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불러주는 내 이름

                    
  ‘당신’이라고 했다. 만난 후 이 주 만에 그가 내 앞에서 선언하듯 말할 때였다. 당신을 향해 어떤 경우도 걸어가겠노라고 했다.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당신이라는 호칭의 어감은 강렬했다.
그 날이 성탄절 전야라는 이유, 눈 내리던 저녁이라는 이유, 고립된 산골 지역이라는 이유, 그가 던진 말의 내용,  이 모든 무게만큼이나 사회 초년병인 나를 들뜨게 했다.
그 시절 내 관념 속에 각인된 그 호칭은 완전하게 어른이 된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상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순간 이제 진짜의 인생을 꾸려가야 할 어른이 되었다는 자각인지 착각인지를 했던 것 같다. 성숙한 인격체로 대우받은 느낌에 설레었다.
결혼 후 남편은 ‘아내’라며 나를 소개했다. 시골에서 그 이름의 영향력은 컸다. 시골 마을의 어르신들이 드디어 나를 책임감 있는 직업인으로 인정해 준다고 느꼈다. 오며 가며 실없는 농담으로 자리를 차지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비로소 ‘울타리’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스무 살 중반부터 시골 지역에서 혼자 일을 해야 하는 독특한 근무환경을 가진 나에게 울타리의 존재는 절대 필요조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내’라는 이름은 세상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몹시도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어서 여러 고단함을 감수해야 했다. 결혼 후 ‘애인 같은 아내’라는 화장품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그 화장품을 바르면 반짝이는 애인 같은 모습을 늘 유지할 것이라 믿었는지 한동안 그 화장품에 애착을 가졌다. 덩달아 아내의 무거움도 벗어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은 인생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다. 부족한 것투성이나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저 흐뭇하다. 자연의 순리에 의해 아기가 어른이 되었지만 내가 아이의 키를 늘리고 몸을 다 불린 듯 스스로가 대견하다. 내리사랑의 본능이 내 피에도 유유히 흐름을 경험하는 삶의 질서가 감격스럽다. 불완전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가장 견고한 이름 하나를 얻었다. 가장 뚜렷이 흔적으로 남는 결과물이다. 따스한 그 이름, 내가 자주 불러야겠다고 문득 마음을 먹게 된다.
‘아줌마’라고 불렀다. 보건진료소에 방문하는 환자 중 매번 습관처럼 ‘아줌마’라고 나를 부르는 아저씨가 있다. 둘이 있을 때보다 누군가가 그 호칭을 듣게 될 때 민망함을 느꼈다. 그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내가 그를 ‘아저씨’라고 호칭하듯 내가 ‘아줌마’가 아닌 건 아니지 않은데 말이다.
대학에서 몇 학기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시간강사에 불과했지만 모두 ‘교수님’이라고 불러 주는 호칭이 감미로웠다. 학교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 톤이 되어갔다. 기품과 교양을 갖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내면이 아니라 타고난 허스키한 목소리를 다듬었다. 길에서 학생을 만나면 자세가 달라졌다. 직장의 일로 대학 강의는 계속 할 수 없었고 마음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큰 이유가 호칭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경험은 내가 세상의 지위에 무척 흔들린다는 방증이다. 내 그릇이 그만큼이라는 씁쓸한 확인이었다.
세상의 호칭은 사회적인 지위를 대변할 때가 많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호칭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그 시절이 잠시였다 해도 그 후의 나머지 인생 모두를 통틀어 우리는 그렇게 그를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예의인 사회이고 그래야 관계 속에서 마음이 놓인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란 책에서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큰 이유가 자신이 갈망하는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가 호칭 인플레에 시달리는 것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잠재우고자 하는 방편이나 위로일 수도 있겠다.
회귀본능일까.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호칭 전부였던 시절처럼 언제부턴가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사람이 제일 좋다. 엄마의 목소리처럼 누군가 따뜻하게 ‘영희야’라고 불러주는 관계의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건 지금의 내 마음이다.
나를 무슨 호칭으로 부르든 다른 이의 호칭이 무엇이든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깊은 호수의 마음이 되고 싶다. 외형에 치우쳐 진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고요하고 단단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길은 멀고 그래서 부끄럽다.

박영희
<프로필>

- 경북대학교 보건대학원 졸업
- 2013년 수필미학 등단
- 책쓰기포럼, 경산수필 회원
- 현재 경산시 대원보건진료소 근무

경산시 진량읍 진성로 232 대원보건진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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