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김문규
발행인 김문규

  우리나라 남·북 전쟁인 6.25전쟁은 세계전쟁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치열하고 처참한 전쟁이었다. 동서고금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결국 권력자들의 권력싸움에 온 국민이 동원된 불행한 전쟁이었다.

  치열한 이데올레기 싸움에서 자유수호를 위해 민간인 신분으로 온몸을 불사른 비정규군 민간부대원과, 어린 학생 신분으로 오직 자유민주국가를 위해 고군분투한 어린 학도군 비정규군의 게릴라 전과 그들의 목숨을 건 헌신 때문에 그나마 반쪽의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6.25전쟁 당시 활동한 비정규군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격대원들이다. 이들은 가장 위험한 일선에서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제17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회기 때마다 비정규군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이들에 대한 보상법이 발의됐다. 겔로(KLO)부대에 대한 보상법은 이들이 미군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한‘비정규군’에 대한 인정과 보상이 곤란하다고 했다.

  전쟁 중에는 정규, 비정규 따지지 않더니 보상 문제에서는 철저히 따진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인천 팔미도 상륙작전도 비정규군인 겔로 부대원들의 희생덕분이었다. 켈로부대, 공군첩보부대인 항공정보대, 자생적으로 조직된 구월산 유격대는 황해도, 평안도 등에서 51년까지 2,500명 규모로 활동했고 휴전이 될 때까지 800명을 유지하며 활동을 했다. 이들은 침투, 상륙작전, 배후습격, 교량과 교통망 파괴, 남포항·원산항의 입구를 봉쇄해 동·서해 제해권 확보에 기여했다.

  월남한 서북청년단인 호림부대는 육본정보국 직속 대북침투목적 특수부대로 최초의 북파공작부대다. 이들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대북침투공작을 벌였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

  인천상륙작전과 비슷한 시기에 북한군이 경주, 기장, 죽장을 차지하고 포항을 압박하고 있었다. 포항에서 밀리면 바다로 뛰어들어야 할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동해 포항 장사리 상륙작전도 어린학도병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학도병 71명 중 전사 48명, 23명이 부상, 행불 또는 포로가 되었다. 어린 학생들의 가상한 용기와 희생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전쟁 당시 활동한 비정규군은 군번도 계급도 없는 자발적으로 결성된 대원들이다. 현재 이분들은 제도적 여건의 미비로 보훈사각지대에 있다. 특히 현재 생존자의 대부분은 80~90세 이상의 고령자이다. 거의 다 사망하시고 얼마 남지 않은 생존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명예회복과 보상대책마련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 희생하신 분들이다. 이들에게 비정규군이라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보상이 어렵다고 한다. 국방부가 공개한 참전 비정규군공로자 현황에 따르면 공로자 1만8천9백9십4명이다. 6.25 전쟁 전 1948년 8월 15일로 앞당겨 북에서 활동한 호림부대원 공로자가 누락되지 않토록 법령을 수정했다.

  박근혜 정부 때 켈로부대에 대한 보상금지급 법안이 발의됐지만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의원인 검사출신 의원 2명이“예산이 너무 많이든다”며 보상금지급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전국에서 활약한 비정규군인 학도병들의 희생도 예산타령만 하지 말고 예비비를 써서라도 보상을 해드리자. 자신을 희생한 비정규군과 아직도 예우를 받지 못하는 어린학도병들을 위해 예산 아닌 예우를 위한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

  인천 팔미도 상륙작전과 포항장사리 상륙작전에서 비정규군의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겠는가. 그분들의 희생에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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