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경북 경산시는 지금부터 1900년 전, 삼한시대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압독문화가 꽃피워왔던 곳으로, 이후 102년 당시 압독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5대 파사왕(이사금), 6대 지마왕(이사금), 7대 일성왕(이사금) 3대왕대에 걸쳐 나라를 되찾기 위한 압독인들의 끈질긴 항쟁이 이어졌고, 640년 신라의 관문이자 주성인 대야성이 백제에 의하여 함락되자, 구 압독국이 『압량주』로 명명되면서 642년에 당시 신라의 대장군이었던 김유신을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압량주민들이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김유신에 대한 저항이 없지 않았으나 달포동안에 걸친 김유신의 지략으로 모두가 군주와 뜻을 같이하게 됨으로 결국 압량주에 봉기(蜂起)하였던 의병들이 왕명에 의해 신라의 정예군이 되었다.

  그리고 압량주의 구국화랑이 김유신장군과 함께 645년 대야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후 『압량주』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왕자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장산성을 쌓게 되고, 여기에서 양성된 압량주 구국화랑들이 백제전투, 고구려전투에서도 모두가 꽃다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 668년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여기 경산 땅은 그날의 역사 속에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남았지만, 그날 화랑들의 함성과 압량주민들의 아우성은 삼국통일의 넋으로 이 땅에 메아리로 남아있다.

  이러한 구국화랑들이 적진으로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데에는 지금의 부적리(夫迪里)란 지명(地名)이 그렇듯, 그들의 훈련을 묵묵히 지켜보고 피눈물로 무사귀환을 기원하였던 마이지와 부적아낙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여기에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과 압량주 구국화랑의 화랑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경산병영유적(사적 제218호)과 마이지(말에게 물을 먹였던 못) 일원의 『신화랑풍류체험벨트조성』사업은 이들 정신을 체험하기 위한 시금석으로, 이를 계기로 한 「범시민압량주구국화랑숭모추진위원회」는 시민 각계각층과 뜻을 같이하여 오는 5월 10일 오전10시, 압량주 구국화랑들에 대한 숭모대제와 압량주 구국화랑 설화마을 조성에 따른 로드맵을 천명하고자 한다.

  1. 찬란한 압독문화의 흔적
  전술과 같이 지금의 경산은 삼국이 성립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압독소국이라는 고대국가로 존재하였다.
  삼국사기 권1 ‘파사이사금조’에는 파사왕 23년(서기 102년) 음집벌굴(지금의 경주시 안강으로 추정)과 실직곡국(지금의 삼척지방 추정)이 압독국과 같이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권34 잡지 지리조’에는 압독국이 신라에 병합된 뒤 장산으로 칭하여 졌다는 기록이 있다1).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산을 중심으로 서 9리에 있는 고포성, 남 7리에 있는 금성, 서 6리에 있는 우곡성 등 이들 3개성을 합하여 신라시대에 압량주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는 신라가 주(州)를 설치할 때에 성(城)을 기초단위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3개의 성 모두가 경산을 중심으로 서편인 대구와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의 압량면 일대에 김유신장군과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음을 미루어보아 위의 금성, 고포성, 우곡성이라는 3세력의 집단이 합쳐져 압독국이라는 고대의 성읍국가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79~1988에는 경산시 조영동의 무문토기와 자인면의 북사리 고분,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에서 고대유물들이 무수히 출토되어 압독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2).

  2. 삼한시대의 경산 ― 압독국의 영광을 뒤로하고
  삼국사기‘파사이사금조’에 의하면 동왕 23년(서기102년)에 압독국왕은 항복하였으나, 파사왕(이사금) 재임 27년 정월에 왕이 직접 구 압독국으로 와서 빈곤한 백성을 살피고 그 해 3월에 돌아왔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 신라 6대 지미왕이 압독국을 친히 쳐서 멸망시켰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압독국민이 국왕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신라 7대 일성왕(이사금, 147년)때 압독국 백성들이 13년에 걸쳐 반란을 일으킴으로 일성왕이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으로 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음은 당시 압독국민의 끈질긴 저항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3)
이는 압독국과 이서소국이 신라 제14대 유례왕(285~298)때에 금성(경주)까지 침입해 신라를 위협하였다는 기록으로 뒷받침되고 있으며, 숱한 압독민들이 전쟁노예가 되었다는 기록은 국왕의 일방적인 항복에도 불구하고 일부 귀족층과 백성들이 강력한 저항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은 의미하는 바 크다.

 

  3. 신라시대의 경산 ― 삼국통일의 전초기지
  압독국이 신라에 병합된 후, 신라는 백제에 의하여 빼앗긴 대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한때 대야주를 경산으로 후퇴시켜 당시 압량군주였던 김유신 장군으로 하여금 작전에 종사케 한 바 있다. 진덕여왕 2년(648년)에는 백제장군 의직이 압량주의 서변을 침략하여 요진 등 10여성을 함락하였으나 김유신 장군이 이를 격퇴하는 등, 경산은 김유신 장군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서 그 빛을 발하였다.

  4. 김유신과 압량주구국화랑 -기록을 중심으로 
  ☞ 김유신(金庾信)의 탄생4)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서기 595년, 아버지 만노군(萬弩郡 : 忠北 鎭川) 태수(太守) 김서현(金舒玄)장군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 하늘에 별이 품안으로 안기는 태몽과 함께 태어났다. 그는 가야왕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며,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김무력(金武力), 어머니는 신라 제 24대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 용화향도(龍華香徒) 김유신5)
  김유신장군은 열다섯 살 되던 해, 서기 609년(진평왕 31) 신라의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서기 611년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그는 화랑이 되어 이름난 산과 강, 들판을 다니며 무예(武藝)를 쌓고 화랑이 지켜야 했던 도리(道理), 삼교(三敎), 삼덕(三德), 오계(五戒)를 신조로 닦았다.

  5. 김유신(金庾信) 결심6)
  김유신은 한 때 천관녀(天官女)와 풍류(風流)에 빠져 잠시 수련을 게을리 함에, 이에 어머니가 엄히 꾸짖자 스스로 천관과 절연(絶緣)을 다짐하고 수련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에 지친 몸을 말의 의존 한 채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문득 말이 도착한 곳이 천관의 집이라,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끼던 애마(愛馬)의 목을 베어 베어버렸다.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約束)을 지키기 위하여 사랑하는 연인(戀人)도, 애마(愛馬)도 모두 버리는 비장(悲壯)한 결심(決心)을 굳히었다. 그의 이 같은 결심은 훗날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聖業)을 달성하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다.


  6. 삼국통일의 비법을 얻다7).
  화랑(花郞) 김유신이 17세 때, 당시 신라는 연접(連接)한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략을 받았다. 이 때 화랑 김유신은 중악산(中嶽山) 석굴(石窟)에 올라 몇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두 나라에 이길 수 있는 비법(秘法)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보검(寶劍)을 전하며 삼국(三國) 통일(統一)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그림] 경주 통일전 소장

  7. 생애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유신8)
  서기 629년, 화랑 김유신(金庾信)이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장군과 함께 고구려(高句麗) 낭비성(娘臂城)으로 전투에 참전하였다.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 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고구려 낭비성전투는 김유신의 생애 첫 번째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8. 김유신과 재매정(財賣井)9)
  서기 644년(선덕여왕 13)에 소판(蘇判)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서기 645년 3월에도 김유신은 싸움터에서 귀환하자마자 다시 서쪽 국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집 문 앞을 그냥 지나가게 되었는데, 50걸음쯤 가다가 멈춰서 자기 집 우물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켜 마셨다. 그러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말한 뒤 계속하여 길을 갔다.

  이렇게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지 않고 의연하게 싸움터로 나가는 김유신의 태도는 이를 지켜보던 군사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들을 싸움터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림] 경주 통일전 소장

  9. 황산벌 전투10)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 현 경남 합천지역)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때,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이 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 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에 힘입은 신라군과 당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백제의 계백장군이 전사하자 연합군의 승리로 기원전 18년, 서기 660년간 700여년의 백제 사적(史蹟)은 막을 내리게 된다.


  10.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다11).
  백제를 정벌한 이후 신라군과 당나라 연합군은 북쪽의 고구려로 진격하여 곧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 마침내 문무왕 668년 9월 드디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다. 문무왕은 김유신장군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다. 서기 673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루는 데 성공한 김유신 장군은 신라화랑이라는 명예를 걸머진 채 세상을 떠났다. 사후인 서기 835(흥덕왕 10)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追尊)되었다.

  11. 압량주 군주 김유신12)
  서기 650년 신라의 중요 병참기지인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되고 당시 군사들은 대부분 죽고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 중 성주(城主)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金春秋의 딸) 또한 죽임을 당하고 이들의 수급이 백제 의자왕 처소 댓돌아래 묻히어 졌다. 신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해졌다. 이에 복성(復城)을 위해 선덕여왕은 서기 642년 김유신 장군을 압독(現 慶山市) 군주로 파견하였다. 이에 압독민들은 신라에 복속(復屬)된 반감(反感)에서 장군의 일행을 반기지 않자, 김유신은 달포 동안 이를 지켜보고 스스로 압독인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오도록 기다렸다. 이를 지켜보던 압독인들은 모두 김유신의 인간됨에 감탄하며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김유신의 지혜는 곧 서기 645년 대야성의 탈환과 더불어 경산이 신라삼국통일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12. 마이지(馬耳池) 축조13)
  서기 642년, 김유신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부임한 후 당시 압독 소재를 중심으로 3곳에 연무훈련장(사적제 218호)을 축조(築造)하였는데, 현재 압량소재지 연무장이 기마장(騎馬場), 내리연무장이 궁도장(弓道場), 선화연무장이 보병훈련장(步兵訓鍊場)이다. 현존(現存)하는 마이지(馬耳池) 당시 마위지(馬爲池)라 하여 기마연무장에서 훈련한 기마(騎馬)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말을 위한 저수지를 축조하였던 것을, 일대의 아낙들이 저녁에 말을 이끌고 와 그의 귀를 씻어주며 남편과 아들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빌었다 하여 이를 마이지(馬耳池)라 하였던 것이 오늘에 이른다.

  이 저수지는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 264-2번지에 소재한 소류지이나, 저수량이 약 30.2천 톤에 달하며, 용수면적 7ha, 유역면적 9ha로 압량 소재지 일대의 농지에 젓줄이 되고 있다.

  13. 압량병영유적14)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압량리에 소재한 사적 제 218호(1971. 4. 28)호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당시 군사 훈련장이었다고 전해오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경산시 압량면 압량리, 내리, 진량읍 선화리에 축조된 두룩산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본 병영유적은 서북쪽의 구릉지대에 높은 대를 쌓은 고대식 광장과 동남쪽에는 무덤처럼 흙을 쌓아올려 높은 대를 만든 토축 고대가 연결되어 있다.

  고대식 광장은 거의 원형이며, 평탄한 넓은 장소를 광장으로 하고 있다. 광장에는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로 보이며, 토축 고대는 장군의 지휘 장소로 보인다. 자연 구릉위에 흙을 쌓아올려서 마치 성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훈련장으로 보여 진다. 다만, 토성을 훈련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 마위지(馬爲池)는 당시 이 병역유적에서 온종일 기마훈련에 지친 말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축조한 저수지로, 여기에 이 마을 아낙들이 남편과 아들의 출정(出征)을 앞두고 말을 목욕시키고, 귀를 씻어주며 가족의 무사귀환을 기원하였다 하여, 이후 이를 마이지(馬耳池)라 하였으며, 이 마을 부적리 지명(地名) 또한 이와 더불어 지아비가 전장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유래되었다고 전승되고 있다.

  14. 압독주 총관과 식읍 300호15)
  김인문은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여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다. 또한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 하였는데, 이처럼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그의 나이 23세 때, 왕명을 받들고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였다. 고종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내조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좌령군위장군을 제수되었고, 태종무열왕의 656년(무열왕 3) 잠시 귀국하였을 때, 압독주(押督州)의 총관(總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축조해 무열왕으로부터 식읍(食邑) 300호(戶)를 받았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은 당 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고자 하여, 숙위하러 가는 인문으로 하여금 당의 원군을 청하려 하였다. 때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각주)-----------------
  국립대구박물관, “압독인의 삶과 죽음,” 2000.
  권이구, “경산임당지구 고분군,” 영남대학박물관, 1991.
  정영화, “조영동 발굴조사보고서,” 영남대학박물관, 1985.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史蹟 第 414號 銘文, 韓國民族大百科事典.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三國遺事》〈卷 3, 塔上編〉;《三國史記》〈卷 4, 新羅 本紀 4〉, 眞興王 37年.
 《東國輿地勝覽》, 《東京雜記》等.
 《三國史記》〈列傳 金庾信 上〉.
 〈韓國民族大百科事典〉金庾信編; 박종서,「高句麗 娘臂城 位置에 對한 檢討」『국학연구』17, 2010; 강종훈,「7世紀 三國統一戰爭과 新羅의 軍事活動」『신라문화』24, 2004.
 〈韓國民族大百科事典〉金庾信編; 《三國史記》〈列傳 金庾信〉; 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통문관, 1984.
 《三國史記》〈列傳 金庾信〉;〈韓國民族大百科事典〉階伯將軍; 이병도,『韓國史』-古代篇-을유문화사, 1959; 임병태,「新羅의 三國統一」『韓國史』 2, 國史編纂委員會, 1978.
 《三國史記》〈列傳 金庾信〉;〈韓國民族大百科事典〉興武大王;《三國遺事》; 문경현, 「三國統一과 新金氏家門」『軍事』 2, 國防軍事硏究所, 1981; 신형식,「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이화사학연구』 13·14합집, 1983; 정중환,「金庾信論」『歷史와 人間의 大鷹』, 198.
《三國史記》〈列傳 金庾信〉; 주보돈, 新羅 中古의 地方統治組織에 對하여, 韓國史硏究, 23, 1979; 강봉룡,新羅 中古期 州制의 形成과 運營,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87.
이은창, 두룩산유적 조사, 영남대학교, 1976; 김종국, 삼한의 압독국 실체와 경산문화 형성, 도서출판 온. 2003.
「문화재청」,「경산문화대사전」.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4, 김인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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