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인의 정신적 지주이신 삼성현(원효·설총·일연) 가운데 한 분이신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선생을 기리는 신축년(辛丑年) 춘향제(春享祭)가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소재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엄숙히 봉행 되었다. 이날 제의(祭儀)는 최근 코로나19의 극성으로 방역 마스크 착용과 개인 거리두기 등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하에 초헌관에 정정호(77, 도동서원 원장), 아헌관 이희문(76, 유생), 종헌관 김재희(75유생), 집례 이순기(76, 유생), 축 최선교(76, 유생), 알자 김영구(61, 유생) 등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3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천기찬(千基燦) 성균관 전의(典儀)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제의에 참례한 자인지역 유생들 특히 이날 제의에는 이 고장 출신(남산면 하대리) 영화배우 이원종(75)씨가 자리를 함께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홍유후 설총 선생은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조부는 신라 17관등 중 11관등이던 내마(奈麻) 담날(談捺), 부(父)는 서당(誓幢), 모(母)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공주이다. 선생은 육두품 출신으로,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삼국사기』에“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삼국유사』에는“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또한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삼국사기』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화왕계」는「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동문선』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타계 이후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진주 남악서원 제향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불과 서쪽 1km 지점에 삼성현을 기리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설총 선생의 배향 또한 본 역사공원으로 옮겨 세워 경산시민들이 함께 참례할 수 있는 제의 공간으로 조성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이기도 하였다.
지난해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소재 육영재(育英齋)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면서, 그간 소원(疏遠)하였던 하양읍 교리 소재 하양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가 명실상부한 조선 시대 하양지역의 지방 선비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도장이었던 사실이 가시화되고 있다.▲ 하양향교 전경 하양읍 한사리 출신 최재림(85, 전 하양향교 전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명종 10년(1555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이 세워지면서, 하양읍 사기리 소재 환성사의 사전(寺田)이 임고서원에 관리권이 넘어갔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하양현(河陽縣) 유생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하여 마침내 하양향교에 귀속되게 윤허 받았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재림 전 전교는, 당시는 조선 조정의 억불숭유 정책이 팽배한 시기라, 큰 사찰에 대한 사전(寺田) 관리는 이 밖에도 임고서원이 무려 5개 사찰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양 유생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환성사 관리권이 하양향교로 돌아왔다며 당시의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실제 당시 임고서원 소장(所藏) 전적 중, 환성사를 비롯한 5개 사찰과 임고서원과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과 당시 하양향교와 임고서원의 유림이 환성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상소한 결과, 조정으로부터 그 판결을 받은 기록문서인‘환성사결송문(環城寺決訟文)’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하고 있다. 하양향교에 관한 문헌은, 태학지(1785년,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와 경산군지(경산군, 1971),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등을 다음과 같이 축약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과 2005년에 편찬한 하양향교지를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하양향교 대성전 이 기록에 의하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길20길 12-5에 소재한 하양향교는, 1580년(선조 1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에 대성전을, 1622년(광해군 14)에 명륜당을 각각 중건하였다 하였고, 그 뒤 1803년(순조 3)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1862년(철종 13)에 진사 손상봉(孫相鳳)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했다. 이 밖에도 1903년, 도유사 김상룡(金象龍), 지현(知縣) 윤규선(尹奎善)이 교궁(校宮)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 도유사 조학기(曺學璣)가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4칸의 전사청(典祀廳), 기물고(器物庫),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내삼문·외삼문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다. 동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의 위치는 명륜당 앞이어야 하나, 이 향교는 출입도를 정면으로 하고, 경사가 완만한데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명륜당(明倫堂) 뒤에 위치하는 특이한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대성전에는 5성위와 신라 2현, 송조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7호로 지정된 하양향교는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焚香)하고 있으며, 운영은 전교 1명과 장의 18명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허광열(75) 현 하양향교 전교는, 하양향교는 하양읍 소재지 중심권에 다소 벗어나 있지만, 하양 유생들은 임진왜란 때나 이후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엿하게 일어나 향토를 수호하여왔다 강조하면서, 최근에도 이들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청소년 충효 교실 등을 확대 추진하고 있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하양읍 동서리에 소재한 하양 육영재(育英齋)는, 하양현의 영재교육을 위하여 조선 순조 23년(1823년)에 하양 현감 이태승(李台升)이 하양지역 향내 유림과 함께 기부금 등으로 당시 환성사(環城寺)에 축조되어 있던 안양실(安養室)을 옮겨와 세운 하양향교 부속 서당이라 설명하였다.▲ 육영재 전경 이에 허광열 전교는, 당시 육영재는 향내에 수학하는 수재(秀才)들을 선발하여 진학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학생 선발과 운용지침에 관한 건은 하양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또한, 훈장은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분을 추대하여 강학(講學)을 맡겨, 성균관(成均館) 진학과 과거에 응시토록 양성하였다고 피력하였다. 또, 숙식과 학자금은 지역 유림에서 육영계(育英契) 및 보인계(輔仁契) 등을 결성하여 재정적인 어려움을 없애고, 학문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육영재는 중간에 한때 양사재(養士齋), 모성재(慕聖齋)라 지칭했다면서, 이는 오로지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육영재는 하양의 자랑이며, 교육도시 경산의 위상을 부상(浮上)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강조했다. 이밖에 육영재는 <육영재기(育英齋記)>, <육영재 상량문(育英齋上樑文)>, <육영재 중수기(育英齋重修記)>, <모성재기(慕聖齋記)> 등 현존하는 관련 자료를 통해 창건과 변화, 그리고 운영 실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한편, 하양 육영재는 경상북도에 조선 후기 양사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 민관이 함께 창건하고, 현재까지 그 구조와 규모가 큰 변화 없이 남아있어 고건축물로, 건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학·교육사·사회사 연구에도 중요 자료로 평가돼, 지난 7월 3일 열린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건축문화재분과)에서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육영재 현장에서 증언하는 최재림 전 전교 이와 동시에 경산시는 지난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5월 30일까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특별전시실에서“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란 주제로 다양한 서책, 교지, 현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여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 (사) 담수회 경산지회 교양강좌와 수강 장면 (사)담수회 경산지회(지회장 박영수, 75)는 지난 11월 18일 오전 10시,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校村里) 소재 자인향교 명륜당에서 2020년 (사)담수회 경산지회 단합 및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이날 행사에는 경산·자인·하양향교의 전·현직 전교와 임원 70여 명이 회원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특히 본행사는 코로나19에 대비한 철저한 방역수칙과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등이 엄격히 준수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날 강좌에는 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종국 박사가“담수회 정신의 계승과 발전방안”이란 주제 발표를 하였다.▲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 아래 묵언으로 진행된 자체 오찬 행사 이에 김종국 박사는 강좌를 통해 본래 담수회는 윤리 도덕 선양과 인간성 회복, 유학(儒學)의 현대화와 대중화 실천, 도덕과 윤리 사상을 고취 앙양하며, 젊은 세대의 충효 정신을 함양하고, 올바른 인재 육성을 위한 가정교육과 사회교육에 앞장선다는 설립목적을 바탕으로, 근본 취지는 영남 학통의 도학정신(道學精神)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겨레의 위난에 순절(殉節)함을 최고의 의(義)로 삼는 선비정신의 선양을 목적으로 한다고 피력하고 예부터 경산지방은 충의(忠義)의 고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의연(毅然)하게 일어나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였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지역 유생들이 자리매김하였다고 역설하면서 그 예로 신라 시대 압량주(押梁州)의 주병(州兵)과 조선 시대 임란 발발 시 창의(倡義)를 주도하였던 지방 유생들의 의병(義兵) 활동이 금자탑(金字塔)이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진 회원 단합회에는 미리 준비한 자인향교 전정 오찬장에는 지그재그식 좌석 배치를 통해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수칙을 준수와 함께 시종일관 묵언(默言) 속에 진행된 오찬 행사가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 호에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불렀던 무애가와 무애춤에 대한 진정성을 짚어보았고, 이번 호는 이를 마무리하는 1~2차에 걸친 입당 구법 시도와 당항성 부근 한 토감(土龕)에서 깨달았던 일체유심(一切唯心), 그리고 신라 백고자회(百高座會)에서 그가 소리쳤던‘서까래와 들보’는 무엇을 의미하나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어제와 오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유심” 본고는《삼국유사》권4, 의해5〈의상전교(義相傳敎)〉에 수록된 원효의 1차 입당 구법 시도와 송나라 찬녕(贊寧)의 송고승전(宋高僧傳), 북송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 그리고 북송의 혜홍각범(慧洪覺範)이 지은 임간록(林間錄)을 일연(一然)이 찬술한《삼국유사》의 기록과 비교 분석하고자 하였다. 먼저 원효의 1차 입당 구법에 대하여《삼국유사》〈원효 불기〉에는 이를《당고승전》에 의존하였고, 동 유사〈의상전교〉에서는 의상의 청에 의하여 입당(入唐) 중 수나라의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되어 1주일여 구금당한 후 풀려나 환국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송(北宋)의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찬술한《종경록》에는 원효의 1차 구법에 대한 기록은 언급하지 않고, 다만 661년에 다시 시도한 2차 구법행만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요약)‘원효와 의상 법사가 함께 당나라에 와서 스승을 찾으려 하였다. 그들은 우연히 밤이 들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 머물게 되었다. 원효 법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마침 왼편에 물이 고인 것을 보고는 몹시도 달게 그 물을 마셨다. 다음날 원효는 그 물을 확인하였는데, 원래 그것은 시체의 썩은 물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불편해 토하려 하다가 크게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내 듣기에 부처가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했다. 좋고 싫은 것은 내게 있으며, 물에 있지 않구나.”하고, 마침내 고국에 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 하였다.’ 북송의 혜홍각범 승이 찬술한 《임간록》 또한 다음과 같이 앞의 《종경록》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요약)‘당나라 때 승려 원효가 처음에 배를 타고 와서는 장차 명산에서 도를 찾고자 하였다. 홀로 거친 비탈을 가다가 무덤 사이에서 잠을 잤다. 몹시 목이 말라 손으로 굴속에 있는 물을 움켜쥐고 달고도 시원하게 마셨다. 날이 밝을 무렵에 보게 된 것은 해골이었다. 몹시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홀연 깊이 깨달아서 탄식해 말하였다.“마음이 생겨나면 이리저리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해골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삼계(三界)가 마음에 있다 하셨는데, 어찌 나를 속이셨겠는가?”하며, 마침내 그는 다시 스승을 찾지 않고 그날로 해동(海東)으로 돌아갔다. 그는“화엄경(華嚴經)”을 풀이하고 성불(成佛)하는 가르침을 널리 폈다 하였다.’ 하지만, 앞의《종경록》〈당신라국의상전〉,《임간록》에 표현된 원효의 토감 속의 깨달음은 사뭇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이를 구체화하면,《송고승전》〈의상전〉에는 원효와 의상의 토감(土龕) 속 경험에 대하여, 본국의 해문(海門)이자 당으로 들어서는 지경에 이르러, 그들은 큰 배를 구하여 거친 바다 물결을 넘으리라 계획하여 길을 가던 중, 갑자기 험한 비를 만나게 되어 길옆의 토감 사이에 몸을 숨겨 습하게 몰아치는 비를 피했다 하였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보니 그곳은 오래된 무덤의 해골 곁이었고, 땅 또한 질퍽한 진흙 길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무덤 앞에 머물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또 그 무덤 굴 벽 가운데 기대어 있었다. 밤은 깊지 않아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였다. 원효가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에는 무덤을 토감이라 생각하고 잤는데도 편안히 잘 수 있었고, 오늘 밤에는 그곳을 피해 잤는데도 귀신이 넘나드는 변을 당했다. 생각에 따라 갖가지 일이 생기고, 생각을 없애니 토굴이니 무덤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음가짐 하나 탓이다. 이 마음 외에 또 무슨 진리가 있으리오. 나는 당으로 건너가지 않겠다.”하고 원효는 짐을 메고 다시 신라로 향해 돌아섰다 하였다. 하지만, 원효가 비를 피하였던 장소가 곧 토굴이고, 그가 무덤 속에서 목이 말라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다음날 그것이 해골 물인 것을 확인하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하였음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조건반사이다. 그러나 이미 원효의 깨달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아(自我)의 본능(本能), 즉 초자아적(超自我的)인 두 개의 마음에서 하나를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 자리에서 삼계는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 하였고, 여기서 원효는 무애(無㝵)와 일심(一心)을 깨닫고, 무애도인(無㝵道人)으로써 스스로 환국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깊은 속내는 위 벽화 ①~③과 같이 그곳이 무덤이든, 토감(土龕) 이든 그것마저도 개의(介意)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전체의 평등과 화쟁(和諍)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라는 대승적(大乘的) 경지에 이르렀다.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 나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다” 금강삼매경론과 백고좌회 강론 부문은 삼국유사에는 언급한 바 없지만, 오히려 중국 송나라에서 찬술한《송고승전》에는 이를 보다 구체화하였다. 신라의 백고좌회(百高座會)는 그 본을 구국(救國)에 두었으나, 갑작스러운 신문왕 왕후가 뇌종양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을 때, 한 무당의 권고로 사신이 구했다는《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책이 모두 흩어진 낱장으로 이를 합철하여 강론할 사람이 없게 되자, 당시 초개사(初開寺)에 수행 중인 원효(元曉)가 천거되었으나, 이전에도 백고좌회에 대덕(大德)들이 모두 나서 참소(讒訴)하여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는 왕명으로 그 소임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라 제31대 신문왕과 숙질 관계이다. 즉, 부왕인 문무왕과 요석궁주와는 형제요, 요석궁주는 신문왕의 고모로, 엄격히 말하면 고모부가 된다. 당시 원효의 백고좌회 수용은 신라 대덕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나 다툼에 앞서 먼저 강력한 왕권과 병으로 고통받는 중생심에 의한 선택으로, 그는 금강삼매경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심 사상을 논하고자 하였다.《송고승전》원전에서 다음과 같이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데는 용왕이 부한 조건이 있었다.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阿伽陀藥力, 亦不過是” 그것은 왕비의 병을 낫게 하는 대신 용왕(龍王)은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을 삼아, 이 경전을 부쳐서 저 나라에 출현시켜 유포하라는 것과 이에 삼십 장쯤 되는 중첩된 흩어진 경전을 반드시 대안 성자가 전차(銓次) 하여 꿰매게 하고, 이에 원효를 청하여 주석을 지어 강론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원효에게 그동안 여러 차례 백고좌(百高座) 회에 대덕(大德)들의 참소(讒訴)로 들지 못한 데 대한 굴레를 왕비의 병을 고치는 조건으로 용왕이 원효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용왕 검해(鈐海)의 존재와 그 금강삼매경을 신라 대덕들의 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효를 선택하게 종용한 당사자는 당연히 대안(大安) 성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적 배경은 개인적으로 대안이 원효를 사문(沙門)에 입문하도록 이끌어 준 최초의 스승이요, 또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이란 데 있다. 이러한 대안의 의도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왕비의 병이 차도 없자 이를 무당(巫堂)에게 청하여 얻은 비법으로 곧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영약을 구하도록 하였다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신이 남쪽 바다[溟漲]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서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서서 사신을 바다로 안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로 신약을 구하기 위해 뱃길에 오른 신라의 사신을 중도에 마중한 것으로, 여기에는 그 중심에는 대안 성자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된다. 또한 본문에서 수중 궁전의 장엄함과 화려함 여기에서 용왕(鈐海)과의 만남은 곧 에 왕비의 병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국(新羅國)을 구하는데, 호국용이 등장하게 되고, 그 호국용을 검해라 하였음은 바다에 빗장을 꽂아 굳건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또 사신에게 도중에 마사(魔事)를 우려한 나머지 용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종아리를 찢어 그 속에 넣고서 밀랍으로 채웠다는 점은 이 일에 철저한 보완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승하 후 죽어 해룡(海龍)이 되어 주변국의 간교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는 동해 산골(散骨) 유명(遺命)과 앞에 동해의 호국용 등장과는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근본적 의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는 본문에서 왕비를 청제(靑帝)의 딸이란 표현과《금강삼매경》은 곧 굳건한 신라의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대안 성자는 국왕의 흔들림 없는 판단을 위해 다음과 같이 그의 천거에 대하여 원효를 불러 주석을 지어 강론하면 왕비의 병이 치유될 것은 의심한바 없을 것이라[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하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고는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安得經, 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즉, 빨리 원효에게 가져다주어 강론하게 하라, 다른 사람은 아니 된다고 다시 한번 이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대하여《송고승전》에는 신문왕이 대안 성자의 청에 일차적으로 차례를 묶은《금강삼매경》을 대덕(大德)에 공개한 후 주석을 청했으나, 아무도 이를 해석하지 못하고, 원효의 참여를 참소(讒疏)하자, 이를 왕명으로 초개사에 기거하는 원효에게 주석을 명했다 하였다. 이에 원효가 왕명으로《금강삼매경소》를 탈고하였으나, 참소(讒疏) 대덕들의 농간으로 도둑질당하였다 하였다. 당시 신라불교의 소승불교론자는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원효가 수행할 수 없다고 도모하고, 갖은 방법으로 기간 내 탈고를 무력하게 하는 한편, 급기야는 이를 제삼자에게 훔쳐내게 하여 원효의 강론을 저지하였던 것이라 하였다. 원효는 자신이 해석한 금강삼매경론을 도난당하자 황당해하며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여 3일간 연장을 받고, 3일간 밤낮으로 원효는 3권의《약소》를 완성하였고, 이에 원효는 준비한 황소의 두 뿔 위에 벼루를 얹고 왕성까지 가는 중, 강론할 약소를 집필하여 백고좌회에 참석하게 되고, 원효가 자리에서“예전에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비록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아침 한 개의 들보를 놓는 곳에서는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모든 유명한 고덕들이 얼굴을 숙여 부끄러워하고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우리 역사 속에 평생을 무애실천 도인으로, 후대에는 보살로서 붓다의 경지에 이르는 성사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삼국유사》찬자인 일연선사는〈원효불기〉의 끝 부문에 다음과 같은 찬시를 남겼다.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무호(舞壺)로 세상을 교화하였으나,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는 돌아다보는 소상만 쓸쓸하다.”하였다. 이는 찬자 일연(一然)이 성사(聖師) 원효(元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는 굴레가 아니라는 불기(不羈)란 제명(題名)으로 집필 당시의 평가를 그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그만의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본고는 지난호에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에 이어, 요석궁을 떠난 원효가 문득 까만 모자를 쓰고 속복(俗服)을 갈아입고 저잣거리에 나서 큰 박을 들고 괴상한 춤을 추면서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데, 이번 호는 당시 그가 추었다는 무애 춤의 진정성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 제1부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 645년을 65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까만 고깔모자 쓰고 속복 입은 원효” 본고는 이 부분 역시 《삼국유사》의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원효불기〉 편에 향전을 인용하였으나, 이를 두고 송나라 찬녕(贊寧)이 적은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사문 원효〉편에는 당시 원효의 행동거지를 이렇게 적었다.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여기에 원효는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나타냄이 어그러지고 거칠었으니, 거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지공(誌公) 법사처럼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된 석장(錫杖)을 가지고 있으면서,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화엄경]를 강론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염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였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하였다. 이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행동거지로 찬술자인 찬녕마저도 찬술(纂述)에 중심을 잡지 못하였다는 표현이다. 《삼국유사》〈원효불기〉에서도, 기이한 행동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仍作歌流于世” 원전에 의하면,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하였고,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이로써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일체(一切)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文句)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하였다. 원효 성사의 저잣거리 무애춤[無㝵舞] 가상도(○내 춤추는 원효) 이는 앞의《송고승전》 기록과 표현양식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으나, 그 속에 담긴 근본만은 걸림 없다는 뜻으로, 이른바 여기서 원효의 무애(無㝵)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이어지는 동《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陁之號, 咸作南無 之稱, 曉之化大矣哉” 이를테면,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옹유(桑枢瓮牖) 확후(玃猴)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는 평가로, 이는 곧 원효의 기이한 노래가 민중들에게는 걸림 없는 무애가(無㝵歌)가 되고, 그의 그침 없는 행동은 곧 무애무(無㝵舞)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효의 걸림 없는 무애행은 곧 가난하게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민중들과 무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이름을 익혔다는 것으로, 이는 저잣거리 민중 속에 신라불교의 대승(大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또한, 향전을 인용한《삼국유사》〈원효불기〉의 몰가부와 여기 무애가는 당시 태종 무열왕과 원효 간 모종(某種)의 언약이 실천되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과 백제와의 전쟁상황을 미루어 볼 때, 원효의 무애춤과 무애가는 신라불교의 대개혁을 암시하는 하나의 메아리와 같은 원효의 아우성이요, 당시 신라의 소승불교에 맞선 대 저항일 수도 있다. 앞의 원효의 몰가부(沒柯斧)는 그가 세상 앞에서 자신이 파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노래하였다면, 여기에 무애가(無㝵歌)는 이전의 몰가부에 대한 소명(召命)을 실천하는 또 다른 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몰가부가 스스로 승려로서 계(戒)를 어기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굴레라면, 무애가는 스스로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면서 저잣거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신라불교가 나라를 구한다는 호국 사상을 과감히 저잣거리 곳곳에 봉기하게 하였다. 이것이 원효의 일심(一心)이요, 무애(無㝵)요, 화쟁(和諍) 사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는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칠 대로 지친 신라 정국에는 원효의 일련의 행각이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되었다. 그도 그를 것이 원효가 무애무(無㝵舞)을 통하여 민중들 앞에서 절절하게 외쳤던 무애가(無㝵歌) 속에는 곧 신라를 구하기 위한 나라 사랑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모두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나라 사랑의 의지가 되었고, 이로써 모두 하나 되는 일심(一心) 사상이 그들로부터 싹트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순교적 정신으로 신라를 구하는 대열에 자신을 불태우면서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계율(戒律)에서 벗어났고, 그 굴레를 걸머진 원효는 고깔모자에 속복을 입고 뭇 신라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였고, 또 그들을 위하여 군승(軍僧)으로써 다시 그들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원효의 군사 자문도 훗날 삼국 간에 전쟁이 모두 끝이 나고 원효는 전국의 전장 터를 두루 섭렵(涉獵)하며 그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외로운 넋을 위로하고 추선(追善)하였던 그곳에는 무려 100여 개소에 달하는 원효사·원효암이 곳곳에 세워진 것 또한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지난 7일 코로나로 인해 관객과의 대면공연이 어려워진 가운데 한국아이국악협회는 경산의 대표 공간인‘경산향교’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비대면‘퐁퐁퐁 국악한마당’을 기획하여 국악공연 영상을 촬영하여 송출했다. 어린 시절 비눗방울 놀이는 누구나 경험했을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놀이 재료로 현재는 전문가에 의해 다양한 도구와 기술들이 결합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아동들에게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예술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날 국악과 버블아트가 융합된‘퐁퐁퐁 국악한마당’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국악은 낡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어나 흥겨운 공연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장르의 결합을 통해 창의ㆍ융합 예술을 경험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퐁퐁퐁 국악한마당’은 허재윤(지부장/기획), 권태룡(연출), 경기민요 박효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우주경(한국무용), 여윤아(해금), 정연준(피리), 함연수(가야금), 등의 청년예술가와 버블아티스트 하마쌤(조동식), 김희준(블루노트 대표/촬영)이 함께했다. 한국아이국악협회 지부장 허재윤은“아동들을 위한 국악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전통을 매개로 주체가 되어 예술적 동반 성장을 함께하고, 타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소통 시너지를 창출”하여“국악과 버블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경산의 특징적인 공연으로 거듭나며 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대표 공연물이 되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본 공연은 2020 경산시지방보조금 선정 작품이다. 공연관람 ☞ https://youtu.be/BYsx4763ZB0
경상북도와 독도재단(이사장 이철우)은 10월 독도의 달을 새기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선보인다. 먼저,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이 독도자료 보존을 위해 손을 맞잡는다. 10월 13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 울릉군이‘디지털 독도 아카이브 협약식’을 통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지도 등 독도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경북도가 후원하는 학술행사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연이어 개최된다. 21일 포스텍 국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재)독도재단)가 개최되고, 22일 영남대학교 법학도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개최된다. 또한, 23일에는 경북대학교에서‘해양생태 및 섬 생물학 국제학술대회’(주관 경북대학교 울릉도ㆍ독도연구소) 열려 독도와 해양생태에 대한 방향을 모색한다. 10월 말에는 대구한의대 등과 공동으로‘독도지킴이 안용복 조명 좌담회’도 마련한다. 경북도는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독도 사진전, 독도상품 비즈페어 등 다양한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12일간 경북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지역출신‘원로 사진작가 김재도 독도 사진전’를 개최하며, 24일에는‘독도 민간단체 워크숍’을 갖고 민간단체 대표들과 독도 수호 활동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독도관련 고지도 DB 구축 사업에 대한 성과를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11월 7일에는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학습용 교재, 문구류, 의류 등 독도관련 상품을 온ㆍ오프라인 동시에 전시 판매하는‘제2회 독도상품 비즈페어’도 진행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독도 상품의 산업화ㆍ생활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종 이벤트도 함께 진행한다. 독도재단에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제작, 해외 한인교육기관이나 재외동포, 독도단체에 배부해 대한민국의 땅! 독도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또한,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사업이 어려워짐에 따라 독도 이미지와‘Dokdo of Korea’가 새겨진 독도마스크를 제작해 미국, 일본 등의 국내외 독도 관련단체에 지원할 계획이다. 경북도와 (재)독도재단은 모든 행사장내 코로나19 방역 예방지침을 준수토록 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화, 손소독제 비치, 관람객 발열체크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등 단계별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갈 방침이다. 김성학 경상북도 해양수산국장은“올해는 대한제국 칙령 반포 12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로 독도가 평화로운 우리 땅이라는 국제적 위상제고를 위해 데이터 구축사업에 앞장서겠다”면서,“앞으로도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서 꼭 필요한 이벤트나 학술대회 위주로 개최하여 독도영토주권을 위해 내실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제1부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 《삼국유사》권 4, 이해 5,〈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였다. 당시 이를 찬술한 일연(一然)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미스터리가 없지 않다. 먼저 몰가부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원효가 하루는 풍전(風顚)하여 거리에서“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 소리치며 다녔다 하였다. 이 시기에 원효는 의상과 의기투합하여 일차 당나라에 구법길을 떠났다 수나라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당하고 1주일이나 억류된 후 풀러나 환국하였던 서기 651년경이다. 이 시기에 신라 정국은 잦은 백제국의 침입으로 백제와의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당나라 구법 길에 오르던 신라의 한 승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환국한 후, 어느 날 느닷없이“내게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느냐, 그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세우겠다.”하는 괴이한 노래를 부르고 다닐 수 있냐는 것이다. 특히 그 시점은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이 재위할 즈음이고, 이후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이 등극 3년을 앞둔 시기로, 원효의 세납은 34세였던 시기다. 어떠한 연유이던 비록 6두품 출신이지만, 황룡사와 분황사 서고에서 수많은 서책을 두루 섭렵한 명망 높은 승려가 느닷없이‘네가 과부를 얻어 아들을 낳겠다’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은 그것이 비록 향전(鄕傳)이라 하더라도 상식 밖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본 기록에는 원효의 행각을 풍전(風顚)이라 기록하였지만, 당대에 주목받든 승려가 어느 날‘바람났다.’,‘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미루어 보아 신라조정에서 과연 이를 방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에는 왜 하필이면 신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그 무렵인가 하는 데서 이를 동《삼국유사》를 통하여 재론하고자 한다. 동 기록에 의하면, 원효의 파계 동기는 귀책사유가 당연히 원효에게 있다는 것이며, 이의 행각을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점이 된다. 하지만, 소상하지는 않지만,《삼국사기》권제 46 열전 제6 설총편에 기록은 이와 또 다른 다음과 같은 양면성이 있다. “薛聰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掩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원효는 처음에 상문(桑門-沙門)이 되어 불서에 널리 통달하였고, 얼마 후에 본색(本色)으로 돌아와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했다. 여기서 상문(桑門)이란 출가를 의미하고, 본색(本色)이란 본래의 모습으로,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처인 인간의 그 본래 모습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이같이《삼국사기》에는 원효에 파계 부분은 일체 언급한 바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설총의 부라 명기하였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동《삼국유사》기록을 근거로 사건의 발생 및 전개 시기를 유추하면, 이는 651년 환국하여 3년 이후인 645년, 즉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元年)인 셈이 된다. 이 시기는 원효의 세납이 37세가 되는 해로, 그간 환국 후 일정한 사찰 없이 남산에 몸을 숨기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발심수행장”과“법화경종요”를 집필하였던 시기로 유추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어느 날 저잣거리에 나돌며 몰가부란 노래를 불렀고, 그것도 노골적으로 자루 빠진 도끼, 즉, 주인 없는 과부를 대상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겠노라 하였다. 여기에서 필자는 왜 하필이면 자루 빠진 도끼를 택했는가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노랫말은 신라 장안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을 어떻게 태종 무열왕이“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자를 얻고자 하는구나”하며, 단번에 그 뜻을 알고 궁리에게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을까 하는 향전의 기록은 모종에 미스터리를 예고하였다. 이를 두고 춘원 이광수는 그의 저서“소설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황룡사에서 분황사로 이적하여 출가 사문으로 정진하고 있을 때, 도성의 귀족 부인들이 원효를 만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했고, 이에 요석궁 공주 역시 원효를 사모한 나머지 몰래 금란가사를 지어 올리고, 매일 같이 찾아와 원효의 법문을 청했으나, 원효는 태동도 하지 않았다 했다. 하지만, 요석공주는 지난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정혼자를 잃고 홀로 요석궁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훨씬 하게 잘생긴 원효와의 만남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같은 요석공주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기어 질책하여보았지만, 이미 공주가 원효에 대한 마음이 도가 넘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록 소설로 각색한 픽션(fiction)작이라 할 수 있지만, 앞의《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 나타난 고전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실에 따른 논픽션(nonfiction)작 이라 할 만큼 세인들에게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 기록의 발상지인 경북 경주시는 사진에서와 같이 지난 2018년에 문천(蚊川)의 월정교(月淨橋)를 복원하고, 그 입구에 복원 안내표지판과 원효 관련 안내판을 세우면서, 그 문안에‘원효와 요석의 사랑’이란 내용으로 문천의 유교(楡橋)와 발굴지를 소개해 두면서 이를《삼국유사》의 원전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란 표지판에는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몰가부(沒柯斧)를 부를 때, 무열왕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적어 놓았다. 중요한 것은 동 유사(遺事)에서,“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 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즉,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궁으로 데려가라 하니,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을 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蚊川)을 지나다 만났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문천교에서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시니, 궁리가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에 가서 옷을 갈아 말리고, 거기서 머물게 하였다.”적었다. 이에 앞서 본전 말미에 “人皆未喩”라 하였다. 이는 곧 원효의 이러한 돌발적인 몰가부 노래에 신라 장안에 모든 이들은 그 노래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무열왕이 궁리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다는데 이미 원효는 요석궁 앞의 유천을 건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절묘한 시간차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호는 저잣거리 무애가가 연재됩니다.)
경향 각처 뿐 아니라 중국도 수시로 오가며 왕성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지역예술인 박도일(전,한국예총 경산지회장)의 시 ㆍ서 ㆍ화 자필전이 경산역개러리맞이방에서 열리고 있다. 2020년 5월 1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코로나19를 주제로 하여 주옥같은 작품 15점이 출품되었다. 박도일씨는 한국문인협회 경산지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산수유 피고 지고" 등 2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며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로서 중견 서예가이다. 한편 한국캘리그라피손글씨협회 이사장을 맞고 있으며 맥원 김재성 화백으로부터 한국화를 사사 중이다. 이번 전시회는 코로나19라는 희대의 유행병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 날짜가 흐르면서 상황이 변함에 따라 바뀌는 사회적인 상황, 느낌의 변화 등을 박 시인 특유의 탁원한 감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본 작품을 포함한 19점의 작품은 한국서예신문에 특집 지상전으로 펼칠 예정이다. 또한 앞으로 쓸 작품을 포함하여 30여점의 작품이 쓰여지면 중앙에서의 시화전 개최 및 시집 발간도 구상 중이다.
꿈은 이뤄집니다. 청년 웹툰작가들의 꿈을 응원하는 "제1회 행복경북 청년웹툰 공모전"이 열린다. 이번 공모전은 신예 청년 웹툰작가를 발굴하여 등용의 기회를 부여하고, 수도권에 편중된 웹툰 창작과 관련 산업의 저변을 넓히고 경북지역에 뿌리내리게 할 목적으로 개최 된다. 경상북도(도지사 이철우)와 경산시(시장 최영조)가 공동주최하고 한국만화인협동조합(이사장 조재호)이 공모전을 주관한다. 공모는 웹툰과 웹툰 스토리 2개 부문으로 이뤄지며 주제에 대한 제한은 없다. 15세 이상의 국민이면 신인, 기성작가에 관계 없이 개인 또는 그룹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 경상북도를 소재로 한 작품과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청년(만 39세 이하로 1년 이상 주소를 둔 사람)에게는 각각 100점 만점에 5점의 가산점이 주어진다. 시상은 총 17명의 수상자를 선발하여 대상 1명에게는 상금 1천만 원, 최우수상 2명(부문별 1명)에게는 각각 상금 5백만 원 등 총 4천2백만 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특히, 대상, 최우수상 수상작에 대하여는 유망 플랫폼에 연재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수상작 전체를 담은 작품집 발간과 시상식을 겸한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다. 공모기간은 7. 22.(수) ~ 7. 30.(목)까지이며, 응모는 행복경북 청년웹툰 공모전 홈페이지(http://gswebtoon.com)에 접속하여 신청서와 함께 작품을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번 공모전을 주최하는 경상북도와 경산시는“웹툰작가의 꿈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던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면서도 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문화콘텐츠 진흥 차원에서 공모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공모전을 주관하는 한국만화협동조합 조재호 이사장은“많은 청년들이 웹툰 작가를 꿈꾸지만 프로 작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며“꾸준히 실력을 쌓은 청년 작가들에게 다양한 도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청년 작가들의 적극적인 도전을 기대했다.
장산(박도일)한국캘리그라피손글씨협회이사장코로나19 장산연작시 여덟번째 -행 복-종일 집에 있느니돌아버리겠어머리에 빨간삔 꽂고비실비실 웃고 다니는여자 보거든 난줄 알아라삼식이는 식이도 아니야구식이야 삼삼은 구그 놈의 구구단은바뀌지도 않아어디로든 갈 수 있고어디서든 머무를 수 있었어행복이발바닥에 있다는 걸처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