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임인년 정월 대보름날이다. 옛날 어린 시절 가난하였던 농촌 생활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명절은 먹을거리가 많아 즐거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오곡 잡곡밥에 9가지 나물로 아침을 먹고 나서 부름을 깨기도 하였다. 몸에 종기가 나지 않는다며 설에 별도로 남겨둔 강밥을 깨물어 먹었다. 오후 나절에는 어른들과 뒷산에 올라 달 불을 놓고 보름달 달맞이를 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그러한 풍속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듯하여 못내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오늘은 입춘이 지나고 열흘이 되는 날이고 오는 주말이면 우수가 다가온다. 봄이 오는 길목에 서 있는 기분인데 한낮의 햇살이 따사로운 기운이 감돈다. 귀촌이랍시고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고향에 숨어있는 문화재를 찾아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오늘은 고향 후배를 앞세워 남천서원을 찾아보았다.

  필자의 고향인 용성(龍城)은 경산의 동극인 구룡산(九龍山)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과 주산인 용산(龍山)은 언제 바라보아도 넉넉하고 듬직하다. 남천서원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 덕천1길 35(덕천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용하고 편안한 길지에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1593년-1647년) 선생의 유업을 기리며 배향하고 있다. 서원(書院)은 성리학의 대가를 제향하는 동시에 교육 기능을 담당한 교육기관이었다. 서당이 사립초등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중학교이며 향교는 공립고등학교, 성균관은 국립대학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남천서원은 1696년(숙종 22)에 지금의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인 자인현 남팔리 삼성산 아래에서 자인현 복현(慈仁縣 復縣)과 성리학을 강론하여 향내(鄕內) 인재 육성에 공헌하신 취죽당(翠竹堂)의 업적을 후세에 기리고자 자인 유생(儒生) 수백 명의 발의로 1699년(숙종 25)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에 준공하였다. 취죽당 서거 54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거 서원이 훼철되었다. 서원철폐령이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1868년, 1871년 두 차례에 걸쳐 내린 명령으로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위패를 묻으라”고 지시하였으며, 이에 남산면 하대리 남천서원 뒷산 9부 능선에 위패를 묻었는데 그 봉분이 지금도 남아있다. 

  1922년 자인향교 유생들의 뜻을 모아 1927년 3월 남천서원을 덕천리의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2008년 3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증·개축(增·改築)하였다. 아마도 이곳 덕천으로 옮긴 것은 이곳이 경주김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인듯하다. 남천서원은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진입공간인 망덕문(望德門)과 강학공간인 강당이 세워져 있으며, 제향공간에는 상덕사(尙德祠)가 세워져 있다. 망덕문은 솟을삼문으로 세워져 있고 출입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각각 방으로 꾸며져 있다. 강당은 팔작지붕에 4칸으로 중앙의 두 칸은 마루이며 양옆에는 방으로 꾸며 놓았고 앞면에 퇴칸을 두었다. 

상덕사
상덕사

  강당 뒤편에 상덕사가 세워져 있는데 전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단출한 사당이다. 당초에는 취죽당 김응명, 매헌(梅軒) 이광후(李光後), 죽헌(竹軒) 이창후(李昌後) 선생 등 3위의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춘추에 봉헌(奉獻)하였으나 현재는 취죽당 단위 위패만 모시고 음력 2월 26일 봉향(奉享)해 오다가 2015년부터 양력 3월, 3째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망덕문(望德門) 현판은 취죽당 11세손 서예 작가 김영문(金永文)이 헌액(獻額)하였으며 남천서원(南川書院) 현판은 취죽당 11세손 서예 작가 김우영(金佑永)이 헌액(獻額)하였다.

  남천서원은 2008년 3월 12대손 김상정(金相政) 선생이 주관하여 대천, 박자, 용암의 청도문중, 상대문중, 송백문중, 도산문중, 부일문중의 후원으로 증·개축하였다. 남천서원의 보존을 위해 경주김씨 문중에서는 종회를 결성하여 종친들의 단합과 전통 유교문화를 계승, 보존함에 힘쓰고 있으며 숭조창손(崇祖蒼孫)의 덕목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은 12대손 김상도 선생이 대구에서 귀촌하여 서원 옆에 거주하면서 서원을 관리하며 선현의 얼을 이어가고 있다. 

  김응명(金應鳴) 선생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1593년(선조 26) 경주부 서(西) 자인현(慈仁縣) 울곡리(蔚谷里)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취죽당(翠竹堂),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경주이다. 신라 경순왕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명종(鳴鐘)의 25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재공(松齋公) 김우련(金愚鍊)이다. 송재공은 임진왜란 당시 자인의 최문병 의병장과 함께 창의하여 청도전투, 경주회맹, 팔공산회맹에 참여하였으며 화왕산 전투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과 함께 혁혁한 공적을 세웠는데 그 참전기록이 용사록(龍蛇錄)에 의해 전해 내려온다. 용사록은 임진왜란 전투에 참전하였던 의병들의 명단이다.

취죽당 일고

  취죽당 김응명 선생은 1607년(선조 40) 15세의 어린 나이에 ‘등태산(登泰山) 소천하(小天下)’라는 시제(試題)로 밀양 영남루에서 치른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1614년(광해군 6)과 1617년(광해군 9)에 향시, 생원시, 초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1617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으로부터 사사(師事)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출사를 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또한 박식하였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서 연하천석(烟霞泉石) 사이를 소요하면서 독서에 힘썼다. 

  자인은 원래 현(縣)이었는데 경주부에 속현되는 바람에 자인 지역민들은 경주까지 내왕하는 거리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관리의 수탈이 심하여 고초가 심하였다. 1633년(인조 11)에 자인 복현(復縣)을 위하여, 방희국(方熙國)을 선두로 하여 최두립(崔㞳立), 이시혐(李時馦), 이창후(李昌厚) 등 300여 명과 함께 자인이 경주부에 속하여 현민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소를 올렸으나 실패하였다. 1637년에 다시 자인현 복현(慈仁縣 復縣)을 상소(上疏)하여 윤허(允許)를 받아 자인현으로 복현(復縣)되어 임선백 현감이 처음으로 부임하였다. 자인 지방민들의 끈질긴 노력과 취죽당 선생의 4년간 투쟁해온 결과이다. 그 후 임선백 현감이 퇴락한 자인 향교를 다시 복원하기를 권유하므로 이에 사비(私費)를 투입하여 향교를 복원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자인향교에서 매월 초하룻날에 수많은 생도를 향교에 모아서 소학(小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서(朱子書)와 예기(禮記) 등을 가르치며 유생양성(儒生養成)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인조 임금의 몽진(蒙塵)을 통념하여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참전하였으나 중로에서 화해함을 듣고 통곡하여 돌아와서 삼락봉(三樂峯) 아래 집을 짓고 대나무 일천 그루를 심어 당호를 취죽당이라 하였다.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공부를 하고 심경(心經)과 사자서(四子書)와 백가제서(百家諸書)를 주위에 두고 공부하니 소문을 듣고 원근에서 찾아오는 이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나라에 충성하는 충신은 부모에 효도하기 마련이다. 김응명 선생은 부친이 병환에 있을 때 부친의 매일 대변을 맛보고 병세를 가늠하여 치료할 약재를 구하여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아래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그 후 모친이 또 별세하여 다시 3년간 시묘살이를 한 경산의 이름난 효자로 꼽히고 있다. 경산지역의 112명 효자 명부 중에 상위에 기록된 인물이다. 취죽당 선생은 1647년(인조 25)에 55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자인면 신관리 뒷산에 그의 부친 김우련 선생 묘소 아래에 잠들어있다.

  취죽당 선생의 사후 275년 후인 1922년 취죽당 일고(翠竹堂 逸稿)가 상재(上宰)되었다. 취죽당 일고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경산박물관, 영남대학교 박물관, 계명대학교 도서관에 각각 보관되어 있으며 목판본은 취죽당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 취죽당 선생의 아들 운계공(雲溪公) 김주(金柱) 선생은 운문사 입구의 원모재(遠慕齋)에서 배향되었으며, 원모재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봄이 가까워진 듯 포근한 낮에 남천서원에서 선현 한 분을 만나고 돌아서는 마음은 가볍고 행복감에 젖어 든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였으며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장(戰場)에 나아갔으며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아니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유학자를 우러러본 시간이었다. 특히 취죽당 김응명 선생은 필자의 12대 조부이신 죽계공(竹溪公)과 친분을 나누며 교유한 분이라 더욱 마음이 끌리는 선현이시다. 서원 내외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침 관리하시는 김상도 선생이 출타 중이라 상덕사에 들어가 배례를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자주 지나는 곳이라 다음 기회에 예를 드리고자 한다. 
  (2022. 2. 14. 월)

기자명 송하 전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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