에 정착한 지 사 년이 되었다. 조금씩 손님이 찾아들었고, 농민들도 쉼터처럼 머물다 갔다. 사무실 일과 병행하다 보니 상주에 있는 배 농사도 그만두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농사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은 내가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대가가 따라왔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았다. 농사는 내가 아무리 잘 지었다고생각해도 하루 아침에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겪었다.  몇 년 전이었다. 수확을 며칠 앞둔 배밭이 몰아친 태풍으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에 대놓고 원망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 알았다. 농사는 하늘과 마주 보며 동업하는 것이라고.  어느 해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해는 배 값이 하늘을 치솟았다. 가을이 되어 배를 따러 밭 입구에 도착했는데 누렇게 매달려 있어야 할 배가 보이지 않았다. 꿈인가 싶어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쭉정이만 남은 빈 봉지가 나무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필요해서 가져갔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해 가을이 끝날 때까지 속앓이를 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앞집에 한 부부가 칠천 평의 농사를 지었다. 복숭아와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저렇게 열심히 하더니 이제는 살 만하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남자는 매일 아침 우리 사무실에 와서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일터로 나갔다. 그 시간은 길어야 십 분, 어떤 때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다가왔다. 싸락눈이 내리던 삼월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사무실에 출근을 하니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전날 그는 통장 모임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응급실로 가던 중 숨을 거두었다.  한동안 여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여자가 사무실로 얼굴을 내밀었다. 말문이 트이자 하루가 멀다 하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말을 했다. 속울음을 토하는 날도 있었고 말문을 닫아서 분위기가 가라앉는 날도 있었다. 농사지으며 남편에게 못해 준 것만 생각난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내게 몇 날 며칠 아끼던 말을 끄집어냈다. 올봄부터 거봉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봉밭 옆에 붙어 있는 복숭아 농사까지는 힘들다며 나보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다. 나는 몇 년 전 봄날이 떠올랐다.  경산에 처음 사무실을 냈을 때였다. 꽃망울을 내밀며 복사꽃이 피는 모습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밭이 어디 있는지 품종이 뭔지도 모르면서 복숭아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다. 남편한테 한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서 결정을 하고 나니 낮에 여자와 주고받았던 말이 걱정이 되었다. “여보! 내가 일을 저질렀어요.’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미 엎질러진 물 어떻게 하겠냐며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해 봄, 여자의 포도밭에 퇴비를 뿌려 주고 물 시설 관리도 해 주면서 복숭아밭에도 거름을 넣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남편이 전지를 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모아 둔 가지는 분쇄기에 넣어서 퇴비로 사용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추운지도 모르고 일을 했다. 꽃이 필 때면 적화를 하고 열매가 맺힐 때는 적과도 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수확을 할 때는 깜짝 놀랐다. 천도복숭아가 알이 굵고 빛깔이 좋아서 복숭아공동선별회에서 농사를 잘 지었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날부터 여자의 행동이 이상했다. 여자는 내가 말을 걸어도 받아 주지 않았고, 옆에 지나가도 모른 체하고 걸어갔다. 내가 농사지은 복숭아가 목돈이 되어 통장으로 돌아오면서 여자는 더욱 멀어졌다. 복숭아 농사는 잘되었는데 그녀의 포도 농사는 엉망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여자는 이듬해 봄, 한마디 말도 없이 복숭아밭을 되찾아갔다.  복숭아 농사를 짓던 나는 주인인 그녀에게 밭을 뺏기고 나서 허한 감정이 생겼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고 다시 봄이 왔다. 복사꽃은 피고 지는데 내 마음은 지난봄 복숭아 농사에 매달려 일하던 게 그리워졌다. 전지를 하고 연분홍 꽃이 피고 열매를 수확하면서 즐거웠던 시간이 생각났다.  남편에게 졸랐다. 복숭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사 달라고 떼를 썼다. 남편은 배밭만 해도 힘이 드는데 복숭아 농사까지 지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더 부지런하게 일하겠다고 남편을 꼬드겼다.  그해 겨울, 문서 운이 있었던지 두 필지로 된 복숭아밭 천 평을 구입했고, 이듬해에 다시 오백 평을 더 사들였다. 남편은 내 이름으로 그 땅을 농지 원부에 올렸다. 그렇게 원하던 복숭아밭을 사고 나니 꽃 피는 봄과, 열매따는 여름, 붉은 이파리의 단풍드는 가을,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겨울의 사계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드디어 나는 배 농사와 복숭 농사 삼천 평 가까이 짓는 농부가 되었다.  작년에 복숭아나무 사이로 고구마 천이백 뿌리를 심었다. 땅이 기름져서 고구마 줄기가 옆으로 뻗어 나갔다. 줄기가 뻗지 못하게 뒤집었다. 한여름 땡볕에 며칠을 그렇게 하고 나니 숨이 찼다. 며칠 동안 고구마를 캤다. 그러면서 고추도 팔백 포기 심어서 거름을 주고 키웠다. 처음 고추 딸 때는 재미가 났다. 두 번 세 번을 따고 나면 허리가 휘청거렸다. 옥수수도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심었다. 검은콩도 오백 평 심었고, 땅콩 들깨와 참깨도 심었다.  봄과 여름 가을은 농사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남들 흔하게 가는 여름휴가도 반납한 채 불볕더위와 싸우면서 온몸이 땀범벅으로 지내는 날이 허다했다.

전문가 | 김미숙 | 2021-04-07 23:07

김미숙ㆍ「수필문학 신인」등단ㆍ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영남수필문학회 경산문협 회원ㆍ대통령배 독서경진대회 대상 수상ㆍ원종린 문학상 수상ㆍ수필집『배꽃 피고 지고』2011ㆍ수필집『나는 농부다』2014ㆍ2014 대구문화재단 문화예술진흥회 창작지원금 수혜    남편이 이십여 년 가까이 일하던 곳에서 사표를 냈다. 그 후 3년은 결혼 생활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매달 들어오던 일정 금액의 돈은 끊어졌고, 다달이 써야 할 돈은 여지없이 나갔다. 나는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남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마음 속에는 농사에 대한 꿈이 있었다.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서 전공했던 것도 그의 마음에는 온통 농업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사과 농사와 벼농사를 지었기에 농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남편은 고향에서 수십만 평의 농사를 지으며 고나광 노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였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깨졌다. 운문댐이 들어서면서 고향은 수몰 지역으로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남편이 취직을 했다. 농업과 관련된 직장에 들어갔다. 종묘와 농약기게,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다루는 회사였다. 새벽에 일터로 나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왔다. 그렇게 일에 빠져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농사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의 꿈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남편이 배밭을 샀다며 잠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집 안에 갇혀 있던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는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차를 타로 한참을 지나서 도착한 곳은 상주에 있는 배밭이었다. 나이테 없는 배나무가 병사의 행렬처럼 줄 서 있었다. 아직 새순도 올라오지 않은 한 살배기 배나무는 꽃샘추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듬해부터 주말과 휴일이면 농장으로 향했다. 큰아이는 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녔지만 작은아이는 걷는 게 서툴렀다.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밭에만 오면 기어 다녔다. 첫해 배 농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해가 갈수록 요령이 생겼다. 대구에서 상주까지는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오가는 시간을 빼면 농사짓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농사를 짓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던 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틈만 나면 밭으로 향했다.  배밭을 자주 들락거리던 해는 수확이 좋았다. 반면 회사 일이 많아 관심을 조금만 덜 가져도 표가 났다. 어느 해는 가물어서 배가 제대로 크지 못할 때도 있었고, 회사 일로 바쁠 때는 수확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린 적도 있었다. 몇 주만 걸러 가도 풀이 내 무릎까지 올라와 초원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삼 년 동안 남편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농업기술원에서 자료를 받아 배밭에서 실험하고 연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쪼들리는 생활은 점점 가라앉았다. 아이들 학원비며 생활비 모든 것을 줄여야 했다. 그렇다고 가난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차례 소나기처럼 지나가리라 여겼다.  어느 해 연말이었다. 남편이 아이들과 나에게 봉투 하나씩 내밀었다. 그 속에는 만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지금 돈이 없어도 기죽지 말고 살라고 넣어준 것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거금이 생긴 나는 너무 좋았다.  쉬지않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연구한지 4년이 되어 갈 즈음이었다. 남편이 드디어 사과 농사에 필요한 특허 하나를 냈다. 사과나무에 이끼 낀 것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무에 낀 이끼는 사과 열매에 영향을 끼쳤다. 사과가 덜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끼가 끼어서 시퍼렇게 보였던 것이다. 특허품을 치면 사과의 색깔이 선명하고 병충해도 덜 입었다. 일년이 지나고 이삼년이 지나자 전국의 능금조합과 농약방을 통해서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우린 사무실이 필요했다. 경산에 있는 도로 옆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냈다. 농사에 필요한 퇴비와 비료, 영양제와 칼슘제를 전시해 놓은 수준이었다. 거기에는 농약 컨설팅도 해 준다는 문구를 간판에 새겨 넣었다. 남편은 전국으로 홍보와 광고 판매를 하러 다녔고, 나는 사무실에서 제품을 전시하고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주말과 휴일에는 여전히 과수원을 드나들었다.

전문가 | 김미숙 | 2021-03-23 22:58

정 훈 탁경산소방서장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일이 작을 때 처리하지 않다가 결국 큰 힘을 들이게 됨을 말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화재는 초기 진압과 신속한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은 불은 소화기로 끄기도 대피하기도 쉽다. 하지만, 화세가 가장 강한 최성기에는 소방서의 모든 소방차량이 출동하여도 진압하기가 어렵다.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주택에서는 특히 화재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는 초기에 빠르게 반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3년 동안 발생한 화재 통계에서도 알 수 있다. 전체 화재 중 주택화재는 28% 정도지만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화재 사망자 중 50%나 차지했다.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초기에 신속히 대피하고 진압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택용 소방시설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주택용 소방시설은 무엇일까. 주택용 소방시설은 화재경보기와 소화기를 말한다. 화재경보기는 열, 연기 또는 불꽃을 감지하여 내장된 음향 장치로 위험을 알리는 장치다. 경보음이 크게 울려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으며, 주변에서 소리를 듣고 화재 신고도 가능하다. 소화기는 압력에 따라 방사하는 기구로 화재 초기 진압에 효과적이다.  주택용 화재경보기 설치를 먼저 의무화한 해외의 사례를 보면, 화재 사망자가 현저하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77년 관련 규정을 마련하여, 2004년까지 96%의 주택에 화재경보기를 보급해 사망자가 46%나 감소하였다. 일본의 경우 주택용 화재경보기에 대한 2004년 기준을 마련하고, 2015년 81%의 주택에 화재경보기를 설치해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12% 감소하였다.  주택용 소방시설은 인터넷, 대형마트 등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소화기는 세대별, 층별 1개 이상 설치하면 되고, 화재경보기는 구획된 방마다 설치하면 된다. 설치도 어렵지 않다. 감지기는 천장에 나사만 박으면 간단하게 설치할 수 있다.  소화기는 제조 일자 기준 사용 기한은 10년이며, 압력 게이지가 녹색을 향하고 있다면 정상이다. 화재경보기는 배터리 수명이 약 10년이므로 주기적으로 배터리 점검이 필요하며, 오작동으로 경보음이 울릴 경우 초기화 버튼을 누르면 경보음이 꺼진다.  신체기능이 떨어져 대피가 어려운 고령 가구나 혼자 사는 1인 가구의 경우에는 화재를 인식하는 것이 늦을 수 있다. 이는 대피가 늦어지는 주된 원인이 된다.  화재는 예고 없이 발생한다. 화재를 대비하기 위한 조그만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안전하고 건강한 가정을 위해 주택용 소방시설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당부한다.

전문가 | 경산소방서 서장 정훈탁 | 2021-02-23 21:39

김미숙· 『수필문학 신인상』등단·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영남수필문학회 경산문협 회원· 대통령배 독서경진대회 대상 수상· 원종린 문학상 수상· 수필집『배꽃 피고 지고』2011· 수필집『나는 농부다』2014· 2014 대구문화재단 문화예술진흥회창작지원금 수혜  내가 농부가 될 줄은 몰랐다. 꿈에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 농사를 짓고 산다.  내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다. 눈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산이요 골짜기였다. 넛재와 한티재를 숨 가쁘게 넘으면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가 나타났다. 그 경계의 철둑을 건너면 강원도 땅이다. 철둑을 건너자마자 '하늘 아래 첫 동네' 라는 표지가 서 있었다.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고 겨울이면 영하 이십 도가 넘어가는 그곳은 시베리아였다. 탄광촌은 바람마저 검은빛이었다. 온통 검은빛 탄가루로 세상을 치장을 해 놓았던 곳에서 나는 열아홉까지 살았다.  언덕배기에 있던 사택은 천여 가구가 넘게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돌구지'라는 마을이었다. 돌산을 깎고 터를 잡아서 지은 집들은 모양도, 크기도, 거리도 엇비슷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석탄 산업이 잘나가던 때였다. 길거리에 다니는 개도 만원짜리를 입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돈을 쫒아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연예인도 길거리에서 종종 만날 수 있을 정도로 탄광촌은 번창했다.  아버지는 광부였다. 생명을 담보로 땅속 깊은 곳에 들어가 석탄을 캐내는 직업이었다. 낭만적인 기질을 타고났지만 그 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척박한 땅에서 일을 하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사각 도시락을 들고 일터로 나가는 모습과 잠자는 모습이 전부였다. 모두가 아버지는 탄광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밥을 같이 먹었다거나 여행을 떠난 기억이 없다. 대화를 나눈다든지 야단맞았던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버지는 오로지 일에 묻혀 살았다. 일주일은 아침에 일하러 나가셨고, 다음 한 주일은 점심을 드시고 나가셨고, 다음 주는 밤 열시가 넘어서야 일터로 떠나셨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탓에 보자기에 싼 책을 어깨에 메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매사에 기운 없는 생활이다 보니 초등학교의 기억은 안개에 싸인 채 어슴푸레할 뿐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내성적이었던 나의 관심사는 책 읽는 것과 글을 긁적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맨 앞자리에 앉았던 작은 키는 중학생이 되면서 쑥쑥 자라 일 년에 십 센티씩 자랐다. 잠자고 일어날 때마다 컸다.  중학생이 된 나는 하얀 칼라에 까만색 교복을 입었다. 낙엽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도 까르륵 웃는 나이가 되어서야 학교생활이 즐거워졌다. 모든게 부족했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것도 중학교 삼학년 그 즈음이었다.  여고생이 되어 등굣길은 무척 힘들었다.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등ㆍ하교를 해야 했기 때무이었다. 집과 학교까지는 먼 거리였다. 우리 집은 언덕배기의 사택이었기에 버스타는 곳까지 매일 뛰어야 했다. 십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타고도 콩나물시루 안에서 한 시간은 옴짝달짝도 하지 못한 채 시달려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학교까지 이십분은 걸어서 언덕으로 올라가야 했다. 여고 삼 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허약 체질이었던 체력이 좋아졌고 걷는 데도 이력이 났다.  사택에 딸린 도로 옆에서 스무 평 남짓 되는 텃밭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그 밭에 온갖 야채를 심었다. 상추며 쑥갓, 깻잎과 우엉, 호박과 감자를 심었다. 밭 가장자리에는 옥수수를 심어서 여름이 익어 갈 무렵 우리는 옥수수를 물고 다녔다. 우리 남매의 도시락 반찬과 아버지의 찬거리는 모두 그곳에서 수확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름날 저녁에는 가마솥에 감자와 옥수수를 삶았다. 우리 다섯 남매는 두레상에 모여 앉아 삶은 옥수수와 감자를 먹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으로도 행복했다. 지금은 모든게 풍족하지만 그때보다 더 행복하거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끼니를 때우던 그때가 아득하게 그립다.

전문가 | 김미숙 | 2021-02-23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