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끊고 맺음이 분명한 전하진 전 경산시청 건축과장


전)경산시건축과장 "전하진"
  경북 경산시 전하진(60) 전)경산시 건축과장, 그는 경상북도 포항시와 연접한 영양군 청기면 횡화리가 고향이다.

  그는 1979년 11월 1일, 24살의 나이로 지방건축 9급 공채시험에 합격, 초임 발령을 당시 경북 경산군 새마을과 농촌주택계 근무를 시작으로, 건설과 주택계, 경산시 주택계장을 거쳐 지난 1996년 10월 24일 지방건축사무관으로 승진, 경산시 주택과장으로 보직된 이래 재임 중 동부동장과 종합민원과장 근무를 제외하고는 줄 곳 주택과장직에 근무한 경산시 주택건설업무의 최고 전문가이자 터줏대감이다.

  평소 그는 외유내강한 성품에 동료간에 우의가 돈독하고, 매사에 끊고 맺음이 분명하며, 의리와 신의가 돈독한 간부공무원으로, 직무에는 창의와 리더십이 뛰어난 실력가로 정평이 나있다.

  전과장은 지난 36년간의 공직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근무처는 자타가 공인하는 새마을과 농어촌주택계와 건축과를 손꼽고 있다.

  지난 2015년 7월 1일자 경산시종합민원과장에서 공로연수에 이르면서도 하루도 후배들을 걱정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는 그는 취재 당시도 시청 종합민원실 쪽으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종합민원실 업무는 정말 복잡다단합니다. 관계법령과 법규도 챙겨야하고, 무엇보다 민원인들에 대한 편의가 최우선이니까요.”
이 순간 문득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혔고, 금방이라도 현직으로 돌아가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저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던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습니다.”

  되돌아보면 그가 처음 건축직공무원으로 당시 경산군 새마을과 농촌주택계에 공직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는 감히 그가 감당할 수 없었으리만큼 경산지역은 건축의 불모지였다 한다. 특히 당시 11개 읍면의 농촌 주거환경은 196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 구조 또한 하수구하나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낙후된 취락이 대부분이었단다.
“저는 경북공전 건축과 2학년 때 지방공무원 공채에 임용되었으니, 당시 건축에 대한 이론만 조금 익혔을 뿐, 실무 경력이 없었어요.”

  그는 힘들고 어려웠던 당시상황을 상기하며, 그래도 그에게 교과서가 되었던 최고의 스승은 곧 경산지역 11개 읍면의 농촌마을의 농어촌주택개량사업이라 회고하였다. 그도 그를 것이 1982년 4월까지 그가 지도하고 감독해야할 농촌주택개량사업의 목표가 무려 700여동에 달았다 하니, 초임 2~년 동안은 밤낮이 따로 없었을 터이다.
“하다 보니 인간의 능력과 한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야근에는 이골이 나있었습니다.”

  1982년 5월, 건설과 관리계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산군 건축인허가 실무를 맡았고, 1988년 2월 도시과 주택계장으로 승진하기까지 낯에는 주택건설 현장을 뛰고, 밤에는 자정이 짧다하며 인허가 서류를 들고 동분서주하여야만 했다. 당시 건설, 도시과에는 주택인허가 업무를 2명의 건축직이 도맡아야하였던 실정으로, 그야말로 눈코 뜰 틈이 없었다는 그의 증언은 보고 듣지 않아도 뻔하다.
“가족들이 불평을 해도 정작 당사자인 나는 불평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소박한 그의 회고 속에는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정열이 불타고 있었다.

  1988년 2월, 건축직으로는 처음 건축계장으로 승진보직을 받았다. 이전까지 실무는 전문직이 담당하였으나, 정작 건축계장은 행정직이 맡아 업무연찬은 물론 상하 간 소통조차 투명하지 못하였던 터라, 건축직이 계장으로 보직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일대 혁신이었다. 그로부터 8년 후 1996년 10월 24일, 그는 경산시 최초 건축사무관으로 건축과장에 승진 임용되었다.

 “당시 저는 건축직이라는 사명감과 직무능력향상을 위해 부서장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1996년 후반부터 도시화 산업화 현상이 날로 심화되면서 경산일원에 공동주택 건설이 늘어난 터라, 무엇보다 이에 대응할 실무에 공직자로서 1인자가 되어야 했다는 전하진 전과장은, 재임 중 5만여 세대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이에 뒤따르는 수많은 민원도 주민편에서 해결한 민원해결사로 정평이 나있다. 한 예로 동부동 관내 B임대아파트와 진량읍 S아파트가 사전 입주를 앞두고 발생한 각종 민원을 직접 현장을 상주하며 해결하였던 당시의 정열은 6순을 맞는 그도 미끼지 않는 듯했다. 그의 민원처리 능력은 겉으로 순탄한 듯 보였지만, 안으로는 수많은 상부의 감사와 시기를 받기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전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입주문제로 절박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가슴이 넓은 그는 매사가 긍정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그의 공적이 헛되지 않아 지난 2006년 12월 29일 지역사회를 빛낸 유공공무원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전 제가 걸어온 지난날들이 모두 아름답기만 합니다. 틈나는 대로 성암산에 올라 가깝게 다가오는 경산 시가지와, 멀리 진량하양 소재지를 아득히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성암산이 그에게는 건축전망대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건축파수꾼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뒤돌아보면 금년 초부터 지난 6월말까지 그가 몸담았던 경산시종합민원실이 그를 위한 자기완성의 수련장이요, 도장이었다 한다. 그래서 일까 퇴직 후에 그간에 쌓은 노하우를 다시 시민에게 되돌리겠다는 그의 외고집이, 내년 초 경산시청 인근의 한 ‘민원무료상담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한다.
 “저는 이달까지 434번이나 봉급을 받았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공직생활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감사하다, 고맙다는 인사로 인터뷰를 마친 그는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각에도 시청테니스팀을 만나야한다 하고,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의 떠나는 뒷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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