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좌] 하양현 역사 알리기

강사 : 최재림(경산시 번영회장)
강사 : 최재림(경산시 번영회장)

  1. 건치(建置) 연혁(沿革)
  1) 하양현의 변천
  하양읍(河陽邑)은 현재 경상북도 경산시에 속한 읍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현(縣)이 설치되어, 요즘으로 치면 시ㆍ군 급의 독자적인 행정 단위를 이루었던 곳이었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6품관에 해당하는 현감(縣監)이 수령으로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되기도 했다.
  [고려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하양은 고려 성종 14년(995)에 하주(河州)라는 이름으로 자사(刺史)가 머무는 고을이 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하양현(河陽縣)으로 개칭되면서 조세 수취 및 역역 동원의 책임을 맡은 감무(監務)가 두어졌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계수관(界首官)인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에 딸린 속현(屬縣)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과 함께 현감이 상주하는 고을로서, 인근 영천군과 함께 안동대도호부의 관할 현이 되었다.
  그 뒤 선조 34년(1601)에 경산현과 더불어 대구부에 합속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는데, 당시 수령이 머무는 관아는 한사리에 두어졌다. 영조 18년(1742)에 관아가 금락리로 이전하면서 고을의 명칭도 화성현(花城縣)으로 개칭되었으며,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의 결과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면서 하양군(河陽郡)으로 칭해졌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조정으로 인해 인근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900년 이상 긴 세월의 대부분 시간 동안 독자적인 지방행정 단위를 유지했던 하양이 더는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는 고을이 아닌 상태로 떨어진 것으로, 이후 현재까지 그런 양상이 지속 되었다.
  하양은 해방 이후인 1973년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어 경산군 하양읍이 되었다가, 1995년 경산군이 경산시에 통합되면서 행정구역 명칭이 경산시 하양읍이 되었다.

  2) 화성지(花城誌) 요약
  (1) 고구려 : 하주(河洲)로 지칭.
  (2) 신라 : 하양(河陽)·하주(河州)·화성(花城)으로 지칭.
  (3) 고려 : 성종 14년(955) 자사를 두었다가 현종 때 하양(河陽)으로 개칭하고 현(縣)이 되었다. 그 후 경주부(慶州府)에 속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4) 조선 : 현감(종 6품, 지방장관 임기 5년)


  2. 읍기와 인구
  1) 하양현 읍기(邑基)
  최초 하양현의 읍기를 한사리(翰斯里)에 두었다가 조선 숙종 41년(1715), 천천(泉川, 현 도리리)로, 영조 18년(1742), 금호동(琴湖洞, 현 금락리)로 옮겨 고종 32년(1895),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1910년 국권침탈과 더불어 191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군(郡)을 폐지되고, 이를 경산군(慶山郡)에 속하여 면(面), 동(洞), 리(里)가 되었다.

  2) 관할구역
  하양현의 관할구역은 1914년 이전까지 모두 7개 면으로, 현의 범위를 동서(東西) 50리, 남북(南北) 50리로 하였다.
  당시 7개 면의 관할구역은 다음과 같다.
  ① 읍내면(邑內面) : 7개 동
  ② 마양면(磨陽面) : 6개 동
  ③ 안심면(安心面) : 6개 동
  ④ 낙산면(樂山面) : 7개 동
  ⑤ 중림면(中林面) : 5개 동
  ⑥ 와촌면(와촌면) : 6개 동
  ⑦ 북면(北面) : 4개 동

  3) 합호(合戶)와 인구(人口)
  동 기록에는 1,366호에 인구 4,612명(남자 2,614, 여자 1,998)으로 나타나고 있다(본 기록은 1934에 출간된 화성지에서 발췌)


  3. 산천(山川) 및 주요기관
  1) 산천(山川)
  동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하양현에 소재한 산을 크게 3곳에 제한하였고 수록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공산(公山)
  칠곡군(漆谷郡) 동(東)쪽, 현 대구광역시(大邱廣域市)와 경산시(慶山市)를 지나 영천시(永川市) 역에 이른다고 하였다.

  (2) 무락산(無洛山)
  하양현의 뒷산으로, 진산(鎭山) 현 무학산(舞鶴山)을 지칭(指稱)한다.

  (3) 초례산(醮禮山)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징벌할 때 부하들과 제사(祭祀) 지낸 곳

  강(江) 하천(河川)으로는,

  (1) 금호강(琴湖江)
  길이 117.5km, 경북동북산지→영일군→영천시→경산시 달성군(대구)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되고, 낙동강의 발원지는 영일군 죽장면 가시령, 경주시 모자산(母子山), 영천시 보현산(普賢山)이다.

  (2) 시천
  시천은 현 청통천으로, 신령(神靈)의 남쪽, 은해사(銀海寺) 골에서 발원한 수계(水系)를 지칭한다.

  (3) 서사천
  서사천은 현 조산천(造山川)으로, 하양 사기리와 대곡리의 수계를 말한다.
  위의 수계가 하양읍(현 롯데아파트 부근)에서 합수되어 금호강에 합류된다. 참고로,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을 양(陽)이라 하고, 한강을 한양, 남한강을  단양, 금강을 청양, 섬진강을 광양, 밀양천을 밀양이라 지칭하였다 한다.

  2) 주요 기관
  아래에 속하는 제의 공간과 소재는 강의 시 강사 별도 해설
  (1) 문묘(文廟)
  향교(鄕校)-현 공립학교 격
  (2) 사직단(社稷壇)
  한해의 풍년 농사와 무사 안녕을 위하여 토신(土神)과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현(縣)마다 1개소씩 설치되었다.

  (3) 성황단(城隍壇) 
  고을의 터를 지켜주는 신을 모신 사당
  (4) 여제단(?祭壇)
  제사를 받지 못하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이나 역질(疫疾)을 퍼터리는 여귀(?鬼)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
  (5) 육영제(育英齋)
  향교를 졸업 후 성균관 입학과 과거를 준비하는 특수기관으로, 대구 경북에 3곳이 있었다.

  (6) 기로당(耆老堂)
  향교 내에 축조되어 있으며, 노인을 봉양하는 곳이다.

  (7) 금호서원(琴湖書院)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 선생을 배향(配享)하는 서원으로 하양현에는 금락리와 부호리에 각각 소재하고 있다.

  (8) 남호서원(南湖書院)
  하양읍 남하리에 소재한 서원으로 금포 김시성 선생을 배향한다.

  (9) 동호사(동호사)
  안심 동곡에 소재한 면와 황경림 선생을 배향한다.

  (10) 임호사(臨湖祠)
  은호리에 소재하며, 괴암 이간 선생을 배향한다.

  (11) 효양사(孝養祠)
  안심 각산(角山)에 소재하며, 운계 배응남 선생을 배향한다.

  4. 역(驛), 봉수(烽燧), 장시(場市), 불우(佛宇)
  1) 화양역(華陽驛)
  서사리 뒷들, 동(東) 영천 청통역(30리), 남(南) 자인 산역(30리)
  중마 : 2필, 상마 : 1필, 역리 15인 노 13명

  2) 봉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기숙사 옆 시산(남(南) 경산(慶山) 성산봉수, 동(東) 영천(永川) 성황봉수와 공조.

  3) 장시(場市)
  오일장으로 4일, 9일 개시, 읍내 일원 원 6차

  4) 누정(樓亭)
  (1) 용벽루
  한사리 동쪽, 1416년 현감 송을이 창건, 서거정 선생의 시가 있다.

  (2) 관서정(觀逝亭)
  동서리 남정지(南亭址) 쪽, 1424년 현감 채륜이 창건, 강호(江湖)의 경치를 보며 관민(官民)들과 함께 노닐던 곳으로, 현재는 홍수로 정자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는 들로 변했다.

  5) 효자 효부 열녀각
  하양읍 소재 효열행각의 주인공(신휴 효자외 10여명)을 강의 시 열거.

  6) 불우(佛宇)
  (1) 환성사(環城寺)
  신라 때 고찰로, 헌덕왕 때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 시대 척불 정책으로, 영천 임고서원에 속하여 공납했으나 1724년 하양향교에 환속(향유 : 박서봉, 황윤종) 되었다. 현재 이를 입증하는 환성사 결송문이 하양향교에 보존되어 있다.

  (2) 신림사(新林寺)·남태사(南泰寺)
  그 밖에 신림사(新林寺) 남태사(南泰寺)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폐쇄(閉鎖)되고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5. 하양현의 의병 창의
  1) 창의 배경
  1592년 임진년 4월, 하양현(河陽縣)에서 황경림이 기장·울산·양산·경주·청도·밀양이 모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고 먼저 가속을 청송 자하동(紫霞洞)으로 보내고, 표형(表兄, 외사촌형) 김거(金?)와 방어책을 논하기 위하여 현감을 만나 군병 소모문을 각 면으로 전달하도록 하고, 서당에 모여 창의 격문을 발송한 후 모두 모여 서약하고 신해(申海)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유생 중 명망과 책략이 있는 자를 택하여 모병(募兵)과 모속(募粟)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효양산 아래에서 병력을 모았으나, 하양현의 군사 수백 명은 이미 방어사군에 소속되어 남아 있는 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가정의 노비와 유생 중 싸울 수 있는 자를 조사하였는데, 관군과 합해 보니 겨우 4백 정도였다. 부족한 무기는 담당관에게 기한을 정해 만들도록 하였고, 붉은 천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고 그것에다 크게‘분충장의 정용군(奮忠仗義精勇軍)’이라고 썼다. 무학산 가장 높은 곳에 척후병을 배치하고 꽹과리와 육성으로 원근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통보하도록 했다.
  왜군 백여 명이 와평(瓦平, 현재의 와촌 평야)으로 침입하여 인가를 약탈하매 병력을 이끌고 대적하여 영천과 경계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신해는“우리 고을은 작은 읍이어서, 왜병이 반드시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 간간이 흩어져 약탈하는 왜군은 실로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말하고, 전군을 통솔하여 신녕으로 가고자 황경림을 찾아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이에 내가“병가의 근심은 항시 적을 소홀히 생각하는데 있다. 만약 허점을 노려 외로운 성을 엿본다면 무엇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군사를 나누어 각기 주둔하여 있으면서 그 변화를 엿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신해는 최대기와 정예병 2백을 선발하여 당일로 권응수 군에 합류했다.
  신해 의병장이 권응수 군에 합류하자 제 유사가 황경림을 하양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추가로 뽑은 의병이 70여 명에 불과하여, 경산과 자인으로 격문을 돌려 450여 명을 얻게 되어 비로소 군용을 떨치게 되었다. 왜군이 초례산 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약탈을 함으로써 도로가 불통하였다. 이에 병력 100여 명을 산꼭대기로 보내 돌을 모으고 깃발을 세우고 큰 소리로 북을 울려 장차 엄습할 것처럼 하면서 해지기를 기다려 불빛이 보이거든 하산하여 접전하도록 명령하였다. 정병 300명을 뽑아 산 밖 애로(隘路) 지점에 매복하게 하고, 민가의 이엉·가벼운 돌·땔나무·인화물질을 가지고 몰래 사방에서 포진하게 하고, 돌격대 30명으로 샛길에서 동시에 불을 질러 왜군이 놀래 감히 산으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왜군이 모두 산 밖 불이 없는 곳으로 나오자, 복병이 일시에 돌격하고, 정상에 매복한 의병 역시 북을 치고 내려오면서 양면 공격을 하여 왜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왜군의 목을 20여 급이나 베었다. 이때 최대기와 신해가 권응수 진영에 있으면서 왜군의 일대가 경산·하양 등지에 모여들어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녕으로부터 정병 2백 명을 이끌고 본진에 합세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충전하여 필사의 각오로 왜군에 대항했다. 그로서 왜군 3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아군도 조총에 맞아 전사한 자가 12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남은 왜군이 멀리 달아나 하양현 일대가 편안하게 되었다. (황경림의 면와실기 중에 채록)

  2) 하양현 출신 임란 창의 대표적 인물
  1) 신해(申海)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그는 고려 신숭겸의 후손으로, 그는 임란 발발 시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지역 의병을 일으켰고, 영천 의병장 권응수, 정대임 등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신해 의병장의 묘갈은 하양읍 도리리 산 1번지 신녕곡 계좌에 있다.
  묘갈명의 전면에는“壬亂功臣倡義大將兼通政大夫行仁同府使平山申公墓碣銘”이라고 적었다.

  2) 황경림(黃慶霖)
  황경림은 본관이 장수(長水), 자는 경서, 아호는 면와(勉窩)이다. 1561년 5월 29일 하양에서 태어나 1625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1592년 임란이 발발하자 그는 안심 지역에서 의병을 창의 왜적과 항쟁하면서 당시 하양, 자인, 경산의 의병일기를 소상히 적어 후대에 남겼다. 면와실기(勉窩實紀)는 1872(고종 9)년, 그의 후손 황이익(黃履翊)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조성교(趙性敎)가 서문을 쓰고, 권말에 홍택주(洪宅疇), 유치엄(柳致儼) 등의 발문을 적었다.
  그는 참봉을 지낸 아버지 인시(認始)와 어머니 김해 배씨 사이에 태어났다. 1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른들처럼 애통해하며, 정성을 다해 상례(喪禮)를 모시는 비범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지역의 신해 의병장과 함께 하양현을 사수하였으며, 여력이 있을 때마다 인근 군, 현에 원군으로 나가 왜적을 물리쳤는데, 주로 하양현 내에서는 와평, 초례산, 도리촌, 금호강 일대를, 경산에서는 반야, 창암에서 주로 적과 싸웠다. 왜군의 출몰이 없었을 때는 영천성 복성전투, 달성전투, 곽재우가 대장으로 휘하의 화왕산성, 수성 전투에도 참여했다.
  1595년에는 권응수 장군과 합세하여 창암에서 왜군을 격파하였고, 1596년에는 대구 출신 서사원(徐思遠) 의병장 등과 공산회맹(公山會盟)을 통해 전의를 불살랐으며, 1598년에는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무진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등 임란 직후부터 왜적이 물러간 1598년까지 향토방위와 현민 보호에 진력했다.
  전란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실제보다 공적을 부풀러 조정에 품계를 올려 상을 받는 등 명예를 누리려고 애썼으나, 그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동내동 초례산 밑으로 은거하여 조용히 학문을 즐기며 여생을 마쳤다.
  지금의 대구 동구 안심 동내동의 동호서당(東湖書堂)은 원래 동호사(東湖祠)라 하여 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남아 있다.
  (이동근 외 1, 경산의 의병항쟁, 2000)

  3) 이간(李幹)
  이간(1576~1697)은 조선조 경산의 선비로서, 본관은 영천인이다. 자는 공직(公直). 호는 괴암(乖菴)이다. 일찍이 매암 이숙량(李叔樑)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7 살에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영천성을 회복하는 데 활약하였다. 1615년 진사에 오르고 하양으로 옮겨 와 금호강 언저리에 만고정(萬古亭)을 세워 학문과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뒤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괴암일고(乖庵逸稿)”를 상재하였다. 1977년 후손들과 향림들이 임호서원을 복원하여 승격시켰다. (경산군지, 1971, p. 227)

  4) 박능정(朴能精)·박붕(朴鵬) 부자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박능정의 조상은 신라 왕손으로서 장무(莊武) 공 윤웅(允雄)이 국가로부터 울산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흥려백(興麗伯)에 봉해졌다. 공의 5대조 진사 박호(朴豪)가 여말 공민왕 때에 요승 신돈이 날뛰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어 벼슬할 생각을 모두 버리고 하양으로 내려와서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비분강개하여 탄식하였다.“대장부로 태어나 나라가 어지러울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하겠거늘 어찌 편안히 방석에 앉아 볼 수만 있겠는가.”하며, 의병을 일으켜 울산의 서생진(西生津)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이러한 사적은 울산지 충의록 또는 울산박씨 가보에 실려 있다. 아들이 곧바로 시신을 모시고 와 하양의 송비동 서쪽 기슭 언덕에 부인 김해 김씨와 함께 유택을 마련하였다.
  박붕은 그의 아들로, 호는 관학암(觀鶴庵)이다. 임란을 당하매 하양의 의병대장 신해(申海) 장군이 권응수 진영으로 합류해 가고 없을 때, 아버지인 훈련원첨정 박능정 공의 정신을 이어 하양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지주인 문관도(文貫道) 공과 힘을 합하여 전략을 꾀하기도 하고 성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기회가 있을 적마다 적을 섬멸하여 뛰어난 공을 세웠다. 선조 임금 시절 학문과 행실이 뛰어나 훈도(訓導)로 천거되었다. 임진왜란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하양현을 지킬 때 5년 동안 성을 굳게 지킨 공을 세웠다. 이러한 사적은 영남여지(嶺南與誌)와 화성지(花城誌)에 실려 전한다.
  전쟁이 평정을 찾자 어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함을 통탄하게 여겨 벼슬길에 나아감을 던져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경산군지, 1971, p. 228)

  5) 허대윤(許大胤)
  생몰 연대 미상. 하양현인으로 자는 비승(丕承), 호는 훈재(塤齋)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우 허경윤과 함께 하양에서 29세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므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오르고 종 7품인 분순위 수문장의 벼슬을 받았다.(경산군지, 1971, p. 229)

  6) 허경윤(許景胤)
  생몰 연대 미상. 하양현인으로 자는 윤승(允承)이고, 호는 치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 허대윤을 따라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3등에 오르고, 벼슬은 정 7품인 적순위수문장을 제수받았다.(경산군지, 1971, p. 229)
 
  7) 김거(金?)
  생몰 연대 미상. 김해인으로 자는 가화(可和), 호는 학포(鶴圃),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현릉 참봉으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는데, 화왕산 동고록(火旺山同苦錄)에 그 사실이 전한다. 후에 승지로 추증되었다.(경산군지, 1971, p. 229)

  8) 박응득(朴應得)
  박응득(1578~1640)은 본은 밀양인으로, 1578년(선조 11) 경산군 진량면 대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응직(應直), 호는 죽고(竹皐)다. 정유재란 때 망우당 곽재우를 따랄 화왕산성에서 싸운 공적으로 승의부위(承義副尉)에 올랐다. 광해군 때 무과에 올라 선전관 및 용양위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년에 청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였을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농성하였다.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관을 증직하였다. 그의 묘비는 경산시 진량읍 신제리 신제지(新堤池) 옆 원봉(圓峰)에 있다. 묘비의 이름과 내용은 p.149와 같다. (경산문화대사전, 2009, pp. 222~223)

  ☞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경산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