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현역 의병장 성재 최문병 선생-

  임진왜란 당시 자인현역에 의병을 창의한 성재 최문병 선생의 가계는 전주 최씨에서 분적한 최균(崔均)의 9세손 최식(崔寔) 선생을 중시조로 고려시대에 예종과 명종 양대에 걸친 벼슬과 공훈으로 연산 부원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했다. 이어지는 성재 선생의 가계는 2세 최완(崔(玩)은 문과에 장원급제, 상찰사봉익대부, 판도판서조의대부에 봉해졌고, 10세 최사해(崔四海)는 절충장군 내금위장을, 11세 증조부 최규(崔奎)는 성균진사로, 12세 조부 공권(公權)은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을, 13세인 부친 최식(崔湜)은 절충장군 동지중추부사로, 실기에 수록된 선생의 선조는 대부분 무관 출신이었다.
  이로써 선생은 유년기부터 체모가 특이하고, 타고난 자질이 영특 활달하였고, 총명함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났다 하였다.
  첫째, 선생은 8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인 동지중추부사 최식 선생을 여이고, 18세에 어머니 경산 전씨가 별세함으로 부모의 상을 피눈물로 맞이하였고, 양위를 중추부사 묘에 합장한 후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는 사실과 이전에 급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단지로 수혈하여 수년간 연명하게 하였다는 기록과 이외에도 1582년 백형의 상을 당하여 선생이 3년간 복을 대신하였다는 기록에서 평소 선생의 인품과 효제를 가늠할 수 있었다.
  둘째, 선생은 또는 남다른 예지와 대담성이 있었다.
  동 실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입을 벌리자 동석한 유생들이 모두 혼비백산 하였으나, 선생만은 태연히 마당으로 내려가 호랑이를 살펴보고 목에 박힌 가시를 뽑아 주었다 하였고, 1585년 7월에는 유생들과 회합 중 느닷없이 큰 비가 오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마구에 소가 벼락을 맞아 죽자, 여러 유생들이 경악하였으나, 선생은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이를 수습하였다 하였고, 1590년 여름 향리의 유생들과 밤새워 학문을 논하던 중 갑자기 키가 훤칠한 장부가 칼을 잡고 나타나 선생에게 이르기를, ‘국운이 크게 불안하게 되었으니 매우 염려된다. 오로지 백성들은 공을 믿고 살 수 있을 것이다’하고 사라지자, 선생은 이를 의아히 생각하고 태연히 일어서며 동행한 유생들을 안심 시킨 후 스스로 닥아 올 여러 정황을 크게 근심한 나머지 1579년에 집 뒤에 인지재를 축조한 후, 미리 활, 화살, 칼, 창 등을 모았다는 기록 등에서 선생의 예지와 대담성을 엿볼 수 있다.
  셋째, 자인현역의 의병창의 배경과 모병 기록이다.
  1592년 4월 15일 향리에 유생선비들과 옛 향교에서 시문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앞산에서 4~5명의 남녀가 앞뒤로 쓰려지면서 통곡하며 뛰어오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자신들은 양산에서 온 관속들인데, 지난 13일 왜구들이 갑자기 침입하여 동래가 함락되고, 언양, 양산을 침범하였다 했다.
  이후 밀양, 청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은 동년 4월 22일 사당의 신주를 받들고 가족과 노복을 거느리고 현의 동쪽 구룡산 아래 물한동으로 피난한 후 당일로 함께 따랐던 유생들과, 양산피난 관속, 가솔들과 함께, “국가가 이리 위태로운데, 초야에 묻혀 있다 하여 어찌 충성을 바칠 마음이 없겠는 가?”하고, 비록 경주부에 속현된 유생에 몸이지만 그 자리에서 창의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로써 사방에 통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선생의 실기에 의하면, 물한동으로 임시 거처를 정한 선생은 열흘 동안  자신의 결심을 가솔과 함께 피난 온 향리 선비들에게 밝히고 동년 5월 2일 드디어 함께한 가솔과 수십인 의 피난민을 설득하여 사방에 통문을 띄워서 뜻있는 인사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하였다.
선생이 피난한 물한동은 이전에 부모의 시묘를 통해 미리 익혀온 요새라 창의하기로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피난을 결심하였던 터이다.
  이로서 자인현역의 건장한 장정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6명이 통문을 받고 찾아와 충의를 다짐함으로 가능하였고, 그날로 구룡산 준령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깃대를 세워 하늘에 맹세하면서 그 자리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면서 평소 무에 출중한 지인 이상과 합류함으로 의기투합하였고, 이후 그로부터 수천에 달하는 장정을 얻을 수 있었다.
  셋째, 이에, 선생은 임란 직전부터 자신의 예지로 미리 준비한 병기를 각자 재능에 따라 나누어 주고, 전 병력을 좌우 2대로 편성, 김홍을 우대장으로, 유인춘을 좌대장으로 삼고, 선봉대장에 박영성, 후원대장에 권삼로, 총대장에 이상(李祥)으로 삼아 병력 수백 명을 각 요해지로 매복시키고, 초소를 만들어 적의 동정을 살피며, 길을 막고 추격하니 감히 적들이 자인경계를 넘지 못하였고, 이로서 전쟁 중에도 농민들이 동요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했다.
  넷째, 선생은 군량미를 별도 확보하지 않고 자인 울옥동 선생의 곡식창고를 적들에게 빼앗길까 우려하여 곡식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빈 창고를 불태워 버렸다 하였다. 여기에 안전한 곳은 곧 물한동이란 점과, 당시 자신의 창고에 서 이적한 곡식은 전량 군량미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다섯째, 주요항쟁 기록이다.
  ①동년 5월 11일, 오목천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여 양민을 죽이고 노략질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총대장 이상과 돌격대를 보내 순식간에 적 수십 명을 참획하여 물리쳤다.
  ②5월 16일, 적의 잔병이 청도를 중심으로 침입, 자인현역을 노략질 하였는데, 선생이 직접 의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하고, 병기 수백점을 탈취하였다. 이 때 청도 의병장 박경전이 합세를 요청하므로, 청도와 자인은 인접지역이니 마땅히 그대의 뜻에 동의한다 하였다.
  ③5월 20일 정예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청도 박경전 의병장과 합세, 적 수백을 참획하고 조총 1백점과 탄환 십여 두를 탈취하였다. 하지만 총대장 이상은 삼족대까지 적을 추격하다 목숨을 잃자 환군하여 총대장을 윤기로 삼고 청도 의병장 박경진과 합세, 잔병을 모두 물리쳤다.  
  ④ 5월 24일 군사를 거느리고 선암전투에 출전하여 5천여 명의 적을 대파하니 적의 시체가 삼대처럼 무너졌고 살아남은 자 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동월 27일은 가지령 전투에서, 29일은 동곡전투에서, 10월 10일은 경주아화전투에서 각각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⑤6월 22일 병졸 1천여명을 인솔 방어사 권응수 의병장 진영에 합세하여 영천성 복성을 꾀하였다. 24일 영천성의 공격을 의논, 여러 읍의 병사를 모으니 3,5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이 영천성 복성 우군장을 맏아 분전하여 28일 복성하니 방어사 권응수 의병장이 이번 싸움의 전략은 모두 최의병장의 계획이다 하고 성생의 공훈을 높이 평가하였다.
  여섯째, 선생에 대한 공훈과 신분상승이다.
  선생은 영천성 복성 공으로 조정의 특명으로 조산대부 별제에 제수되었고, 이어 동년 9월 10일에는 병사 박진의 상계로 장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이는 나의 병사로 하여금 이뤄진 공로라 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1596년 10월 전쟁이 끝나자 자인향교 위판과 가솔을 거느리고 울곡 본가로 돌아온 후, 이후 화왕산성에 두 아들을 보내 방어사 곽재우 의병장과 협력하게 한 후 1599년 8월 4일 울곡에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 선생에게 가선대부한성부 우윤에 추증되었다.
  이와 같이 성재 최문병 의병장은 당시 경주부에 속현된 자인현역 사람으로, 선대로터 대를 이어온 무인의 후손이기도 한 선생은 평소 남다른 예지와 통찰력을 겸비한 지역선비로 학문과 인품은 물론, 효우의 표상이 되었다.
  그가 창건한 인지재는 임란발발 직전 국난위기를 주목하고, 여기에 활·화살·칼·창 등을 모우는 군기고와 지역 선비들과 의기투합을 결속하는 장소가 되었고, 43세로 짧은 생을 마쳤지만, 선생의 생은 오로지 충효에 근간하였고, 일신의 영달과 신분상승과는 무관하였던 인물이다.
  자인현역의 의병창의 발상지는 선생의 묘역이 현존하고 있는 능적골 일대의 속칭 물한동이다.
  선생의 묘역은 사진에서와 같이 약 1,200㎡에 달하는 구역으로, 위로 동지중추부사 내외 묘와 40m 간격으로 그 아래 선생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선생의 묘역에는 좌측에 묘비석과 정면에는 혼유석, 상석, 향석이 배치되어 있고 하단에는 좌우로 2개의 망주석이 나란히 서있다.

▲ 구룡산하 물한동 선영에 자리한 성재 선생의 묘역(계좌정향)
▲ 구룡산하 물한동 선영에 자리한 성재 선생의 묘역(계좌정향)

   이 중 묘비석은, 선생이 돌아가신 141년 후인 1740년 4월에 당시 자헌대부 공조판서 겸 의금부사오위도총부총관 이가환이 근찬한 글을 1863년 7월에 입석하였던 것으로, 이에 따른 일대의 석물은 동시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현존의 묘비석 비신에서 이 비를 세우는데 감역과 유사를 맡은 9세손~11세손이 모두 1863년 이후 사람임이 확인됨으로, 이를 근거로 석조전문가에 정밀분석을 의뢰한 결과 묘비석의 가첨석과 기단석을 제외한 현존의 비신은 1945년 이후에 개채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밖에 묘지명을 밝힌 혼유석 또한 이때에 개채되었다는 사실을 문중 관계자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이의 상황을 전문가의 고증과 현장 주변 고령자, 문중 관계자 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채록한 결과 이는 일제강점기에 임란창의 의병장에 대한 극심한 사찰과 탄압이 팽배해 짐으로, 문중에서 이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명문화된 의병관련 일체의 석물을 훼철하여 땅 속 깊숙이 묻어 버렸다는 엄청난 사실과, 당시 관계자 가솔들이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산속 깊숙이 피난하였다가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고향 원당리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문중 원로 최태진(88세)씨의 증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곧 이 일대가 임란창의 현장이라는 점과 의병장 최문병 선생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이는 일제강점기에 임란창의 의병장 후손들의 수난사로 분석되었다.
  이와 같이 현존하는 임란창의 유적과 선생에 묘역은 당시 경주부에 속현되었던 자인현역에 대장으로 나라를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던 최문병 의병장과 휘하 의병들의 혼이 묻힌 곳으로 이에 대한 역사적 예우와 현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시점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같은 수난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상기시키는 산교육의 장으로서의 현창하고 보존하여야함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야할 사명이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경산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