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번영회 사무국장 박 승 표
경산시번영회 사무국장
박   승   표

  1. 자인현 역사적 개황
  1) 역사적 변천
  자인은 노사화(奴斯火), 기화(基火) 또는 인산(仁山)이라 불렀다.
  자인의 옛 이름인 奴斯火(노사화)는 상고의 촌락국가라 할 수 있는 伐二火(벌이화) 였고, 자인 북사리 고분의 부장품을 보면 임당 고분과 같아 가야 시대 압독국 속지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자인으로 개칭하여 獐山郡(장산군, 지금의 경산)의 속현이 되면서 자인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려 8대 현종 9년(1017년)에는 경주부에 領縣(영현)이 되어 완전히 그 독자성을 상실하였다.
  자인이 復縣(복현)이 된 조선 16대 인조 15년(1637년)까지 873년 간을, 특히 경주의 영현이 된 이후의 621년간은 참으로 어렵고 억울한 시기의 생활로 지내왔다.
  불교의 성사 원효와 유교의 대현 설총 부자가 탄생한 이 고장이 보잘것없는 고장으로 변했다.
  1632년 복현운동의 불꽃이 지펴진 것은 白濂(백렴)에 의하여 시작되어 거현적으로 발전하고 더디어 그 5년 후에 소원이 성취되었다.
  이전에는 자인이 왜구와 왜란으로 쓰라린 고통을 당했을 때 현의 백성을 구한 한 장군과 의병장 崔文炳(최문병) 등의 큰 功을 잊을수 없다.
  자인이 복현된 후로는 역사는 전일의 불공정 하였던 일을 보상하는 뜻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정에서 특별한 대우를 하여 지방관으로 최하위인 현감의 고을임에도 자인만은 대부분이 문과 급등의 守令이 부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이웃 고을이었고 현재는 같은 경산시에 속해 있는 하양을 두고는“河陽雖小 將相之邑”(하양수소 장상지읍)이라 불렀듯이 자인을 두고서는“慈仁雖小 聖賢之邑”(자인수소 성현지읍)이라고 불렀음으로 보아 큰 고을의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2) 현의 명칭
  자인의 옛 지명 奴斯火(노사화)의 어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或 者는“奴”를 종, 노예로 보는 경향이 짙은데 그러면 자인을 종의 고을로 삼았다는 말인가.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전혀 그러하지 않다. 필자가 보는 견해의“奴”는 신라국으로 속하기 전에는 압독국의 영속이였기 때문에 신라국으로 편입되면서 노새 편입된 새롭고 편안한 땅이란 뜻으로 붙여졌으며 신라의 옛 이름을 서라벌과 함께 斯盧(사로)라는 이름이 쓰인 것으로 보아“奴斯”는 신라국의 중요한 새로운 지역으로 높여 부른 지명으로 본다. 또한“火”는 오행의 하나로서 方向→南, 時期→夏(여름), 十干→丙丁, 五事→視(시?眼), 五藏→心(심)을 뜻하기에 결론적으로 노사화는 신라 변방에 있는 중요하고 보배로운 지역이라는 높은 뜻의 地名이다. 후일 자인으로 변경된 것 역시 원효의 출생지로 불교의“慈”와(자·자비) 유교의“仁”을 택함으로써 성스러운 천명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며, 기화는 잘못된 이해와 표기인 듯하다.


  2. 시대별 변천
  1) 선사시대
  경주의 옛 이름은 徐羅伐(서라벌)이라 하지만 실지로 신라국과 같은 이름이다.
  경주 인근의 安康(안강)의 옛 이름은 音汁伐(음즙벌), 音質國(음질국)이라고 하며 같은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보면“변한은 남쪽에 있는데 12소읍 즉 작은 고을이 각기 나라로 일컬었다.(弁韓在南 十二小邑 各稱國)
  上代에 自治의 村落이 그대로 국가의 행세를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차츰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昌寧(창녕)의 옛 이름은 比自火(비자화), 比斯伐(비사벌)이라고도 하였는데 火는 古語의“블”이고, 伐(벌)은 음이“벌”이니, 이는 초기 농경사회의“들”“촌락”또는, 국가와 맥을 같이 한다.
  영남방언에서 아직도 들을수 있는“어”“으”의 음운 현상은 火와 伐의 통용임을 명확히 증명된다.
  따라서 우리 자인의 옛 이름은 奴斯火이니 상대사에서 자인의 위상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노사화의 일명은 其火(기화)라 하니, 其火(기화)와 奴斯火(노사화)의 관계는 어떠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의 해상왕 張保皐(장보고)의 일명이 弓福(궁복)이라 했으니 이들 관계도 일명의 其火나 弓福은 그 당시 전해오던 고문현의 보존 상태에서 기인한 것이다.
  장보고란 중국식이 아닌가 싶다. 궁복이 오히려 본명 일수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일찍이 당에 가서 무공까지 세워 소장까지 승진한 사람이니 계속 장보고로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문헌의 훼손으로 張에서 長이 지워져 弓만 남고 保皐(혹은 寶高)에서 韻母(운모 음절에서 中聲±終聲)“오”가 탈락하여 전음절“보”의 종성으로 첨가된 복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이 奴斯火에서 奴는 안보이고 斯는 斤이 떨어져 나가 其만 남아 其火가 된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곧 其火는 奴斯火의 오류로 볼만하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에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농경사회를 이룬 것이 확실하다.
  20c 초기에 김해 貝塚(패총)에서 炭化米(탄화미)가 출토되었지만 1977년 驪州(여주)에서 출토된 炭化米(탄화미)는 3000년 이전의 것으로 측정하고 있고 人類學(인류학)에서는 단순농업 경제시대를 적어도 8000년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奴斯火(노사화)이던 상대의 자인이 신석기 시대 농경사회의 촌락국가였음을 전래의 문헌의 기록과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유적과 출토된 유물로 알 수 있다. 支石(지석-고인돌)의 호칭은 켈트(celt語 dolmen=dol(table)+men(stone)으로 卓子石(탁자석)이란 뜻인데 혹 묘라고도 하고 제단이라고도 하니 아마 두 기능을 함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 할 것이다.
  어느것이든 원시종교인 샤머니즘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선돌 역시 지석과 같이 거석문화의 형태이다.
  특히 용성면에는 근 10여 기의 지석이 있고 신석기 시대의 무문토기와 마제석기 등이 함께 출토되기도 하였다.
  입석은 자인면 교촌리와 용성면 고죽리에서도 볼 수 있다.

  2) 신라 시대
  德業日新 網羅四方

  우리나라 역사에서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列國時代(열국시대) - 고조선 말기 제후국들의 독립세력이 등장하여 여러 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동예, 옥저, 삼한(마, 진, 변) 등
  - 四國時代(사국시대) -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駕洛國)
  - 三國時代(삼국시대) - 고구려, 백제, 신라
  - 南北國時代(남북국시대) - 신라와 발해(渤海)
  - 高麗時代(고려시대)
  - 朝鮮時代(조선시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BC 59년경 徐羅伐(서라벌-신라)에서 朴赫居世(박혁거세)가 개국한 시기와 함께 그 후의 상당한 기간까지도 奴斯火(노사화-자인) 주변에 伊西國(이서국-청도)과 押督國(압독-경산) 등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아 중앙집권 국가가 있기 이전으로 列國時代라 할 수 있지만 통솔적으로 新羅(BC 59~AD 935)의 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에 볼수 있는 유물로는 자인면 북사리 1호 竪穴式(수혈식) 石室古墳(석실고분)에서 출토된 金製耳飾(금제이식)과 銀製?帶(은제과대-은 허리띠) 같은 것으로 보아 고대 자인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노사화를 자인으로 개칭한 것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의 일이다.
  이때는 대대적으로 지역명과 행정구역 개편이 일어난 시기이며, 이때 慈仁은 獐山郡(장산군)에 소속된 현으로 남게 된다.
  장산과 경산은 고호이고 이전 시대의 압독소국으로 6대 祗摩王(지마왕 112~134년)의 치세에 항복하였다. 한편 군에는 태수를 두니, 115인인데 관등은 舍知(사지 13等官)에서 重阿飡(중아찬 6等官 4級)까지이고 縣令(현령)은 201인으로 先沮知(선저지 17등관)에서 沙飡(사찬 8등관)까지였다.
  그 동안 많은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있었고 특히 신라 21대 炤智麻立干(소지마립간-왕) 시대에는 구휼정책으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민생을 구제하였고 靺鞨(말갈)의 잦은 침입으로 국란을 겪기도 하였다. 22대 智證王(지증왕) 때부터 왕이란 시호를 드림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통일은 30대 문무왕 8년의 일이고 국학을 설립한 것은 31代 神文王(신문왕) 2년(682년)의 일이다. 35대 景德王(경덕왕) 16년에는 지명을 완전히 한문식으로 바꾸었다.
  38대 元聖王(원성왕) 4年(787年)에는 과거 제도인 독서 三品科(독서 삼품과)를 실시하였다. 그중에는 휠씬 이전부터 사교육이 있기도 하였지만 공교육 제도인 국학의 설립과 공적인재 등용을 위한 두서삼품과 실시는 매우 특기할 만한 일이다.
  신라시대의 자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큰 광채있는 사건이 元曉聖師(원효성사 617~658년)의 출생이다. 출생 당시 자인은 압량군 屬地(속지)였다.
  조부는 仍皮公(잉피공)으로 祠廟(사묘)가 세워진 만큼 공로가 있는 분이었고 부는 談捺(담날)로 乃末(내말) 11등관)이었고 兒名은 誓幢(서당), 또 新幢(신당)이니 동음이서이다.
  원효성사의 출생지에 관하여는 현재 압량 신월리, 동부동 여천, 유곡 등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필자는 단연코 거부한다.
  자인이 틀림없는 출생지로 보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三國遺事“元曉不羈(원효불기)”에는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裟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裟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裟羅樹 其樹之實赤異於常……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 娑羅……拂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원효는 압량군의 남쪽(後 章山郡) 불지촌의 북쪽, 北四一里 栗谷 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지명은 불지 發智村(俗言 弗等乙村)이라 불렀다.
  사라수는 서라벌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던 어머니가 해산끼를 느끼고 밤나무에 남편의 옷을 걸치고 그 나무 아래서 해산한 것이다.
  그 후 그 밤나무에 열린 열매가 가사색을 닮아 푸르며 너무 크고 신기하여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불렀다. (例 : 菩提樹 釋迦牟尼의 깨달음의 나무)
  佛地村, 初開寺, 栗谷, 佛地, 金堂寺(新林寺) 等 考察해 보면 원효의 출생지는 자인 북사리 불당고개(옛-栗谷)임이 틀림이 없다. 아들 설총의 탄생지도 우리 현인 것이다.
  자인읍지에 기록되어 있는 帝釋庵(제석암)을 더깊이 고증한다면 원효의 출생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질 것으로 확신한다.
  원효는 義湘(의상-625~702年) 스님과 唐(당)으로 유학가기 위해 遼東(요동)으로 가던 중 지금의 수원 부근의 무덤가에서 자다가 두개골에 고인 물을 달게 마시고 아침에 그것을 보고는 크게 깨달아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두개골도 다름없이 사라진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觸?不二)
  (심생칙종종법생 심멸칙촉루불이)
  홀로 되돌아와 불교에 심취하고 불학에 정진하였다. 원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세분의 스님으로는 고구려에서 옮겨온 전주 고대산 景福寺(경복사)의 普德和尙(보덕화상), 梁山(양산) 靈鷲山(영축산)에 은거한 朗智大師(낭지대사), 迎日(영일)의 金梯山(금제산), 吾魚寺(오어사)에서 經疏(경소)의 의문점을 풀어주던 惠空和尙(혜공화상) 등이 있다.
  원효는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우뚝솟은 학문과 사상의 대가이며 스승이 되었다.
  大乘起信論蔬(대승기신론소)는 중국에서 海東蔬(해동소)라 하여 大蔬(대소)로 여긴다. 일본에서도 8세기 이후에 원효를 인용한 學僧(학승)은 50여명이나 되고, 인도에서도 陳那(진나)의 후계자들이 十門和諍論(십문화쟁론)을 梵語(범어)로 번역하였다 하니 이 화쟁론이야 말로 저술 학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華嚴經(화엄경)에 대한 여러 異論(이론)을 融會和合(융회화합) 시켜 대동중도의 이해와 실천을 논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전해진다.
  이는 후일 大覺國師(대각국사-1055~1101년)의 敎禪一致(교선일치)나 西山大師(1520~1604년)의 삼교일치 사상의 원천이 되었으므로 金富軾(김부식-三國史記)는 和諍國師影讚(화쟁국사영찬)에서“白用其海 萬象 一天廣矣大矣 莫得名焉”(백용기해 만상 일천광의대의 막득명언) “온 하천이 바다로 들어가고 모든 형상이 한 하늘에 있도다. 광대함이여, 위대함이여 이름을 부를 수 없도다” 라고 칭송하였다. 이 외에도 金剛三昧經論蔬(금강삼매경론소)도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
  원효는 총 99부 240여권의 저술을 하였다 하니 그의 학문의 광범위성은 미루어 짐작하기도 어렵다.
  고려 15代 肅宗(숙종) 6년 1101年에는 大聖和靜國師(대성화정국사)로 贈諡(증시) 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는 靜은 諍의 착오인 듯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儒敎聖賢(유교성현)으로 추앙받는 薛聰(설총)은 부 원효 모 瑤石公主(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 談捺(담날) 밑에서 수학하였고 아버지 원효는 소성거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설총은 俊才(준재)로 유학을 섭렵하여 대성하였고 翰林(한림)이란 관명을 쓴 것으로 보아 국학에서 諸生(제생)을 교수하였을 것으로 본다.
  설총은 신문왕에게 花王戒(화왕계)를 바쳐 관계를 맺었고 吏讀(이두)를 창제, 정리함으로서 문자교육의 필요성을 일찍 알게 되었다.
  花王戒(화왕계)는 왕을 諫(간)하는 글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散文(산문) 중에서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文體(문체)는 당시 유행하던 騈儷體(변려체)이었다. 고려 8대 顯宗(현종) 18년(1022년)에 弘儒候(홍유후)로 追封(추봉)되고 文廟(문묘)에 향시되니 東國(동국) 18위의 儒敎聖賢(유교성현) 중 최초의 인물이다.

  3) 고려시대
  奴斯火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자인으로 개명하여 현이 되고난 이 후로 獐山郡(慶山)의 領縣이 되어 오다가 고려 8대 현종 9년(1017년)에는 다시 경주의 영현으로 이속되어 조선 중엽까지 내려왔다.
  고려의 태조 13년(930년) 아직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西京(平壤)에 학교를 창설한 것은 아마도 고려라는 국명이 大高句麗(중국에서는 고구려도 흔히 고려로 칭하기도 했음)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학교를 그 국도에 세웠을 것이다.
  惠宗(혜종) 원년(944年)에 翰林院(한림원)이란 명칭이 보임은 고려가 국초부터 교육과 학문에 노력을 크게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6代 성종 6년(987년)에는 12牧에 학교를 세웠고 8대 현종 13년(1022년)에는 薛聰에게 弘儒侯(홍유후)를 追封하여 文廟에 종사(從祀)하였고 15代 肅宗(숙종) 6년(1101년)에 오히려 늦은 감이 있기도 하지만 元曉에게 大聖和諍國師(대성화쟁국사)로 贈諡(증시)하였다.
  16代 睿宗(예종)은 즉위하자(1105년) 各州 縣의 지주사와 현영으로 進士(朝鮮의 文科) 출신자는 학사를 겸임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12C에는 각 고을에 학교 곧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본다.
  신라시대에 심심찮게 있었던 倭寇(왜구)가 고려의 건국이후 23대 고종 9년(1222년)까지 300년 가까이 침입해 오는 일이 없다가 그 다음 해를 시작으로 國亡(1392년)까지 170년 동안에 왜구의 침입 횟수는 400회가 넘고 지역은 全 국토를 덮으니 실로 未曾有(미증유)의 환란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중 32대 우왕 5년(1379년) 6월에는 더디어 청도, 밀양, 자인에도 왜구의 침입 시 있었다.
  이때 禹仁烈(우인열 1337~1403년)이 경상도 上元帥(상원수)로 왜구를 무찔렀다.
  이 사실을 두고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전해오는 경산, 자인 단오제-한장군 놀이에 등장하는 한장군을 두고 고려말 인물로 보고 있다.


  그 論據(논거)는 다음과 같다.
  ① 韓-新羅時代의 韓은 王號 干 또는 蒙古語(몽고어) khan과 같은 呼稱이며,
  ② 韓將軍-韓 아래 將軍을 붙여 불러왔다는 것은 語構成(어구성)이 王 十將軍 같아 이상하다.
  ③ 韓將軍 놀이?깃발에서 獐山司命旗(장산사명기)를 볼 때 자인이 경산에 소속되어 있던 시기가 신라에서는 170년 고려에서는 82년이라 해도 한장군이 경산인으로 자인에 와서 싸웠다면 그 소속된 시기는 불명하다.
  ④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문병이 七言詩에 언급한 韓宗愈(한종유 1283~1354年)는 軍務(군무)에 종사한 기록이 없고 전래의 고려말기 설에 의거 추정한 것으로 본다.
  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가 34대 禑王(우왕) 5년 (1379년)에 蔚州(울주-지금의 蔚山), 청도, 밀양, 자인, 언양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경상도 상원수 禹仁烈(우인열-1337~1403년)이 이를 격퇴한 점을 연결해 보면 고려말 인물이라 함이 더 가까울 것 같다. 라고 설하고 있으나,


  필자가 보는 한장군에 의견은 다음과 같다.
  ① 자인이 장산에 처음 소속된 시기가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65년)에 奴斯火(노사화)에서 자인으로 개칭되면서 장산군 소속 현이 되었다.
  ② 장산사령기에 대해서는 자인현의 상급 기관이 장산군이기 때문에 앞세웠던 것으로 본다.
  ③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문병께서 韓宗愈(한종유)라고 언급한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수 백년 세월이 흘러 오면서 전래되어 오는 이름을 거론한 것으로서 본다.
  여러 역사가들이 지목하는 고려말 韓宗愈(한종유) 보다 문무관직에 오르지 아니한 토착 고을 백성중에 대향 애국심이 높고 무술에 능한 장정의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문무관 중의 한 사람이였다면 그 공적에 대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관 주도로 이루졌을 것인데 현재 자인 太首(태수)로 추앙하는 한장군은 민초들이 중심이 되고 현감이 후원하는 형태로 전래된 점으로 볼 때 실존 향민의 의병의 한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훨신 타당할 것이다.
  ④ 고려 34대 禑王(우왕) 5년(1379년) 울주, 청도, 밀양, 언양, 자인에 침입한 왜구을 禹仁烈(우인렬) 상원수가 격퇴한 것은 집단적 조직적 침입 형태이기에 관이 주도하여 물리친 것이고 자인에서의 한장군이 殲滅(섬멸)한 왜구는 도천산성에 기거하면서 고을 민을 괴롭힌 숫적으로 많지 않은 잔당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본다.
  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慶州府 慈仁縣?에
  民俗質朴有羅代之遺風
  女圓舞新羅時有韓將軍
  失其名或云宗愈
  이하생략
  위 사실로 볼 때 한 장군을 기리는 자인단오 한 장군 놀이는 신라시대부터 전래해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 실존 인물에 대한 이견은 학자들에 따라 있을수 있으나 원적인 이해를 부정한다면 전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인에 있어서는 한장군은 태수로, 영웅으로 길이 推仰(추앙) 받을 것이다.
만일 실존인물이 아니였다면 자인현내 일곱곳이나 사당을 짓고 제사를 그 오랜 세월동안 지내 왔을까 하는 점에 한번 더 깊이 숙고함이 필요하다.

  4) 조선시대
  (前期)
  자인현은 여전히 경주부의 소속으로 지방관 곧 현감이 부임하지 않았다.
  경주부의 영현으로서 자인 주민들의 생활을 억울하고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성리학자 慶州府尹(경주부윤) 李楨(이정)은 특별히 13대 명종 17년(1562년) 자인현에 학교를 세워 학문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비참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임진왜란인데 조선기의 倭(日本)와어 관계를 먼저 본다. 조선에서 일본에 사절을 보낸 횟수가 태조~세종(1392~1450) 59年 동안에 49회 단종~성종(1452~1494) 43年  동안에 12회 燕山君(연산군)~선조(임진 1592년) 103년간 단 4회 보냈다. 총 65회 사절을 파견한 것 중에 단 20회만이 幕府(막부. 왜의 중앙집권 실체)에 보내고 나머지 45회는 대마도 등 藩主(번주)에게 보낸 것이다. 이 사실로 보면 조선은 왜의 정보에 매우 어두웠던 것이다.
  禮曹(예조)의 명의로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과분한 것으로 당연히 경상도 觀察使(관찰사) 명의로 파송되어야 했었다.
  對馬島(대마도)는 朝鮮(조선)과 가장 가까운 倭寇(왜구)의 전초기지가 되고 있었다. 世宗元年(세종원년 1419年) 5月에 對馬島(대마도) 반란자들에 의한 왜구가 있어 전일부터 대일 강경책을 써온 上王(상왕) 太宗(태종)의 의견을 따라 다음달 6월 19일 도체찰사 李從茂(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니 이것이 己亥東征(기해동정)이다.
  9월 25일에 이르러 항복을 청해왔고 25년(1443년)에 계해조약을 맺었고 歲賜米豆(세사미두 매년 쌀과 콩을 내림)가 200석이었다.
  이 외에도 150석이 더 지급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중종 5년(1510년)에 三浦倭亂(삼포왜란)이 있었고 39년(1544년)에 蛇梁津倭變(사량진왜변)이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는 戰國時代(전국시대 1467~1568년)가 100년간 계속되다가 織田信長(직전신장 오다노부나가)이 전국을 장악하였으나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586년 ?臣秀吉(풍신수길 도요도미히데요시)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풍신수길은 권력의 평정하면서 거느린 부하 무인들의 전투력을 나라 밖으로 돌림으로서 국내의 安全을 도모하고 한편으로는 식민지 개척에 야심을 두게되어 일으킨 것이 임진왜란이다.
  14대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하오 4시 경에 加德島(가덕도) 烽火臺(봉화대)에서 敵船(적선) 90여척이 선두로 釜山(부산)에 접근해 옴을 알려오고 다음날 14일에는 부산을 공격하였다.
  一番隊(일번대)에서 三番隊(삼번대) 그리고 후속대 수군을 합하면 전쟁에 참가한 왜군의 총병력은 거의 20만 명에 달하였다. 14일에 부산이 함락되고 15일에는 東萊(동래)가 함락되었다.
  4월 15일 양산의 官屬(관속) 5?6名이 崔文炳(최문병) (당시 36세)에게 찾아와 양산과 彦陽(언양)을 침입한 戰況(전황)을 전하자 崔文炳(최문병)은 크게 놀라고 진노하였다. 며칠 뒤 밀양과 청도가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사당의 신주를 받들고 가족과 노복을 거느리고 현동, 구룡산, 물한동, 능적골(현제 용성 용전동)으로 피난하였다.
  5월 20일 피난한 수십명과 사방에 통문을 띄워 사람을 모았다.
  이 때 김홍 유인춘 박영성 등 5?6명이 찾아왔으며 충의로서 의병을 설득하였다.
  5월 7일에 千丈山(천장산)에 祭壇(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맹세한 다음 의병을 진용을 갖추었다.
  그 후 의병장 최문병은 하양, 영천, 신령, 아화, 청도, 울산 태화평, 창령 화왕산 등지에서 수많은 전공을 거두어 鄕民(향민)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켰다. 義兵將(의병장) 崔文炳(최문병)은 어모장군(禦侮將軍) 訓鍊僉正(훈련검정)으로 승진되었으며 사後 가선대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추증(追贈)되었다.
  후손들은 성제 최문병을 높이 추앙하고 자인 원당 용계서원에서 향사를 지내면서 기리고 있다.
  필자는 의병장 최문병에 대한 내용은 간략하게 대신하고“省齊先生 實記”을 자세하게 소고하여 전할 것을 약속한다.
  선조 31년(1598년) 8월 풍신수길이 죽자 11월까지 왜군이 철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柳成龍(유성용) 李元翼(이원익) 李德馨(이덕형) 등의 조신과 李舜臣(이순신) 權慄(권률) 金時敏(김시민) 등의 관군 장수와 곽재우) 趙憲(조헌) 鄭文孚(정문부) 외 승병 등 의병이 장수와 명국의 원군 장수 李如松(이여송) 麻貴(마귀) 등의 전공을 받들 수 있다.
  선조 37년(1604년) 사명당 유정이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幕府(막부)의 德川家康(덕천가강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講和條約(강화조약)을 맺고 3.500여 명 포로를 刷還(쇄환) 함으로서 임란은 끝을 맺는다.
  최문병 의병장도 전란의 영향으로 病患(병환) 얻어 1599년 8월 4일 공의 나이 43세에 울곡리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결과 조. 중. 일 삼국이 받은 영향도 매우컷다.
  조선은 수많은 인명이 殺傷(인구의 절반)되고 문화재가 소실 약탈 당하였다.
  임란전에 170만 결이던 경작 면적이 80만 결로 줄어 들었다.
  명국 또는 원군의 전비 충당에서 큰 재정적 과중이 결국 명의 멸망의 큰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약탈해간 문화재 외에 新儒學(신유학)과 算學(산학)이 전래되어 도자기와 활자의 기술이 전수되었다.
  자인은 임란 당시 영헌에 불과하였으나 궐기한 의사의 수가 다른 고을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을 아주 특기할 만 하다.
  고려시대 이후 뛰어난 학자나 문,무인이 기록으로는 없었으나 漢陽(한양) 출신 奉常時(봉상시) 主簿(주부) 朴雲達(박운달 1492~1554年)이 대원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樂山遺集(요산유집)을 남겼고 蔚谷里(울곡리)出生 의병장 최문병 역시 省齊實記(성제실기)를 남김으로서 임진왜란의 참상과 함께 역사적 진실을 간직하고 公의 애국충절과 지혜를 배울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상동면에 은거한 李承曾(이승증 16C)은 출중한 효행으로 동국신속 삼강행실에도 수록되어 있다.

  (後期)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 만인 16대 인조 5년(1627년)에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일어나니 滿洲(만주)의 胡族(호족)을 통일한 청의 태조 奴兒哈赤(노아합적 누르하치)를 이은 2대 태종 천덕 1년이었다.
  이때 청과 조선은 형제지국을 맺었으나, 인조 10년에는 君臣之義(군신지의)와 금은 각 1만량 오색포 5백만 疋(필) 등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는 조선에 대해 14년(1636년) 12월에 드디어 청태종은 10만 대병을 거느리고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침공하여 왔다.
  斥和派(척화파)인 金尙容(김상용) 등과 주화파인 崔鳴吉(최명길) 등은 비록 대립은 하였으나 둘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수없는 정기와 상황에 표출이었다.
  다음 해 정월 30일에 왕은 피난 온 남한산성에서 三田渡(삼전도)로 내려와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때 자인에서는 복현운동을 하던 李時謙(이시겸) 등 인사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鳥嶺(조령)까지 갔다가 三田渡(삼전도)의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일은 復縣(복현)을 청원한 2차) 上疏(상소)에 기록되어 있다.
  또 南漢山城(남한산성)에서 上護軍(상호군)으로 왕을 호종하던 朴應得(박응득 1578~1639년)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대원리로 돌아왔다.
  한편 자인이 경주부의 영현이 된 이래 사무연락의 리정(里程)이 너무 먼데도 그런대로 지내왔으나 임란후 실제 경작 면적에 반을 덧붙여 부과한 稅額(세액) 등 慶州府 吏屬(경주부 이속)들의 橫暴(횡포)와 收奪(수탈)이 한층 더 심하여 慈仁(자인)의 復縣運動(복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이 있은지 5年 後인 仁祖 10년(1632년)에 儒生(유생) 白濂(백렴)이 홀로 上京하여“원통할 때 부모를 부름은 사람의 상정”이라 하여 그 원통한 사실과 복현의 진실함을 疏(소)로 올렸다.
  이에 王은 戶曹(호조)에 호조에서는 慶尙監營(경상감영)에 영을 내려 조사하게 하니 監司 鄭世矩(감사 정세구)의 사유를 갖춘 狀啓(장계)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慶州府尹 全湜(경주부윤 전식)이 白濂을 誣告(무고)로 몰았다.
  다음 해(1633년)에 方熙國(방희국)을 疏頭(소두)로 金應鳴(김응명), 최두립, 李時謙(이시겸), 李昌後(이창후) 등 3백여 명이 식량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 3개월 동안이나 징을 치며 호소하였으나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仁祖實錄」(인조실록) 정월 초팔일 조에 訴請(소청)한 사실과 調査(조사)를 命(명)하였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나 朝廷(조정)의 의견이 엇갈린 중 벌을 받게 되었다.

  疏(소)의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자인에서 경산 15리, 하양 20리, 청도나 대구가 40리인데 경주는 120리 거리이다.
  徵收(징수) 量(량)이 욕심에 차지 않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도한 폭행을 일삼고 부모선조까지 욕보였다.
  백렴이 상소한 일이 경주부의 노여움을 입어 세족이 도피하고 민중이 흩어져 가는 실정이다.
  언양도 울주에서 복현하였고 機張(기장)도 東來(동래)에 復縣(복현)하였으며 河陽(하양)과 慶山(경산)은 大邱(대구)에 병합되었다가 復縣(복현)하였다.
  慈仁(자인)이 비록 縣監(현감)은 없지만 鄕校(향교)가 있고 客舍(객사)와 官衙(관아), 驛館(역관), 社稷壇(사직단), 氷庫(빙고)의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鄕吏(향리)의 後孫(후손)이 대대로 戶長(호장)이 되어 印章(인장)을 전해오고 官奴(관노), 館婢(관비)의 자손도 아직 있으므로 이들을 收合(수합)하면 고을 모양을 이룰 수 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義兵(의병)을 일으켜 東奔西走(동분서주) 賊(적)을 토벌하고 東萊(동래)에 와있던 明(명)나라 원병의 식량 보급을 위해 男負女戴(남부여대) 3백리 길을 오갔으며 자인으로 피난 온 백성들도 돌보아 주었으며 穀倉(곡창)을 잘 보전하여 농사에 지장이 없게 하였다.
  위와 같은 사유를 들어 上疏(상소)하였는데 領相 尹坊(윤방)과 左相 金?(김유)가 慈仁의 意見에 동조하였으나 많은 堂上官(당상관)들이 慶州府의 意見을 지지함으로서 복현의 뜻이 성공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 많은 도움을 주던 余應福(여응복)은 杖一百(장일백)에 白馬山城(백마산성)으로 3년간 유배되고 方熙國(방희국), 金瑾(김근) 등도 杖을 맞고 流配(유배)되었다.
  丙子胡亂(병자호란)의 다음해인 인조 15년(1637년) 봄에 李時謙(이시겸) 등의 3次 上疏를 白見龍(백현용), 金相?(김상건), 朴慶龍(박경용)이 가지고 올라가서 더디어 允許(윤허)를 받았다.
  이때 상소 중에 기록한 것을 보면
  지난번 상소 이 후 侵虐(침학)이 더욱 심해진 일
  糧穀(양곡) 1천 석을 거두어 海岸(해안)의 軍備(군비)에 쓰도록 헌납하였다는 일이다.
  이것은 자인 고을을 혹심하게 침탈한 것이다.
  慶尙監司(경상감사) 李敬與(이경여)가 이에 관한 狀啓(장계)를 올리고 나서 자인은 慶州府(경주부)의 屬縣(속현)이 된지 621년만에 復縣運動(복현운동)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소원이 달성된 것이며 민중운동의 빛나는 결실을 본 것이다.
  한편 新羅(신라) 때에 麻珍良(마진량) 또는 麻彌良(마미량)이라 부르던 懸은 慈仁에서 불과 15리 거리에 있는 곳으로 景德王(경덕왕) 때에 이르러 餘粮縣(여량현)으로 개칭하여 오다가 그 후 仇史部曲(구사부곡)으로 강등된 것이다.
  자인이 경주부에 속할 때는 같이 경주에 속해 있었고 자인 최초로 복현 상소를 한 백렴이 仇史部曲(구사부곡) 사람이었다.
  17대 효종 4년(1653년)에 田禹闢(전우벽)이 이런 사연으로 疎(소)를 올려 仇史部曲(구사부곡)이 자인현 귀속이 허락되었다.
  자인이 현으로 완전히 복귀하고 초임 현감 任善伯(임선백 재임 1637~1642년)은 선정을 베풀었고 沈若老(심약로 39대 1739~1744년)는 산에 밤나무를 심어 有實樹(유실수) 장려의 선구자가 되었고 李胤沆(이윤항 43代 1752~1753年)은 농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진흥시켰다. 吳宖?(오행묵 116대 1888~1889년)은 흉년에 선정을 베풀었고 재임 기간의 일들을 적은「慈仁叢?錄」(자인총쇄록)을 남겼다.
  1893年에 관찰사 이헌영은 60緡(민)을 내리면서 그 이자로 장학금으로 쓰게 하였고, 현감 李晩胤(이만윤 119대 1893~1894년)은 자신이 강학하였다.
  官衙(관아)는 官上里(현 新官里)에 있었으나, 1667년에는 현감 南宮鈺(남궁옥 11대 재임 1663~1668年)이 원당리로,
  1669년에는 현감 金始徽(김시휘 26대 재임 1696~1700년)가 현재 면소재지인 북사1리로 옮겼다.
  현감은 19세기 전반까지는 거의가 문과 급제자이며 혹 무과 출신자(7명)도 있었다.
  이들 중 善政碑(선정비), 淸德碑(청덕비), 不忘碑(불망비), 恤民碑(휼민비), 墮淚碑(타루비) 등의 이름으로 세워진 것은 26기가 계정 숲 입구에 있다.
  이 중 두 현감은 2기씩 있고 또 파면을 당한 2名의 현감 비도 있다.

  조선 후기 자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용천리의 朴正佑(박정우)는 특출한 孝子로 旌閭(정려)의 기문은 현감 柳雲羽(유운우 59代) 재임 1780~1783年)가 지었고, 梁氏(양씨)는 順天人 朴德潤(박덕윤)에게 시집가서 孝婦로 烈女로 크게 칭송되어 谷新里에 孝烈閣이 세워졌다.
  그리고 학자 문사로는 만년에 육동에 은거한 池德鵬(지덕붕 1804~1872年)이 商山文集(상산문집)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시조 13수가 실려있고 駕日里(가일리)의 李浩雨(이호우 1826~1892年)는 진사로 素山集(소산집)을 남겼고, 다문리의 朴致準(박치준 1838~8981年)은 希菴集(희암집)을 남겼다.
  그리고 불교계의 고승으로 雪松演初(설송연초 1676~1750년) 속성 백씨는 禪敎一致(선교일치)를 주장하였는데 비는 운문사에 있다.

  5) 현대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했던 19세기 후반 淸日戰爭(1894~1895년)에서 勝利한 日本과 이미 征服(정복)의 경험을 쌓은 서양의 열강들이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를 만들 角逐戰(각축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런 시기에 朝鮮(조선)은 國號(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꾸고 王도 皇帝(26代 高宗 1863~1907年)로 호칭을 바꾸면서 세계 先進國(선진국)과의 競爭(경쟁)을 도모하기 위하여 외형적 모양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露日戰爭(노일전쟁 1904~1905년)에서 다시 勝利(승리)한 일본의 强壓(강압)로 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 1905년)을 체결하게 됨으로서 군사권, 外交權(외교권)이 상실된 半身不遂(반신불수)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전국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義兵(의병)이 일어나고 자인, 영천, 청도의 接境(접경) 地域(지역)인 九龍山(구룡산) 일대는 李亨杓(이형표 1856~1924年 영천 북안 출신) 산남의진(山南義陣 참여 의병장)의 活動(활동) 根據地(근거지)가 되었다.
  자인은126대 현감 秦永濂(재위 1907~1909년)이 부임하여 시대적 변천과 새로운 교육 방식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8년에 학교를 설립한 일이 있고 같은해에 사립 培義(배의) 학교도 설립 되었으며 谷蘭(곡란)에 龍崗(용강) 학교가 생겨 10여년 존속되었다.
  1910년 庚戌國恥(경술국치) 韓日合邦(한일합방)을 맞게 되면서 자인은 경산에 합병되고 현의 자인은 자인면, 진랑, 압량 일부, 용성, 남산으로 분할되었다.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목으로 토지를 국유화 하였고 심지어 조선인의 토지로 기일내에 등록하지 않은 것은 강제로 일본인 소유로 만들었다.
  한편 각도의 監營(감영)을 비롯하여 지방의 官衙建物(관아건물) 등은 조선 역사를 없애는 차원에서 거의 다 헐어 버렸다.
  자인에서도 使衆堂(시중당), 樂山樓(요산루)만 남기고 鄕射堂(향사당), 軍器庫(군기고), 客舍(객사), 刑吏廳(형리청), 縣司(현사), 人吏廳(인리청), 軍官廳(군관청), 養武堂(양무당), 司倉(사창) 등 모두 헐려서 마지막 조선이 사라졌다.
  己未年(기미년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3월 8일 대구의 서문시장에 집결한 학생의거에 주동적 역할을 한 송림리 출신 백남채(1889~1951年)는 계속 독립운동에 함께하다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광복후 제헌국회 의원이 되었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세워지고 광복군이 힘을 모으고 국내에서는 지속적인 의거 활동이 계속되던 중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일시동인 정책으로 창씨개명,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조선인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4년에 남산 지역에서는 대왕산 죽창의거가 일어나 끝까지 일본과 싸우는 애국 충절의 모습을 지켜왔다.
  1945년에는 더디어 일본의 패배와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해방광복을 맞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지방의회는 최소 단위로 읍면까지 시행하였다가 폐지되었다.
  1995년에는 지방자치가 실시되어 이전의 경산군에서 경산시, 자인면이 되었다.
  20세기에는 국가 사회의 많은 구조 변화와 함께 산업구조도 많은 변화를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과 함께 공단이 설립되는 등의 변화로 국민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자인도 예외는 아니다 수도작 중심의 농업에서 과수, 축산,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고 산업단지 공단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이와 동시 용성 송림의 한지 생산 같은 수공업은 거의 사라지는 등 안타까운 면도 없지 않다.
  더불어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초등 1개(계림)교가 없어지고 재학생 3.000명이 넘던 자인초교도 재학생이 200명 이하의 작은 학교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인농고가 경북기계금속 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크게 발전되어 있고 자인여상도 농촌 고등학교 답지않게 발전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인물을 보면,
  조곡출신 안병희(安炳喜 1854年~1939年)는 전남 구례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당시 관계의 부패를 한탄하며 부임하지 않았으며 洛隱集(낙은집)을 남긴 선비였다.
  관상리 출신 白日欽(백일흠 1878年~?)은 역리대가로써 雲齊遺稿(운제유고)를 남겼다.
  불교계의 큰 스님 石潭斗碩(석담두석, 俗姓 池氏 1875년~1953년)은 육동출신이며, 은해사 주지 불교중앙 교육원 초대 교무이사를 역임하는 등 불교 진흥 사업의 큰 기둥이셨다.
  읍천리 裵恩希(배은희 1888년~1966년)는 목사로서 광복 전에는 항일 투사로 광복 후에는 초대 고시위원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동부동 출신 黃基式(황기식 1905년~1971년)은 서예대가로서 자인현 읍지을 편찬하여 남김으로서 아주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되고 있다.
  북사동 출신 소설가 張德祚(장덕조 1914년~2003년)는 학창시절부터 항일 운동을 하였고, 6.25 동란때는 조선일보 기자로서 휴전 조인식 현장을 중개한 종군기자로 명성을 날렸고 우리나라 대표 여류 작가로 이조여인열전 등 150여편의 작품을 남긴 문학인이다. 생가복원 장덕조 문학상 등 사업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 밖에도 정치, 사법, 행정, 교육, 문인, 군장성 등 각계각층에서 고향 자인의 명성을 높이고 있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이 부분은 자세히 조사하여 보완할 것이다(이하 생략).

기자명 경산시번영회 사무국장 박 승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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