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陵酒肆留別 
                       이 백
風吹柳花滿店香 吳姬壓酒喚客嘗
金陵子弟來相送 欲行不行各盡觴
請君試問東流水 別意與之誰短長

금릉주사유별
                          이 백
풍취유화만점향 오희압주환객상
금릉자제내상송 욕행불행각진상
청군시문동류수 별의여지수단장

금릉의 술집에서 작별인사하며
바람 불어 버들개지 날리니 술집은 향기로 가득하고
오나라 아가씨는 술을 걸러서 손님 불러 맛보게 하네
금릉의 자제들 모두 나와 서로 송별인사 나누니
가려고 하나 가지 못하고 제각각 술잔만 비운다
그대들에게 시험 삼아 물으니 동으로 흐르는 저 강물과
이별의 마음 중 누가 더 길고 짧은가?

  유별 : 먼저 길을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뜻.
  금릉 :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과 신해혁명 또 중국국민당 정부도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으며 일본 군인들에 의해 중국인 30여만 명이 학살된 남경대학살이 있었던 곳이다.

곽종육(서예가)
  이백(701-762):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가 태백太白이며 시인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는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시선이라 일컬어진다. 태어난 곳이 분명치 않으나 그가 쓴 여한형주서에서 농서포의라 하였고 친척이며 대서예가인 당나라 이양빙(720~780)의 초당집서에는 농서 성기인(감숙성 진안현)이라고 하였다. 당재자전 전당시 당시기사에서는 서량 무소왕 이고의 9세손이다고 하였다. 열 살에 오경에 통달하였다고 하며 스스로 꿈에 붓끝에 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자유자재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장검을 사용하는 기술을 배워 임협의 무리가 되려고도 하였다. 천보 초에 촉으로부터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하지장에게 그의 시 촉도난을 보여주었는데 하지장은 이를 읽어보고 인간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다고 감탄하였다. 이에 하지장이 현종에게 추천하여 현종은 이백을 만나 시사를 논해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한림공봉을 제수하였다. 그는 갈수록 오만방자하여 하지장 이적지 이진(여양왕) 최종지 소진 장욱 초수와 더불어 음주팔선인이라 불렸다.
  이백은 사방을 부유하다 화산에 오르려고 술에 취한 채 나귀를 타고 화음현의 행정관청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 현령은 이백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이 나서 그를 관청의 뜰로 끌고 가서 말에서 내리라고 하며 소리쳤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무례하게 구느냐? 이에 이백은 일찍이 내가 취하여 토하였을 때 임금이 직접 수건으로 닦아주었고 나의 국을 살펴주었으며 양귀비가 벼루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으며 고력사(현종의 총애를 받던 환관)가 가죽신을 벗겨주었다. 천자의 문 앞에서도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 화음현 내에서는 나귀도 타지 못하는가? 라고 하였다.

  안녹산의 반란으로 현종의 아들인 영왕이 동남절도사가 되었을 때 그의 막료로 들어가 보좌하게 되었으나 영왕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자 이백은 팽택으로 도망갔다가 영왕이 패한 뒤에 붙잡혀 심양?陽(지금의 강서성 구강시)의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러자 지난날 죽을죄를 지은 장군 곽자의를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곽자의의 도움으로 사면되었다. 뒤에 이백은 우저기를 건널 때 술에 취한 채 배를 타고 가며 달을 붙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 두보는 그의 시 음중팔선가에서 이백은 한말 술에 시 백편을 짓고 취하면 장안의 저자 변두리 술집에서 잠을 잤으며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일컫기를 신은 술 마시는 신선이다 하였다. 문집 20권이 전하고 있으며 북송시대에 편찬된 이한림집 30권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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