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덕
장순덕

  유난히 자글자글 들끓었던 정유년 여름이 한발 물러났다. 정말이지 생애 처음 겪어보는 혹서로 다시는 선선한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나의 여름은 헉헉거리며 불쾌지수까지 겹쳐 신심이 참담한 지경에 다다랐다. 누진세가 겁나서 에어컨 한 번 마음 놓고 켜지 못하고 길고 긴 여름 혹서를 견뎌야했다. 그러나 계절의 섭리는 깔축없다. 처서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창문으로 넘어왔다. 남편과 나는 여름을 잘 보낸 자축의 의미로 모처럼 청도 나들이에 나섰다.

  청도는 언제 들러도 겹겹이 포개어진 부드러운 산봉우리가 이방인들을 포근히 감싸며 맞이하고 동창천 맑은 물이 언제 가뭄과 폭서에 시달렸느냐는 듯이 목마름을 촉촉이 적셔 주는 듯하였다. 동창천을 돌아 깊은 산자락을 들어서며 청도군 금천면 임당 1리 운림고택을 찾았다.
  임당 마을은 운문산 한 자락을 휘감고 시루봉의 서쪽 기슭에 고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은 낙동강 지류의 동창천을 바라보고 터를 잡고, 세월의 무게만큼 적요가 감도는 산과 들녘에 조용히 파 묻혀 언제 다시 기지개를 켤 듯이 숨죽이고 있었다. 김씨고택은 그 중심부에 있는 듯 없는 듯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마을 일대에 내시가의 땅이 많았으나 쇠락한 후손들이 땅을 처분하여 마을을 등지거나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임당 1리 마을 회관을 지나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다가 좌측 조그만 다리를 지나면 고택의 기다란 토석담장이 보인다. 담장이 꽤 긴 것으로 보아 집터가 웬만한 고을관아 만큼의 규모쯤 된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조선후기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내시 김일준이 낙향하여 건립한 운림고택은 국가민속문화재 제 245호로 지정되어 내관가계의 중요 자료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부터 내시 가계가 이어져왔다고 하니 400여 년이 흘러온 지금도 임당리를 통틀어도 이만한 규모의 집을 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얼마나 큰 가옥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지금은 빈 고택과 넓은 터만 덩그러니 있어 후손들은 모두 어디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지 행적을 알 길이 없고, 대문 오른 쪽 연당 주위 아그배나무 열매만 씨를 맺어 대신 텅 빈 고택을 지켜주고 있었다.
  내시는 씨가 없어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보통 거세시킨 어린아이를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순전히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의 살붙이를 들여 내시 가계가 순조로운 대물림을 했던 까닭은 쌓아온 많은 재산과 지위를 움켜쥐기 보다는 재물과 덕을 베풀고 양민의 구휼에 봉사해왔던 때문이리라.

  5칸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측 큰 사랑채와 우측 중사랑채가 배치되어 있어 안채로 들어가려면 큰 사랑채와 중사랑채의 중간문을 지나서야 들어갈 수있다. 특이하게 큰 사랑채와 곳간채만 남향으로 배치되어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대문과 안채 다른 건물은 북향을 하고 있어 나라에 대한 그의 단심을 엿보게 한다.
  큰 사랑채에는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이 기거하고 중 사랑채에는 양자 아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널찍한 빈터에는 종들이 기거하는 집이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로 보아 운림저택의 위상이 대 저택이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안채를 들어가다가 중문을 지나기 전 중사랑채 오른 쪽 차면담 나무판에는 하트모양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안채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선을 살피는 감시구멍이다. 내시가의 아녀자가 되면 바깥출입을 일채 못하도록 하는 폐쇄적인 집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친정부모의 상외에는 바깥출입이 극히 제한되어 죽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중사랑채에서 무심코 중문을 살피려다 나무판에 세 개의 구멍을 발견하고
 ‘어라? 이 구멍을 말하는 거로구나. 무슨 연유로 세 개나  뚫어놓았을까? 글쎄, 하트 모양 같기도 하고 무슨 씨앗 모양같기도한데. 옛날에는 하트의 뜻을 알고 뚫었을 리는 만무하고...’
양미간 사이 거리로 눈을 들이대고 볼 수 있도록 뚫려있어 출입동선을 살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옆에는 기역자 모양의 토석담이 둘러쳐져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구멍에 대한 생각에 만 가지 상념이 스쳤다.
  구멍이란 단어 풀이를 보니 뚫어지거나 파내어 빈틈이 생긴 자리라고 풀이 해놓았다.
  구멍에 대한 사람의 심리를 객관적으로 풀이해 보면 구멍은 무조건 눈으로 들여다보게 되어있다.
  구멍의 세계는 항상 이쪽과 저쪽의 연결 통로가 된다. 호기심 소통 대화 환기 생리 숨쉬기의 차원에서, 미미한 바늘구멍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블랙홀과 같이 신비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거대한 구멍도 있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선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힘의 차원은 다르더라도 바늘구멍이나 맨홀 구멍이나 공통된 부분은 하나도 소홀히 하다가는 큰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댐에 실구멍이 터지면 금방 구멍이 헐어 둑 전체가 무너진다. 이는 실구멍도 방치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방증이다.
  사람의 몸에도 구멍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남자는 구규(九竅) 여자는 십규(十竅)다.
여자가 남자보다 구멍이 하나 더 많다고 한다. 즉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천지에 구멍이 없다면 인류와 자연은 번식을 할 수 없어 도퇴될 것이고 숨을 쉬고 살 수가 없다. 이 경우는 막히면 안 되는 구멍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구멍으로 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방문객들의 제각각 표정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중문으로 들어서며 전혀 자신의 행동거지를 살피는 눈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나는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 하트 모양의 나무감촉을 음미해보았다. 구멍을 보면 무조건 손가락을 넣어 쑤셔 넣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보다. 구멍 아랫쪽이 뽀죡이 솟아나 있어 어떤 의미 일까 생각하다 아마 오랜 세월 닳거나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겠거니 하고 의문을 접기로 했다.

  구멍은 양면성을 깔고 있다.
  첫째는 모든 비밀은 구멍에서 밝혀진다.
  구멍으로 아주 잘못된 비밀을 훔쳐보다가 사전에 범죄를 예방할 수도 있고 또 비밀은 반드시 밝혀지게 되어있다는 직접적 물증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둘째로는 남의 사생활을 들춰내어 사생활 침해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김씨고택의 세 개의 구멍은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피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사생활 침해이다. 오늘날 감시카메라 역할과 똑같기 때문이다.
  문구멍을 생각해보자.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방안에서 수상하게 소곤거리는 엄마와 대화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창호지를 눌러 들여다보다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그 남자는 외삼촌이었고 외삼촌은 총각 때 몇 년 동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다 결혼하고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다.
  문구멍은 주로 밖에서 안쪽을 볼 때 손가락에 침을 발라 뚫어 들여다본다. 달덩이 같았던 언니가 하도 예뻐서 첫날 밤 옆방에서 잠자던 언니와 형부의 방을 문구멍으로 훔쳐보다가 엄마에게 엉덩이를 맞았던 기억도 있다. 이는 신랑신부 초야의 침실을 엿보기 위해서 오랜 풍습에서 묵인되어 온 사생활 침해에 속한다.
  김씨고택의 주인은 무엇보다 아녀자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서 벽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새색시는 한 번 대문턱을 들어서면 친정 부모의 장례 외에는 죽을 때까지 대문을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미 400여 년이나 지난 여인들의 안타깝고 처량한 일생이었다고 해도 자유를 억압당한 여인들의 일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오늘 날에는 여성상위 시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6070세대의 결혼 한 남성들이 큰소리 치고 산다는 소문은 옛날 이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골동품 취급을 받는다.
  그만큼 남성들의 입지는 줄어들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드세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여성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자신의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한다. 그래놓고 남성들에게 가정에서 세밀한 자기 역할분담을 맡긴다. 그리고 공평한 사회적인 입지를 분배한다. 여성들은 밖에서도 가정일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 놓고 활동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남성들은 밖에서 마음 놓고 놀 수 없다. 자꾸 가정에 신경이 쓰인다. 몇 시까지 아내의 허락하에 놀다가 손자 유치원에서 데려오거나 병원에 가는 일 등은 남편의 전담이다.
  불과 반세기 전에만 하더라도 억압받는 여성의 위치에서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운림고택을 나오면서 400여 년 동안 대물림을 해온 내시 가계가 감시 구멍을 통해 아녀자를 억압하고 통재하여 지탱하여 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쌓아온 부를 바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애향심으로 많은 덕행을 쌓아 허물을 덮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살아가도록 마을에서 인심을 얻으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운림고택 대문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구름을 열어 커다란 햇살 구멍을 만들어 빛을 쏘았다. 마치 하늘에서 삼신할머니가 만 가닥 금빛 실을 내려 흩어진 내시 가의 후손들에게 아들을 점지해주는 듯했다.
  무덥던 여름도 어느새 9월이라는 가을의 초입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임당리 들녘에는 짙푸른 복숭나무가 무성히 키우던 잎을 중단하고 이제 잎을 떨어뜨릴 채비를 한다. 파란 대추알은 엄지손가락 두 배만큼이나 굵어졌다. 곧 반만 붉게 물들 쯤이면 대추를 따고 건조시켜 추석 차례 상에 올려 질 것이다. 씨없는 청도 반시도 아직 연둣빛 색이지만 이미 성장을 멈추고 시집갈 때를 기다리는 새색씨처럼, 가을 햇볕에 살을 태울 준비로 부끄러움이 봉긋봉긋 묻어있다.

  약력
  - 경북 경산 출생, 시인, 수필가
  - 월간 《문학세계》시 등단, 계간 《영남문학》수필 등단
  - 제7회 전국문학인꽃축제 문학상, 제1회 송암문학상,
  - 문경새재 시 공모전 수상, 장계향 문학공모전 수상 외 다수
  - 시집 『누가 삭막한 세상에 눈물 뿌려주었던가』
  - 경산문인협회 회원,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이사

기자명 장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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