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김우용·김우련 형제의 충의

  붉은 닭띠 해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하는 새해 벽두의 신묘(辛卯)일.
  이날은 필자가 2015년 12월 23일 경산학회 초청으로 동 학회에 연말학술세미나에 ‘경산지역 임란의병활동과 지역에 미친 영향’이란 주제로 소략(疎略)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면서 그 자리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경산지역 의병장 후손과 학회의 권고로 너무나 부족한 필자가 감히 이를 수락하고 집필을 결심하게 된 그날이 이듬해인 병신년 1월 4일 을유(乙酉)일이다. 그리고 그해 5월 1일 그간 공부한 결과를 ‘경산임란창의’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 놓게 되었고, 부족한 필자의 글이 적잖은 의병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비록 집필만 하는데 만 5개월이 가까운 시간들이 흘렀지만, 실상은 2013년 자인면 원당리에 소재한 최문병 임란의병장의 강학소를 연구하게 되면서 임란 당시 경산지역에서 창의를 주도한 5인의 의병장에 대한 실기를 연구와 함께 틈틈이 집필 초록을 준비하였고, 막상 책으로 세상 밖으로 소개되기까지 5개월에 가까운 시간은 지난해 초록한 내용을 현장 답사하고 당시의 전승되는 구전(口傳)들을 채록하면서 밤낮 없이 집필에만 몰두하여야만 했다.
  비록 실기와 묘갈명(墓碣銘)에 의존한 결과물이지만, A4 용지에 382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글을 빼곡히 써내려갈 수 있었던 용기와 인내는 아마도 부족한 필자에게 필자만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소명(召命) 같은 강력한 메시지가 있지는 않았나 싶다.
  의병장의 묘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무작정 670m 고지의 험준한 산 정상에서 지방인의 증언 하나만으로 수십 기에 달하는 묘역을 찾아다니며 해질 무렵이 다되어 발견한 의병장의 묘역 앞에 우리 내외가 큰절을 올렸던 현장에서 필자가 무언으로 주고받았던 창의 주인공들과의 대화 속에서 필자는 그들의 향토 사랑과 구국의지를 읽어 내고자 하였던 것이 이 글을 결코 중단하지 못하게 되었던 큰 결심의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2017년 1월 4일 오후 2시, 필자는 문득 본지에 소개한바 있는 임란 당시 자인현 울옥동에서 성재 최문병 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형제가 혈맹(血盟)의 의지로 창의를 맹세한 송정공 김우용 선생과 그의 아우 김우련 선생의 구국충정을 생각하면서 선생의 후손인 김상조(71, 전 기업인)님과 함께 자인면 신관리 의사(義士)의 선영과 울옥리 선영을 답사하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필자를 안내한 김상조 선생은 인접 용성면 덕천리 유덕산 기슭에 선조의 위패가 봉안된 남천서원(南川書院) 상덕사(尙德祠) 옆에 지난 2015년 포항의 한 제철회사 대표직을 은퇴한 후 자신의 인생 후반을 숫제 조상 위선사에 집중하기 위한 서원지기를 자청한 순정파로, 그는 일찍이 경북중고등학교와 국내 명문대학 및 일본 유학 등을 거친 이 시대 최고 지식인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먼저 필자를 안내한 곳은 구 자인현역인 경산시 자인면 신관리 산 36번지에 소재한 금학산 내룡이 길게 이어지는 해좌지원(亥坐之原)에 자인현 임란창의 의사(義士) 송재공(松齋公) 김우련(金遇鍊) 선생과 자인 복설운동으로 앞장섰던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선생의 묘소였다.
  묘역 상단에 자리한 송재공 김우련(金遇鍊) 선생으로, 선생은 백형 김우용(金遇鎔) 선생과 함께 경산임란창의의 금자탑을 세운 주역 중 한사람이다.
  송재공의 조하(兆下)에 자리한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命) 선생은 조선 인조 14년(1636년), 청 태종이 한양에 침범한 이른바 병자호란 당시 경주부윤의 압정 속에서도 재빨리 의병을 모아 자인현민 백현룡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구국대열의 선봉에 섰고, 또 경주부에 속현 된지 실로 620년만인 1637년(인조 15년)에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던 주역 중 한사람이다. 선생은 또 병자호란 때 왕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이 식량부족으로 청에 화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삼락봉(三樂峯) 밑에 떼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푸른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며 통곡하였다 하여 스스로 자신의 호를 취죽당(翠竹堂)이라 불렀다는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의사 김우련 선생 부자 묘역 

 

   

 

 

 

▲ 김우련 선생 아래 취죽당 선생 묘소

 

 

 

 

 


  여기서 잠깐 현존하는 최문병 의병장의《성재선생실기》와 최대기 의병장의《회당실기》, 황경림 의병장의《면와실기》, 권응수 의병장의《백운재실기》, 곽망우당의《창의록》등에 수록된 의사 김우련 선생 일가의 의병활동기를 살펴보면, 너무나 구구절절하고 사실적이다. 이중에 황경림 의병장의《면와실기》에 수록된 김우용 선생 일가의 활동상은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1597년 7월 19일, 여러 지역의병장들과 화왕산성 성중에서 큰 회합을 개최하였는데, 모두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면서 적신동맹을 맺으며 진충보국을 맹세하였는데, 이 때 참여한 의사(義士)가 무려 6백 여에 달했다 하였고, 당시 하양·자인·경산현에서 만도 무려 28명의 의사가 지역 의병을 이끌고 참전하였다는데 ‘자인현’의 인사로는 김진, 이창우, 이광후, 김우용(金遇鎔), 김우련(金遇鍊), 김응광 등이라 하였다. 또한 1592년 6월 9일 경주성 복성 전투에 자인현 출신으로 김우련, 김우용, 전극창 등 모두 9명이 원정하였고, 1596년 3월 3일 대구지역 전투에서도 자인현 출신으로 김우련, 김우용, 전극찬 등 모두 8명의 의사가 지역의병들과 함께 사투하였다는 기록이 생생이 남아있음은 당시 경산인의 위상과 자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김상조(71세) 선생은, 그의 직계 선조인 김우련 선생 형제와 취죽당 김응명 선생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승되는 기록 중에는 다소 사실과 다른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남아 있는 기록으로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언제 다시 기회가 있겠습니까?”
하며, 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사전 등에 수록된 기록 중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등재된 취죽당 김응명 선생에 대한 본관(本貫)과 출사(出仕) 등에 대한 사료적 오기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가 연구한 자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후손 김상조 선생이 추정하는 취죽당의 여막과 시묘 현장
  먼저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선생의 연보에 대해여, 취죽당 김응명 선생은 1593년(선조26년) 당시 경주부 서 자인현 울곡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취죽당, 자는 이원(而遠), 본관은 경주(慶州)로, 1647년(인조 25)에 돌아가셨다 하였고, 선생은 15세에 밀양 영남루에서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시관(試官)이 되어 치른 초시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영탁한 수재로, 난후 사마에 뽑히어 생원(生員)에 올랐던 인물이라 하였다. 선생은 또한 일찍이 부친 송재공의 뜻에 따라 성주의 한강 정구의 학사 백매헌(白梅軒)에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 연구에 진력하였으나, 선생은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항상 대쪽 같은 곧은 품성과 단정한 심성으로 독서에만 전념하였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전후 6년에 걸쳐 송재공 조하(兆下)에 여막을 치고 시묘하였다는 내용을 족보 기록을 인용하여 보다 소상히 설명하였다.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인현민 백현룡과 이광후·이창후 형제와 함께 의병을 모아 창의를 도모하던 중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소식들 듣고 땅을 치며 통곡하며, 산중에 은거한 후 떼집을 짓고 주변에 푸른 대나무 천 그루를 심은 후 스스로 호를 취죽(翠竹)이라 일컬었다는 대쪽 같은 선생의 선비 정신을 자랑하였고, 1633년(인조 11년)에 자인현민 방희국(方熙國)을 필두로 최두립·이시겸·이창후 등과 함께 상하 300여인이 대거 상경하여 자인현 복설운동을 주도함으로 경주부 속현 620년 만인 1637년에 국왕으로부터 복현을 윤허 받게 되었다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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