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 전명수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계명문화대학교 출강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녹조근정훈장 수훈
송하 전명수
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
계명문화대학교 출강
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
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
녹조근정훈장 수훈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봄날처럼 느껴지는데 새부산 고속도로를 달려 한숨에 밀양 삼랑진에 위치한 민어산으로 오른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헐떡이며 오르니 산정 바로 아래에 작은 절집 만어사가 나타난다. 만어산 만어사(萬魚寺)는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만어로 776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만어사는 46년(수로왕 5)에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설 속의 사찰이다. 1180년(고려 명종 10) 중창하였으며 1506년(중종 1) 화일(化日)이 중건하였다. 이어서 1879년(고종 16)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는 만어사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지금의 양산지역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羅刹)이 서로 사귀면서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등 온갖 행패를 일삼았다. 이에 수로왕이 주술로 그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로부터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는데, 이들 돌에서는 신비로운 경쇠소리가 났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으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감화로 인해 수많은 물고기가 돌로 변해 법문을 듣는다는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절집이다.

  또 다른 전설로는 옛날 동해 용앙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천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고 알려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니 수많은 종류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머물러 쉰 곳이 이 절이었다. 그 뒤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하였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 버렸다고 한다. 현재 절의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높이 5m 정도의 뾰족한 자연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미륵바위라 한다. 이 미륵바위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지 못한 여인이 득남을 할 수 있다고 하며 창건 이후 신라시대에는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하나의 바위가 전승되어 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암괴류를 물고기가 돌로 변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큼직한 바위가 미륵바위로 믿고 섬기는 현장을 돌아보고 그냥 웃고넘길 만은 아니다. 옛날 옛적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민속 신앙의 하나로 자연숭배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높은 산정이나 큰 바위 앞, 신령스러운 고목 아래서 지극정성을 드리는 일은 일종의 민속 신앙이라 하겠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신앙을 불교가 이를 수용한 곳으로 이해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라 하겠다. 절집에서 산신각을 짓고 산신을 모시는 일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이러한 전설을 뒷받침하듯 법당 앞 널찍한 너덜지대에는 물고기 떼가 변한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는 돌더미가 널려있는데 지금도 이를 두드리면 맑은소기가 나기 때문에 종석(鍾石)이라고도 부른다. 현존하는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 불상이 아닌 미륵바위를 안치한 미륵전, 삼성각, 요사채, 객사 등이 서 있다. 산 위에 있는 수곽(水廓)의 물줄기는 매우 풍부한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씻던 곳이라고 전해 온다.

  밀야 만어사 삼층석탑(密陽 萬魚寺 三層石塔)은 지금의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조금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석탑도 지금의 위치가 원래 세워져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올려진 3층 석탑으로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 장식에는 보주(寶珠)가 얹혀 있으니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등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에서 퇴화된 자취가 엿보이지만 각 부의 구조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1181년(고려 명종 11)의 중창 때 건립한 것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견고하게 정제된 탐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밀양 만어사 아미타오존도(密陽 萬魚寺 阿彌陀五尊圖)는 정행(正倖), 정첨(正添) 2인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세기 후반의 아미타불화로 안정된 화면 구성, 세련된 필선과 비례를 잘 갖춘 인물표현 등 조선후기에 유행한 아미타오존도 형식과 양식이 잘 갖추어진 작품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1880년에 조성된 불화이다. 불화의 화풍과 안정된 인물 구성이나 인물들의 비례감이 잘 표현되어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밀양 만어사 석조여래좌상(密陽 萬魚寺 石造如來坐像)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각승 승호가 제작한 석제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양식적인 특징을 통해 조각승의 계보 혹은 유파는 물론 활동과 제작기법 등 조선후기 석조불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밀양 만어사 암괴류(密陽 萬魚寺 岩塊流)는 만어산(700m)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만어사(萬魚寺)에서부터 산의 아래쪽으로 암괴류(岩塊流)가 잘 발달해 있다. 암괴류란 동결과 융해의 반복에 의해 암괴들이 계곡을 따라 집단적으로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한다. 만어산 암괴류는 한반도에서 빙하기가 끝난 후 산의 암석들이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을 받아 생성된 암괴류로, 경관적 가치가 크다. 빙하기에 사면을 따라 암괴가 토양과 함께 느린 속도로 흘러내리다가 완경사지에 도달한 후, 이후 흐르는 물에 의해 토양이 씻겨 나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대구의 비슬산, 부산의 금정산, 광주의 무등산 등지에서도 암석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암괴류가 발달해 있다.

  이곳의 암괴류에 있는 암석 덩어리를 물고기로 인식한 불교적 믿음이 반영된 지명으로 전설상으로는 동해에서 온 물고기와 용이 불법에 감동받아 만어산으로 모여들어 돌이된 것이라 한다. 암괴류는 돌덩어리가 흐르면서 만들어 놓았기에 ‘돌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어산은 정상에서부터 해발 500m까지는 경사가 25。를 넘는 급경사를 이루지만 암괴류가 형성된 아래 지점인 해발 300m에 이르면 경사도는 5。 정도로 완만해진다. 만어산의 암석이 노출된 시기는 산 정상부의 것이 약 6만 5천 년 전이며 만어산 아래쪽 주변의 것은 적어도 3만 8천 년 전인 것으로 측정된다고 한다. 빙하기에 형성된 것이므로 현재의 기후 환경에서는 암괴류가 만들어질 수 없다. 암괴를 이루는 암석은 새립질 화강섬록암이며 암괴의 평균 직경은 1.5m 정도이고 암괴류의 면적은 115,149m2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밀양에는 ‘밀양의 신비’라고 일컬어지는 세 곳이 있다. 이는 삼복더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밀양시 무안면 소재지에 위치한 표충비각, 그리고 이곳 만어산 암괴류가 그것이다. 자연경관은 물로 지형학적인 관점에서도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현재는 암괴류가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 화석화 단계이며 주변의 식생이 서서히 암괴류를 잠식해 가고 있다. 다른 암석 위에 가볍게 올라가 있는 일부 암석을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나 쇠북소리를 낸다. 이 때문에 만어사보다 이 돌들이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돌들은 물고기가 수면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어서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어산불영에 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만어산 암괴류는 처음 찾아와서 보았던 그 풍광 그대로이며 신비로움도 마찬가지이다. 옛날에는 오솔길을 걸어서 올라왔었는데 지금은 승용차를 타고 올라왔으니 격세지감이 들기도 한다. 미륵전에는 불상은 보이지 않고 길쭉하고 훤칠한 바위가 버티고 서있으니 동해 용왕의 아들이 이곳에 와서 바위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어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을 거두어 돌아서는 발길은 가볍기만 하다.

기자명 송하 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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