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경상북도 유림단체 신년교례회 및 학술회가 지난 1일 인터불고경산CC 대연회장에서 도내 기관단체장과 23개 시군 유림대표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을 이루었다.

  경상북도청년유도회(회장 황의호)와 경산시청년유도회(회장 조재환)는 지난 1일 인터불고경산CC 대연회장에서 경상북도 23개 시군 유림대표 및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림단체 신년교례회 및 윤리도덕성 회복을 위한 학술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 박원갑 경북향교재단 이사장, 이상필 경북전교협의회 회장, 안승관 성균관유도회 경북본부 회장, 임종식 경상북도 교육감, 최영조 경산시장, 조현일·배한철·박채아 도의원, 강수명 경산시의회 의장을 비롯한 경산시의원 등이 대회장을 가득 메웠다.

  신년교례회에 앞서 열린 학술회에서 김종국 박사(전 경산시립박물관장)는‘징사 이승증 선생의 선비정신과 금학산 맹구대 해후’를 주제로 강연하고, 경산아리랑보존회의 민요공연, 장산 박도일 선생과 한중섭 예천향교 전교의 신년휘호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경북청년유도회는 우리 민족의 정통인 유교문화의 정수를 계승하고, 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한 유도 중흥을 목적으로 지난 1988년 창립하였고, 그간 청년유도회는 선비문화포럼, 경전암송대회, 세계청년유림대회, 경북도청 신청사 상량식 고유제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유교문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정신적 가치관으로 발전하는 계기 마련과 유림의 미래와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데 기여하여 왔다고 소개한 황의호 경북청년유도회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오늘날 사회는 경로효친과 미풍양속이 사라져가고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면서 경북 유림들이 무너져가는 윤리와 도덕을 함양시킬 수 있는 실천적 방법과 시대에 맞는 유학의 정수를 찾아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 하였고, 이철우 도지사는 축사에서 이번 신년교례회가 경북의 유림이 화합하고 미래를 여는 인문정신의 원천인 유교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어려운 시국에 인성교육 등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유림의 노고와 행사를 위해 봉사하는 청년유도회 남녀 회원들을 치하하였다.

  이어 최영조 경산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사람을 중시하고 관계를 신뢰하는 유학의 이념은 새로운 시대 윤리 도덕의 기준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면서, 경산에서 열리는 2020년 신년교례회가 전국 유림지도자들이 새로운 윤리 도덕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피력하였다.

  이날 강연에 나선 김종국 박사는, 먼저 한국유학의 종주가 탄생한 경산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어 조선 시대 성리학자인 관란 이승증 선생의 선비정신과 선생의 40대 이후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학산과 맹구대 와의 만남에서 선생의 행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하였다.

▲ 윤리도덕성 회복을 위한 강연에 나선 김종국 박사
▲ 윤리도덕성 회복을 위한 강연에 나선 김종국 박사

  김 박사는 본 강연을 통해, 조선 시대 대표적인 징사(徵士)로 알려진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 1515~1599) 선생은, 조선 시대 대학자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히고, 1558년(명종 13) 43세의 늦깎이로,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던 인물이라 소개하면서, 하지만 당시는 1547년(명종 2)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영향으로,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이로써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시기라 하였다.

  김 박사는 본 고를 연구하면서 남아있는 관련 문헌 등이 명확하지 않아 관란 선생이 타계한 지 222년이 지난 1821년(순조 21)에 선생의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관란집과 경산지역에 전승되는 일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선생의 행장의 출생지인 경주와 만년에 은거하였다는 경산시 금학산을 중심으로 3개월여 연구한 90여 쪽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먼저 관란(觀瀾) 선생은 40대 이전인 경주의 행적에서 자신이 태어난 향리에서 농민을 구휼(救恤)하기 위하여 경주 보문호 일대에 사비로 보(洑)를 막아 수리(水利)를 안전하게 농민을 구휼(救恤)하였고, 또한 18세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는 사실과 이로써 사액(賜額)으로 정려각(旌閭閣)을 받았다는 기록 등을 만년 이전 행적으로 이를 소상히 하였다. 하지만 선생의 나이 38세에 회재 선생의 타계와 이후 5년여 행적이 불분명하다 하면서 만년에 금학산으로 은둔(隱遁)하였다는 기록을 유추하면서 선생만이 간직하여야 하였던 선비로서의 트라우마를 이후 선생이 즐겨 찾았던 맹구대와 반구대에 남긴 시편을 통해 회재 선생과의 동병상련을 피력하였다.

▲ 당시 관란 이승증 선생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는 맹구대 재현
▲ 당시 관란 이승증 선생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는 맹구대 재현

  또한, 42세에 사마시(司馬試)인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 조정으로부터 연이어 제수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 사도시직장(司?寺直長)에 각각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는 부분에 대하여 선생만이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하였던 선비정신을 선생이 남긴 시문을 통해 이를 전이적(轉移的) 트라우마로 인용하였다. 하지만 팔순을 앞둔 78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란했던 조정의 폐해에 한발 물러서 오로지 구국일념으로 의병을 창의하였다는 우국충정은 진정 선생만이 가능하였던 선비정신이 아닐 수 없다면서 당시 선생의 항쟁과 전과를 지역 의병장 실기 속에 남아있는 기록과 비교 분석하였다.

  또한, 선생이 돌아가신 1659년(효종 10년)에 맹구대 옆에 단을 모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이후 지역 유생들이 이를 훼철하고 그 자리에 회재 선생을 모시었다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등을 지적하면서 이후 현재에 이르는 관란서원의 변천사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어 김 박사는 선생이 타계하신 지 361년 동안 선생의 묘역이 지금의 경산시역인 용성면 금학산에 모셔져 있음에도 선생의 행적이 녹아있는 관란서원이 아닌 선생이 태어난 경주시 소재 자그마한 제당에서 배향하고 있다는 점과 경주에 건립된 선생의 임란창의비 또한 창의 기록이 모두 경산지역의 행적임에도 경주시 인왕동에 건립하게 하였다는 점 등은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강조하자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김 박사는 본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지정된 시간이 부족하여 모두 이를 소상히 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선생의 행적과 트라우마, 맹구대에 심은 선생의 시문 등을 통해 선생의 학문적 사상과 선비정신을 재조명하고 관란서원 또한 명호에 걸맞게 관란 선생을 회재 선생과 함께 배향하는 방안을 재검토하여야 할 것이라는 주문을 남겼다.

  이에 대하여 관란서원 김윤근(83) 원장은,‘이는 오랫동안 관행처럼 지속되어 온 사안으로, 지역 유림과의 화합 차원에서 먼저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라며, 최대한 중재에 나서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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