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11-30 16:5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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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덕  유난히 자글자글 들끓었던 정유년 여름이 한발 물러났다. 정말이지 생애 처음 겪어보는 혹서로 다시는 선선한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나의 여름은 헉헉거리며 불쾌지수까지 겹쳐 신심이 참담한 지경에 다다랐다. 누진세가 겁나서 에어컨 한 번 마음 놓고 켜지 못하고 길고 긴 여름 혹서를 견뎌야했다. 그러나 계절의 섭리는 깔축없다. 처서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창문으로 넘어왔다. 남편과 나는 여름을 잘 보낸 자축의 의미로 모처럼 청도 나들이에 나섰다.  청도는 언제 들러도 겹겹이 포개어진 부드러운 산봉우리가 이방인들을 포근히 감싸며 맞이하고 동창천 맑은 물이 언제 가뭄과 폭서에 시달렸느냐는 듯이 목마름을 촉촉이 적셔 주는 듯하였다. 동창천을 돌아 깊은 산자락을 들어서며 청도군 금천면 임당 1리 운림고택을 찾았다.  임당 마을은 운문산 한 자락을 휘감고 시루봉의 서쪽 기슭에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낙동강 지류의 동창천을 바라보고 터를 잡고, 세월의 무게만큼 적요가 감도는 산과 들녘에 조용히 파 묻혀 언제 다시 기지개를 켤 듯이 숨죽이고 있었다. 김씨고택은 그 중심부에 있는 듯 없는 듯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마을 일대에 내시가의 땅이 많았으나 쇠락한 후손들이 땅을 처분하여 마을을 등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임당 1리 마을 회관을 지나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다가 좌측 조그만 다리를 지나면 고택의 기다란 토석담장이 보인다. 담장이 꽤 긴 것으로 보아 집터가 웬만한 고을관아 만큼의 규모쯤 된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조선후기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내시 김일준이 낙향하여 건립한 운림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 245호로 지정되어 내관가계의 중요 자료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부터 내시 가계가 이어져왔다고 하니 400여 년이 흘러온 지금도 임당리를 통틀어도 이만한 규모의 집을 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얼마나 큰 가옥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지금은 빈 고택과 넓은 터만 덩그러니 있어 후손들은 모두 어디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지 행적을 알 길이 없고, 대문 오른 쪽 연당 주위 아그배나무 열매만 씨를 맺어 대신 텅 빈 고택을 지켜주고 있었다.  내시는 씨가 없어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보통 거세시킨 어린아이를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순전히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살붙이를 들여 내시 가계가 순조로운 대물림을 했던 까닭은 쌓아온 많은 재산과 지위를 움켜쥐기 보다는 재물과 덕을 베풀고 양민의 구휼에 봉사해왔던 때문이리라.  5칸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측 큰 사랑채와 우측 중사랑채가 배치되어 있어 안채로 들어가려면 큰 사랑채와 중사랑채의 중간문을 지나서야 들어갈 수있다. 특이하게 큰 사랑채와 곳간채만 남향으로 배치되어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대문과 안채 다른 건물은 북향을 하고 있어 나라에 대한 그의 단심을 엿보게 한다.  큰 사랑채에는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이 기거하고 중 사랑채에는 양자 아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널찍한 빈터에는 종들이 기거하는 집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로 보아 운림저택의 위상이 대 저택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안채를 들어가다가 중문을 지나기 전 중사랑채 오른 쪽 차면담 나무판에는 하트모양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안채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선을 살피는 감시구멍이다. 내시가의 아녀자가 되면 바깥출입을 일채 못하도록 하는 폐쇄적인 집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친정부모의 상외에는 바깥출입이 극히 제한되어 죽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중사랑채에서 무심코 중문을 살피려다 나무판에 세 개의 구멍을 발견하고 ‘어라? 이 구멍을 말하는 거로구나. 무슨 연유로 세 개나  뚫어놓았을까? 글쎄, 하트 모양 같기도 하고 무슨 씨앗 모양같기도한데. 옛날에는 하트의 뜻을 알고 뚫었을 리는 만무하고...’양미간 사이 거리로 눈을 들이대고 볼 수 있도록 뚫려있어 출입동선을 살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옆에는 기역자 모양의 토석담이 둘러쳐져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구멍에 대한 생각에 만 가지 상념이 스쳤다.  구멍이란 단어 풀이를 보니 뚫어지거나 파내어 빈틈이 생긴 자리라고 풀이 해놓았다.  구멍에 대한 사람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풀이해 보면 구멍은 무조건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어있다.  구멍의 세계는 항상 이쪽과 저쪽의 연결 통로가 된다. 호기심 소통 대화 환기 생리 숨쉬기의 차원에서, 미미한 바늘구멍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블랙홀과 같이 신비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거대한 구멍도 있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선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힘의 차원은 다르더라도 바늘구멍이나 맨홀 구멍이나 공통된 부분은 하나도 소홀히 하다가는 큰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댐에 실구멍이 터지면 금방 구멍이 헐어 둑 전체가 무너진다. 이는 실구멍도 방치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방증이다.  사람의 몸에도 구멍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남자는 구규(九竅) 여자는 십규(十竅)다.여자가 남자보다 구멍이 하나 더 많다고 한다. 즉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천지에 구멍이 없다면 인류와 자연은 번식을 할 수 없어 도퇴될 것이고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 이 경우는 막히면 안 되는 구멍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구멍으로 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방문객들의 제각각 표정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중문으로 들어서며 전혀 자신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눈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나는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 하트 모양의 나무감촉을 음미해보았다. 구멍을 보면 무조건 손가락을 넣어 쑤셔 넣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보다. 구멍 아랫쪽이 뽀죡이 솟아나 있어 어떤 의미 일까 생각하다 아마 오랜 세월 닳거나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겠거니 하고 의문을 접기로 했다.  구멍은 양면성을 깔고 있다.  첫째는 모든 비밀은 구멍에서 밝혀진다.  구멍으로 아주 잘못된 비밀을 훔쳐보다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할 수도 있고 또 비밀은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있다는 직접적 물증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둘째로는 남의 사생활을 들춰내어 사생활 침해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김씨고택의 세 개의 구멍은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사생활 침해이다. 오늘날 감시카메라 역할과 똑같기 때문이다.  문구멍을 생각해보자.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방안에서 수상하게 소곤거리는 엄마와 대화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창호지를 눌러 들여다보다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그 남자는 외삼촌이었고 외삼촌은 총각 때 몇 년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다 결혼하고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다.  문구멍은 주로 밖에서 안쪽을 볼 때 손가락에 침을 발라 뚫어 들여다본다. 달덩이 같았던 언니가 하도 예뻐서 첫날 밤 옆방에서 잠자던 언니와 형부의 방을 문구멍으로 훔쳐보다가 엄마에게 엉덩이를 맞았던 기억도 있다. 이는 신랑신부 초야의 침실을 엿보기 위해서 오랜 풍습에서 묵인되어 온 사생활 침해에 속한다.  김씨고택의 주인은 무엇보다 아녀자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서 벽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새색시는 한 번 대문턱을 들어서면 친정 부모의 장례 외에는 죽을 때까지 대문을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미 400여 년이나 지난 여인들의 안타깝고 처량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자유를 억압당한 여인들의 일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오늘 날에는 여성상위 시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6070세대의 결혼 한 남성들이 큰소리 치고 산다는 소문은 옛날 이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골동품 취급을 받는다.  그만큼 남성들의 입지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드세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자신의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한다. 그래놓고 남성들에게 가정에서 세밀한 자기 역할분담을 맡긴다. 그리고 공평한 사회적인 입지를 분배한다. 여성들은 밖에서도 가정일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 놓고 활동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밖에서 마음 놓고 놀 수 없다. 자꾸 가정에 신경이 쓰인다. 몇 시까지 아내의 허락하에 놀다가 손자 유치원에서 데려오거나 병원에 가는 일 등은 남편의 전담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만 하더라도 억압받는 여성의 위치에서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림고택을 나오면서 400여 년 동안 대물림을 해온 내시 가계가 감시 구멍을 통해 아녀자를 억압하고 통재하여 지탱하여 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쌓아온 부를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애향심으로 많은 덕행을 쌓아 허물을 덮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살아가도록 마을에서 인심을 얻으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운림고택 대문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구름을 열어 커다란 햇살 구멍을 만들어 빛을 쏘았다. 마치 하늘에서 삼신할머니가 만 가닥 금빛 실을 내려 흩어진 내시 가의 후손들에게 아들을 점지해주는 듯했다.  무덥던 여름도 어느새 9월이라는 가을의 초입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임당리 들녘에는 짙푸른 복숭나무가 무성히 키우던 잎을 중단하고 이제 잎을 떨어뜨릴 채비를 한다. 파란 대추알은 엄지손가락 두 배만큼이나 굵어졌다. 곧 반만 붉게 물들 쯤이면 대추를 따고 건조시켜 추석 차례 상에 올려 질 것이다. 씨없는 청도 반시도 아직 연둣빛 색이지만 이미 성장을 멈추고 시집갈 때를 기다리는 새색씨처럼, 가을 햇볕에 살을 태울 준비로 부끄러움이 봉긋봉긋 묻어있다.  약력  - 경북 경산 출생, 시인, 수필가  - 월간 《문학세계》시 등단, 계간 《영남문학》수필 등단  - 제7회 전국문학인꽃축제 문학상, 제1회 송암문학상,  - 문경새재 시 공모전 수상, 장계향 문학공모전 수상 외 다수  - 시집 『누가 삭막한 세상에 눈물 뿌려주었던가』  - 경산문인협회 회원,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이사

전문가 | 장순덕 | 2020-10-19 22:11

윤   치   열국민건강보험공단 경산청도지사자격징수부장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는 질문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은 건강을 첫손에 꼽을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코로나 19’는 전 세계 인류에게 큰 짐을 지우며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 ‘코로나 19’에 따른 대면 접촉 제한은 사회, 경제활동을 위축시키며 경제위기를 가져왔고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경제 위기상황에서 병원비까지 부담하면서 구매력과 소비활동 감소로 이어져 또 다른 경제위기를 유발하고 있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국민건강보험 재정은 국민의 진단 ‧ 치료비(건강보험 80%, 정부지원금 20%)로 사용되어 국민들이 부담 없이 방역에 협조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가 방역의 모범국가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의료기관에는 급여비용을 먼저 지급(2조 5천3백 억원)하여 환자 감소에 따른 병의원의 어려움을 해소 하였으며, 저소득층에 대해 보험료를 감면(30~50%)하여 안정적인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였다.  정부와 공단은 초음파(복부‧비뇨기‧자궁‧난소)건강보험 적용, 뇌 MRI 건강보험 적용, 선택 진료비 폐지, 간병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간호 간병통합서비스 실시 등 국민의 병원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실제 가족이 중증질환에 걸리면 의료비 걱정부터 하게 되고, 특히 저소득층은 병원비 때문에 빈곤층이 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현재 이들을 위한 산정특례제도, 재난적의료비 지원사업은 건강보험 재정을 통해 병원비를 지원하고 있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이러한 지원도 결국 건강보험 재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번‘코로나 19’상황에서 건강보험이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건강보험 재정이 건전하고 여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이처럼, 건전한 건강보험 재정은 국민의 생활안정과 경제회복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코로나 19’는 2차 유행 가능성이 있고, 또 다른 감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다.  더구나 지난 해 건강보험 진료비는 86조 4천7백 억원으로 전년대비 11.4% 증가하였고, 전체 인구의 14.5%인 65세 이상 노인의 진료비가 35조 8천2백 억원으로 총 진료비의 41.4%를 차지하였다. 고령화에 따른 급격한 진료비 증가와 저 출산에 따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보험료 수입기반의 약화를 가져와 건강보험 재정에 지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이런 어려움과 위협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재정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코로나 19’이후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인식 설문조사에서‘적정수준의 보험료는 부담할 가치가 있다’는 국민 의견이 87%로 나타났다. 또한 KBS의‘코로나 19’이후 한국사회 인식조사 결과 건강보험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87.7%로 조사되었다.  이처럼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건강보험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젠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적정 수준으로의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의 공감과 지지, 공정하고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건강보험료 부과, 의료계 등 이해관계자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건전하고 안정되어야 국민이 의료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전문가 | 윤치열_국민건강보험공단 경산청도지사 자격징수부장 | 2020-08-24 16:51

이   양   구국민연금공단 경산청도지사장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묵자(墨子)가 말한 군자의 덕목 가운데에 청렴에 관하여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명언이 전해온다. "군자는 가난할 때에도 청렴함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라고 하였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직자는 청렴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가난함에도 청렴을 유지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청빈한 관리의 표상인 청백리가 존경을 받았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지금까지도 청렴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으며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공직자의 부패는 여전히 잘 근절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2016.9.28. 시행된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겪고 있다. 3만.5만.10만원으로 대변되는 이 법으로 인해 술자리 접대문화가 사라져가고 있고 과도한 경조사 부담을 덜게 되었으며 명절 선물도 합리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편하게 공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바, 설사 가까운 지인이 금품을 준다고 하더라도 수월하게 청탁을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올해 초에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우리나라의 2019년도 부패인식지수(CPI)가 100점 만점에 59점, 세계 180개 국가 중 39위로서 2018년보다 6계단 오른 역대 최고 점수를 기록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 공단도 예외는 아니어서 김영란법 시행 이후 청렴한 사회 정착에 동참하기 위해 내부 시스템을 정비하고 청렴 신고제도를 운영하는 등 부패방지체계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결과 국민권익위원회에서 매년 평가하는 '공공기관 부패방지 시책평가'에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 1등급을 달성하여 2019년, 2020년 2년 연속 부패방지 시책평가 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처럼 통계수치로 나타나는 변화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청렴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여행하고 나서 SNS를 통해 올린 체험담에서 여행 중에 가방이나 지갑을 잃어버리고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되찾을 수 있었고 심지어 가방과 지갑 속에 있던 현금과 물건들이 그대로 있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는 글들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좀도둑과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리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전보다 살림살이가 나아진 탓도 있으나, 우리 사회 전체의 청렴도가 향상되었고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우리 고유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한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잣대로는 경제력, 군사력, 인구, 면적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국민들의 청렴함도 중요한 평가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면서 높아진 우리 국격의 밑바탕에는 성숙한 시민 의식이 있고, 그런 시민 의식을 가능케 한 것은 우리 일상 속에 청렴함이 굳게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오늘날 묵자가 살아있다면 "공직자는 가난함에도 청렴해야 한다" 는 말 대신에 "공직자는 김영란법을 잘 지켜서 생활 속 청렴을 실천하라"고 했을 듯하다. 시행 4년째를 맞고 있는 김영란법이 청렴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며, 앞으로 우리 공단도 그 길을 앞장서서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전문가 | 이양구_국민연금공단 경산청도지사장 | 2020-08-24 13:55

김 미 숙  한 곡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 김미숙(배꽃)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더군다나 악기까지 다루면서 노래하는 사람을 보면 더없이 부럽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까지 살려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들을 보면 넋까지 잃고 만다. 어떤 자리에서든지 마이크만 갖다 대면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를 볼 때면 소외된 느낌마저 들 때가 있었다.  나는 불혹의 중반이 넘을 때까지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었다. 끝가지 가사를 아는 노래가 없어서이기도 하거니와 음악적 감각이 없다보니 그 흔한 노래방 가는 것조차도 거부하게 되었다. 저녁 모임이 끝나면 무시로 드나들던 노래방 출입을 해 본 적도 없었고 혼자서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은 노래를 못하면 옆에서 박수를 치고 흥얼흥얼 거리면서 몸을 살살 흔들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음악소리가 쾅쾅 울리자 시끄럽다고 느끼는 순간 슬그머니 노래방을 빠져나올 때가 많았다. 연습을 해서 다음엔 후련하게 한 곡 정도는 불러 보고픈 마음뿐, 그때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음악과는 시나브로 담을 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체여행을 갈 때면 주로 음주가무가 시작된다. 앞자리부터 노래를 시작하면 맨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럴 때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가끔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어쩌다가 중간에서 은근슬쩍 넘어갈 때면 안도의 한숨을 쉴 때도 있었다.  십수 년 전 늦가을이었다. 그때 남편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매달 나오던 월급은 끊겼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구상 중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가도 뚜렷한 일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하던 몇 푼의 아르바이트로 입에 풀칠만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긴 터널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래에 닥쳐올 두려움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았다. 천장이 뚫어져라 한숨만 토하고 있었다.   봄은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다시 찾아왔다. 늘 오는 봄이지만 우리 집엔 아직도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이듬해 늦봄, 5월의 햇살은 눈부셨다. 투명한 하오의 햇살을 받은 이팝나무 꽃도 생기가 넘쳤다. 호젓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나는 그때 일자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축 처져 있는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라디오에서 애절하게 들려오던 음악을 듣게 되었다. 색소폰 연주였다. 노래는 어떤 곡인지 알지 못했다. 간혹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멜로디였다. 이팝나무 꽃 사이로 부서지던 햇살처럼 청아한 소리로 느껴졌다. 그 소리는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했으며 두근거리게도 했다. 음악소리가 가슴을 울려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음악에 빠져서 내려야 할 정류장을 몇 코스나 더 가서야 하차를 하게 되었다. 먼지 나는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되돌아오는 길은 내 삶이 자꾸만 뒤처지는 기분이었다.    우린 결혼할 때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문 칸 방에서 월세로 몇 년을 허덕이고 전세방에서 전전했지만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은 두 아들이 있고 건강한 남편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무슨 걱정이냐며 내 안에 있는 내가 또 다른 바깥의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내려야 할 곳을 잊게 했던 음악소리는 그 후 삶이 벅차고 힘들 때 무시로 찾아왔다.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 심지어는 책을 읽으면서도 음악을 듣는 버릇이 생겼다. 문득, 노래를 배워서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었다. 축 처져 있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힘내라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노래 한 곡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흥얼거렸다. 어느 해 문학회 연말 모임에서 처음으로 노래방에 따라갔다. 문학행사가 끝나고 모인 자리였다. 나도 이번에는 뺀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감 있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가슴이 떨리고 쿵덕쿵덕 거렸지만 즐기려고 애썼다. 떨렸지만 노래를 부르고 나자 해냈다는 안도의 한숨이 몰려왔다.   나는 배우는 것에 뭐든지 남보다 뒤처졌다. 눈썰미도 없었고 배워서 익히는 것도 수없이 반복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남들이 일주일이면 배우는 것을 나는 한 달 이상 걸려야 가능했다. 두세 배 아니, 열 배 이상은 노력해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뭔가를 시작하면 포기하기가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노래 한 곡을 불러본다. 시작하는 부분에서 박자를 놓치기도 하고 음정도 맞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른다. 인생은 고속도로처럼 쭉쭉 뻗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도도 있고 국도도 있고 구불구불한 오솔길도 있었다. 노래 한 곡을 부른다는 것은 인생도 여러 갈래의 어렵고 힘들고 아름다운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겨울은 찾아온다. 내게 찾아올 겨울의 빈 들녘을 풍요로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다. 아직도 나는 노래 한 곡 멋들어지게 부르지 못하지만 수시로 음악을 듣고 콧노래를 부르며 흥얼거린다.   

전문가 | 김미숙(배꽃) | 2020-07-28 22:38

김  미  경  부지깽이        - 김미경 -  싸늘히 식은 부지깽이가 도망가던 등 뒤 마당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가시나가 허구한 날 책만 들다보고 그라삿노. 엄마 좀 거들면 손가락이라도 뿌라지나.”뒤따라 날라 온 엄마의 잔소리는 피할 새도 없이 등짝에 바로 내리꽂혔다. 갑자기 날라 온 부지깽이를 용케 피하긴 했지만, 바깥 추위만큼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서늘하다.  그 당시에는 겨울 날씨가 꽤나 매웠다. 밤새 창가에는 고드름이 아이스크림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꽁꽁 언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너나없이 방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을 먼저 헤집어댔다. 아랫목에는 수건에 똘똘 싸여 푹 파묻힌 밥주발이 어김없이 식솔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을 집어넣었을 때 온몸으로 스며드는 구들장의 온기는 그 날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위로와도 같았다.  뜨뜻한 온돌방을 지켜주던 아궁이 앞에는 부지깽이가 파수꾼처럼 세워져있었다. 기다란 쇠로 된 막대기다.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장작의 위치를 바꿔주거나, 불이 활활 잘 타도록 잉걸불을 들추면서 공기를 집어넣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다 타버린 재는 아궁이 속 남김없이 싹싹 끌어내주는 청소까지 도맡아주었다. 부지깽이의 불 속 깊은 뒤척임은 온 집안의 구들장을 골고루 데웠고, 아궁이 앞에 잠시 엉덩이 붙인 어머니들에게는 포근한 휴식마저도 주었다.  옛날 자식들을 엄히 다스림에 있어 회초리가 아버지들의‘매채’였다면 어머니들에겐 부엌의 부지깽이가 그것이었다. 더하여 손에 물마를 새 없었던 어머니들에게 부지깽이는 허허롭던 손에 쉽게 잡혀주던 친구와도 같았다. 아마도 타는 속 대신 애꿎은 아궁이를 뒤적거리면서 궂은 살림을 같이 토닥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근대 아궁이에서는 장작 대신 연탄으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변해버린 부엌의 역사 속에서도 부지깽이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다. 연탄아궁이도 연탄재를 끌어내 줘야만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부엌의 새로운 동반자인 연탄집게가 부지깽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바뀐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부지깽이의 어깨가 사뭇 넓어졌다. 꺼지는 불을 되살려도 주고, 꽉 막힌 구들장 밑까지 시원하게 뚫어주는 숨은 일꾼이 따로 없었다.  속 시원히 뚫린 아궁이에서 열기를 다 뿜어낸 연탄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다. 한 줌 재로 남은 연탄을 쑥 들어 올릴 때의 허탈감은 다 타버린 생의 무게만큼 초라하다. 남은 재마저 부지깽이로 퍼 올리면, 마치 막 화장을 끝낸 유골처럼 숙연하기마저 하다. 탄다는 것이, 희생한다는 것이 그러한 것인 듯.  연탄불이 하얗도록 타고나면, 다 타버린 밑 연탄을 버리고 위의 연탄을 다시 밑불로 놓아준다. 그 다음 까만 새 연탄을 남아 있는 밑불 위에 구멍 맞춰 끼워놓는다. 구들장을 따뜻하게 데우는 임무를 다한 연탄을 부지깽이는 그냥 보내주지 않는다. 골목 어귀 얼어붙은 길 위에다 멋지게 내팽개쳐준다. 끝으로 밟아서 골고루 부셔버리면, 흙에서 온 연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풍장을 치른다. 그 마지막 가는 길까지가 오로지 희생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같이 가게 일을 돌보느라 부지깽이가 곤두서듯 사셨다. 가게일과 집안일로 늘 발을 동동거리셨다. 추운 겨울날에는 얼다 못해 쩍쩍 갈라진 발뒤꿈치에서 피고름이 흘렀다. 양말이라야 나일론 양말이 다였던 시절이었다. 가게에 딸린 단칸방은 방문턱이 어른 키의 반만치나 턱없이 높았다. 손님이 가게에 얼비치기라도 하면, 어린 내가 방에서 떨어질까 봐 등짝에 얼른 끌어 업고 손님을 맞았다고 했다.콧구멍만 하던 단칸방에서 겨우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의 허리띠는 그만큼 더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방이 한 칸이라도 늘어난 대신 살펴야할 아궁이도 그만큼 는 셈이었다. 궁핍한 살림은 허리 한 번 펼 새도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식솔들 끼니거리를 차려야했다. 부지깽이가 날라 올만도 했다. 연탄 갈 시간에 맞춰 살펴보라던 아궁이를 책을 읽다 깜빡한 것이다. 연탄불이 하얗게 식어버렸다.한겨울 차가운 구들장을 다시 덥히려면 반 시간여를 아궁이문을 열어두고 지펴야만 했다. 밥을 할 수 있는 수단도 연탄불이 전부였다. 엄마의 입술도 추위와 배고픔으로 연탄재처럼 하앳다. 그 당시엔 번개탄이 꺼진 연탄불을 피우는 불쏘시개였다. 매캐한 번개탄을 피워대며 연탄불을 다시 지피는 엄마의 속까지 하얗게 다 탔을 성 싶었다.  엄마의 잔소리는 불을 피우는 내내 속사포로 날라 왔다. 맏딸이다 보니 사소한 집안일을 도와야만했다. 책만 들었다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나였기에, 그런 나의 모습이 엄마에게는 불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잔소리만큼 나도 만만찮았다. 또박또박 말대꾸하다보면 부지깽이가 날라 오듯 엄마의 큰소리가 쑥 나온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와 같이 있노라면 늘 타닥타닥 타는 잔불 같은 싸움이 잦았다.  꺼져가던 불씨도 알불로 키우던 엄마가 지금은 밑 불 다 꺼져가는 하얀 연탄재가 되려한다.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다. 퇴원하는 엄마를 부축할 때의 무게감은 다 탄 연탄을 쑥 들어 올린 것처럼 서글펐다. 부지깽이를 내던지던 엄마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까맣던 머리도 어느새 생기 하나 없이 푸석하다.  엄마의 잔소리도 이젠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없다. 다행히 아직 밑불은 살아 있다. 큰 전이 없이 수술도 잘 되었다. 꺼지려는 밑불을 위해서는 아궁이문을 활짝 열어줘야만 할 때다.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꺼지는 불을 되살리듯, 이번에는 자식들이 부지깽이가 되어야할 차례다.  부모님의 사랑이 마치 연탄불 사랑 같다. 구들장을 온종일 데워주면서 뭉근하게 오래가는 연탄불,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뜨끈뜨끈한 밥주발을 품에 꼭 안고 기다려주는 그런 식지 않는 사랑이다. 따뜻한 온기를 퍼주고 또 퍼주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다 베풀고 나서야 자신은 하얗게 식어가는 것이 마치 부모님의 사랑과 꼭 닮았다.  아침, 저녁으로 벌써 찬바람이 등허리를 감싼다. 이제 아궁이는 아파트 보일러 스위치 속에서 가물거리는 옛말이 되었지만, 아궁이를 살피던 부모님의 사랑은 아직도 뜨끈뜨끈하다. 그 사랑이 뭉근한 연탄불처럼 오래 가도록 아궁이를 살피듯 간간이 살펴드려야 할 것 같다. 등 뒤로 날라 오던 부지깽이 잔소리도 오래 오래 들을 수 있도록.

전문가 | 김미경 | 2020-07-28 22:16

김   미   숙  여든의 중반을 건너고 있는 외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자식이 몇 명이나 되었지만 당장 모실 사람이 없었다. 친정어머니는 불효자라며 슬퍼했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한동안 곡기를 끊었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를 자신이 모시겠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짐을 꾸리던 날 할머니 얼굴에 서광이 비추었다. 대화 상대가 없었던 할머니는 피붙이들이 그리웠다. 친정에서 한솥밥을 먹게 된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나간 옛 이야기를 들추며 행복해 하셨다.   할머니가 친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주무시다가 헛소리를 하셨다.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느라 힘들었던 탓일까. 가끔씩 정신 줄을 놓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젊은 사람도 깜박 할 때가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차츰 이상해진 것은 나를 보고 뜬금없이“누구래요”그러는 것이다. 농담으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손을 잡고 큰손녀라고 해도 눈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치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치매가 온 후 부터는 어머니가 일하러 간 사이, 점심과 저녁을 챙기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상태가 어떤지도 봐야 했다. 기저귀를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할머니와 뒹굴다보면 둘 다 콩죽 같은 땀이 줄줄 흘렀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였다. 할머니는 밤사이에 몸이 많이 아팠는지 지쳐 보였다. 눈에 초점을 잃은 것 같았다. 차고 있던 기저귀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검붉은 핏덩이로 이불이 엉켜 있었다. 방 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냄새 때문에 마스크를 해도 구역질이 났다. 기저귀를 채우려고 눕혔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내 힘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추한 모습을 나한테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기저귀는 채우지 못하고 핏덩이 이불을 그대로 덮어 둔 채 나의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친정으로 향했다. 양쪽 베란다에는 어머니가 세탁한 이불들이 미세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방 모서리에 앉아 계셨다. 잠시 정신이 돌아왔는지 나를 알아보셨다. 전날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기저귀를 이불속에 덮어둔 채 달아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외갓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여섯 살 되던 겨울이었다. 외할아버지 생신이 다가왔다. 일주일 전부터 도포자락 휘날리며 갓을 쓰고 오신 친인척분들이 사랑방에 머무르셨다. 할머니는 가마솥에 옥수수가루로 조청을 달였고 맷돌에 콩을 갈아서 두부도 만드셨다. 유과며 단술을 만들었고 손님들 접대를 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 어린 나는 홍역이 걸렸다. 열이 펄펄 끓었고 붉은 반점의 두드러기가 온 몸에 꽃을 피웠다. 군불을 넣은 아랫목에 누워 있으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고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니며 칭얼거렸다. 종종 걸음을 치던 할머니는 징징거리는 나를 등에 업고 몇 날 며칠을 노심초사 하셨다. 그때 할머니는 기운 없이 축쳐진 내가 죽는 줄 알고 애면글면 눈물을 보이셨던 기억이 난다.     여고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을 외갓집에서 보내고 개학하기 며칠 전이었다. 비가 억수로 퍼붓더니 태풍이 몰려왔다. 불어난 냇가에 길은 끊어지고 콘크리트 다리 위로 쏜살처럼 흐르는 물은 짐승의 포효하는 형국이었다. 등교는 코밑에 다가왔고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학교에 갈 수 없음이 걱정되어 밤새 뒤척였다.     그 마음을 알았던지 할머니는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비는 오락가락 했고 큰물은 여전히 모든 것을 삼킬 듯 넘쳤다. 할머니는 산길로 돌아가자며 이른 새벽, 나를 깨우셨다.     아직 산허리의 반도 오르지도 않았는데 헉헉 숨이 목까지 찼다. 가끔 비가 내렸고 그 비가 그치면 먹구름이 몰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햇살 한줌도 나타났다가 이내 숨곤 했다. 할머니와 나는 재를 넘고 또 넘었다. 가슴은 따가웠고 온 몸이 나른 하자 다리도 후들거렸다. 소나기가 한차례 퍼붓자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이미 다 젖은 상태였다. 우산은 들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벌써 높은 재를 세 개나 넘었다.“할매 아직 멀었어.”하고 물으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하셨다. 조금 가다가 또 여쭈면 돌아오는 대답도 한결 같았다. 산길은 가파르고 비는 연신 퍼부었고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새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맥없이 걷다보니 다리가 풀렸고 움푹 파인 길 위에 빠지면서 중심을 잃었다.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는 데굴데굴 굴러서 수십 미터 아래로 나뒹굴었다. 온 몸은 멍투성이고 얼굴이며 팔다리는 돌맹이에 부딪혀서 피가 줄줄 흘렀다.    아득하게 할머니 소리가 들렸다. 나를 흔들어 깨우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눈을 떴다. 희미하던 할머니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손녀 살았구나. 할머니는 나를 껴안고 꺼억 꺼억 소리 내어 우셨다. 다 키운 외손녀를 잃을 뻔 했다며 산이 쾅쾅 울리도록 통곡을 하셨다. 빗물인지 핏물인지 범벅이 된 내 얼굴에 할머니는 얼굴을 갖다 대고 하염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목욕통에 물을 받았다. 할머니는 따뜻한 물속에서 행복해 하셨다. 미소 짓는 얼굴이 해맑다. 등을 밀고 가슴과 팔, 다리를 씻겨 드렸다. 가슴은 바싹 달라붙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전날 핏덩어리를 그대로 두고 간 죄스러움 때문에 그것을 만회라도 하듯이 온 몸을 깨끗하게 닦았다. 여든 여섯의 나이답지 않게 흰머리도 찾기 힘들었고 체구가 작아서 어린아이 같았다. 할머니의 몸이 언제 이렇게 작아졌을까. 나를 업고 끌어안았던 할머니는 나보다 훨씬 작아진 채 내 품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날 몸이 개운했던지 할머니는 죽 한 그릇 다 드시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명치끝이 눌리는 것처럼 따가웠다. 나의 유년 시절과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웃고 울던 행복했던 날이 많았다. 이제 그리워도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할머니는 떠나셨다. 나의 슬픔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머물러 있었다.

전문가 | 김미숙 | 2020-06-16 12:23

정  동  규국민건강보험공단 경산청도지사장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세계는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 방역당국의 체계적인 대처와 의료진의 헌신 그리고 높은 국민의식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수준 높은 진단과 병원비 지원 같은 안정적인 의료체계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건강보험’이다.  그동안 당연해서 평소 느끼지 못했지만 국민 모두가 40여 년간 발전시켜온 건강보험이 코로나19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모든 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된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보험료와 높은 의료 접근성을 갖고 있어 코로나19의 조기진단과 조기치료가 가능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80%, 국가에서 20% 의료비를 부담하면서 본인부담 진료비가 전혀 없어 빠른 진단과 조기치료를 받는 사회적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  둘째, 공단은 방역당국에 코로나19 환자의 기저질환 여부를 제공하고, 공단의 빅테이터를 기반으로 위험 군을 분류해 경증환자는 생활치료센터로, 중증환자는 의료기관으로 배치하는 등 효율적인 치료가 가능하도록 지원했다.  셋째, 의료기관에는 공단이 운영하는 수진자 자격확인 시스템을 통해 코로나19 확진자, 접촉자, 감염증 발생지역 방문 입국자 등 감염대상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하도록 제공함으로써 상황별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다.  또 코로나19로 경영난을 겪는 의료기관에 요양급여비용 선 지급 제도를 시행해 재정적 안정을 지원하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재난적 상황에서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건강보험료를 감면했다. 특별재난지역은 건강보험료 납부액 기준 하위 50이거나 그 외 지역 건강보험료 기준 하위 20% 가입자의 보험료를 3개월간 50%를 감면하고, 보험료 납부액 기준 하위 20~40%에 해당하는 가입자는 3개월간 30%를 감면하는 등 3개월간 총 1160만 명의 국민에게 약 9500억 원 규모의 감면혜택을 지원했다.  다섯째, 공단 인재개발원 전체를 대구지역 코로나19 경증 환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로 제공하고, 공단 일산병원에서 의료진을 파견해 환자를 돌보았고, 공단직원과 고객센터 상담원을 투입해 질병관리본부 콜센터(1339)에서 상담 처리하는 등 사회적 책임수행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건강보험의 중요성과 우수성을 잘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이번 코로나19 감염병 같은 위기 상황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며, 아프면 언제 어디서든 병·의원에 갈 수 있도록 의료접근성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건강보험은 전 세계에 수출되는 우수한 제도로 계속 발전하고 있었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보장성을 강화하고 건전 재정을 유지하는 등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다.

전문가 |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산청도지사장_정동규 | 2020-05-20 10:30

  5월이다.  꽃들은 진여(眞如)를 드러내고, 새들은 묘유(妙有)를 노래한다. 사람 없는 빈산에도 물은 흐르고 꽃이 핀다는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化開)의 경계 없는 대하드라마가 출렁인다. 바람과 햇살은 속세의 속살을 헤집기에 아침부터 바쁘다.  강호는 지금 마주보고 있어도 돌아 앉아 있어도 대립이 아니라 원용이다. 남원 바래봉의 철쭉이, 내 공향 황매산의 철쭉이 그렇다. 태안의 튤립이 곡성의 장미가 그렇고, 경호강 섬진강의 물줄기가 그렇다.  부처님오신 날이라고 방방곡곡 연등이 수를 놓고, 근로자의 날이 있고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고 스승의 날이 있고 부부의 날이 있는 5월. 색깔은 눈에 담고, 향기는 코에 담고, 맛인 입에 담는다.  나의 마음은 담을 데가 모자라 당신의 가슴을 빌리고, 나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당신의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따라 열심이다. 나는 사랑이 총집합된 5월을 ‘강호와 협객’이라 이름을 붙여본다. 강호란 세상을 말하며, 협객이란 의로운 사람이 아닌가. 여의도엔 고함소리가 높으고, 광화문엔 붉은 머리띠를 둘러도 강호엔 꽃은 피고 잎은 푸르러 지천으로 사랑을 절창한다.  가정의 달인 효의 계절에 세 딸을 낳은 건 나의 천복일까. 모처럼 지갑도 두툼해 바쁜 꿀벌처럼 나의 하늘을 짊어지고 머무는 곳마다 술잔을 드니 나도 협객이 된다.  이백은 말한다.  “나는 협객이다. 시는 칼이었고 술은 칼집이었다.”고. 칼집에서 칼이 나오니 술에서 시가 나오는 모양이다. 5월에는 나도 와룡봉추(臥龍鳳雛)요, 너도 와호장룡(臥虎臟龍)이다. 강호별곡(江湖別曲)을 논할 필요가 없는 5월은, 그늘에 있어도 좋고 양지에 있어도 좋다. 사변(事辯)과 이변(理辯)이 공존하지만, 범아일여(梵我一如)가 되는 계절이다. 지금 강호는 골짝 골짝마다 동네 동네마다 대학 대학마다 축제의 계절이다.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청도의 소싸움도, 앞만 보고 달리는 청풍호의 모노레일도, 강호의 협객이다. 서천의 덩치 큰 광어도, 기장의 키 작은 멸치도, 서귀포의 번쩍이는 은갈치도, 5월의 협객이다.  강호와 협객. 참으로 좋은 낱말이다. 안동포처럼 곱고 명주실처럼 질긴 우리들의 인연이 살아 숨 쉬는 장소가 강호가 아닐까보냐.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모두가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로운 협객이다.  하동의 왕의 녹차도, 내 고향 대목골의 향기 좋은 찔레꽃도 협객이다. 효의 계절에 관절이 좋질 않아도 동해안 레일바이크를 달리는 주름진 협객들. 강호는 폭풍의 역사를 영욕으로 함께 하고, 협객은 서러운 세월을 밀당으로 동반한다.  숨겨진 강호의 절정무학을 습득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산을 하여 짚고 있는 저 지팡이, 풍운(風雲)을 떠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천하제일검 보검이더냐, 의천도룡기 명검이더냐. 세월의 무게에 내공이 소지하여 눈동자가 흐려도 초파일법당에 낮은 자세로 두 손을 모우는 협객들.  속세를 구원하는 연등은 죽비로 불을 밝히고, 신부의 면사포처럼 하얀 아까시가 길게 출렁거리며, 고봉으로 담은 하얀 쌀밥처럼 이팝나무가 눈부시다.  나는 지금 오동도를 돌아 여수해상케이블카 크리스탈캐빈을 타고, 그 아래 여수의 밤바다를 본다. 향일암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느 선사의 말을 전하는지 귀가 간지럽다. 어리석으면 부처도 중생이 되고, 지혜로우면 중생도 부처가 된다고. 돌산대교의 회 센터에서 해산물을 앞에 두고 술잔을 드니 협객이 따로 있을쏘냐. 바둑에도 귀신보다 무서운 게 자충수라 하던데, 술잔을 너무 많이 들어 자충수를 두면 어이할꼬. 벌써 아내의 눈 꼬리가 못마땅한지 63빌딩보다 높은 이순신대교의 주탑처럼 올라가는데...  5월이다.  급변하는 강호에 틈새를 비집고 흐르는 청빈의 석간수가 지구에는 자물쇠가 없단다. 산그늘을 길게 품은 저 아래 민들에의 홀씨가 중심을 잡기 힘들어도 기어이 언덕을 오른다. 사랑 때문이다.  108가지 번뇌가 있고 5만 가지 병이 있다는 강호에, 8만4천 가지의 처방전이 있어 수명은 길고 길어지나 보다. 손녀가 시집을 간다고 난생처음 서울행 KTX를 탔다는 90살 북면아지매도 오늘은 빠른 협객이다.  오늘의 뉴스가 시끄럽고 맛 집 앞에 줄이 길다하여도, 쥐어짜면 단물이 흐르는 5월의 하늘을 느긋하게 보면 어떨까. 비주류로 살아온 잡초가 세상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겨울 산처럼 세상을 견디며 발효되어 지구를 지키는 협객이다. 싹이 나고 움이 트는 세상의 푸른 희망은 꼼수가 없는 흙에서 나오니, 흙수저를 든 당신이 협객이 아니더냐.  힘든 여정을 위로하는 저녁노을이 오르가즘 립스틱처럼 남해의 지친 물살을 묽게 애무하는 너도 협객이다. 그래, 태권도 검은 띠를 땄다는 손자 녀석 재웅이도, 민석이도 협객이요, 양파와 마늘을 캐는 당신도 협객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직책이 아버지라 해도 절망의 해독제가 행동이란 걸 어디서 들었는지, 늙은 협객의 고깃배가 남해의 새벽 물살을 가른다. 구멍 없는 낚시 바늘이 있고, 바늘 없는 손목시계가 있는 오늘, 잎보다 꽃이 먼저 피면 어떻고, 꽃보다 잎이 먼저 피면 어떠랴. 비교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칼이 작아도 모두가 아름다운 협객인 것을.중중무진 법계에 여래의 씨앗이 보리수로 자라는 은혜와 감사의 5월, 손님도 자주 오면 단골이 되고, 사랑도 자주하면 가족이 된다.  달빛은 연애다리 수양버들가지에 흔들리고, 경남대 앞 새벽인력시장에 공을 치면 어떡하나 걱정을 해도, 헝겊 한 조각 콜라주로라도 끼어들어 사랑하면 봄인 것을, 사랑하면 강호의 협객인 것을...  윤용수  진주고등학교 졸업  1991년 KBS와 한국수필 등단  수필집‘아내의 앞치마’,‘순결보다 아름다운 것’,‘물매화’, 선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회원

전문가 | 윤용수 | 2020-04-21 09:23

정석현경북 경산중앙대학 연영과 졸업경산의회 3선의원, 의장 역임평통경산시협의회 회장 역임기관지 평통신문 통일의 시 게재저서본대로 느낀대로. 생각대로동인지 시마을문예 및 다수영남문학 등단영남문학작가회 회장보잉 737이륙의 굉음 혹시나하는 조바심누구나다 그렇거야대구공항을 이륙하여 시가지 상공을 나르니수성못이 조그마하게 보이누나앞산. 지산.가창.골짜기들이 하늘 아래 펼쳐지는 대 자연88 고속돌 상공을..지리산.. 여수가.....이어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조국 강산의 아름다움들이 내마음속으로 이어지고바다밑 까지 훤히 보이는 맑고 맑은 날씨가끔 구름사이로 햇살이비행기 그림자를 찍느라고어느새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 오르는 제주 국제공항이국의정취가 풍기는 탐라도산방산 언저리에 노란 유체꽃이 우릴 반기는 구나마라도를 향해 유람선은 노 젖는가눈 덮힌 한라산, 산방산.협재 바위를 바라보며과연 제주도는 아름답구려가파도를 지나 마라도에 오니국토 최남단의 우리땅3명의학생이 수업하는 초등학교. 17호가 살아간다나교회가 있고 절도 있는홍삼 한사라에 소주한잔을 먹어며다시 산방산으로천연 보호구역 산방굴사 돌부처님께 건강 사랑 행복을 빌이 모두며다시 한라산 옷 자락으로해물 잡탕에 저녘을 떼우고, 비바리 양주에 흥겨운 노래 가락이 울려퍼지면어슬픈 춤 속에 자정이 넘고등소평 서거소식에 몸은 잠들었던가맑은 아침 햇살을 가르며 버-스는 5,16 도로 따라 눈 덮힌 한라산 자락으로 기어 오른다휴게소를 지나 숲 터널을 빠져 남제주 서귀포로따뜻한 서귀포항, 풀잎새 70 리길빨간 동백꽃잎 사이로 천지폭포가 줄기차게 흐르네흰 포말을 그리며 정방폭포는 말이 없구나!이미지 식물원은 몇년전 보담 많이 컷구려옛 감귤농장엔 신시가지 아파트가 들어서고.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귀포의 아름다움이 눈에서 흐르고도자기 컵에 얼굴을담어며불바리,다금바리,비바리, 삼바리를 먹어란다.자연산 박물관엔10m 칼치가 헤엄을 치고삼성혈 거쳐 용두암은 승천 못해 굳어 있네모던 잡귀신을 막아주는 방신탑이오늘도 탐라도를 지켜주고한라산 정상은 구름과 함께 노는데눈 덮힌 정상 백록담은 봄 오는 소리를 듣는가때론 매서운 봄바람속에 산굽부리를 스쳐 지나말이 말을 타고 박차를 가할때평야를 달리는 서부의 사나이들민속마을 ,냉발, 신선초에 가래가 없어지고성산 일출봉 90 봉을 오르내린다멀리-- 산호 백사장이반짝이는 신비의 천혜 마을 우도를 바라본다어느새 8000m 상공엔 태양이 더욱 눈 부시고.....지상엔 어둠이 깔리며눈 덮힌 지리산위를 나르는 모양최 첨단 외로운 섬 하나등대도 외롭게봄을 맞이 하는가 .1997년 봄이오는 길목에서

전문가 | 소우주/정석현 | 2020-04-21 09:21

송학 김 시 종ㆍ《영남문학》영남문학 신인상 수필 등단ㆍ제50회 민족통일 문예대전공모전에 대구광역시 협의회 회장 상 수상ㆍ《한국경찰문학》발전 유공 수상ㆍ시집『봄의지열』(1958년)ㆍ영남문학 대외 협력이사, 수필과 지성, 이후문학 동인, 대구문인협회,대구수필가협회 이사, 국제 펜 한국본부 대구 회원,한국경찰문학회 대구, 경북지회장.  산천은 생동감이 넘치나 말이 없다.  단지 바람 같은 물소리와 산새의 울음만이 산천의 적막감을 깨뜨릴 뿐이다. 청명 곡우 때가 되면 산야는 연초록 물감으로 가득하다. 봄바람도 계절에 따라 훈훈하고 상쾌한 향기를 느끼게 된다. 봄을 즐기며 산행하기가 좋은 시기다.  지금은 농촌 놀이 문화도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된다. 농번기가 끝나면 농민들은 찧은 피로감과 휴식을 즐기기 위해 관광지를 찾아 음률에 맞추어 춤을 즐기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문화도 찾기 어렵다.  오직 산행을 통하여 명성 고적지를 찾아 기암괴석과 자연 속의 풍광을 즐기는 놀이 문화를 즐기는가 싶다. 이제는 농촌도 노령화되었고, 젊은이는 생업을 위해 도시로 떠났다, 놀이 문화를 주도할 사람도 없는 듯하다. 산행을 통한 삶의 즐거움과 건강관리에 심취하는 모습이 절실해 보인다.  경북 봉화에는 청량산이 있다. 연화봉 아래 산 가장자리에 청량사가 있으며 사찰을 둘려선 장인봉(870m) 외 11개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져 낙동강을 굽이 살피는 듯하다.  청량사는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자리에 있는 청량하고 고귀한 사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송광사의 법장 고봉 스님에 의해 중창된 고찰이기도 하다. 청량사는 여러 전설(傳說)도 많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응진전과 우물을 파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이 있고,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대가 있다. 그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돌렸다,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러진 금탑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물을 마신 뒤 총명해졌다고 하여 총명수가 있으며, 응진전은 고려 말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로 정진한 곳이기도 했었다. 청량 폭포에서 공원 관리소로 가는 길목에 퇴계 선생 시비도 보게 된다.  청량사를 지나 가파른 급경사 산길을 오르다 보면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한 청량산 하늘 다리를 볼 수 있다. 해발 800m 위치에 설치된 다리로서 국내 산악 현수교로서 가장 길고 높은 다리로 100여 명이 동시에 건너도 안전상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길이 90m 높이 70m 넓이 1, 5m로 1년간의 공사 기간을 지나 2008년 5월에 준공된 산악 현수교이다. 그러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올 때는 하늘 다리가 출렁거리기도 한다.  청량산의 하늘 다리가 준공된 후 많은 사람이 산악 현수교를 구경하기 위해 찾았다. 심지어 주차장에 버스가 주차할 장소가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다.  청량산은 태백산에서 갈려 일월산의 서남쪽 지점에 우뚝 솟은 신령한 산으로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명호면 북곡리, 안동시 도산면, 예안면과 접경을 이룬 도립공원이다. 예부터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산으로 전남 영광의 월출산, 경북 청송의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알려져 있다.  산의 암석은 변성 암류와 퇴적 암류로 되어 있는데 퇴적 암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량산은 주세붕이 명명한 열두 봉우리를 주축으로 하고 있고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發源)한 낙동강이 산의 웅장한 절벽을 끼고 유유히 흘러 산봉우리마다 숱한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산이다. 이 산은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안동에 속해 있다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시 봉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산이 좋아 청량산을 2회에 긍하여 산행한 바 있었다. 공직 생활을 마치고 청마 산악회를 통한 청량산을 일주한 바 있었다. 산행 출발지인 입석에서 응진전, 김생굴,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자란봉, 하늘 다리, 선학봉, 청량산의 가장 높은 주봉인 장인봉의 철 사다리를 타고 정상을 정복한 것이 어제 같으나 벌써 20 수년이 지난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 후 청량산의 하늘 다리가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산악 현수교가 설치된 후 대구 경우 산악회의 옛 동지들과 청량산 산행에 동참했다. 짧은 코스를 선택하여 청량사를 거쳐 연화봉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했었다. 연화봉에서 내려다본 청량산 기슭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낙동강 강물의 풍광을 즐기며 계곡에서 올라오는 신선한 바람에 피로한 몸을 추스르며 일행과 더불어 환담을 한 시절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매월 4주 차 토요일이 되면 산행 안내 문자와 경우 카페 게시판에 자세한 홍보와 산행에 참여할 명단이 올라온다. 지금까지 이십 수년간 산행을 통한 건강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무리한 산행으로 인한 양 다리의 연골이 달아 조심스럽기도 해진다. 산행에 참여하면 항상 정상을 오르다 보니 다리의 연골에 무리가 왔나 보다. 지금은 산행지를 선별하고 있다. 어쩌다 정상을 갔다 오면 무릎의 연골 문제로 정형외과를 찾은 것이 일상화되고 보니 의사는 평지는 걷더라도 산행을 자제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나이가 늘어 가고 보니 자성(自省)하는 마음으로 가벼운 운동과 연골 영양 주사약으로 대처하기도 한답니다. 봉화 청량산은 산세가 너무나 아름답다. 지금쯤 단풍에 물든 청량산 풍광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설렌다. 산천을 곱게 물든 단풍 물결이 민물처럼 밀리어와 가슴에 수채화를 그리는 듯하다.

전문가 | 송학 김시종 | 2020-02-28 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