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수필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 (사) 대구문화재지킴이회 회원,- (사)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사회복지법인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대구문화기행단 운영- 녹조근정훈장 수훈 임인년 정월 대보름날이다. 도시 생활이 갑갑하여 고향에 머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자 고향에 친구들과 교유하는 시간이 잦아지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 늘어나는 듯하다. 옛날 같으면 정월 대보름날이 명절이다. 오곡 잡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로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호도나 강밥으로 부름을 깨기도 하였다. 주로 혼자 지내고 있는 터라 인근 동에 사는 친구가 낮에 찰밥 먹고 가라 하였다. 고맙고 기쁜 마음으로 친구댁에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친구는 자기 조상 한분을 소개하면서 같은 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지재(仁智齋)로 안내하였다. 친구 최용석 군은 영천최씨 원당 문중 대표라 문중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인지재는 경북 경산시 자인면 원당길14길 19(원당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 선생이 강학소를 설립한 후 의병을 일으킨 장소이다. 처음에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부르다가 그 이름을 인지재로 바꾸었다. 최문병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8세기 초에는 서당으로 활용하였으며 선생을 추모하던 용계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어 최문병 선생의 신주를 이곳 인지재에 모셔 추모하였다. 용계서원은 1986년에 복원되어 선생의 신주를 다시 모셔갔다. 인지재는 1,643㎡의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본당과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구조는 우측에 대청마루 한 칸과 좌측에 2칸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전면 반 칸은 툇간을 두었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건물이지만 방문을 열면 방과 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공간의 구성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조선 중기 지방 강학소(講學所)의 건축 구성을 가진 소박한 건물이나 의병장 최문병 선생이 수학하다가 임진왜란 때 자인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장소라는 점에서 경상북도 의병사(義兵史)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2019년‘경산시향토문화유산보호및관리에관한조례에 의거 인지재(仁智齋)를 첫 번째로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최문병 선생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이며 부친은 최식(崔湜)이고 모친은 경산전씨(慶山全氏)이다. 선생은 1557, 4, 20 지금의 경산시 자인면 울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산 자인에 살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후학 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장 과정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부모에게 효도하는 본을 보이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천장산(千丈山)에서 자인과 인근의 왜적을 격퇴하였으며, 자인의 관곡(官穀)을 무사히 지켜내는 등 자인지역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탁월한 예지력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화살과 창 등을 미리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는 김응명 선생의 부친인 김우련 선생과 힘을 합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지방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최문병 선생은 장신에 건장한 신체를 가졌으며 그의 조상은 주로 무인이 많았다고 하니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듯하다.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 의병장의 지원 요청에 따라 그와 합세하여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하였다. 이어 다시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장과 합세하여 하양, 와촌, 영천 등지의 적을 물리친 공으로 1593년에는 동지중추부사 박진(朴晋)의 상주로 인하여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윤에 추증되었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자인은 995년 행정구역이 고려국 영동도 장산군 자인현이었다. 그 후 1018년(고려 현종 9) 경주부의 속현이 되어 자인은 경주까지 거리가 멀고 험한 길이었으며 경주부의 관원들로부터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재산상의 피해와 극심한 고초를 당한 지역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피해를 벗어나는 길은 자인이 복현되어 현감이 파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최문병 선생이 주동이 되어 1584. 4. 13. 자인 유향소 좌수 안량, 별감 권응형, 유사 임세진, 장병 이응기 등과 함께 자인현 복현 운동을 시작하였다. 최문병 선생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자인의 품관이었다. 자인 우시장에서 소를 구매하고 현민을 규합하여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복현 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의한 후 임금에게 올릴 상소문을 경상도 관찰사 류성룡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거사는 경주부 관원들이 알게 되어 1584. 5. 1. 최문병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경주부로 압송되어 심한 공초(供招)를 당하였다. 공초의 죄목은 관부(官府) 사칭, 뇌물 갹출, 경주부 배반, 농우 도살 등으로 엄한 처벌을 받았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기세를 바탕으로 1599년(선조 32) 제2차 자인현 복현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나이 42세였고 제1차 복현 운동을 전개한 지 15년 만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은 경주부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자인에 주둔한 군인 전원을 차출해 가는 바람에 자인은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는 자인 주민들을 착취하다가 정작 위기 시에는 자인을 버린 셈이 되었다. 감목(監牧) 신분인 최문병 선생은 1599년 봄 최두성, 이기업 등과 자인을 대구부에 합속시키려고 경상도 관찰사 한준겸에게 소장을 올렸다. 이에 경주부에서는 1599. 7. 14. 반박 소장을 올렸는데 관찰사는 경주부의 손을 들어 주어 최문병 선생의 생전에 그 뜻을 이루지 하였다. 그 후 1633년에 백렴, 방희국 등이 각각 상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1637년 김응명, 이시험, 이창후, 백현룡 등이 다시 복현 상소를 올려 인조 임금으로부터 윤허를 받고 1637년 6월에 초대 현감 임선백이 파견되었다. 이처럼 최문병 선생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장으로 약 1,000여 명이라는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로가 지대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주부 속현된 자인현을 두 차례에 걸쳐 복현 운동을 전개하다가 심한 공초로 인하여 1599. 8. 4.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자행되어 온 경주부의 갖은 행패로부터 자인 현민들을 구하려는 애향심의 발로에서 시작된 복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좌절감과 극심한 공초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듯하여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앞을 가린다. 최문병의병장안장 최문병 선생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말안장이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 경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말안장은 최문병의병장안장(崔文炳義兵將鞍裝)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는데 길이 56㎝, 너비 39㎝, 높이 34㎝이고 안장은 등자(鐙子), 띠, 고들개 등 부속 장구를 모두 갖추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앞뒤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가는 골제(骨製)로 복륜(覆輪)을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켜 놓았다. 앞뒤 안교의 바깥쪽에는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골편(骨片)으로 꽃모양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의 아래쪽은 둥글려서 파내고 그 테두리에도 골편을 붙였다.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가로 105㎝, 세로 26㎝의 크기이다. 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둥근 모양이다. 그리고 배 띠와 고들개는 마포(麻布)와 면직(綿織)으로 만들었다. 이 안장 금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마구(馬具)로서, 괴목제(槐木製)의 책상과 저지(楮紙)로 만든 지함(紙函)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 성재 선생 사후 약 50년 후인 1646년에 그의 후손 최영기가 선생의 활약 사항과 글을 묶은 「省齋先生實記(성재선생실기)」 상, 하 두 권을 편찬하여 전해지고 있다. 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한 시기는 자인현(慈仁縣)이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원당리로 이건한 후 관아에 우환이 잦아들자 북사리로 옮겨간 이후이다. 인지재를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그때 이곳에 인지재가 세워진 것이다. 지금의 인지재(仁智齋) 자리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다. 그러니 인지재 부지는 자인현청(慈仁縣廳)이 소재하였던 경산의 중요 기록유산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를 숙의(熟議)하였으며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로 중요한 유적이므로 더욱 다듬고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그런데 지금의 인지재(仁智齋)는 부서진 기와지붕에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을 씌워 놓았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균형을 잃은 듯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뜻하지 않게 예지력이 뛰어나고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크게 공을 세운 충신이요,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다가 고초를 겪은 선각자 한 분을 만난 일은 분명 행운이었지만 너무나 일찍 세상을 하직한 점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또 그분을 기리는 전각이 바라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허술한 점이 후예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마음이다. 경산시 지정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에 씁쓸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긴다. (2022. 2. 15. 화)
▲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에 자리한 자인향교(사진 자인향교 모성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6호(1985년 8월 5일)로 지정된 바 있는 자인향교(전교 김상도)는 지난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 첫 번째 丁日)인 3월 5일(양력) 오전 10시에 춘계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였다. 이날 대제(大祭)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 수칙 준수와 함께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등 5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초헌관(初獻官)에 김상도(69) 현 자인향교 전교가, 아헌관(亞獻官)은 이원종(79) 탤런트 겸 현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이, 종헌관(終獻官)은 최용석(77) 현 영천최씨 원당 문중회장이, 분헌관(分獻官)은 유학 이상정(68)씨와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67) 교수가, 집례(執禮)에는 전명수(77) 전 교육공무원이, 대축(大祝)에는 유학 최선교(77)씨, 알자(謁者)에는 유학 김영구(64)씨가 각각 소임하였다. 2002년 6월에 편찬된 자인향교지에 의하면, 자인향교는 본래 고려 공민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하였고, 1562년(명종 17)에 경주 부윤 이정(李楨)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5년(광해군 7)에 도천산(到天山) 아래에 이전하였다가 1728년(영조 4)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는 대성전(大成殿)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였고, 1924년에 명륜당(明倫堂), 1926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존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모성루(慕聖樓), 4칸의 동재(東齋), 평삼문(平三門), 4칸의 하당(下堂), 2칸의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건축 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남향한 경사면에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아래부터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으로 배치되었고, 대성전 왼쪽에는 서무, 뒤쪽에는 화계가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 내부에 진설한 제수와 제의 의례(초헌관 김상도 전교)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여기에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酋'는 술병에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이며, '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생폐(生幣)와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전(祭典)으로 석전제·석채·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이와 유사한 말로 석채(釋菜)가 있는데, 이는 나물 종류만 차려놓고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 조촐한 의식이다. 석전의 의식절차는 홀기(笏記)에 의해 진행되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격을 그 원형으로 하고 있다. 제관은 전일(前日)에 재계(齋戒)를 하는데,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을 행한다. ▲ 임인년 석전대제(춘) 집사분정기 봉행절차는 초헌관(初獻官)이 폐백(幣帛)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에 이어 초헌관이 신위전(神位前)에 첫 술잔을 올리고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 초헌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亞獻禮),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초헌관이 음복위에서 음복잔을 마시고 수조하는 의식인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대축이 변과 두를 거두는 의식인 철변두(撤籩豆), 초헌관이 망요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보는 의식인 망료례(望燎禮) 등으로 진행된다. 보편적으로 석전복식에는 금관제복과 유건도포(儒巾道袍)가 있다. 금관제복에는 금관·홀(笏)·수(繡)·중단(中單)·상(裳)·패(佩)·방심곡령(方心曲領)·흑각대(黑角帶)·말(襪, 버선)·이(履, 신)·폐슬(蔽膝, 무릎가리개)·대대(大帶, 큰띠)·의(衣, 겉에 입는 옷)이며, 유건도포에는 유건·도포·목화(木靴, 목이 긴 신발)·사대(紗帶, 도포끈)·행전(行纏) 등이다. 석전대제는 정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 제례악이 연주되고 일무가 추어지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는 집례가 읽어 내려가는 제의 진행 의례(사회 시나리오)가 모두 한자 원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적잖은 한문 실력자를 제외하고는 읽지도 해석도 어렵다는 점이다.▲ 한자 원문에 의한 진행(전명수, 77)과 알자의 안내를 기다리는 헌관 이에 대하여 자인향교 전교 출신인 천기찬(85) 성균관 전의는,“지금까지는 향교에 몸담은 60~70대 지역 유생들이 행사 때마다 답습적 학습을 통해 큰 무리 없이 집례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문 세대가 아닌 청소년 세대들이 이를 전수해 나가기에는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사안임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미 한자로 엮어진 불교 경전(반야심경)도 불교계에서 먼저 우리말로 바꾸어 나가는 예를 보더라도 앞의 제안은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인지재(仁智齋)』의 현상 경산시는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경관적 가치가 높은 지역의 비지정 문화유산을 보존ㆍ관리하기 위해 지난 2019년 ‘경산시 향토문화유산보호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후, 다음 해 12월, 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를 열어 관내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소재 『인지재(仁智齋)』등 모두 3건에 대해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의결하고 이를 지정 예고 후 지정 고시하였다. 이중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산 『인지재(仁智齋)』는 지난 2013년 6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된 바 있으나, 동 문화재에 대한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이를 신청 문중에서 취하함으로 보존에 어려움을 겪어온 경산지역 임란(壬亂) 관련 고건축물로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 최문병 강학소로 건립되면서 자인현역 의병 창의에 직접적으로 활용된 건물로, 이는 지역 의병사에 중요한 인물 및 장소성을 가진 역사적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성재 선생 실기에 의하면, 인지재는 1579년(조선 인조 12년) 당시 자인현이 경주부에게 속현되어 있을 때, 지금의 자인면 울옥리(당시 울곡동)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건립 당시 당호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하였다가 1587년경에 『인지재(仁智齋)』로 개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는 선생이 1589년부터 나라에 큰 국란을 예견하고 홀로 『인지재(仁智齋)』에 기거(起居)하면서 활과 화살, 칼 등의 무기를 수집, 닥쳐올 앞날을 크게 근심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스스럼없이 구국 대열에 나설 것을 맹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덧붙여『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로부터 복현된 시기인 1637년에서 이후 30여 년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현감 남궁옥南宮鈺)에 의해 신관리에서 원당리로 이건(이 무렵 울곡동에 세거하였던 영천최씨들 또한 지금의 원당리로 전거(轉居)하였다)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 원당으로 관아(官衙)를 옮긴 후부터 계속 우환(憂患)이 잦아들게 되자, 1699(숙종 25)년에 김시휘(金始徽, 1696~1699년) 현감이 지금의 자인초등학교 교정이 있는 북사리(이전에 표기한 ‘서부리’는 필자의 오기로 바로잡는다) 일대로 이건(移建)하였다. 이러니 지금의 『인지재(仁智齋)』가 소재한 부지(敷地)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던 셈이다.▲ 『인지재(仁智齋)』의 주요 건축 부위 세부 실측도 영천최씨 원당문중 최용석(77)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 자리에 『인지재(仁智齋)』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1699년 현감 김시휘(金始徽)가 현청을 북사리로 옮기게 되면서, 당시 북사리 일대 영천최씨 소유 자산을 원당리 소재 구 현청 부지와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인지재(仁智齋)』의 이건 시기는 이후 1차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최초 원당리로 옮겨 세운 시기 또한 1710년경으로 유추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은 곧 고려 현종(顯宗) 재위 시부터 1637년까지 무려 600여 년간 경주부(慶州府)에 속현(屬縣)되었던 자인현(慈仁縣)이 복현(復縣)된 후 두 번째로 자리 잡았던 현청(縣廳) 소재를 입증하는 경산시의 중요 기록유산이요, 이에 『인지재(仁智齋)』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 숙의(熟議)와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로,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義兵史)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굴곡을 걸머쥔 체 4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켜온 『인지재(仁智齋)』는 아래 사진에서와 보는 바와 같이 부서진 기와에는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이 이를 가려주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균형을 잃고, 그저 무심한 세월 소리는 산바람마저 지쳐 지나간다.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인지재(仁智齋)』는 경산시가 지정한 경산문화유산의 얼굴일 터인데 지정 3년이 지나도 그저 속수무책 치켜만 보고만 있는 지정(指定) 당국의 향후 대책이 아쉽기만 하다. 덧붙여,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경산지역(경산, 하양, 자인현역)에는 무려 3천 명이 넘는 현민(縣民)들이 창의(倡義)하여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 일념으로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걸고 오늘의 경산(慶山) 땅을 사수(死守)하여 왔지만, 변변한 임란 추모 공간 하나 현창(顯彰)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문화정책을 훗날 경산사(慶山史)는 무어라 평가할까 두렵기만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먼저,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설화에서와 같이 신령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물로서 표현되는 경우이다.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하여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였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웃옷을 던진 뒤 던진 옷 중 물어 올리는 옷의 주인이 희생당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중 호랑이가 왕건의 옷을 물어 올려 약속대로 왕건이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間髮)의 차이로 왕건이 살아나게 되었는데, 호랑이는 순간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 했다. 다음은,《삼국유사》권 제5, 감통(感通) 제7,『김현감호』편에서와 같이 호랑이가 자유자재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과 교유한다는 기록이 있다. 즉,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하던 김현(金現)은, 한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둘로 변신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소녀를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게 되어 소녀의 형제 호랑이에게 잡혀서 먹히게 된 것을 소녀의 기지(奇智)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형제호랑이의 살생에 대한 천벌이 멀지 않음을 감지한 소녀가 김현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형제를 살리고, 김현에게 공을 돌렸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행위에 감동된 두 개의 인간을 도와주는 경우, 또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는 경우이다. 이상의 유형이 호랑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랑이와 토끼의 설화는 호랑이의 어리석음을 희화적(戱畵的)으로 표현한 유형에 속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꾀 많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 토끼는 꾀를 내어 먹을 것이 많은 곳을 가르쳐 줄 테니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호랑이는 토끼를 따라 강변에 가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점점 물이 얼기 시작하여 꼬리가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더 많은 물고기가 달리기를 기다리다 결국 물이 얼어붙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상의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이지만,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전혀 간교하지 않고,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곧 호랑이의 상징적 표현이다. 민화 속의 등장하는 호작도는 호랑이를 꾸짖는 까치를 해학적으로 풀이한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탐관오리를 풍자하지만 청렴한 까치가 있어 이에 물들지 않는다 하였고,《동국세시기》에서는“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하였다. 이러한 벽사의 염원은 호랑이삼재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재는 곧 풍(風)·수(水)·화(火)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 것으로, 정초의 세화(歲畵)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행위의 완성을 꾀하려는 민중 속에 전승되는 지혜로 볼 수 있다. 또한 호랑이는 민중 속에 강력한 신앙적 존재로 아래와 같이 산신신앙의 신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호랑이는 사나운 맹수지만 때로는 범과 같이 온순한 존재로 인간들을 구제하는 친근한 존재로, 벽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참고로 인간의 띠 궁합론에는 호랑이띠 해에 개띠, 돼지띠, 말띠와는 서로 잘 소통되는 반면, 원숭이띠 뱀띠와는 서로 간에 이해와 배려가 요구되기도 한다는 풀이가 전제되고 있다. 그 원리는 설화적 풀이로, 개띠는 책임감이 강하고, 욕심이 적고, 현실에 만족하는 성격으로, 호랑이띠와 원만한 띠에 속하고, 돼지띠는 성실하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저돌적인 성향이 있어 호랑이띠와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고, 말띠는 행동이 앞서는 성격으로 행동적인 말띠와 용맹한 호랑이띠의 궁합은 무난하다는 평이다. 반면 원숭이띠와 뱀띠는 서로 주관이 강하여 양보하지 않는 궁합으로 서로의 장점보다 단점을 들추어내기 쉽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인간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기상과 같이 걸림 없이 모두가 건강하고 가정마다 행운이 가득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 『자인의 역사』 출판물 지난 11월 25일 오후 2시, 이팝나무 군락지로 알려진 자인면 계정 숲 내 조선시대 자인현의 정청(政廳)인 시중당(使衆堂) 뜨락에서 한 국문학자(이홍우, 59, 문학박사)가 수년간 각고(刻苦)로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자인의 역사』란 제명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자인면 출신 이태희(61, 대주화학 대표·자인면 명예면장)·황성일(81, 동아P&P 회장)씨의 협찬과 류영태(61) 전 자인면장의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자인의 역사를 적은 서책은 과거 1800년대에 네 번에 걸쳐 읍지 형태로 출간되었으나, 공식적인 기록물은 1888년 자인현감으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默)이 1889년 발간한 『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과 1932년에 출간된 자인 출신 근대 서화가인 희재(羲齋) 황기식(黃基式, 1905~1971) 선생이 집필한 『자인현읍지』가 전부다. 하지만 내용이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출간된 이홍우 박사의 『자인의 역사』는 무려 782쪽에 달하는 자인 사람의 삶과 생활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일 출판기념회에 참석(경산시 기관장 및 자인면민 100여 명)한 인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시중당 앞에서 열린 『자인의 역사』 출판기념회 『자인의 역사』는 지난 2018년 1월부터 저자가 개별적으로 자료수집과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공식적으로는 2021년 3월 자인역사 편찬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향토사 자료를 바탕으로 약 4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귀띔하였다. 이 책은 모두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 중 미세하게 소상(昭詳)과 왜소(矮小)한 부분이 다소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종원 자인역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자인의 역사 편찬을 위하여 애써 주신 자인면민과 출향(出鄕) 인사에게 감사드리며, 과거 자인현 구역에 포함되었던 남산(南山)·용성(龍城)과 진량(珍良)·압량(押梁) 일부 지역을 포함한 자인의 역사서 개정판이 발간되길 희망하며, 훗날 이 책이 새로운 역사서 발간에 유용한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피력하였다. 저자 이홍우 박사는 자인면 신도리 출신으로,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한 후 동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무천극예술학회 회장, 한국드라마학회 이사도 맡고 있다. 연구 저서로는 『한국 희곡과 극적 상황』, 『한국 현대 희곡론』, 『희곡의 이해』, 『희곡 원론』 등이 있으며, 창작 희곡집으로 『캄차카반도 4,750미터 클류체프스카야산의 하얀 웃음(연극과 인간)』이 있다. 한편, 자인면은 오는 12월 6일부터 각 기관, 공공도서관 및 대학도서관 등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책자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자인면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무료 배부할 예정이라 밝혔다.
재산을 두고 펼쳐지는 웃음과 눈물의 가족 이야기 블랙코미디 ‘아비’, 경산시립극단 제8회 정기공연에 선보입니다. 경산시립극단 제8회 정기공연 ‘아비’가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4시에 경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전석무료 공연으로 펼쳐진다. 이번 정기공연 ‘아비’는 평소 가족 간의 소통과 애정 표현이 서툴며, 모든 일에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아버지가, 어느 날 가족들을 모이게 한 후 “전 재산을 남산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라는 선언을 하게 되고, 이를 뒤엎으려는 가족들과 일어나는 다툼을 표현한 코믹 풍자극이다. 아내와 3남매는 기부하려는 아버지에게 애원하고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아버지의 결심을 바꾸지 못해 가족들의 갈등은 고조된다. 이런 팽팽한 갈등 속에 아버지가 배신감과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가족 간 서로 이해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연극 “아비”는 인간의 돈에 대한 욕망을 풍자한 코믹 풍자극이다. 돈에 대한 집착을 가장 강하게 보인 아버지가, 사실은 가족애가 깊은 사람이었다는 반전은 관객들에게 잊혀 가는 가족애를 다시금 돌아보게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이자 원로배우 ‘이원종’이 남편 역으로 출연하고 대구·경북의 유명 극단 대표와 배우들이 배우로 대거 출연해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본 공연은 무료공연으로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공연일 전날까지 예매할 수 있다. 또한, 잔여석에 대해 공연당일 경산시민회관에서 공연 시작 90분 전부터 좌석티켓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관광과(810-5359, 6587)로 문의하면 된다.
▲ 추석을 앞두고 북적거리는 자인 재래시장 오는 21일 추석(秋夕)은 설날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양대 명절(名節)에 귀향(歸鄕)하는 인파를 보고 민족의 대이동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이중 추석은 매년 음력 팔월 보름날로, 이는 신라시대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했다 전승되며, 예로부터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과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님께 차례(茶禮)를 모시는 의례를 갖추게 되며, 이를 다른 말로 가위·한가위 또는 중추절(仲秋節)이라 하기도 한다. 이때는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할 계절이라 음력 팔월 중순은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하다. 절기 또한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 예부터‘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라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라 하였고,《삼국사기》권 지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이사금] 때, 왕이 이미 6부를 정한 후 이를 두 부분(部分)에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에게 각기 부내(部內)의 부녀자를 거느리어 편을 짜고 패를 나누어 7월 16일부터 길쌈을 시작하여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고사(考査)하여 지는 편이 음주(飮酒)를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이에 가무(歌舞)와 온갖 유희(遊戲)가 일어나니,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고, 이에 진 편의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였던 음조(音調)가 훗날 회소곡(會蘇曲)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남아있는 가배(嘉俳)가 곧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가위·한가위고 추석이다. 집안에 따라 다소 달리할 수 있지만, 추석 전에 조상님 산소를 성묘하고 벌초를 마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추석을 맞이하며, 보편적으로 추석날 아침에 첫 번째 행하는 일은 수일 전부터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상님 음덕(蔭德)을 기리는 차례를 모시는 순으로 시작된다. 이때는 설날과는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제일 먼저 올리는 천신(薦新) 의례를 거치는 것이 전통적인 상례(常例)이다. 이는 곧 조상님의 음덕(蔭德)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 그리고 효에 근간(根幹)이 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조상님과 후손들의 교감(交感)은 이를 받드는 후손들에 제의(祭儀) 축문(祝文)에서 그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축문에 수록된 용어와 사자성어 등을 중심으로 이를 서술하고자 한다(본문은 기제사 제의 의례에 국한).한자로 차례(茶禮)는 다(茶)자를 쓴다. 즉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지내는 제사(祭祀)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즉 15일 단위로 4대조까지 모시는 사당(祠堂)에 차[茶]를 올리고 간략한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현상으로 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없지 않으나, 이는 최대한 간소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제사와 차례의 가장 중요한 부문은“독축(讀祝)”이다. 즉 모든 제사상을 아무리 진수성찬을 올렸다 해도 제주(祭主)가 마음으로 받치는 축문(祝文)이 있어야 성대한 제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사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 신(神)도 제주(祭主)의 애달픈 문장과 목소리에 마음을 연다는 데 진정성을 두고 있다. 축문의 문장 구성에도 어딘가 모르게 절절하고 효가 묻어나 있다. 이를테면 제를 알리며 조상님께 알린다는 문장도‘효자 ○○ 감소고우(敢昭告于)’라는 사자성어로‘제주○○이 삼가 밝게 고한다’하였고, 돌아가신 분을‘현고·현비(顯考·顯妣)’라 높이고, 부군(府君)이라 하였으며, 해가 바뀌었다 하여‘세서천역(歲序遷易)’으로 조상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기일(忌日)을 휘일부림(諱日復臨)이라는 애통(哀痛)함을 표했다. 또한 덧붙여 그 그리움을‘추원감시(追遠感時)’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난다고 하였으며, 그 감정을‘호천망극(昊天罔極)’‘불승영모(不勝永慕)’라 하여 넓고 하늘 같은 조상님의 음덕을 기렸다. 이와 아울러‘근이(勤以)’‘청작서수(淸酌癙羞)’라하여 정성을 다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공신전헌(恭伸奠獻)’이라 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제사를 올린다고 하였으며, 종결문에‘상향(尙饗)’이라 하였으니 부디 조상님께서 흠향하시라는 간절함이 있다. 이 밖에도 축문에는 유시보우(惟時保佑), 실뢰신휴(實賴神休), 세천일제(歲薦一祭), 예유중제(禮有中制), 이자상로(履玆霜露) 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기제사의 축문은 다음과 같이 후손들의 애틋함이 글귀마다 묻어나 있다. 먼저 기일을 일깨우면서‘유세차(維歲次)’, 이는 애절한 마음을 여는 문장으로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는 발단부로 돌아가신 애통함 해를 맞이한다는 첫머리 문장이다. 이어지는 간지(干支)는 돌아가신 해를 의미하며, ○월 간지, 삭(朔)은 그달의 초하루 간지, 이후는 기일과 간지를 적는다. 이는 돌아가신 해와 돌아가신 날의 달과 그달의 초하루 간지를 적고, 이어 기일 날짜와 간지를 적은 후, 제주의 이름을 쓴다. 독축(讀祝)은 제주가 읽거나 대신 읽는 대축(大祝)이 있으나, 기제사나 제주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처럼 제의(祭儀)는 곧 후손들을 훈도하는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전통 축제를 통하여 효와 충을 일깨워 왔고, 이로써 반만년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연면히 이어왔다.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경산시(시장 최영조)는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의 3종이 지나달2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65호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金剛般若經疏論纂要助顯錄)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은 1489년(성종 20)에 윤호, 임원준, 허종 등이 왕명을 받아 8권 8책으로 편찬 간행한 의학서이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구급방서(救急方書) 중에서 가장 정리가 잘 된 책으로, 질병을 중풍, 두통 등 127종으로 나누어서 그 치료 방문을 모아 엮었다. 현재 전하는 중간본은 권1, 권2, 권3, 권6, 권7의 다섯 책이다. 이들은 동일한 판본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권7>은 원간본인 을해자본의 번각본이며, 대체로 원간본의 면모를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전기의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국어학적으로 원간본의 어휘, 문법, 음운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문원문, 현실한자음, 한글언해, 방점, 고유어, 약명 등은 한의학, 국어학, 서지학, 번역학, 한문학 등 다방면의 연구에서 가치가 크다. 『천로금강경』은 송나라 임제종의 승려인 천로 도천(川老 道川, 일명 冶父)이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금강반야바라밀경』에 주석을 달고 송(頌)을 붙인 목판본으로, 13세기 중엽의 간본으로 추정된다.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중국에서 처음 전래된 형태를 그대로 번각한 것이며 고려에서의 간행은 13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 후 1387년에 간행한 것은 한 세기 전에 간행되었던 책을 일부 고쳐서 번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래되거나 소장된 천로(川老) 야부(冶父)의 계열본 중에서는 그 간행시기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추정되며, 한국의 불교사와 인쇄문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료이다.천로금강경(川老金剛經) 당나라 종밀(宗密, 780~841)이 저술한『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疏論纂要)』에 대하여 송나라의 혜정(慧定)이 그 요지를 다시 해설[助顯]한 것이다.「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下券)은 1378년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전본(傳本)이 매우 드문 희귀본으로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책은 경전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고려 말 사찰 간행 불서 연구에도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불교사와 인쇄문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최남수 문화관광과장은“이번에 도문화재로 지정된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전적 3종을 포함한 우리시 지정문화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 속에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번에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전적 3종이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경산은 국가지정문화재 15건, 도지정문화재 28건, 국가등록문화재 1건 등 모두 44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지난해 국가등록문화재로 신청한 대구대학교 점자박물관 소장품인「한글학습 점자교재」는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동산분과)에서‘국가등록문화재 신청’으로 의결하여 문화재청 심의를 앞두고 있다.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인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이 1898년에 뉴욕 점자를 기초로 하여 한글점자(이른바 평양점자)를 창안하고 학생을 가르친『점자교재』로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심의되었다.
경산시립극단 이원종 예술감독은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 여파로 관망하여오던 경산시립극단 제7회 정기공연을 오는 9월 2일(목요일)~9월 4일(토요일)까지 3일간 평일 19:30/주말 16:00시 예정으로 엄인희 작“그 여자의 소설”을 김도훈 연출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고 8월 20일 경산시립극단 측이 밝혔다. 이번에 올리게 된“그 여자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치하에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시부모와 딸 조춘이를 데리고 근근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주인공을 배경으로, 그녀가 살아가는 고난과 삶의 애환, 역경을 그
▲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 8월 5일(목요일) 13:30~17:30분까지 무려 3시간 30여 분(휴시시간 제외)에 걸쳐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사)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무형문화연구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소재, 원장 함한희)이 주관한 행사로, 최재해 보존회장은‘지금까지 여러 번 학술대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발표 때마다 학자들 간에 여러 이견이 분분하여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를 함축시켜서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다시 시도하였다.’라며‘경산자인단오제를 문화재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경산 자인 고을에 있는 지역 공동체(共同體)의 큰 행사, 제사(祭祀)로 봐주셨으면 한다’라고 피력하였다.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는 어디까지나 경산자인단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한 장군 오누이에 대한 향토 사랑과 충절(忠節), 그리고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기 위한 제의(祭儀)를 근본으로, 이는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따른 여느 단오절(端午節) 행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역축제(地域祝祭)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은,‘어디까지나 우리 것이 가장 한국적이요, 세계적이라 하듯, 자인 지방 단오 속에는 한 장군이란 지역 수호신(守護神)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의 충절(忠節)이 이 고장을 지켜왔다는 점만으로도 축제(祝祭)로서의 독창성(獨創性)은 여느 단오절 제의 의례에 본이 된다고 자평하였다. 이를테면, 제의(祭儀) 이전에 지역에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진충묘(盡忠廟)에 이르는 호장행렬(戶長行列) 또한 제의(祭儀)를 앞두고 지역 수호신(守護神)인 한 장군 오누이를 맞이하려는 서막(序幕)이다. 이는 전날 도천산(到天山) 아래 검흔석(劍痕石) 부근에서 연행(演行)되는 영신의례(迎神儀禮)와는 차별화되고 있다. 이는《동국세시기》에 수록된 군위단오편에도 주신인 김유신(金庾信)과 부신인 소정방(蘇定方)·이무(李茂) 장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대제(大祭)에 앞서 고을 이방이 대신한 호장행렬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곧 강신례(降神禮)를 의미하는 행렬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강릉단오의 경우도 그 형식은 달리하고 있지만, 유사성은 없지 않다. 여기서 자인단오와 한 장군제 유래를 살펴보면, 그 출발점은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자인읍지(慈仁邑誌)》에 따르면, 9세기 전후 신라 시대에 왜구(倭寇)들이 자인의 도천산(到天山)에 성(城)을 쌓고 기거하면서,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 오누이가 버들못[柳提]에서 여원무(女圓舞)와 배우잡희(俳優雜戱)의 놀이판을 벌여 이들을 유인(誘引), 섬멸(殲滅)하였다는 데서 설화적 발단부(發端部)와 전개부(展開部), 결과부(結果部)가 성립된다. 이에 증시부(證示部)는 한 장군의 충의(忠義)를 추앙(推仰)하여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단옷날에 추모제를 모신 후 여원무와 배우잡희, 무당굿, 그리고 단옷날 행사인 씨름, 그네 등, 다양한 놀이를 3~4일에 걸쳐 연행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이른바 완벽한 설화적 4단 구조가 갖춰진 셈이다. 이와 같은 축제 전통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전승력(傳承力)이 약화(弱化) 되었으나, 1971년 한장군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 한장군문화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뒤 1991년에 한 장군을 추모하는 한묘대제(韓廟大祭), 여원무(女圓舞), 호장굿, 자인팔광대(慈仁八廣大), 무녀 굿이 자인 단오절에 본격 연행되면서 1996년부터는 경산시의 후원으로 경산자인단오 한장군축제로 개칭되어 오다가 2007년 3월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名稱)이 변경되었다. 이러니 자인단오의 뿌리는 곧 한 장군 축제이고, 한 장군 오누이가 중심 신체(神體)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역 전통 축제가 단오(端午) 세시풍속(歲時風俗)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단오(端午)라는 큰 틀 속에 한 장군의 존재가 동일선상에 종속된 축제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한 장군을 추모(追慕)하는 제의를 단옷날에 향사(享祀)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곧 기일(忌日)과 무관한 단옷날이 한 장군 신위(神位)를 받드는 날이란 뜻이 된다. 이날에 오신(娛神)과 유신(遊神) 행위로 등장하는 여원무와 자인팔광대, 자인 큰 줄다리기, 무녀 굿 등은 한 장군을 추모하는 종속(從屬)된 하나의 제의 의례의 진행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축제적 일련의 행위에 그간 학계에서까지 설왕설래하며 결론을 얻지 못한 부분을 이번에 무형문화연구기관에 의뢰하여 큰 틀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이다. 이에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회장 최재해)는 문화재라는 측면보다 자인의 큰 어른 한 장군에 대한 캐릭터를 부상(浮上)하고 이를 기리고자 하였던 것, 그 구상이 이른바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이다. ▲ 학술대회 개최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는 최재해 보존회장 그 방안(方案)은 모두 6편의 논문(論文)을 통해 6명의 발표자와 6명의 토론자를 통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먼저 제1주제는, 무형문화재 정책과 경산자인단오제(발표 한국예술종합학교 허용오 교수)로, 발표자는 ①경산자인단오를 보는 두 시선, ②흥미로운 대상으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③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④경산자인단오제 앞에 놓인 세 갈래 길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본고에서도 종래와 차별화된 논증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결론 부분에서 ①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 ②현재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제기된 문제점을 섬세하게 개선, ③현재의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토론자(목포대학교 이경엽 교수)는, 보존회 앞에 놓은 세 갈래 길이 타당한 제안인지, 이런 식의 제안을 받을 이유가 있는지, 어떤 길을 수용할 것이지 등등, 보존회로써 선택하고 응답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지역 공동체 유산으로서 경산자인단오제로(발표 영남대학교 이은정 교수), 본고는, 서론 부분에서 자인단오와 연계한 구 자인현 내에 읍면을 달리한 마을 단위 당산제(堂山祭) 또는 동제(洞祭) 형식의 개별 한당을 지역공동체적 측면에서 진충묘(盡忠廟) 내 통합 흡수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발표자는 발표문 끝부분에 보존회가 경산자인단오제 내에서 한당 제사의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수용하고, 각 마을에서 한당 제사(祭祀)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유연하게 포섭(包攝)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발표자의 제안에 반박하고 나선 최주근 교수 이에 토론에 나선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 교수는, 마을 단위 개별 사당은 지역단위 독창성(獨創性)과 개별 신앙적(信仰的) 개념(槪念)으로 존속되고 있는 바, 이를 단순 문화재적 한계로 보고 향후 통합 또는 포섭하는 방안은 바람직하지 못한 제안이라 지적하였다. 세 번째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호장장군행렬의 운용과 놀이 구현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제언(발표 진주문화연구소 남성진 교수, 토론 한양명 교수) 이다. 발표자는 본 발표에서 한 장군의 출현 시기를“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하였고, 호장행렬은 전설의 역사화 현상 즉, 자인단오의 의역사적(擬歷史的) 접속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과거의 전설적 인물을 현재의 실존적 시간 속에 불러와서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한양명 교수는, 호장(戶長)을 장군행렬로 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호장행렬을 단오를 선전하는 길놀이로 보거나 단선적인 일회성 행렬 정도로 보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재현이 이루어진 것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네 번째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 연구이다. 발표자(발표 계명대학교 이종희 교수)는 본고를 통해 경산자인단오제의 유래와 역사를 피력하고, 여원무와 여원화, 여원무의 특징, 여원무의 구성과 변천을 논하고, 이어 여원무의 전승 보존과 문제점 개선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전성희 교수는, 여원무와 여원화의 본질에 대한 의식 부족과 여원무 원형 연구 및 재창조 과정의 당위성 입장이라는 표현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다섯 번째 발표에 나선 석대권 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장은, 국가무형문화재 범주로서 자인팔광대의 전승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석 소장은 본고에서 특히 자인팔광대의 명칭과 대본의 문제를 제시하고 보존회의 적극적인 검토를 주문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는, 3가지 질문을 통해 발표자가 제시한 자인팔광대에 대한 문제 사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것을 요구하였으며, 자인팔광대에는 발표문에 지적되어 있듯이 이야기와 시대에 대한 통찰과 영남의 춤과 음악이 응집된 인간 위무의 종합예능인데 이 부분이 자인단오제에서 가볍게 다뤄지는 것 또한 경산자인단오제 성격을 잘못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마지막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큰굿의 방향성 탐색이다. 이에 발표에 나선 경상대학교 홍태한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자인단오제 큰굿의 가치와 방향성, 향후 보존회의 역할 등을 역설하였고, 토론에 나선 윤동환 전북대학교 교수는, 자인 단오 큰굿의 제의적 복원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자인의 큰굿 형식에 대한 개인적 사견과 이를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전승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였다.▲ 종합토론에 나선 박승표 자인면 번영회장 본 발표를 마친 종합토론 시간에 무려 150분(주제당 25분)에 걸친 발표자와 토론자의 토론에 열중해온 자인면 번영회 박승표(향토사학가) 회장이 종합 토론자로 나서면서, 그간 답답한 심경을 대략 10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발표자의 진정성 있는 학술적 해명과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경산자인단오제는 개별적 연행이 아닌 5마당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②자인단오축제를 조선 시대 고을 축제로 표현함은 신라 시대부터 전승해 온 경산자인단오 축제에 대한 극단적 편견이다. ③호장행렬은 신라말부터 한 장군 제의를 최초 봉행한 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조선시대로 표기함은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④호장행렬은 단순 가장행렬이고, 길놀이 문화의 행렬로 치부하는 것은 경산자인단오축제의 위상을 저해하는 극단적 표현이다. ⑤호장행렬은,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勝戰)을 알리는 행렬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다. ⑥여원무 연구에서 한 장군은 구비전승되는 인물로, 이는 자인중학교 증축 시 고분발굴 시기로부터 추정된다는 의견은 근거를 왜곡한 발상이다. ⑦여원무 복제에 있어 설왕설래한 발표 내용은 발표자가 주장하는 발전적 방안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⑧팔광대에 등장하는 인물 소개가 갈팡질팡하였음은 체계적인 연구라 할 수 없다. ⑨한장군의 등장 시기를 이미 여러 읍지에 수록된바 같이“나대지유풍”즉, 신라 시대 풍속이라 하였는바, 이에 발표자가 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굳이 지칭함은 무슨 의미인지? ⑩팔광대를 유교적 바탕에서 생성된 1980년대 창작품이다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연구한 것인지, 이로써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은 무엇이란 말인가 등, 요목 조목 질의를 하였으나, 종합토론을 위한 시간적 제약 때문에 종합토론의 답변도 없이 끝마치게 되어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며. 이에 대한 토론자의 구체적인 답변을 요약하여 보존회측에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 진행팀을 주목하게 하였다. 필자(김종국 박사)는, 본고를 정리하면서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에서 제출한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을 표본으로,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가 이를 어디에서 어디까지 원용할 것인가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의 통찰력을 기대해 본다.
▲ 여원무 연행 장면(비대면 연행) 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경산자인단오제”가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의 여파로 비대면 방식으로 연행되면서, 경산시와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는 좀처럼 주춤하지 않는 코로나19에 정면 도전, 새로운 트렌드(trend)인 온택트 문화 기법을 활용하여 경산자인단오제의 산실인 경산시의 역사문화와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한“자인단오TV”를 개발, 경산시민과 함께 전국의 문화애호가가 온라인을 통하여 소통하는 방식을 시도함으로 연일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평을 받았다.▲ 경산자인단오제 최재해 보존회장 본 온택트 방식을 기획한 최재해 보존회장은 경산자인단오제 연행의 최소한의 필수 요원과 영상 촬영 스텝만 참여한 가운데 철저한 거리두기와 비대면 수칙을 준수한 채 이를 총 3회에 걸쳐 온라인 형식의 유튜브 방송을 시도하였다고 회고하면서 내년에는 경산자인단오제의 원형과 예술적 가치를 보다 승화시킬 수 있는 빛나는 지역축제로 이끌어나가겠다 다짐하였다.▲ 신주 빚기와 숙성과정 안치 본 기획은 모두 3회에 걸쳐 주로 현장 중심으로 편집하여 유튜브 자인단오 TV로 방영하였다. 그 첫날은 한장군놀이의 발상지인 도천산 아래 버들 못[유제지]에 영신제를 올리고, 이어 한 묘(한 장군 사당)를 영상답사, 한 장군 꽃관 지화(紙花) 만들기, 향토 출신 가수 노래, 경산시 농특산물 소개 등 방송인 한기웅씨 진행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였고, 둘째 날에는 방송인 이도현 진행으로, 단오장 이모저모와 신주(神酒) 빚기 등을 소개하고, 박인태 이수자의 한장군놀이 유래 소개, 경산특산물 알리는 순으로 진행하면서, 중간중간에 향토 출신 가수들이 주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자인면 원당리 진충묘(盡忠廟)의 한장군 영신(迎神) 의례 셋째 날인 단옷날에는 호장장군 행렬, 진충묘 한 장군 대제 봉행(초헌관 최영조 경산시장), 한 장군 묘소 참배, 보인 농악 풍물 한마당 등으로 이어졌고, 오후에는 계정들소리, 자인팔광대놀이, 한 장군 큰굿 순으로 실시간 중계형식으로 유튜브 영상이 방영된 후, 본 경산자인단오제 온텍트 유튜브 자인 단오 TV가 종영(終映)되자 전국의 많은 문화애호가의 환영 댓글과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에 시도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온택트 방식의 영상기획은, 2억 5천만 원의 경산시 예산지원으로 추진되었는데, 여기에는 현 보존회 최재해(69) 회장과 안명욱(86) 전임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향토애와 협력으로 가능하였다는 후문이다.▲ 전통 신주 빚기 재현 현장을 지도하는 안명욱(86) 전 보존회장 안명욱 전 회장은 최재해 현 회장과 함께 재임 중 경산자인단오제를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을 이루어온 인물들이다. 그 중 안명욱 전 회장은 이전 경상북도 도의원, 자인농협장 등을 거친 지역에 큰 어른으로, 경산자인단오제의 역사와 지역문화에 자타공인의 노하우(know-how)가 있다는 정평과 함께, 그는 이번에 기획한 유튜브( YouTube) 방송 촬영을 위해 구순(九旬)을 앞둔 연세도 아랑곳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며 격려와 고증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평을 받았다.▲ 진충묘 한 장군 추모 대제와 한 장군 묘소 참배 경산자인단오제는 강원도 강릉단오제와 더불어, 경산시 자인면과 강릉시 대관령 일대는 국내 대표적인 단오 축제의 현장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범일(梵日) 국사를 추앙하는 강릉단오제에 비해, 경산자인단오제는 한 장군과 그의 누이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축제로, 이 지방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구 자인현에 5개소(용성면 대종, 가척리, 자인면의 원당리, 진량읍 마곡리, 계정숲 진충묘)의 한 장군 사당(祠堂)을 짓고, 장군과 한 낭자의 충의와 애향심을 길이는 실존했던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장군 대제 봉행 후 오는 2022년을 기약하는 최재해 회장 인사 요약하면, 경산자인단오제의 한 장군놀이는, 신라 말경 자인지역에 왜적이 침략(侵略)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웅거(雄據)하면서 밤마다 지역의 양민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자, 어느 날 한 장군이 도천산 아래 버들지 앞에서 왜구(倭寇)를 섬멸할 것을 맹세하고, 지역에 의병을 모아 버들지로 유인 섬멸하였다는 전승유래로, 당시의 설화 현장에는 왜구를 참한 참왜석(또는 검흔석)이 있고, 버들지가 남아 있었으나, 급격한 산업화로 버들지는 자인공단 내로 편입되어 당시의 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단 입구에 이를 축소한 모형만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 장군의 활동상은 자인 지방의 단오놀이로 승화되면서 당시 한 장군 오누이가 지역 의병들이 이 왜구를 유인하면서 꽃을 들고 화관(花冠)을 쓴 춤이 여원무(女圓舞)로 인정, 이를 국가 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 보존되면서 경산자인단오제 한장군놀이 연행이 본격화되면서 경산지방의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경산인의 정신적 지주이신 삼성현(원효·설총·일연) 가운데 한 분이신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선생을 기리는 신축년(辛丑年) 춘향제(春享祭)가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소재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엄숙히 봉행 되었다. 이날 제의(祭儀)는 최근 코로나19의 극성으로 방역 마스크 착용과 개인 거리두기 등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하에 초헌관에 정정호(77, 도동서원 원장), 아헌관 이희문(76, 유생), 종헌관 김재희(75유생), 집례 이순기(76, 유생), 축 최선교(76, 유생), 알자 김영구(61, 유생) 등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3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천기찬(千基燦) 성균관 전의(典儀)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제의에 참례한 자인지역 유생들 특히 이날 제의에는 이 고장 출신(남산면 하대리) 영화배우 이원종(75)씨가 자리를 함께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홍유후 설총 선생은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조부는 신라 17관등 중 11관등이던 내마(奈麻) 담날(談捺), 부(父)는 서당(誓幢), 모(母)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공주이다. 선생은 육두품 출신으로,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삼국사기』에“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삼국유사』에는“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또한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삼국사기』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화왕계」는「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동문선』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타계 이후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진주 남악서원 제향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불과 서쪽 1km 지점에 삼성현을 기리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설총 선생의 배향 또한 본 역사공원으로 옮겨 세워 경산시민들이 함께 참례할 수 있는 제의 공간으로 조성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이기도 하였다.
지난해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소재 육영재(育英齋)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면서, 그간 소원(疏遠)하였던 하양읍 교리 소재 하양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가 명실상부한 조선 시대 하양지역의 지방 선비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도장이었던 사실이 가시화되고 있다.▲ 하양향교 전경 하양읍 한사리 출신 최재림(85, 전 하양향교 전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명종 10년(1555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이 세워지면서, 하양읍 사기리 소재 환성사의 사전(寺田)이 임고서원에 관리권이 넘어갔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하양현(河陽縣) 유생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하여 마침내 하양향교에 귀속되게 윤허 받았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재림 전 전교는, 당시는 조선 조정의 억불숭유 정책이 팽배한 시기라, 큰 사찰에 대한 사전(寺田) 관리는 이 밖에도 임고서원이 무려 5개 사찰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양 유생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환성사 관리권이 하양향교로 돌아왔다며 당시의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실제 당시 임고서원 소장(所藏) 전적 중, 환성사를 비롯한 5개 사찰과 임고서원과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과 당시 하양향교와 임고서원의 유림이 환성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상소한 결과, 조정으로부터 그 판결을 받은 기록문서인‘환성사결송문(環城寺決訟文)’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하고 있다. 하양향교에 관한 문헌은, 태학지(1785년,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와 경산군지(경산군, 1971),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등을 다음과 같이 축약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과 2005년에 편찬한 하양향교지를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하양향교 대성전 이 기록에 의하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길20길 12-5에 소재한 하양향교는, 1580년(선조 1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에 대성전을, 1622년(광해군 14)에 명륜당을 각각 중건하였다 하였고, 그 뒤 1803년(순조 3)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1862년(철종 13)에 진사 손상봉(孫相鳳)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했다. 이 밖에도 1903년, 도유사 김상룡(金象龍), 지현(知縣) 윤규선(尹奎善)이 교궁(校宮)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 도유사 조학기(曺學璣)가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4칸의 전사청(典祀廳), 기물고(器物庫),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내삼문·외삼문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다. 동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의 위치는 명륜당 앞이어야 하나, 이 향교는 출입도를 정면으로 하고, 경사가 완만한데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명륜당(明倫堂) 뒤에 위치하는 특이한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대성전에는 5성위와 신라 2현, 송조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7호로 지정된 하양향교는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焚香)하고 있으며, 운영은 전교 1명과 장의 18명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허광열(75) 현 하양향교 전교는, 하양향교는 하양읍 소재지 중심권에 다소 벗어나 있지만, 하양 유생들은 임진왜란 때나 이후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엿하게 일어나 향토를 수호하여왔다 강조하면서, 최근에도 이들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청소년 충효 교실 등을 확대 추진하고 있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하양읍 동서리에 소재한 하양 육영재(育英齋)는, 하양현의 영재교육을 위하여 조선 순조 23년(1823년)에 하양 현감 이태승(李台升)이 하양지역 향내 유림과 함께 기부금 등으로 당시 환성사(環城寺)에 축조되어 있던 안양실(安養室)을 옮겨와 세운 하양향교 부속 서당이라 설명하였다.▲ 육영재 전경 이에 허광열 전교는, 당시 육영재는 향내에 수학하는 수재(秀才)들을 선발하여 진학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학생 선발과 운용지침에 관한 건은 하양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또한, 훈장은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분을 추대하여 강학(講學)을 맡겨, 성균관(成均館) 진학과 과거에 응시토록 양성하였다고 피력하였다. 또, 숙식과 학자금은 지역 유림에서 육영계(育英契) 및 보인계(輔仁契) 등을 결성하여 재정적인 어려움을 없애고, 학문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육영재는 중간에 한때 양사재(養士齋), 모성재(慕聖齋)라 지칭했다면서, 이는 오로지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육영재는 하양의 자랑이며, 교육도시 경산의 위상을 부상(浮上)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강조했다. 이밖에 육영재는 <육영재기(育英齋記)>, <육영재 상량문(育英齋上樑文)>, <육영재 중수기(育英齋重修記)>, <모성재기(慕聖齋記)> 등 현존하는 관련 자료를 통해 창건과 변화, 그리고 운영 실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한편, 하양 육영재는 경상북도에 조선 후기 양사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 민관이 함께 창건하고, 현재까지 그 구조와 규모가 큰 변화 없이 남아있어 고건축물로, 건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학·교육사·사회사 연구에도 중요 자료로 평가돼, 지난 7월 3일 열린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건축문화재분과)에서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육영재 현장에서 증언하는 최재림 전 전교 이와 동시에 경산시는 지난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5월 30일까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특별전시실에서“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란 주제로 다양한 서책, 교지, 현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여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 (사) 담수회 경산지회 교양강좌와 수강 장면 (사)담수회 경산지회(지회장 박영수, 75)는 지난 11월 18일 오전 10시,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校村里) 소재 자인향교 명륜당에서 2020년 (사)담수회 경산지회 단합 및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이날 행사에는 경산·자인·하양향교의 전·현직 전교와 임원 70여 명이 회원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특히 본행사는 코로나19에 대비한 철저한 방역수칙과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등이 엄격히 준수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강좌에는 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종국 박사가“담수회 정신의 계승과 발전방안”이란 주제 발표를 하였다.▲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 아래 묵언으로 진행된 자체 오찬 행사 이에 김종국 박사는 강좌를 통해 본래 담수회는 윤리 도덕 선양과 인간성 회복, 유학(儒學)의 현대화와 대중화 실천, 도덕과 윤리 사상을 고취 앙양하며, 젊은 세대의 충효 정신을 함양하고, 올바른 인재 육성을 위한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 앞장선다는 설립목적을 바탕으로, 근본 취지는 영남 학통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겨레의 위난에 순절(殉節)함을 최고의 의(義)로 삼는 선비정신의 선양을 목적으로 한다고 피력하고 예부터 경산지방은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연(毅然)하게 일어나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지역 유생들이 자리매김하였다고 역설하면서 그 예로 신라 시대 압량주(押梁州)의 주병(州兵)과 조선 시대 임란 발발 시 창의(倡義)를 주도하였던 지방 유생들의 의병(義兵) 활동이 금자탑(金字塔)이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진 회원 단합회에는 미리 준비한 자인향교 전정 오찬장에는 지그재그식 좌석 배치를 통해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수칙을 준수와 함께 시종일관 묵언(默言) 속에 진행된 오찬 행사가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 호에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불렀던 무애가와 무애춤에 대한 진정성을 짚어보았고, 이번 호는 이를 마무리하는 1~2차에 걸친 입당 구법 시도와 당항성 부근 한 토감(土龕)에서 깨달았던 일체유심(一切唯心), 그리고 신라 백고자회(百高座會)에서 그가 소리쳤던‘서까래와 들보’는 무엇을 의미하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어제와 오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유심” 본고는《삼국유사》권4, 의해5〈의상전교(義相傳敎)〉에 수록된 원효의 1차 입당 구법 시도와 송나라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 북송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 그리고 북송의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지은 임간록(林間錄)을 일연(一然)이 찬술한《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먼저 원효의 1차 입당 구법에 대하여《삼국유사》〈원효 불기〉에는 이를《당고승전》에 의존하였고, 동 유사〈의상전교〉에서는 의상의 청에 의하여 입당(入唐) 중 수나라의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되어 1주일여 구금당한 후 풀려나 환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송(北宋)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종경록》에는 원효의 1차 구법에 대한 기록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661년에 다시 시도한 2차 구법행만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요약)‘원효와 의상 법사가 함께 당나라에 와서 스승을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우연히 밤이 들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 머물게 되었다. 원효 법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마침 왼편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는 몹시도 달게 그 물을 마셨다. 다음날 원효는 그 물을 확인하였는데, 원래 그것은 시체의 썩은 물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불편해 토하려 하다가 크게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내 듣기에 부처가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했다. 좋고 싫은 것은 내게 있으며, 물에 있지 않구나.”하고, 마침내 고국에 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 하였다.’ 북송의 혜홍각범 승이 찬술한 《임간록》 또한 다음과 같이 앞의 《종경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요약)‘당나라 때 승려 원효가 처음에 배를 타고 와서는 장차 명산에서 도를 찾고자 하였다. 홀로 거친 비탈을 가다가 무덤 사이에서 잠을 잤다. 몹시 목이 말라 손으로 굴속에 있는 물을 움켜쥐고 달고도 시원하게 마셨다. 날이 밝을 무렵에 보게 된 것은 해골이었다.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홀연 깊이 깨달아서 탄식해 말하였다.“마음이 생겨나면 이리저리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三界)가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하며, 마침내 그는 다시 스승을 찾지 않고 그날로 해동(海東)으로 돌아갔다. 그는“화엄경(華嚴經)”을 풀이하고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을 널리 폈다 하였다.’ 하지만, 앞의《종경록》〈당신라국의상전〉,《임간록》에 표현된 원효의 토감 속의 깨달음은 사뭇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이를 구체화하면,《송고승전》〈의상전〉에는 원효와 의상의 토감(土龕) 속 경험에 대하여, 본국의 해문(海門)이자 당으로 들어서는 지경에 이르러, 그들은 큰 배를 구하여 거친 바다 물결을 넘으리라 계획하여 길을 가던 중,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어 길옆의 토감 사이에 몸을 숨겨 습하게 몰아치는 비를 피했다 하였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보니 그곳은 오래된 무덤의 해골 곁이었고, 땅 또한 질퍽한 진흙 길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덤 앞에 머물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또 그 무덤 굴 벽 가운데 기대어 있었다. 밤은 깊지 않아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였다. 원효가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에는 무덤을 토감이라 생각하고 잤는데도 편안히 잘 수 있었고, 오늘 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도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 토굴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 또 무슨 진리가 있으리오. 나는 당으로 건너가지 않겠다.”하고 원효는 짐을 메고 다시 신라로 향해 돌아섰다 하였다. 하지만, 원효가 비를 피하였던 장소가 곧 토굴이고, 그가 무덤 속에서 목이 말라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그것이 해골 물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하였음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조건반사이다. 그러나 이미 원효의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아(自我)의 본능(本能), 즉 초자아적(超自我的)인 두 개의 마음에서 하나를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 자리에서 삼계는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 하였고, 여기서 원효는 무애(無㝵)와 일심(一心)을 깨닫고, 무애도인(無㝵道人)으로써 스스로 환국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깊은 속내는 위 벽화 ①~③과 같이 그곳이 무덤이든, 토감(土龕) 이든 그것마저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과 화쟁(和諍)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라는 대승적(大乘的) 경지에 이르렀다.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 나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금강삼매경론과 백고좌회 강론 부문은 삼국유사에는 언급한 바 없지만, 오히려 중국 송나라에서 찬술한《송고승전》에는 이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신라의 백고좌회(百高座會)는 그 본을 구국(救國)에 두었으나, 갑작스러운 신문왕 왕후가 뇌종양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한 무당의 권고로 사신이 구했다는《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책이 모두 흩어진 낱장으로 이를 합철하여 강론할 사람이 없게 되자, 당시 초개사(初開寺)에 수행 중인 원효(元曉)가 천거되었으나, 이전에도 백고좌회에 대덕(大德)들이 모두 나서 참소(讒訴)하여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왕명으로 그 소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라 제31대 신문왕과 숙질 관계이다. 즉, 부왕인 문무왕과 요석궁주와는 형제요, 요석궁주는 신문왕의 고모로, 엄격히 말하면 고모부가 된다. 당시 원효의 백고좌회 수용은 신라 대덕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나 다툼에 앞서 먼저 강력한 왕권과 병으로 고통받는 중생심에 의한 선택으로, 그는 금강삼매경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심 사상을 논하고자 하였다.《송고승전》원전에서 다음과 같이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용왕이 부한 조건이 있었다.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 亦不過是” 그것은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대신 용왕(龍王)은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하라는 것과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반드시 대안 성자가 전차(銓次) 하여 꿰매게 하고, 이에 원효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원효에게 그동안 여러 차례 백고좌(百高座) 회에 대덕(大德)들의 참소(讒訴)로 들지 못한 데 대한 굴레를 왕비의 병을 고치는 조건으로 용왕이 원효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용왕 검해(鈐海)의 존재와 그 금강삼매경을 신라 대덕들의 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효를 선택하게 종용한 당사자는 당연히 대안(大安) 성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적 배경은 개인적으로 대안이 원효를 사문(沙門)에 입문하도록 이끌어 준 최초의 스승이요, 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이란 데 있다. 이러한 대안의 의도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왕비의 병이 차도 없자 이를 무당(巫堂)에게 청하여 얻은 비법으로 곧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영약을 구하도록 하였다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신이 남쪽 바다[溟漲]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서서 사신을 바다로 안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로 신약을 구하기 위해 뱃길에 오른 신라의 사신을 중도에 마중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 중심에는 대안 성자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된다. 또한 본문에서 수중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 여기에서 용왕(鈐海)과의 만남은 곧 에 왕비의 병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국(新羅國)을 구하는데, 호국용이 등장하게 되고, 그 호국용을 검해라 하였음은 바다에 빗장을 꽂아 굳건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 사신에게 도중에 마사(魔事)를 우려한 나머지 용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종아리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랍으로 채웠다는 점은 이 일에 철저한 보완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승하 후 죽어 해룡(海龍)이 되어 주변국의 간교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동해 산골(散骨) 유명(遺命)과 앞에 동해의 호국용 등장과는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근본적 의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는 본문에서 왕비를 청제(靑帝)의 딸이란 표현과《금강삼매경》은 곧 굳건한 신라의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대안 성자는 국왕의 흔들림 없는 판단을 위해 다음과 같이 그의 천거에 대하여 원효를 불러 주석을 지어 강론하면 왕비의 병이 치유될 것은 의심한바 없을 것이라[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하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고는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安得經, 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즉,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론하게 하라, 다른 사람은 아니 된다고 다시 한번 이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대안 성자의 청에 일차적으로 차례를 묶은《금강삼매경》을 대덕(大德)에 공개한 후 주석을 청했으나,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하고, 원효의 참여를 참소(讒疏)하자, 이를 왕명으로 초개사에 기거하는 원효에게 주석을 명했다 하였다. 이에 원효가 왕명으로《금강삼매경소》를 탈고하였으나, 참소(讒疏) 대덕들의 농간으로 도둑질당하였다 하였다. 당시 신라불교의 소승불교론자는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원효가 수행할 수 없다고 도모하고, 갖은 방법으로 기간 내 탈고를 무력하게 하는 한편, 급기야는 이를 제삼자에게 훔쳐내게 하여 원효의 강론을 저지하였던 것이라 하였다. 원효는 자신이 해석한 금강삼매경론을 도난당하자 황당해하며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3일간 연장을 받고, 3일간 밤낮으로 원효는 3권의《약소》를 완성하였고, 이에 원효는 준비한 황소의 두 뿔 위에 벼루를 얹고 왕성까지 가는 중, 강론할 약소를 집필하여 백고좌회에 참석하게 되고, 원효가 자리에서“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모든 유명한 고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 평생을 무애실천 도인으로, 후대에는 보살로서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성사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삼국유사》찬자인 일연선사는〈원효불기〉의 끝 부문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남겼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무호(舞壺)로 세상을 교화하였으나,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는 돌아다보는 소상만 쓸쓸하다.”하였다. 이는 찬자 일연(一然)이 성사(聖師) 원효(元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는 굴레가 아니라는 불기(不羈)란 제명(題名)으로 집필 당시의 평가를 그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그만의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