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재』는 자인지역 최문병 의병장의 임란 창의 관련 고건축물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인지재(仁智齋)』의 현상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인지재(仁智齋)』의 현상

  경산시는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경관적 가치가 높은 지역의 비지정 문화유산을 보존ㆍ관리하기 위해 지난 2019년 ‘경산시 향토문화유산보호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후, 다음 해 12월, 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를 열어 관내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소재 『인지재(仁智齋)』등 모두 3건에 대해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의결하고 이를 지정 예고 후 지정 고시하였다.

  이중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산 『인지재(仁智齋)』는 지난 2013년 6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된 바 있으나, 동 문화재에 대한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이를 신청 문중에서 취하함으로 보존에 어려움을 겪어온 경산지역 임란(壬亂) 관련 고건축물로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 최문병 강학소로 건립되면서 자인현역 의병 창의에 직접적으로 활용된 건물로, 이는 지역 의병사에 중요한 인물 및 장소성을 가진 역사적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성재 선생 실기에 의하면, 인지재는 1579년(조선 인조 12년) 당시 자인현이 경주부에게 속현되어 있을 때, 지금의 자인면 울옥리(당시 울곡동)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건립 당시 당호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하였다가 1587년경에 『인지재(仁智齋)』로 개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는 선생이 1589년부터 나라에 큰 국란을 예견하고 홀로 『인지재(仁智齋)』에 기거(起居)하면서 활과 화살, 칼 등의 무기를 수집, 닥쳐올 앞날을 크게 근심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스스럼없이 구국 대열에 나설 것을 맹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덧붙여『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로부터 복현된 시기인 1637년에서 이후 30여 년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현감 남궁옥南宮鈺)에 의해 신관리에서 원당리로 이건(이 무렵 울곡동에 세거하였던 영천최씨들 또한 지금의 원당리로 전거(轉居)하였다)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 원당으로 관아(官衙)를 옮긴 후부터 계속 우환(憂患)이 잦아들게 되자, 1699(숙종 25)년에 김시휘(金始徽, 1696~1699년) 현감이 지금의 자인초등학교 교정이 있는 북사리(이전에 표기한 ‘서부리’는 필자의 오기로 바로잡는다) 일대로 이건(移建)하였다.
  이러니 지금의 『인지재(仁智齋)』가 소재한 부지(敷地)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던 셈이다.

▲ 『인지재(仁智齋)』의 주요 건축 부위 세부 실측도
▲ 『인지재(仁智齋)』의 주요 건축 부위 세부 실측도

  영천최씨 원당문중 최용석(77)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 자리에 『인지재(仁智齋)』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1699년 현감 김시휘(金始徽)가 현청을 북사리로 옮기게 되면서, 당시 북사리 일대 영천최씨 소유 자산을 원당리 소재 구 현청 부지와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인지재(仁智齋)』의 이건 시기는 이후 1차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최초 원당리로 옮겨 세운 시기 또한 1710년경으로 유추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은 곧 고려 현종(顯宗) 재위 시부터 1637년까지 무려 600여 년간 경주부(慶州府)에 속현(屬縣)되었던 자인현(慈仁縣)이 복현(復縣)된 후 두 번째로 자리 잡았던 현청(縣廳) 소재를 입증하는 경산시의 중요 기록유산이요, 이에 『인지재(仁智齋)』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 숙의(熟議)와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로,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義兵史)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굴곡을 걸머쥔 체 4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켜온 『인지재(仁智齋)』는 아래 사진에서와 보는 바와 같이 부서진 기와에는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이 이를 가려주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균형을 잃고, 그저 무심한 세월 소리는 산바람마저 지쳐 지나간다.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인지재(仁智齋)』는 경산시가 지정한 경산문화유산의 얼굴일 터인데 지정 3년이 지나도 그저 속수무책 치켜만 보고만 있는 지정(指定) 당국의 향후 대책이 아쉽기만 하다.

  덧붙여,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경산지역(경산, 하양, 자인현역)에는 무려 3천 명이 넘는 현민(縣民)들이 창의(倡義)하여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 일념으로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걸고 오늘의 경산(慶山) 땅을 사수(死守)하여 왔지만, 변변한 임란 추모 공간 하나 현창(顯彰)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문화정책을 훗날 경산사(慶山史)는 무어라 평가할까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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