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제는 마을의 수호·안녕·풍요를 위해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민간의례의 중 하나, 이는 주민들의 화합과 결속을 근간한다.”

  ▣ 중방동, 정월대보름 만사형통 기원 당산제 개최

  2018년 3월 1일 오전 11시, 경산시 중방동 당산목(경상북도 보호수 제11-10-6-1-1호) 앞에서 중방동민의 평안과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당산제가 경산중방농악보존회(회장 이승호)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이날 당산제에는 경산중방농악보존회 단원 50여명과 경산시단위 기관단체장, 중방동 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전통세시 방식으로 복원하여 재현함으로 참여한 지역주민과 내빈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경산시 중방동당산제와 당산목
경산시 중방동당산제와 당산목

  본래 중방동당산제는 1700년 중기, 이 마을에 달성 서씨들이 정착하면서 기존의 각성바지와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마을향약 형식으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 새벽에 연행되어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이를 재현하였으나, 6.25 한국전쟁과 더불어 다시 중단되는 수난을 겪어오다 지난 2000년도부터 경산중방농악보존회에 의하여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이를 복원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단위로 연행되는 당산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세시의례로,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적 의례로, 이는 당산굿·동제(洞祭)·당제(堂祭)라고도 하며, 제일(祭日)은 주로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정초가 가장 많고, 일부지역에서는 10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며, 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을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산가(産家)·상가(喪家)의 출입과 외지출타 등을 금하고, 개고기 등의 궂은 음식을 피하고 언행을 삼가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매사에 근신한다. 제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와 당산석·신당 등 제장(祭場) 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는다. 제물은 화주나 제관집에서 준비하는데, 대체로 메·주(酒)·과(果)·포(脯)·편·채(菜) 등이다.

중방동당산제 진행 장면
중방동당산제 진행 장면

  제사비용은 마을공동 제답(祭畓)의 수입에서 충당하거나 집집마다 추렴하여 쓴다. 제사는 대개 자정을 전후한 시간에 시작하여 새벽녘에 마친다. 제의는 주제자(主祭者)에 따라 진행방식이 다른데, 마을사람 가운데 선정된 제관이 주제할 경우 제물진설(祭物陳設)·신주헌작(神酒獻爵)·재배·당산축·소지·퇴식·음복 등의 순서로 유교식 절차에 따른다. 무당이 주관할 경우 제관이 헌작·재배·축문·소지 등 간단한 제를 올린 다음 무녀(巫女)와 공인(貢人)이 열두거리굿으로 진행한다. 대부분의 경우 제의는 유교식 절차로 행하여지는데, 풍물을 울리는 매굿(메굿 또는 매구굿)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농악대가 치는 매굿은 마을제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아들이는 의미로서 치는 들당산굿이 있다.

  또한 제당의 잡귀잡신의 침입을 막고 또 쫓는 의미의 매구굿이 있다. 그리고 제가 끝나고 신을 보내기 위한 날당산굿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당산제가 끝나면 마을공동 시설인 우물·창고·정자·다리 등을 돌면서 굿을 친 다음 각 가정을 방문하여 문굿·샘굿·조왕굿·마당굿 등 집안 구석구석을 돌면서 굿을 치는데, 이를 매구치기 또는 마당밟기·지신밟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당산굿은 당산제를 전후하여 2~3일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당산제는 다른 동제와 비교하여볼 때 유교식 제사와 매굿, 줄다리기가 복합 병행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다른 동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한편,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신성기간 동안 마을사람들은 얽혀 있는 감정을 해소하는 화해의 장(場)을 마련하고, 마을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일체감을 가짐으로써 지역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고, 노동으로 힘든 생활에 활력을 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한다(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중방동당산제와 지신밟기 유래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일원에 전승되는 ‘당산제와 지신밟기’ 의례는 본래 1700년 중기 이 마을을 개척한 달성 서씨(개척자, 서사선 선생) 일가가 현 경산시 중방동을 중심으로 상방, 하방동을 개척하면서 기존의 각성바지와 함께 결속을 이루고, 남천강 수계에 범람으로 인한 재해와 경외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을신앙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의 중방, 상방의 당산신앙이고, 이에 신의적(神醫的) 존재로 등장하게 된 놀이가 지신밟기로, 이는 ‘중방두레농악’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중방동은 경북 경산시의 소재지 중심지역으로, 지형적으로는 사방에 남북으로 흘러내리는 선의산 수계권의 영향을 받아 남천강을 중심으로 한 시의 소재 지역에 넓은 취락이 형성된 곳으로, 예부터 남천강과 남매지는 이 지방의 풍년농사에 근간이 되었다.

  특히 남매지는 상하로 2개의 저수지가 약 38,000㎡에 달하였고,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남천강의 풍부한 선의산 수계의 영향으로 넉넉한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지형적 여건을 갖춘 중방동은 118,000㎡에 달하는 기름진 옥토를 풍년농사로 이끌어 내는 대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개척 초기부터 백자산괴로 이어지는 살피구역에 남천강 본류가 포락하면서 해마다 잦은 재해가 발생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이에 극약처방으로 내 세운 조처가 곧 상방, 중방, 하방동의 향약과 두레의 근간이 된 중방동당산제가 지역 민속놀이의 모태가 되었다.

  본 향약은 집성을 이룬 달성 서씨가 중심이 되어 마을 규약을 정하고, 이에 각성바지와 결속을 다지는 방안의 품앗이 두레 규약을 제정하였던 것으로, 여기에 일차적으로 등장하게 된 마을 규약이 해마다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마을 동신제가 등장하게 되었고, 본래 일대의 마을신앙인 동신제의는 먼저 상방동의 관아 전정에서 당시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를 동신목으로 추앙한 것을 계기로, 경산 소재지 권역의 동신제의 근간이 되었고, 본 제의는 상방, 중방, 하방 주민들의 최대 기복제의가 되었으며, 이로서 걸립과 지신밟기 등장이 곧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의례로 집집마다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풍물놀이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당시 이들이 연행한 풍물놀이가 곧 지금의 ‘중방동지신밟기’로, 이후 ’중방동 두레농악‘의 모태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마을 향약과 두레형식

 ‘중방동동신제’는 지금의 경산시 중방동을 배경으로, 남매지 일대 주변 농민들의 애환을 달래고, 이를 통한 풍년농사 기원 굿으로 등장한 지신밟기와 두레형 농악놀이가 중방동 일대의 철마지 세시풍속과 기우제, 그 밖에 농사철에 힘을 부추기는 일련의 요소로 자리매김 함으로 중방동 ‘두레농악’은 여로부터 중방동민들의 삶의 애환만큼이나 강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이 경산시의 ‘중방동당산제와 지신밟기’ 의례는 그 발원자체가 집성촌의 집성 씨족과 각성바지 사이에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방안으로 등장하게 된 마을 향약과 동신제 의례를 중심으로 풍물패가 등장하면서, 두레 형식의 지신밟기와 영농현장에서의 농사일 독려하는 차원의 풍물이 연행되면서 씨족간의 갈등을 와해하고 치유하는 상조의 의지를 굳혀왔음은 물론, 예로부터 영농현장에서 연행되는 각종 뱀들과 해충들을 퇴치하는 굿거리장단의 전승양상은 경산중방농악만의 독창성이다.

  특히 1945년 해방과 더불어 1947년 이후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중방동당산제를 복원하고 이어 과거의 두레농악을 복원하면서, 지난 2000년부터 중방동당산제의가 중방동의 전통 민속놀이로 활성화되기에 이르면서 중방동 당산제와 지신밟기가 중심이 된 ‘경산중방농악놀이’가 각종 전국민속농악놀이를 석권하고 있음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경산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