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11-30 16:50 (월)
기사 (71건)

  본고는 지난호에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에 이어, 요석궁을 떠난 원효가 문득 까만 모자를 쓰고 속복(俗服)을 갈아입고 저잣거리에 나서 큰 박을 들고 괴상한 춤을 추면서 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데, 이번 호는 당시 그가 추었다는 무애 춤의 진정성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 제1부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 645년을 654년으로 바로잡습니다. “까만 고깔모자 쓰고 속복 입은 원효”  본고는 이 부분 역시 《삼국유사》의 찬자(撰者) 일연(一然)이 〈원효불기〉 편에 향전을 인용하였으나, 이를 두고 송나라 찬녕(贊寧)이 적은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사문 원효〉편에는 당시 원효의 행동거지를 이렇게 적었다.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여기에 원효는 얼마 안 되어 말하는 것이 사납고, 함부로 하였으며, 행적을 나타냄이 어그러지고 거칠었으니, 거사들과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었고, 지공(誌公) 법사처럼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된 석장(錫杖)을 가지고 있으면서,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화엄경]를 강론하기도 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염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였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하여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하였다.  이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행동거지로 찬술자인 찬녕마저도 찬술(纂述)에 중심을 잡지 못하였다는 표현이다. 《삼국유사》〈원효불기〉에서도, 기이한 행동은 이와 다를 바 없었다.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仍作歌流于世”  원전에 의하면,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하였고,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이로써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일체(一切)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文句)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하였다. 원효 성사의 저잣거리 무애춤[無㝵舞] 가상도(○내 춤추는 원효)  이는 앞의《송고승전》 기록과 표현양식은 서로 다르다 할 수 있으나, 그 속에 담긴 근본만은 걸림 없다는 뜻으로, 이른바 여기서 원효의 무애(無㝵)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이어지는 동《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 있다.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陁之號, 咸作南無 之稱, 曉之化大矣哉”  이를테면,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옹유(桑枢瓮牖) 확후(玃猴)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는 평가로, 이는 곧 원효의 기이한 노래가 민중들에게는 걸림 없는 무애가(無㝵歌)가 되고, 그의 그침 없는 행동은 곧 무애무(無㝵舞)가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원효의 걸림 없는 무애행은 곧 가난하게 살아가는 하층계급의 민중들과 무지렁이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이름을 익혔다는 것으로, 이는 저잣거리 민중 속에 신라불교의 대승(大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또한, 향전을 인용한《삼국유사》〈원효불기〉의 몰가부와 여기 무애가는 당시 태종 무열왕과 원효 간 모종(某種)의 언약이 실천되는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과 백제와의 전쟁상황을 미루어 볼 때, 원효의 무애춤과 무애가는 신라불교의 대개혁을 암시하는 하나의 메아리와 같은 원효의 아우성이요, 당시 신라의 소승불교에 맞선 대 저항일 수도 있다.  앞의 원효의 몰가부(沒柯斧)는 그가 세상 앞에서 자신이 파계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노래하였다면, 여기에 무애가(無㝵歌)는 이전의 몰가부에 대한 소명(召命)을 실천하는 또 다른 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몰가부가 스스로 승려로서 계(戒)를 어기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굴레라면, 무애가는 스스로 속복(俗服)으로 바꿔 입고“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면서 저잣거리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고, 이로써 신라불교가 나라를 구한다는 호국 사상을 과감히 저잣거리 곳곳에 봉기하게 하였다. 이것이 원효의 일심(一心)이요, 무애(無㝵)요, 화쟁(和諍) 사상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는 원효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 백제와의 전투에서 지칠 대로 지친 신라 정국에는 원효의 일련의 행각이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되었다. 그도 그를 것이 원효가 무애무(無㝵舞)을 통하여 민중들 앞에서 절절하게 외쳤던 무애가(無㝵歌) 속에는 곧 신라를 구하기 위한 나라 사랑의 의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만 외치면 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모두가 부처님의 세계인 극락으로 갈 수 있다.”  이는 무지한 민중들에게 나라 사랑의 의지가 되었고, 이로써 모두 하나 되는 일심(一心) 사상이 그들로부터 싹트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순교적 정신으로 신라를 구하는 대열에 자신을 불태우면서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계율(戒律)에서 벗어났고, 그 굴레를 걸머진 원효는 고깔모자에 속복을 입고 뭇 신라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였고, 또 그들을 위하여 군승(軍僧)으로써 다시 그들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 통일전에 소장된 원효의 군사 자문도  훗날 삼국 간에 전쟁이 모두 끝이 나고 원효는 전국의 전장 터를 두루 섭렵(涉獵)하며 그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외로운 넋을 위로하고 추선(追善)하였던 그곳에는 무려 100여 개소에 달하는 원효사·원효암이 곳곳에 세워진 것 또한 이와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0-11-18 21:25

  지난 7일 코로나로 인해 관객과의 대면공연이 어려워진 가운데 한국아이국악협회는 경산의 대표 공간인‘경산향교’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비대면‘퐁퐁퐁 국악한마당’을 기획하여 국악공연 영상을 촬영하여 송출했다.  어린 시절 비눗방울 놀이는 누구나 경험했을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있는 놀이 재료로 현재는 전문가에 의해 다양한 도구와 기술들이 결합하여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아동들에게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예술활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날 국악과 버블아트가 융합된‘퐁퐁퐁 국악한마당’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국악은 낡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어나 흥겨운 공연으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장르의 결합을 통해 창의ㆍ융합 예술을 경험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퐁퐁퐁 국악한마당’은 허재윤(지부장/기획), 권태룡(연출), 경기민요 박효지(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우주경(한국무용), 여윤아(해금), 정연준(피리), 함연수(가야금), 등의 청년예술가와 버블아티스트 하마쌤(조동식), 김희준(블루노트 대표/촬영)이 함께했다.  한국아이국악협회 지부장 허재윤은“아동들을 위한 국악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전통을 매개로 주체가 되어 예술적 동반 성장을 함께하고, 타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소통 시너지를 창출”하여“국악과 버블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경산의 특징적인 공연으로 거듭나며 유아와 어린이를 위한 대표 공연물이 되고자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본 공연은 2020 경산시지방보조금 선정 작품이다.  공연관람 ☞ https://youtu.be/BYsx4763ZB0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0-11-15 16:28

  경상북도와 독도재단(이사장 이철우)은 10월 독도의 달을 새기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선보인다.  먼저,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이 독도자료 보존을 위해 손을 맞잡는다. 10월 13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경북도와 국립중앙도서관, 울릉군이‘디지털 독도 아카이브 협약식’을 통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지도 등 독도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경북도가 후원하는 학술행사도 10월 21일부터 23일까지 연이어 개최된다. 21일 포스텍 국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재)독도재단)가 개최되고, 22일 영남대학교 법학도서관에서는‘울릉도ㆍ독도 해양보호생물 관리활성화 세미나’(주관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 개최된다.  또한, 23일에는 경북대학교에서‘해양생태 및 섬 생물학 국제학술대회’(주관 경북대학교 울릉도ㆍ독도연구소) 열려 독도와 해양생태에 대한 방향을 모색한다. 10월 말에는 대구한의대 등과 공동으로‘독도지킴이 안용복 조명 좌담회’도 마련한다.  경북도는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독도 사진전, 독도상품 비즈페어 등 다양한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12일간 경북도서관 전시실에서는 지역출신‘원로 사진작가 김재도 독도 사진전’를 개최하며, 24일에는‘독도 민간단체 워크숍’을 갖고 민간단체 대표들과 독도 수호 활동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독도관련 고지도 DB 구축 사업에 대한 성과를 온ㆍ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11월 7일에는 대구 수성못 상화동산에서 학습용 교재, 문구류, 의류 등 독도관련 상품을 온ㆍ오프라인 동시에 전시 판매하는‘제2회 독도상품 비즈페어’도 진행해,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이 되고 독도 상품의 산업화ㆍ생활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각종 이벤트도 함께 진행한다. 독도재단에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제작, 해외 한인교육기관이나 재외동포, 독도단체에 배부해 대한민국의 땅! 독도 사랑의 의미를 되새긴다.   또한,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사업이 어려워짐에 따라 독도 이미지와‘Dokdo of Korea’가 새겨진 독도마스크를 제작해 미국, 일본 등의 국내외 독도 관련단체에 지원할 계획이다.  경북도와 (재)독도재단은 모든 행사장내 코로나19 방역 예방지침을 준수토록 하고 마스크 착용 의무화, 손소독제 비치, 관람객 발열체크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등 단계별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갈 방침이다.  김성학 경상북도 해양수산국장은“올해는 대한제국 칙령 반포 12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로 독도가 평화로운 우리 땅이라는 국제적 위상제고를 위해 데이터 구축사업에 앞장서겠다”면서,“앞으로도 코로나 상황을 감안해서 꼭 필요한 이벤트나 학술대회 위주로 개최하여 독도영토주권을 위해 내실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20-10-19 17:55

  제1부 원효는 왜 문천교에서 몰가부를 노래했나? 《삼국유사》권 4, 이해 5,〈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였다.  당시 이를 찬술한 일연(一然)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당한 미스터리가 없지 않다.  먼저 몰가부를 소개하는 첫머리에 원효가 하루는 풍전(風顚)하여 거리에서“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 소리치며 다녔다 하였다.  이 시기에 원효는 의상과 의기투합하여 일차 당나라에 구법길을 떠났다 수나라 국경수비대에 간첩으로 오인당하고 1주일이나 억류된 후 풀러나 환국하였던 서기 651년경이다. 이 시기에 신라 정국은 잦은 백제국의 침입으로 백제와의 전쟁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당나라 구법 길에 오르던 신라의 한 승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환국한 후, 어느 날 느닷없이“내게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느냐, 그러면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세우겠다.”하는 괴이한 노래를 부르고 다닐 수 있냐는 것이다. 특히 그 시점은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이 재위할 즈음이고, 이후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이 등극 3년을 앞둔 시기로, 원효의 세납은 34세였던 시기다.  어떠한 연유이던 비록 6두품 출신이지만, 황룡사와 분황사 서고에서 수많은 서책을 두루 섭렵한 명망 높은 승려가 느닷없이‘네가 과부를 얻어 아들을 낳겠다’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기록은 그것이 비록 향전(鄕傳)이라 하더라도 상식 밖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본 기록에는 원효의 행각을 풍전(風顚)이라 기록하였지만, 당대에 주목받든 승려가 어느 날‘바람났다.’,‘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미루어 보아 신라조정에서 과연 이를 방관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부정적인 시각은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에는 왜 하필이면 신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그 무렵인가 하는 데서 이를 동《삼국유사》를 통하여 재론하고자 한다.  동 기록에 의하면, 원효의 파계 동기는 귀책사유가 당연히 원효에게 있다는 것이며, 이의 행각을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점이 된다.  하지만, 소상하지는 않지만,《삼국사기》권제 46 열전 제6 설총편에 기록은 이와 또 다른 다음과 같은 양면성이 있다. “薛聰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掩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원효는 처음에 상문(桑門-沙門)이 되어 불서에 널리 통달하였고, 얼마 후에 본색(本色)으로 돌아와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했다. 여기서 상문(桑門)이란 출가를 의미하고, 본색(本色)이란 본래의 모습으로,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처인 인간의 그 본래 모습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이같이《삼국사기》에는 원효에 파계 부분은 일체 언급한 바를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설총의 부라 명기하였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동《삼국유사》기록을 근거로 사건의 발생 및 전개 시기를 유추하면, 이는 651년 환국하여 3년 이후인 645년, 즉 태종 무열왕 등극 원년(元年)인 셈이 된다.  이 시기는 원효의 세납이 37세가 되는 해로, 그간 환국 후 일정한 사찰 없이 남산에 몸을 숨기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발심수행장”과“법화경종요”를 집필하였던 시기로 유추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때 어느 날 저잣거리에 나돌며 몰가부란 노래를 불렀고, 그것도 노골적으로 자루 빠진 도끼, 즉, 주인 없는 과부를 대상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겠노라 하였다.  여기에서 필자는 왜 하필이면 자루 빠진 도끼를 택했는가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노랫말은 신라 장안에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을 어떻게 태종 무열왕이“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현자를 얻고자 하는구나”하며, 단번에 그 뜻을 알고 궁리에게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을까 하는 향전의 기록은 모종에 미스터리를 예고하였다.  이를 두고 춘원 이광수는 그의 저서“소설 원효대사”에서 원효가 황룡사에서 분황사로 이적하여 출가 사문으로 정진하고 있을 때, 도성의 귀족 부인들이 원효를 만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했고, 이에 요석궁 공주 역시 원효를 사모한 나머지 몰래 금란가사를 지어 올리고, 매일 같이 찾아와 원효의 법문을 청했으나, 원효는 태동도 하지 않았다 했다. 하지만, 요석공주는 지난날 백제와의 전투에서 정혼자를 잃고 홀로 요석궁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훨씬 하게 잘생긴 원효와의 만남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 같은 요석공주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기어 질책하여보았지만, 이미 공주가 원효에 대한 마음이 도가 넘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비록 소설로 각색한 픽션(fiction)작이라 할 수 있지만, 앞의《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 나타난 고전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사실에 따른 논픽션(nonfiction)작 이라 할 만큼 세인들에게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 기록의 발상지인 경북 경주시는 사진에서와 같이 지난 2018년에 문천(蚊川)의 월정교(月淨橋)를 복원하고, 그 입구에 복원 안내표지판과 원효 관련 안내판을 세우면서, 그 문안에‘원효와 요석의 사랑’이란 내용으로 문천의 유교(楡橋)와 발굴지를 소개해 두면서 이를《삼국유사》의 원전을 인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란 표지판에는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몰가부(沒柯斧)를 부를 때, 무열왕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적어 놓았다.  중요한 것은 동 유사(遺事)에서,“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 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즉, 왕이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궁으로 데려가라 하니, 궁리가 칙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을 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蚊川)을 지나다 만났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문천교에서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시니, 궁리가 원효를 데리고 요석궁에 가서 옷을 갈아 말리고, 거기서 머물게 하였다.”적었다.  이에 앞서 본전 말미에 “人皆未喩”라 하였다. 이는 곧 원효의 이러한 돌발적인 몰가부 노래에 신라 장안에 모든 이들은 그 노래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오로지 태종 무열왕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점이다.  이로써 무열왕이 궁리를 시켜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라는 칙명을 내렸다는데 이미 원효는 요석궁 앞의 유천을 건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절묘한 시간차가 아닐 수 없다. (다음 호는 저잣거리 무애가가 연재됩니다.)     

문화 · 예술 | 김종국 기자 | 2020-10-19 17:50

  꿈은 이뤄집니다. 청년 웹툰작가들의 꿈을 응원하는 "제1회 행복경북 청년웹툰 공모전"이 열린다.  이번 공모전은 신예 청년 웹툰작가를 발굴하여 등용의 기회를 부여하고, 수도권에 편중된 웹툰 창작과 관련 산업의 저변을 넓히고 경북지역에 뿌리내리게 할 목적으로 개최 된다.  경상북도(도지사 이철우)와 경산시(시장 최영조)가 공동주최하고 한국만화인협동조합(이사장 조재호)이 공모전을 주관한다.    공모는 웹툰과 웹툰 스토리 2개 부문으로 이뤄지며 주제에 대한 제한은 없다. 15세 이상의 국민이면 신인, 기성작가에 관계 없이 개인 또는 그룹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 경상북도를 소재로 한 작품과 경상북도에 거주하는 청년(만 39세 이하로 1년 이상 주소를 둔 사람)에게는 각각 100점 만점에 5점의 가산점이 주어진다.  시상은 총 17명의 수상자를 선발하여 대상 1명에게는 상금 1천만 원, 최우수상 2명(부문별 1명)에게는 각각 상금 5백만 원 등 총 4천2백만 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특히, 대상, 최우수상 수상작에 대하여는 유망 플랫폼에 연재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아울러 수상작 전체를 담은 작품집 발간과 시상식을 겸한 전시회도 계획하고 있다.  공모기간은 7. 22.(수) ~ 7. 30.(목)까지이며, 응모는 행복경북 청년웹툰 공모전 홈페이지(http://gswebtoon.com)에 접속하여 신청서와 함께 작품을 제출하면 된다.  한편, 이번 공모전을 주최하는 경상북도와 경산시는“웹툰작가의 꿈을 위해 수도권으로 떠나던 청년들이 지역에 머물면서도 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문화콘텐츠 진흥 차원에서 공모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공모전을 주관하는 한국만화협동조합 조재호 이사장은“많은 청년들이 웹툰 작가를 꿈꾸지만 프로 작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며“꾸준히 실력을 쌓은 청년 작가들에게 다양한 도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청년 작가들의 적극적인 도전을 기대했다.  

문화 · 예술 | 김도경 기자 | 2020-05-08 11:19

경산시번영회 사무국장박   승   표  1. 자인현 역사적 개황  1) 역사적 변천  자인은 노사화(奴斯火), 기화(基火) 또는 인산(仁山)이라 불렀다.  자인의 옛 이름인 奴斯火(노사화)는 상고의 촌락국가라 할 수 있는 伐二火(벌이화) 였고, 자인 북사리 고분의 부장품을 보면 임당 고분과 같아 가야 시대 압독국 속지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자인으로 개칭하여 獐山郡(장산군, 지금의 경산)의 속현이 되면서 자인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려 8대 현종 9년(1017년)에는 경주부에 領縣(영현)이 되어 완전히 그 독자성을 상실하였다.  자인이 復縣(복현)이 된 조선 16대 인조 15년(1637년)까지 873년 간을, 특히 경주의 영현이 된 이후의 621년간은 참으로 어렵고 억울한 시기의 생활로 지내왔다.  불교의 성사 원효와 유교의 대현 설총 부자가 탄생한 이 고장이 보잘것없는 고장으로 변했다.  1632년 복현운동의 불꽃이 지펴진 것은 白濂(백렴)에 의하여 시작되어 거현적으로 발전하고 더디어 그 5년 후에 소원이 성취되었다.  이전에는 자인이 왜구와 왜란으로 쓰라린 고통을 당했을 때 현의 백성을 구한 한 장군과 의병장 崔文炳(최문병) 등의 큰 功을 잊을수 없다.  자인이 복현된 후로는 역사는 전일의 불공정 하였던 일을 보상하는 뜻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정에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지방관으로 최하위인 현감의 고을임에도 자인만은 대부분이 문과 급등의 守令이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이웃 고을이었고 현재는 같은 경산시에 속해 있는 하양을 두고는“河陽雖小 將相之邑”(하양수소 장상지읍)이라 불렀듯이 자인을 두고서는“慈仁雖小 聖賢之邑”(자인수소 성현지읍)이라고 불렀음으로 보아 큰 고을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 현의 명칭  자인의 옛 지명 奴斯火(노사화)의 어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或 者는“奴”를 종, 노예로 보는 경향이 짙은데 그러면 자인을 종의 고을로 삼았다는 말인가.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필자가 보는 견해의“奴”는 신라국으로 속하기 전에는 압독국의 영속이였기 때문에 신라국으로 편입되면서 노새 편입된 새롭고 편안한 땅이란 뜻으로 붙여졌으며 신라의 옛 이름을 서라벌과 함께 斯盧(사로)라는 이름이 쓰인 것으로 보아“奴斯”는 신라국의 중요한 새로운 지역으로 높여 부른 지명으로 본다. 또한“火”는 오행의 하나로서 方向→南, 時期→夏(여름), 十干→丙丁, 五事→視(시?眼), 五藏→心(심)을 뜻하기에 결론적으로 노사화는 신라 변방에 있는 중요하고 보배로운 지역이라는 높은 뜻의 地名이다. 후일 자인으로 변경된 것 역시 원효의 출생지로 불교의“慈”와(자·자비) 유교의“仁”을 택함으로써 성스러운 천명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며, 기화는 잘못된 이해와 표기인 듯하다.  2. 시대별 변천  1) 선사시대  경주의 옛 이름은 徐羅伐(서라벌)이라 하지만 실지로 신라국과 같은 이름이다.  경주 인근의 安康(안강)의 옛 이름은 音汁伐(음즙벌), 音質國(음질국)이라고 하며 같은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보면“변한은 남쪽에 있는데 12소읍 즉 작은 고을이 각기 나라로 일컬었다.(弁韓在南 十二小邑 各稱國)  上代에 自治의 村落이 그대로 국가의 행세를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차츰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昌寧(창녕)의 옛 이름은 比自火(비자화), 比斯伐(비사벌)이라고도 하였는데 火는 古語의“블”이고, 伐(벌)은 음이“벌”이니, 이는 초기 농경사회의“들”“촌락”또는, 국가와 맥을 같이 한다.  영남방언에서 아직도 들을수 있는“어”“으”의 음운 현상은 火와 伐의 통용임을 명확히 증명된다.  따라서 우리 자인의 옛 이름은 奴斯火이니 상대사에서 자인의 위상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노사화의 일명은 其火(기화)라 하니, 其火(기화)와 奴斯火(노사화)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의 해상왕 張保皐(장보고)의 일명이 弓福(궁복)이라 했으니 이들 관계도 일명의 其火나 弓福은 그 당시 전해오던 고문현의 보존 상태에서 기인한 것이다.  장보고란 중국식이 아닌가 싶다. 궁복이 오히려 본명 일수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찍이 당에 가서 무공까지 세워 소장까지 승진한 사람이니 계속 장보고로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문헌의 훼손으로 張에서 長이 지워져 弓만 남고 保皐(혹은 寶高)에서 韻母(운모 음절에서 中聲±終聲)“오”가 탈락하여 전음절“보”의 종성으로 첨가된 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奴斯火에서 奴는 안보이고 斯는 斤이 떨어져 나가 其만 남아 其火가 된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곧 其火는 奴斯火의 오류로 볼만하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에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농경사회를 이룬 것이 확실하다.  20c 초기에 김해 貝塚(패총)에서 炭化米(탄화미)가 출토되었지만 1977년 驪州(여주)에서 출토된 炭化米(탄화미)는 3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하고 있고 人類學(인류학)에서는 단순농업 경제시대를 적어도 80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奴斯火(노사화)이던 상대의 자인이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의 촌락국가였음을 전래의 문헌의 기록과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적과 출토된 유물로 알 수 있다. 支石(지석-고인돌)의 호칭은 켈트(celt語 dolmen=dol(table)+men(stone)으로 卓子石(탁자석)이란 뜻인데 혹 묘라고도 하고 제단이라고도 하니 아마 두 기능을 함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어느것이든 원시종교인 샤머니즘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선돌 역시 지석과 같이 거석문화의 형태이다.  특히 용성면에는 근 10여 기의 지석이 있고 신석기 시대의 무문토기와 마제석기 등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입석은 자인면 교촌리와 용성면 고죽리에서도 볼 수 있다.  2) 신라 시대  德業日新 網羅四方  우리나라 역사에서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列國時代(열국시대) - 고조선 말기 제후국들의 독립세력이 등장하여 여러 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동예, 옥저, 삼한(마, 진, 변) 등  - 四國時代(사국시대) -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駕洛國)  - 三國時代(삼국시대) - 고구려, 백제, 신라  - 南北國時代(남북국시대) - 신라와 발해(渤海)  - 高麗時代(고려시대)  - 朝鮮時代(조선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BC 59년경 徐羅伐(서라벌-신라)에서 朴赫居世(박혁거세)가 개국한 시기와 함께 그 후의 상당한 기간까지도 奴斯火(노사화-자인) 주변에 伊西國(이서국-청도)과 押督國(압독-경산) 등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중앙집권 국가가 있기 이전으로 列國時代라 할 수 있지만 통솔적으로 新羅(BC 59~AD 935)의 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에 볼수 있는 유물로는 자인면 북사리 1호 竪穴式(수혈식) 石室古墳(석실고분)에서 출토된 金製耳飾(금제이식)과 銀製?帶(은제과대-은 허리띠) 같은 것으로 보아 고대 자인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노사화를 자인으로 개칭한 것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의 일이다.  이때는 대대적으로 지역명과 행정구역 개편이 일어난 시기이며, 이때 慈仁은 獐山郡(장산군)에 소속된 현으로 남게 된다.  장산과 경산은 고호이고 이전 시대의 압독소국으로 6대 祗摩王(지마왕 112~134년)의 치세에 항복하였다. 한편 군에는 태수를 두니, 115인인데 관등은 舍知(사지 13等官)에서 重阿飡(중아찬 6等官 4級)까지이고 縣令(현령)은 201인으로 先沮知(선저지 17등관)에서 沙飡(사찬 8등관)까지였다.  그 동안 많은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있었고 특히 신라 21대 炤智麻立干(소지마립간-왕) 시대에는 구휼정책으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민생을 구제하였고 靺鞨(말갈)의 잦은 침입으로 국란을 겪기도 하였다. 22대 智證王(지증왕) 때부터 왕이란 시호를 드림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통일은 30대 문무왕 8년의 일이고 국학을 설립한 것은 31代 神文王(신문왕) 2년(682년)의 일이다. 35대 景德王(경덕왕) 16년에는 지명을 완전히 한문식으로 바꾸었다.  38대 元聖王(원성왕) 4年(787年)에는 과거 제도인 독서 三品科(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였다. 그중에는 휠씬 이전부터 사교육이 있기도 하였지만 공교육 제도인 국학의 설립과 공적인재 등용을 위한 두서삼품과 실시는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신라시대의 자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큰 광채있는 사건이 元曉聖師(원효성사 617~658년)의 출생이다. 출생 당시 자인은 압량군 屬地(속지)였다.  조부는 仍皮公(잉피공)으로 祠廟(사묘)가 세워진 만큼 공로가 있는 분이었고 부는 談捺(담날)로 乃末(내말) 11등관)이었고 兒名은 誓幢(서당), 또 新幢(신당)이니 동음이서이다.  원효성사의 출생지에 관하여는 현재 압량 신월리, 동부동 여천, 유곡 등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필자는 단연코 거부한다.  자인이 틀림없는 출생지로 보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三國遺事“元曉不羈(원효불기)”에는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裟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裟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裟羅樹 其樹之實赤異於常……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 娑羅……拂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원효는 압량군의 남쪽(後 章山郡) 불지촌의 북쪽, 北四一里 栗谷 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지명은 불지 發智村(俗言 弗等乙村)이라 불렀다.  사라수는 서라벌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던 어머니가 해산끼를 느끼고 밤나무에 남편의 옷을 걸치고 그 나무 아래서 해산한 것이다.  그 후 그 밤나무에 열린 열매가 가사색을 닮아 푸르며 너무 크고 신기하여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불렀다. (例 : 菩提樹 釋迦牟尼의 깨달음의 나무)  佛地村, 初開寺, 栗谷, 佛地, 金堂寺(新林寺) 等 考察해 보면 원효의 출생지는 자인 북사리 불당고개(옛-栗谷)임이 틀림이 없다. 아들 설총의 탄생지도 우리 현인 것이다.  자인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帝釋庵(제석암)을 더깊이 고증한다면 원효의 출생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질 것으로 확신한다.  원효는 義湘(의상-625~702年) 스님과 唐(당)으로 유학가기 위해 遼東(요동)으로 가던 중 지금의 수원 부근의 무덤가에서 자다가 두개골에 고인 물을 달게 마시고 아침에 그것을 보고는 크게 깨달아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두개골도 다름없이 사라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觸?不二)  (심생칙종종법생 심멸칙촉루불이)  홀로 되돌아와 불교에 심취하고 불학에 정진하였다. 원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세분의 스님으로는 고구려에서 옮겨온 전주 고대산 景福寺(경복사)의 普德和尙(보덕화상), 梁山(양산) 靈鷲山(영축산)에 은거한 朗智大師(낭지대사), 迎日(영일)의 金梯山(금제산), 吾魚寺(오어사)에서 經疏(경소)의 의문점을 풀어주던 惠空和尙(혜공화상) 등이 있다.  원효는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우뚝솟은 학문과 사상의 대가이며 스승이 되었다.  大乘起信論蔬(대승기신론소)는 중국에서 海東蔬(해동소)라 하여 大蔬(대소)로 여긴다.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에 원효를 인용한 學僧(학승)은 50여명이나 되고, 인도에서도 陳那(진나)의 후계자들이 十門和諍論(십문화쟁론)을 梵語(범어)로 번역하였다 하니 이 화쟁론이야 말로 저술 학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華嚴經(화엄경)에 대한 여러 異論(이론)을 融會和合(융회화합) 시켜 대동중도의 이해와 실천을 논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전해진다.  이는 후일 大覺國師(대각국사-1055~1101년)의 敎禪一致(교선일치)나 西山大師(1520~1604년)의 삼교일치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므로 金富軾(김부식-三國史記)는 和諍國師影讚(화쟁국사영찬)에서“白用其海 萬象 一天廣矣大矣 莫得名焉”(백용기해 만상 일천광의대의 막득명언) “온 하천이 바다로 들어가고 모든 형상이 한 하늘에 있도다. 광대함이여, 위대함이여 이름을 부를 수 없도다” 라고 칭송하였다. 이 외에도 金剛三昧經論蔬(금강삼매경론소)도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  원효는 총 99부 240여권의 저술을 하였다 하니 그의 학문의 광범위성은 미루어 짐작하기도 어렵다.  고려 15代 肅宗(숙종) 6년 1101年에는 大聖和靜國師(대성화정국사)로 贈諡(증시) 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는 靜은 諍의 착오인 듯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儒敎聖賢(유교성현)으로 추앙받는 薛聰(설총)은 부 원효 모 瑤石公主(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 談捺(담날) 밑에서 수학하였고 아버지 원효는 소성거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설총은 俊才(준재)로 유학을 섭렵하여 대성하였고 翰林(한림)이란 관명을 쓴 것으로 보아 국학에서 諸生(제생)을 교수하였을 것으로 본다.  설총은 신문왕에게 花王戒(화왕계)를 바쳐 관계를 맺었고 吏讀(이두)를 창제, 정리함으로서 문자교육의 필요성을 일찍 알게 되었다.  花王戒(화왕계)는 왕을 諫(간)하는 글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散文(산문) 중에서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文體(문체)는 당시 유행하던 騈儷體(변려체)이었다. 고려 8대 顯宗(현종) 18년(1022년)에 弘儒候(홍유후)로 追封(추봉)되고 文廟(문묘)에 향시되니 東國(동국) 18위의 儒敎聖賢(유교성현) 중 최초의 인물이다.  3) 고려시대  奴斯火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자인으로 개명하여 현이 되고난 이 후로 獐山郡(慶山)의 領縣이 되어 오다가 고려 8대 현종 9년(1017년)에는 다시 경주의 영현으로 이속되어 조선 중엽까지 내려왔다.  고려의 태조 13년(930년) 아직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西京(平壤)에 학교를 창설한 것은 아마도 고려라는 국명이 大高句麗(중국에서는 고구려도 흔히 고려로 칭하기도 했음)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학교를 그 국도에 세웠을 것이다.  惠宗(혜종) 원년(944年)에 翰林院(한림원)이란 명칭이 보임은 고려가 국초부터 교육과 학문에 노력을 크게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6代 성종 6년(987년)에는 12牧에 학교를 세웠고 8대 현종 13년(1022년)에는 薛聰에게 弘儒侯(홍유후)를 追封하여 文廟에 종사(從祀)하였고 15代 肅宗(숙종) 6년(1101년)에 오히려 늦은 감이 있기도 하지만 元曉에게 大聖和諍國師(대성화쟁국사)로 贈諡(증시)하였다.  16代 睿宗(예종)은 즉위하자(1105년) 各州 縣의 지주사와 현영으로 進士(朝鮮의 文科) 출신자는 학사를 겸임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12C에는 각 고을에 학교 곧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본다.  신라시대에 심심찮게 있었던 倭寇(왜구)가 고려의 건국이후 23대 고종 9년(1222년)까지 300년 가까이 침입해 오는 일이 없다가 그 다음 해를 시작으로 國亡(1392년)까지 170년 동안에 왜구의 침입 횟수는 400회가 넘고 지역은 全 국토를 덮으니 실로 未曾有(미증유)의 환란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중 32대 우왕 5년(1379년) 6월에는 더디어 청도, 밀양, 자인에도 왜구의 침입 시 있었다.  이때 禹仁烈(우인열 1337~1403년)이 경상도 上元帥(상원수)로 왜구를 무찔렀다.  이 사실을 두고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전해오는 경산, 자인 단오제-한장군 놀이에 등장하는 한장군을 두고 고려말 인물로 보고 있다.  그 論據(논거)는 다음과 같다.  ① 韓-新羅時代의 韓은 王號 干 또는 蒙古語(몽고어) khan과 같은 呼稱이며,  ② 韓將軍-韓 아래 將軍을 붙여 불러왔다는 것은 語構成(어구성)이 王 十將軍 같아 이상하다.  ③ 韓將軍 놀이?깃발에서 獐山司命旗(장산사명기)를 볼 때 자인이 경산에 소속되어 있던 시기가 신라에서는 170년 고려에서는 82년이라 해도 한장군이 경산인으로 자인에 와서 싸웠다면 그 소속된 시기는 불명하다.  ④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문병이 七言詩에 언급한 韓宗愈(한종유 1283~1354年)는 軍務(군무)에 종사한 기록이 없고 전래의 고려말기 설에 의거 추정한 것으로 본다.  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가 34대 禑王(우왕) 5년 (1379년)에 蔚州(울주-지금의 蔚山), 청도, 밀양, 자인, 언양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경상도 상원수 禹仁烈(우인열-1337~1403년)이 이를 격퇴한 점을 연결해 보면 고려말 인물이라 함이 더 가까울 것 같다. 라고 설하고 있으나,  필자가 보는 한장군에 의견은 다음과 같다.  ① 자인이 장산에 처음 소속된 시기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奴斯火(노사화)에서 자인으로 개칭되면서 장산군 소속 현이 되었다.  ② 장산사령기에 대해서는 자인현의 상급 기관이 장산군이기 때문에 앞세웠던 것으로 본다.  ③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문병께서 韓宗愈(한종유)라고 언급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수 백년 세월이 흘러 오면서 전래되어 오는 이름을 거론한 것으로서 본다.  여러 역사가들이 지목하는 고려말 韓宗愈(한종유) 보다 문무관직에 오르지 아니한 토착 고을 백성중에 대향 애국심이 높고 무술에 능한 장정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문무관 중의 한 사람이였다면 그 공적에 대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관 주도로 이루졌을 것인데 현재 자인 太首(태수)로 추앙하는 한장군은 민초들이 중심이 되고 현감이 후원하는 형태로 전래된 점으로 볼 때 실존 향민의 의병의 한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훨신 타당할 것이다.  ④ 고려 34대 禑王(우왕) 5년(1379년) 울주, 청도, 밀양, 언양, 자인에 침입한 왜구을 禹仁烈(우인렬) 상원수가 격퇴한 것은 집단적 조직적 침입 형태이기에 관이 주도하여 물리친 것이고 자인에서의 한장군이 殲滅(섬멸)한 왜구는 도천산성에 기거하면서 고을 민을 괴롭힌 숫적으로 많지 않은 잔당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  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慶州府 慈仁縣?에  民俗質朴有羅代之遺風  女圓舞新羅時有韓將軍  失其名或云宗愈  이하생략  위 사실로 볼 때 한 장군을 기리는 자인단오 한 장군 놀이는 신라시대부터 전래해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 실존 인물에 대한 이견은 학자들에 따라 있을수 있으나 원적인 이해를 부정한다면 전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인에 있어서는 한장군은 태수로, 영웅으로 길이 推仰(추앙) 받을 것이다.만일 실존인물이 아니였다면 자인현내 일곱곳이나 사당을 짓고 제사를 그 오랜 세월동안 지내 왔을까 하는 점에 한번 더 깊이 숙고함이 필요하다.  4) 조선시대  (前期)  자인현은 여전히 경주부의 소속으로 지방관 곧 현감이 부임하지 않았다.  경주부의 영현으로서 자인 주민들의 생활을 억울하고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성리학자 慶州府尹(경주부윤) 李楨(이정)은 특별히 13대 명종 17년(1562년) 자인현에 학교를 세워 학문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비참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임진왜란인데 조선기의 倭(日本)와어 관계를 먼저 본다. 조선에서 일본에 사절을 보낸 횟수가 태조~세종(1392~1450) 59年 동안에 49회 단종~성종(1452~1494) 43年  동안에 12회 燕山君(연산군)~선조(임진 1592년) 103년간 단 4회 보냈다. 총 65회 사절을 파견한 것 중에 단 20회만이 幕府(막부. 왜의 중앙집권 실체)에 보내고 나머지 45회는 대마도 등 藩主(번주)에게 보낸 것이다. 이 사실로 보면 조선은 왜의 정보에 매우 어두웠던 것이다.  禮曹(예조)의 명의로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과분한 것으로 당연히 경상도 觀察使(관찰사) 명의로 파송되어야 했었다.  對馬島(대마도)는 朝鮮(조선)과 가장 가까운 倭寇(왜구)의 전초기지가 되고 있었다. 世宗元年(세종원년 1419年) 5月에 對馬島(대마도) 반란자들에 의한 왜구가 있어 전일부터 대일 강경책을 써온 上王(상왕) 太宗(태종)의 의견을 따라 다음달 6월 19일 도체찰사 李從茂(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니 이것이 己亥東征(기해동정)이다.  9월 25일에 이르러 항복을 청해왔고 25년(1443년)에 계해조약을 맺었고 歲賜米豆(세사미두 매년 쌀과 콩을 내림)가 200석이었다.  이 외에도 150석이 더 지급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중종 5년(1510년)에 三浦倭亂(삼포왜란)이 있었고 39년(1544년)에 蛇梁津倭變(사량진왜변)이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戰國時代(전국시대 1467~1568년)가 100년간 계속되다가 織田信長(직전신장 오다노부나가)이 전국을 장악하였으나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586년 ?臣秀吉(풍신수길 도요도미히데요시)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풍신수길은 권력의 평정하면서 거느린 부하 무인들의 전투력을 나라 밖으로 돌림으로서 국내의 安全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식민지 개척에 야심을 두게되어 일으킨 것이 임진왜란이다.  14대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하오 4시 경에 加德島(가덕도) 烽火臺(봉화대)에서 敵船(적선) 90여척이 선두로 釜山(부산)에 접근해 옴을 알려오고 다음날 14일에는 부산을 공격하였다.  一番隊(일번대)에서 三番隊(삼번대) 그리고 후속대 수군을 합하면 전쟁에 참가한 왜군의 총병력은 거의 20만 명에 달하였다. 14일에 부산이 함락되고 15일에는 東萊(동래)가 함락되었다.  4월 15일 양산의 官屬(관속) 5?6名이 崔文炳(최문병) (당시 36세)에게 찾아와 양산과 彦陽(언양)을 침입한 戰況(전황)을 전하자 崔文炳(최문병)은 크게 놀라고 진노하였다. 며칠 뒤 밀양과 청도가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사당의 신주를 받들고 가족과 노복을 거느리고 현동, 구룡산, 물한동, 능적골(현제 용성 용전동)으로 피난하였다.  5월 20일 피난한 수십명과 사방에 통문을 띄워 사람을 모았다.  이 때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6명이 찾아왔으며 충의로서 의병을 설득하였다.  5월 7일에 千丈山(천장산)에 祭壇(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맹세한 다음 의병을 진용을 갖추었다.  그 후 의병장 최문병은 하양, 영천, 신령, 아화, 청도, 울산 태화평, 창령 화왕산 등지에서 수많은 전공을 거두어 鄕民(향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켰다. 義兵將(의병장) 崔文炳(최문병)은 어모장군(禦侮將軍) 訓鍊僉正(훈련검정)으로 승진되었으며 사後 가선대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추증(追贈)되었다.  후손들은 성제 최문병을 높이 추앙하고 자인 원당 용계서원에서 향사를 지내면서 기리고 있다.  필자는 의병장 최문병에 대한 내용은 간략하게 대신하고“省齊先生 實記”을 자세하게 소고하여 전할 것을 약속한다.  선조 31년(1598년) 8월 풍신수길이 죽자 11월까지 왜군이 철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柳成龍(유성용) 李元翼(이원익) 李德馨(이덕형) 등의 조신과 李舜臣(이순신) 權慄(권률) 金時敏(김시민) 등의 관군 장수와 곽재우) 趙憲(조헌) 鄭文孚(정문부) 외 승병 등 의병이 장수와 명국의 원군 장수 李如松(이여송) 麻貴(마귀) 등의 전공을 받들 수 있다.  선조 37년(1604년) 사명당 유정이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幕府(막부)의 德川家康(덕천가강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講和條約(강화조약)을 맺고 3.500여 명 포로를 刷還(쇄환) 함으로서 임란은 끝을 맺는다.  최문병 의병장도 전란의 영향으로 病患(병환) 얻어 1599년 8월 4일 공의 나이 43세에 울곡리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결과 조. 중. 일 삼국이 받은 영향도 매우컷다.  조선은 수많은 인명이 殺傷(인구의 절반)되고 문화재가 소실 약탈 당하였다.  임란전에 170만 결이던 경작 면적이 80만 결로 줄어 들었다.  명국 또는 원군의 전비 충당에서 큰 재정적 과중이 결국 명의 멸망의 큰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약탈해간 문화재 외에 新儒學(신유학)과 算學(산학)이 전래되어 도자기와 활자의 기술이 전수되었다.  자인은 임란 당시 영헌에 불과하였으나 궐기한 의사의 수가 다른 고을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아주 특기할 만 하다.  고려시대 이후 뛰어난 학자나 문,무인이 기록으로는 없었으나 漢陽(한양) 출신 奉常時(봉상시) 主簿(주부) 朴雲達(박운달 1492~1554年)이 대원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樂山遺集(요산유집)을 남겼고 蔚谷里(울곡리)出生 의병장 최문병 역시 省齊實記(성제실기)를 남김으로서 임진왜란의 참상과 함께 역사적 진실을 간직하고 公의 애국충절과 지혜를 배울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상동면에 은거한 李承曾(이승증 16C)은 출중한 효행으로 동국신속 삼강행실에도 수록되어 있다.  (後期)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 만인 16대 인조 5년(1627년)에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니 滿洲(만주)의 胡族(호족)을 통일한 청의 태조 奴兒哈赤(노아합적 누르하치)를 이은 2대 태종 천덕 1년이었다.  이때 청과 조선은 형제지국을 맺었으나, 인조 10년에는 君臣之義(군신지의)와 금은 각 1만량 오색포 5백만 疋(필) 등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는 조선에 대해 14년(1636년) 12월에 드디어 청태종은 10만 대병을 거느리고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침공하여 왔다.  斥和派(척화파)인 金尙容(김상용) 등과 주화파인 崔鳴吉(최명길) 등은 비록 대립은 하였으나 둘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수없는 정기와 상황에 표출이었다.  다음 해 정월 30일에 왕은 피난 온 남한산성에서 三田渡(삼전도)로 내려와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때 자인에서는 복현운동을 하던 李時謙(이시겸) 등 인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鳥嶺(조령)까지 갔다가 三田渡(삼전도)의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일은 復縣(복현)을 청원한 2차) 上疏(상소)에 기록되어 있다.  또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上護軍(상호군)으로 왕을 호종하던 朴應得(박응득 1578~1639년)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대원리로 돌아왔다.  한편 자인이 경주부의 영현이 된 이래 사무연락의 리정(里程)이 너무 먼데도 그런대로 지내왔으나 임란후 실제 경작 면적에 반을 덧붙여 부과한 稅額(세액) 등 慶州府 吏屬(경주부 이속)들의 橫暴(횡포)와 收奪(수탈)이 한층 더 심하여 慈仁(자인)의 復縣運動(복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있은지 5年 後인 仁祖 10년(1632년)에 儒生(유생) 白濂(백렴)이 홀로 上京하여“원통할 때 부모를 부름은 사람의 상정”이라 하여 그 원통한 사실과 복현의 진실함을 疏(소)로 올렸다.  이에 王은 戶曹(호조)에 호조에서는 慶尙監營(경상감영)에 영을 내려 조사하게 하니 監司 鄭世矩(감사 정세구)의 사유를 갖춘 狀啓(장계)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慶州府尹 全湜(경주부윤 전식)이 白濂을 誣告(무고)로 몰았다.  다음 해(1633년)에 方熙國(방희국)을 疏頭(소두)로 金應鳴(김응명), 최두립, 李時謙(이시겸), 李昌後(이창후) 등 3백여 명이 식량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 3개월 동안이나 징을 치며 호소하였으나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仁祖實錄」(인조실록) 정월 초팔일 조에 訴請(소청)한 사실과 調査(조사)를 命(명)하였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나 朝廷(조정)의 의견이 엇갈린 중 벌을 받게 되었다.  疏(소)의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자인에서 경산 15리, 하양 20리, 청도나 대구가 40리인데 경주는 120리 거리이다.  徵收(징수) 量(량)이 욕심에 차지 않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도한 폭행을 일삼고 부모선조까지 욕보였다.  백렴이 상소한 일이 경주부의 노여움을 입어 세족이 도피하고 민중이 흩어져 가는 실정이다.  언양도 울주에서 복현하였고 機張(기장)도 東來(동래)에 復縣(복현)하였으며 河陽(하양)과 慶山(경산)은 大邱(대구)에 병합되었다가 復縣(복현)하였다.  慈仁(자인)이 비록 縣監(현감)은 없지만 鄕校(향교)가 있고 客舍(객사)와 官衙(관아), 驛館(역관), 社稷壇(사직단), 氷庫(빙고)의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鄕吏(향리)의 後孫(후손)이 대대로 戶長(호장)이 되어 印章(인장)을 전해오고 官奴(관노), 館婢(관비)의 자손도 아직 있으므로 이들을 收合(수합)하면 고을 모양을 이룰 수 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義兵(의병)을 일으켜 東奔西走(동분서주) 賊(적)을 토벌하고 東萊(동래)에 와있던 明(명)나라 원병의 식량 보급을 위해 男負女戴(남부여대) 3백리 길을 오갔으며 자인으로 피난 온 백성들도 돌보아 주었으며 穀倉(곡창)을 잘 보전하여 농사에 지장이 없게 하였다.  위와 같은 사유를 들어 上疏(상소)하였는데 領相 尹坊(윤방)과 左相 金?(김유)가 慈仁의 意見에 동조하였으나 많은 堂上官(당상관)들이 慶州府의 意見을 지지함으로서 복현의 뜻이 성공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 많은 도움을 주던 余應福(여응복)은 杖一百(장일백)에 白馬山城(백마산성)으로 3년간 유배되고 方熙國(방희국), 金瑾(김근) 등도 杖을 맞고 流配(유배)되었다.  丙子胡亂(병자호란)의 다음해인 인조 15년(1637년) 봄에 李時謙(이시겸) 등의 3次 上疏를 白見龍(백현용), 金相?(김상건), 朴慶龍(박경용)이 가지고 올라가서 더디어 允許(윤허)를 받았다.  이때 상소 중에 기록한 것을 보면  지난번 상소 이 후 侵虐(침학)이 더욱 심해진 일  糧穀(양곡) 1천 석을 거두어 海岸(해안)의 軍備(군비)에 쓰도록 헌납하였다는 일이다.  이것은 자인 고을을 혹심하게 침탈한 것이다.  慶尙監司(경상감사) 李敬與(이경여)가 이에 관한 狀啓(장계)를 올리고 나서 자인은 慶州府(경주부)의 屬縣(속현)이 된지 621년만에 復縣運動(복현운동)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소원이 달성된 것이며 민중운동의 빛나는 결실을 본 것이다.  한편 新羅(신라) 때에 麻珍良(마진량) 또는 麻彌良(마미량)이라 부르던 懸은 慈仁에서 불과 15리 거리에 있는 곳으로 景德王(경덕왕) 때에 이르러 餘粮縣(여량현)으로 개칭하여 오다가 그 후 仇史部曲(구사부곡)으로 강등된 것이다.  자인이 경주부에 속할 때는 같이 경주에 속해 있었고 자인 최초로 복현 상소를 한 백렴이 仇史部曲(구사부곡) 사람이었다.  17대 효종 4년(1653년)에 田禹闢(전우벽)이 이런 사연으로 疎(소)를 올려 仇史部曲(구사부곡)이 자인현 귀속이 허락되었다.  자인이 현으로 완전히 복귀하고 초임 현감 任善伯(임선백 재임 1637~1642년)은 선정을 베풀었고 沈若老(심약로 39대 1739~1744년)는 산에 밤나무를 심어 有實樹(유실수) 장려의 선구자가 되었고 李胤沆(이윤항 43代 1752~1753年)은 농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진흥시켰다. 吳宖?(오행묵 116대 1888~1889년)은 흉년에 선정을 베풀었고 재임 기간의 일들을 적은「慈仁叢?錄」(자인총쇄록)을 남겼다.  1893年에 관찰사 이헌영은 60緡(민)을 내리면서 그 이자로 장학금으로 쓰게 하였고, 현감 李晩胤(이만윤 119대 1893~1894년)은 자신이 강학하였다.  官衙(관아)는 官上里(현 新官里)에 있었으나, 1667년에는 현감 南宮鈺(남궁옥 11대 재임 1663~1668年)이 원당리로,  1669년에는 현감 金始徽(김시휘 26대 재임 1696~1700년)가 현재 면소재지인 북사1리로 옮겼다.  현감은 19세기 전반까지는 거의가 문과 급제자이며 혹 무과 출신자(7명)도 있었다.  이들 중 善政碑(선정비), 淸德碑(청덕비), 不忘碑(불망비), 恤民碑(휼민비), 墮淚碑(타루비) 등의 이름으로 세워진 것은 26기가 계정 숲 입구에 있다.  이 중 두 현감은 2기씩 있고 또 파면을 당한 2名의 현감 비도 있다.  조선 후기 자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용천리의 朴正佑(박정우)는 특출한 孝子로 旌閭(정려)의 기문은 현감 柳雲羽(유운우 59代) 재임 1780~1783年)가 지었고, 梁氏(양씨)는 順天人 朴德潤(박덕윤)에게 시집가서 孝婦로 烈女로 크게 칭송되어 谷新里에 孝烈閣이 세워졌다.  그리고 학자 문사로는 만년에 육동에 은거한 池德鵬(지덕붕 1804~1872年)이 商山文集(상산문집)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시조 13수가 실려있고 駕日里(가일리)의 李浩雨(이호우 1826~1892年)는 진사로 素山集(소산집)을 남겼고, 다문리의 朴致準(박치준 1838~8981年)은 希菴集(희암집)을 남겼다.  그리고 불교계의 고승으로 雪松演初(설송연초 1676~1750년) 속성 백씨는 禪敎一致(선교일치)를 주장하였는데 비는 운문사에 있다.  5) 현대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했던 19세기 후반 淸日戰爭(1894~1895년)에서 勝利한 日本과 이미 征服(정복)의 경험을 쌓은 서양의 열강들이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를 만들 角逐戰(각축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런 시기에 朝鮮(조선)은 國號(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꾸고 王도 皇帝(26代 高宗 1863~1907年)로 호칭을 바꾸면서 세계 先進國(선진국)과의 競爭(경쟁)을 도모하기 위하여 외형적 모양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露日戰爭(노일전쟁 1904~1905년)에서 다시 勝利(승리)한 일본의 强壓(강압)로 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 1905년)을 체결하게 됨으로서 군사권, 外交權(외교권)이 상실된 半身不遂(반신불수)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전국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義兵(의병)이 일어나고 자인, 영천, 청도의 接境(접경) 地域(지역)인 九龍山(구룡산) 일대는 李亨杓(이형표 1856~1924年 영천 북안 출신) 산남의진(山南義陣 참여 의병장)의 活動(활동) 根據地(근거지)가 되었다.  자인은126대 현감 秦永濂(재위 1907~1909년)이 부임하여 시대적 변천과 새로운 교육 방식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8년에 학교를 설립한 일이 있고 같은해에 사립 培義(배의) 학교도 설립 되었으며 谷蘭(곡란)에 龍崗(용강) 학교가 생겨 10여년 존속되었다.  1910년 庚戌國恥(경술국치) 韓日合邦(한일합방)을 맞게 되면서 자인은 경산에 합병되고 현의 자인은 자인면, 진랑, 압량 일부, 용성, 남산으로 분할되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목으로 토지를 국유화 하였고 심지어 조선인의 토지로 기일내에 등록하지 않은 것은 강제로 일본인 소유로 만들었다.  한편 각도의 監營(감영)을 비롯하여 지방의 官衙建物(관아건물) 등은 조선 역사를 없애는 차원에서 거의 다 헐어 버렸다.  자인에서도 使衆堂(시중당), 樂山樓(요산루)만 남기고 鄕射堂(향사당), 軍器庫(군기고), 客舍(객사), 刑吏廳(형리청), 縣司(현사), 人吏廳(인리청), 軍官廳(군관청), 養武堂(양무당), 司倉(사창) 등 모두 헐려서 마지막 조선이 사라졌다.  己未年(기미년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3월 8일 대구의 서문시장에 집결한 학생의거에 주동적 역할을 한 송림리 출신 백남채(1889~1951年)는 계속 독립운동에 함께하다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광복후 제헌국회 의원이 되었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세워지고 광복군이 힘을 모으고 국내에서는 지속적인 의거 활동이 계속되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일시동인 정책으로 창씨개명,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4년에 남산 지역에서는 대왕산 죽창의거가 일어나 끝까지 일본과 싸우는 애국 충절의 모습을 지켜왔다.  1945년에는 더디어 일본의 패배와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해방광복을 맞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지방의회는 최소 단위로 읍면까지 시행하였다가 폐지되었다.  1995년에는 지방자치가 실시되어 이전의 경산군에서 경산시, 자인면이 되었다.  20세기에는 국가 사회의 많은 구조 변화와 함께 산업구조도 많은 변화를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함께 공단이 설립되는 등의 변화로 국민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자인도 예외는 아니다 수도작 중심의 농업에서 과수, 축산,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고 산업단지 공단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이와 동시 용성 송림의 한지 생산 같은 수공업은 거의 사라지는 등 안타까운 면도 없지 않다.  더불어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초등 1개(계림)교가 없어지고 재학생 3.000명이 넘던 자인초교도 재학생이 200명 이하의 작은 학교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인농고가 경북기계금속 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크게 발전되어 있고 자인여상도 농촌 고등학교 답지않게 발전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인물을 보면,  조곡출신 안병희(安炳喜 1854年~1939年)는 전남 구례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당시 관계의 부패를 한탄하며 부임하지 않았으며 洛隱集(낙은집)을 남긴 선비였다.  관상리 출신 白日欽(백일흠 1878年~?)은 역리대가로써 雲齊遺稿(운제유고)를 남겼다.  불교계의 큰 스님 石潭斗碩(석담두석, 俗姓 池氏 1875년~1953년)은 육동출신이며, 은해사 주지 불교중앙 교육원 초대 교무이사를 역임하는 등 불교 진흥 사업의 큰 기둥이셨다.  읍천리 裵恩希(배은희 1888년~1966년)는 목사로서 광복 전에는 항일 투사로 광복 후에는 초대 고시위원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동부동 출신 黃基式(황기식 1905년~1971년)은 서예대가로서 자인현 읍지을 편찬하여 남김으로서 아주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되고 있다.  북사동 출신 소설가 張德祚(장덕조 1914년~2003년)는 학창시절부터 항일 운동을 하였고, 6.25 동란때는 조선일보 기자로서 휴전 조인식 현장을 중개한 종군기자로 명성을 날렸고 우리나라 대표 여류 작가로 이조여인열전 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긴 문학인이다. 생가복원 장덕조 문학상 등 사업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 밖에도 정치, 사법, 행정, 교육, 문인, 군장성 등 각계각층에서 고향 자인의 명성을 높이고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이 부분은 자세히 조사하여 보완할 것이다(이하 생략).

문화 · 예술 | 경산시번영회 사무국장 박 승 표 | 2020-01-20 10:40

문화 · 예술 | 편집부 | 2019-11-25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