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농협에서 수십 년 동안 근무하다 퇴직을 한 이재권씨를 만났다. 자그마치 삼십 오 년을 한 곳에서 일했으니 회사를 위해 한평생 산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 없이 순탄하게 보냈다. 특별한 굴곡이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별 탈 없이 자랐다. 2남 1녀의 삼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그는 퇴직을 하면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남아 있는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딱히 할 만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퇴직 전에 특별히 준비한 것도, 생각해 놓은 일도 없었다. 농협에서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땅을 밟으며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게 되었다. 그의 고향은 용성면 매남이다. 그곳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이 400여 년간 13대에 걸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는 일찍 도시에 나와 학교를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농협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퇴직을 하고서 부모님이 물려준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그는 천 평에 털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듬해는 조경수로 벚나무 삼백오십 주를 심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서툴고 힘이 들었고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직장 다닐 때 받았던 스트레스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직장 생활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농사는 육체적인 노동의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시골의 한적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퇴직 후 자신이 원했던 생활과 딱 맞아 떨어졌다. 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그는 혼신을 다하여 과일 농사에 몰두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결과가 나왔다. 농사는 이론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수십 년 지은 전문가라고 해도 해마다 수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무는 말이 없으니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년 후 복숭아나무에서 약간의 수확을 했다. 자신이 심고 가꾼 나무에서 처음 수확을 하니 기쁨이 가득했다. 복숭아를 따서 주변의 이웃과 친인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잠시 이듬해가 되자 삼 년생이 된 나무는 키가 커서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과수 종목 변경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었다. 블루베리 농가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왔다. 시작 단계라 뜨고 있고 일하기도 쉽다고 하니 한 번쯤 해 볼 만하다고 화면 속의 농부가 말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힘이 덜 들 것 같은 블루베리 농사로 바꾸기로 했다. 농업진흥청에서 재배와 관리하는 교육을 받고 농장 여러 곳을 기웃거렸다. 복숭아를 베어내고 블루베리 삼백오십 주를 구입해서 화분에 심었다. 똑같은 크기의 화분에 심어 놓은 분재는 새순을 밀어내며 자랐다. 그해 겨울, 하우스 안의 블루베리는 추위를 탔던지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흙을 파서 뿌리를 봤더니 원뿌리가 썩었다. 살릴 수 없을 정도였다. 묘목을 다시 구입했다. 구입한 나무에 퇴비를 밀어 넣은 다음 영양재를 섞어서 다시 심었다. 가끔 냉해를 입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무는 잘 자랐다. 사 년 정도 되자 까맣게 익은 열매가 나뭇가지마다 조롱조롱 달렸다. 그해, 수백 그램 정도의 수확을 하여 천만 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농사를 짓고 이 정도의 수입을 올리기는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수백만 원의 돈이 들어갔지만 현금화되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문제는 이듬해에 일어났다. 배수 불량으로 인하여 나뭇가지가 마르기 시작했다. 더 두었다가는 나무를 모두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삼분의 이 이상의 나무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다. 이미 뿌리가 상해서 옮겨 심어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묘목을 구입해서 다시 심었지만 겨울이 되자 나무는 또 얼었다. 농사는 나무를 심고 캐내고 또 심고 캐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사람 사는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년에는 잘 짓겠지, 내년엔 더 많은 열매를 따겠지 하는 각오로 매년 다음 해에 희망의 메시지를 거는 게 농사와 사람의 인생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가 생각난다. 블루베리를 심어서 언제쯤 얼마만큼 수입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그를 보며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6월 초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올해는 다행히 추위에 피해가 없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결실이 잘되었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검게 익은 블루베리가 오종종하다. 수확하는 그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일하거리가 있는 노년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코로나 위기로 인해 재난지원금을 5차례나 받게 되었다. 일반 국민들도 서민이라면 작년과 올해 걸쳐 평균 세 번 정도는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지금까지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전대미문의 일이다. 1997년 11월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당시 외환위기 때는 경험적인 데이터로 네 집중 한 집이 망했다. 4형제의 집안이라면 그중에 한 형제는 망하는 꼴이었다. IMF의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에 의해 공공, 기업, 금융, 노동의 4개 부문에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이 이루어졌고,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1999년 2월에 실업자 수가 근 200만명을 육박해 10%대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래도 정부가 그때는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줄 생각을 못 했다. 빈곤인구가 전체인구의 4%에 머물던 나라가 8∼20%(빈곤통계 및 기준차이에 따른 빈곤규모의 차이)로 급증함으로써 빈곤문제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지금 코로나19의 충격은 그때보다도 더하다고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서민 경제 상황은 참으로 어렵다. 식당, 목욕시설, 여가 및 위락산업은 거의 폐업의 위기에 이르렀다. 비교적 OECD 가입국 39개 가운데서도 그런대로 우리나라가 코로나 위기를 가장 잘 대처하고 있다고 하지만, 취약계층과 코로나 쇼크에 충격이 큰 자영업자들은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범국민적으로도 이동이 제한되고, 만남이 제약되는 가운데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질환이 주는 구속지수는 참으로 크다. 무언가 자꾸만 움츠려들고, 일상의 만남이 위축되고 귀찮아진다. 만남이 자유롭지 못하니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가 없고 외톨이 행동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모임이 없으니 대중음식점과 관광 여행사, 스포츠, 목욕탕, 영화관, 놀이시설 등 일상생활과 관련이 있는 전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 지구촌 전체가 한꺼번에 겪는 위기이고 보니, 그 고통의 총량적인 크기가 그 이전의 개별국가들이 겪었던 고난시기 보다 훨씬 그 충격이 크고 넓으며 또한 깊다. 그러다 보니 세계 각국들은 저마다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어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다. 마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내 로라 하는 선진국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을 위한 재난극복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주는 재난지원금정책을 두고는 정파간, 국민간 논란이 뜨겁다. 국민들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펼치며,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이를 태면 왜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느냐에서 부터, 자영업자, 저소득자를 중심으로 집중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줘도 된다는 주장까지 실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정부는 88%까지 주자고 한 5차 재난지원금을 경기도는 100%까지 주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그러나 재정적자가 높으니 아예 일반국민들에게는 재난지원금을 줄 필요도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는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재난지원금의 재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부터 따져보자. 재난지원금의 재원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 내는 세금이다. 세금은 누가 낸 것인가? 국내의 모든 기업과 근로 현장에 종사하는 소득창출자인 기업과 개인이 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금은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층이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저소득자는 적게 낸다. 소득이 낮아 한계소득권에 있는 근로자는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세금은 절대적으로 결국 부자 기업과 부자 개인이 내는 돈이다. 우리나라 조세구성을 보면 대기업들과 고소득자, 고재산가들이 내는 세금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하고 합리적으로 살아서 부자가 되었고, 그 결과로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내는 애국자이며, 국민경제의 혁혁한 공로자들이다. 그들은 세금을 많이 낸 댓가로 국가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 사실상 국가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은 없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고액납세자에 대한 여러 가지 혜택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혜택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부자를 쓸데없이 미워하고 헐뜯으려는 성향이 있다. 물론 나라가 어려울 때 저소득자나 충격이 큰 자영업자들을 국가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전대미문의 대 환란이 왔을 때, 고난을 함께 이기기 위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위해 수많은 경제적 기여를 한 부자를 포함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드리는 차원에서 주는 재난 지원금은 국민의 사기를 올리고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소득증가와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가 있다. 일찍이 대공황기에 구원의 경제학자 John Maynard Keynes는 경기회복을 위한 유효수요의 증가를 주장하면서 국제회의의 위해 숙박하던 호텔에서 새 타월을 몇 장이나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제가 여려운 시기에는 돈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은 돈을 써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자영업자들도 회생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재난지원금은 결국 부자들이 낸 세금으로 나라가 국민들에게 베푸는 시혜인 셈이다. 그 돈은 위축된 경기를 살려 경제의 활기를 찾는 역할을 한다. 경기를 회복시키고 경제를 살려 국민소득을 높이고, 고용을 증가시켜 경기도 부양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재난지원금은 두 가지 형태로 지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의 사기를 돋우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보편적 재난지원금과 특정계층을 위한 차별적 재난지원금이 그것이다. 재난지원금 정책에 대하여 지나치게 경제적 약자지원이라는 제한적 목적 한 가지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또한 재난지원금으로 재정적자가 커지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다. 국가재정은 가정 살림과는 다르다. 재난지원금을 주어 경제를 회복시켜 차년도의 국민소득을 올려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부채를 줄이면 될 일이다. 국가는 나라의 사정에 따라 어려운 시기에 국민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후일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좀 더 거두어 보충하면 된다. 우리나라 부동산가격 급상승으로 가계부채는 높지만, 우리나라의 재정상황은 세계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크게 나쁘지 않다. GDP대비 50% 선이다. 일본의 220%, 미국의 180%에 비하면 아직은 좋은 편이다. 물론 적자가 없는 건전재정이 좋을 테지만, 그렇다고 항상 건전재정이 가장 좋은 선택은 아님을 경제학은 이미 오래 전에 밝혀왔다. 단순한 도덕적 인식과 과도한 정파적 정쟁이 보편적 재난지원금에 대하여 지나친 비판과 부정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책운용자들이 재난지원금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않고, 무작정 실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해와 불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5차 재난지원금의 용처를 밝히고 있는 언론 기사를 보면, 이번 추석연휴에 재난지원금이 국민의 행복지수를 올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는 생물이다. 경제는 생명체처럼 순환해야 살아가는 생물인 것이다.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재난지원금으로 적절히 순환되는 사회는 행복경제를 창조하다고 생각한다.
김미숙 경상북도 울진이 고향인 황익수 씨를 만났다. 그는 몇 년 전 복숭아 동호회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다 최근에 동호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로 나왔다. 도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는 몇 년 동안 일에 파묻혀 살았다. 공무원은 안정된 직업이었지만 일을 해도 어딘가 허한 느낌이 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사표를 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았던지 삼성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대로 쭉 나가길 바랐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인터넷 쇼핑이 활발해지면서 대리점은 차츰 하향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왔다.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차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식품공장 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그 일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스트레스로 인해 어떤 때는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벌어 놓은 돈은 사업 자금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로 쓰일 곳이 많은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앞날도 막막했다. 오십대 초반, 그는 우연하게 농사에 발을 디뎠다. 지인의 소개로 도시의 근교에서 농사짓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던 농사는 하우스 안에서 야채를 길러 직접 도매상으로 내다 파는 일이었다. 상추 농사가 짓기 쉽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던 부부는 하우스 안에서 적응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쪼그리고 앉아서 상추를 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랭지에서 8년 동안 팔천 평과 씨름하느라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가물했다. 사업을 하면서 전 재산을 탈탈 털린 악몽을 잊기 위해 일에만 전념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농사짓는 일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도 못하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견뎌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태풍 매미가 들이닥쳤다. 하우스의 파이프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비닐은 여기저기 흠집을 내고 달아났다. 하우스 안에 있던 상추는 만신창이가 된 채 쓸모없게 되었다. 야채 농사는 이제 그만 지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복숭아 농사로 길을 바꾸었다. 원래 그는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한때 사업이 잘나가던 중에도 틈을 내어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녔다. 그때 원예학을 전공하면서 농업의 전반적인 지식을 쌓았고 애정도 가졌었다. 경산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은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옮겨서 처음 시작했던 농사는 천도복숭아였다. 천칠백 평의 빈 땅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때는 복숭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주변에서 추천해 준 품목을 심었는데 삼 년 후에 다 익은 복숭아 맛을 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과일 맛이 아니었다. 너무 시고 텁텁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맛이 나지 않았다. 맛없는 복숭을 눈속임으로 시장에 갖다 내놓기 싫었다. 저도 가족도 먹지 않는 과일을 농사지어서 판매할 수는 없었다. 그해 가을 그들은 삼 년생인 복숭아나무를 뽑아냈다. 이듬해, 다시 백도와 황도를 심었다. 명품이라고 하는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들이 원하는 품종이 또 아니었다. 품종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오 년이 지난 후에 알았다. 묘목 키우는 사람이 장난을 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착오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몇 그루의 품종 중에서 스물세 그루를 뽑아냈다. 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또다시 묘목을 심었다. 나무를 심어 놓고 수확할 때까지 수입이 나오려면 몇 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8년 동안 키웠던 스물세 그루의 나무는 돈으로 따지면 그들 부부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수확은 없고 투자만 계속했으니 십 원짜리 하나라도 아껴야 했다.그들은 다른 농부에 비해서 농사가 많지는 않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품질 좋은 복숭아를 생산하는 게 꿈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밭에 들른 적이 있었다. 나무를 예술 작품처럼 키워 놓았다. 작년에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나무처럼 분재를 해 놓은 것 같았다.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밭을 둘러보는 내내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또 천 평의 땅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했다. 그곳에 산딸기를 심었다. 복숭아 수확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초처럼 커야 하는 딸기를 수확할 때면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뻘뻘 흘렸다. 부지런한 그들 부부는 잠시도 놀 틈이 없었다. 힘든다고 그만두려고 했던 딸기를 뽑지 못하는 이유는 돈의 회전이 빨랐다.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고 아이들 학비도 댈 수 있었다.시간이 흐르자 두 가지 일이 겹쳐졌다. 딸기를 매일 따서 납품을 하다 보니 복숭아 열매를 솎지 못했다. 나무를 심고 첫 수확 하는 해는 복숭아를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가 없었다. 농번기의 시골은 시간과의 싸움인데 딸기를 따는 족족 도매상으로 직접 갖다줘야 하니 일하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복숭아 아카데미 일 년 과정을 마쳤고, 경북기술원 농민사관학교의 일 년 과정도 수료했다. 지금은 영남대학교 2년 마이스터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복숭아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공부를 끝없이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요즘은 농번기가 따로 없다. 공부와 농사를 병행하다 보니 일 년이 눈 깜짝할 시간이라고 했다. 농사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있으면 짓기가 수월하지만, 호미자루 하나 없이 시작한 그들 부부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직 정상적으로 수입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에게서 행복의 씨앗이 엿보인다. 그들 부부는 큰 욕심이 없다. 이웃 사람들과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면 그만이라고 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 그들의 얼굴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순을 갓 넘긴 너털웃음이 삶의 여유를 말하는 것 같다. 참 행복해 보이는 부부의 모습이다.
한국복지사이버대학교임승환 부총장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제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한지 76 주년 되는 국경일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서 온몸을 던져 목숨바쳐 구한 이 나라 우리가 함께 고마워하고 기뻐해야할 오늘 전국민은 연일 2천명을 오르내리는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백신공급이 제때 안되어 2주 이상 지연되는 것은 물론 예약을 받기위해 폰을 들고 정보의바다를 헤메는 현실입니다. 소상공인ㆍ자영업자는 한숨이 눈물로 바뀐지 오래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철저한 개인위생 준수와 사회적거리두기 이젠 정말 지쳐가고 있네요.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백신접종 하라. 개인위생 철저히 하고 마스크 착용하라. 4인 이상 모이지마라. 거리두기 하라. 시간 지켜 영업장 문닫아라. 이와중에 K방역 자화자찬이란 말이왠말입니까. 언제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지. 특히 자영업자ㆍ소상공인들 언제까지 얼마 안되는 지원금으로 경쟁력을 상실시킬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속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든든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국민백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명의 확진자라도 제대로 치료해서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온몸을 던진 자랑스런 그리고 존경하는 세계최고의 의료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얻은 광복절인 오늘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코로나19여 우리 국민들 더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조용히 지구를 떠나거라.
이 재 희1949년 경북경산출생(전)역도선수(현)대구 해안농약사 대표갓바위 가는 길고요와 적막 사이참묵과 여백 사이꽃무릇 이냥 지고꽃대궁만 남은 기슭단풍은 아직 설들어더없이 곱기만 하고근엄한 부처님 얼굴가을 햇살에 찬란하다지나가는 꽃구름도삼배를 올리고 가는데인간사 백팔번뇌를홀로안고 애태우시네
고황 대조영 장군상 경자년 금년 한해는 지나온 세월 중에서 가장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아니하고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 한 해를 허송하게 보낸 것이다. 중국 우환에서 들어온 폐렴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지금도 지구상의 전 인류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 2월 10일 첫 확진자가 나타난 이후 전국적으로 감염시키고 있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그 기세가 조금 수그러지는 듯하다가 늦가을부터 다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동호인을 만나거나 여행도 마음 놓고 떠날 수 없으며 친구나 친인척의 모임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연말이 되니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에 접어들고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 그래도 오래 만에 오늘 하루만 포근한 날이 될 거라는 일기예보에 따라 길을 떠나본다. 오늘 찾아 나선 곳은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의 발해마을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마을 입구에는 큼직한 바위에‘발해마을’이라 새겨 놓았으며 도로변에는 태극기와 발해마을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울은 오래전에 복개를 하여 넓은 길이 나있고 농산물집하장 앞에는 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담벼락에는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 장군과 기마부대가 만주벌판을 누비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이곳에 와사 농촌계몽운동이랍시고 한 달 동안 살았던 곳인데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보인다. 발해마을을 다듬고 가꾸어 나가는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 태재욱 선생을 만나 발해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발해국(渤海國)은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로 고구려 역사의 연장을 의미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 15대의 왕위를 계승하며 229년간 존속한 나라로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북국 시대가 열렸는데, 남은 신라, 북은 발해를 이르는 것이다.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존속하였으며 수도는 발해 성왕 이후로 상경 용천부로 정하고, 초기에는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나 고려라 불리기도 하였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698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이 동모산 부근에서 건국하였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를 확장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건국할 당시 대조영이 진국(震國)이라 하였으나, 713년 당나라로부터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명목상 책봉을 받은 후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였다. 926년 발해는 갑작스럽게 멸망했는데, 그 이유는 백두산 폭발, 거란의 침입, 지도층의 내분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가 명확하지는 않다. 발해국이 멸망한 이후 고왕 대조영의 후손들이 대거 옛 고구려 땅에 유민으로 정착하였다. 그 이후 영순태씨 일족은 상주, 문경지역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대조영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미명으로 2001년부터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이 고대 중국 정부의 동북 지방에 속했다는 역사 왜곡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행태에 대해 태씨 문중의 일족이 똘똘 뭉쳐 역사바로세우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견하며 그의 용기가 대단해 보였으며 나라와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추진하고 있음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태재욱 회장은 영순태씨 43세손으로 1942년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 721번지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을 하다가 1990년 초에 귀향하여 문중 재실을 관리하던 중 대조영을 모시는 사당과 영순태씨 입향조에 대한 내력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1년부터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인 발해에 대하여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 왜곡 사실을 접하게 되어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의 근간을 흔들고 있음에 참을 수가 없었단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대조영의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중국의 역사 왜곡을 반박하기 위하여 종인들의 중지를 모아 발해국의 대조영 후손들이 사는 마을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복원하기로 하였다. 역사 자료를 수집해 나가면서 장기적으로 발해마을 종합계발계획을 추진하였으며‘발해왕조제례보존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 송백2리를 발해마을이라 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라서‘발해마을’이라고 부른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고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의 18세손인 중시조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르면서 지금 문경 일대인 영순현 고을을 하사받아 다스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중상의 31세손이며 통전대부를 지낸 태순금이 피난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영순태씨는 북한 지역에 많이 정착하였고, 국내에는 이곳 발해마을이 유일한 태씨 집성촌이라 한다. 1950년 중반에는 송백리에만 60여 가구가 살 만큼 번성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27가구에 40여 명 정도이고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약 9천여 명이라 한다. 그런데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이 어떻게 태씨(太氏)인지 궁금하여 문의하였더니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다. 두 글자는‘크다’라는 의미인데 대(大)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太)로 썼을 뿐이다.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설명을 들어보니 궁금증이 풀린다. 이어서 발해마을을 가꾸어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발해마을은 2016년 농촌건강장수마을에 선정되었고, 2017년 농촌진흥청 주관‘전국 어르신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 참가하면서 대조영 후손들이 살고 있는 태씨 집성촌이라는 역사 콘텐츠를 발굴, 적극 활용해 그해 9월에 발해마을 입구에 대형 마을 표지석을 세웠고 신도비, 발해고황 대조영 장군상 제막식을 가졌으며 마을벽화, 기마상 조형화, 안내표지판, 발해 상징 로고 깃발과 태극기 게양, 마을 스토리 지도 등으로 마을환경을 정비하는 등 경산을 대표하는 농촌 관광마을을 조성하였다. 2017. 11. 28일‘전국 어르신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동안 고황제 대조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2015년부터 춘분과 추분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처음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가, 2015년 영순태씨와 협계태씨를 합치면서 다시 왕조 제사로 부활하여 지내고 있다. 2018. 3. 21일 사당에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모시고 발해왕조 춘분 대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발해국 태씨의 뿌리 및 민족사'란 대형 유래석을 세움으로 발해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발해국의 역사와 명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게 하였다. 대조영의 영정을 모시는 추모재(追募齋) 앞 정원에는 발해마을 안내판, 발해국 태씨의 뿌리 및 민족사 유래석, 대조영 흉상, 석등 등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제작한 과정도 이야기해 주었다. 대조영의 표준영정은 얼굴 박사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전국의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사진을 찍어 특징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숙명여대 권희연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한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태씨 일족의 남성은 한국인의 평균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 점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발해마을을 더욱 다듬고 가꾸어나갈 포부도 들려주었다. 2013. 5.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발해 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 와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 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두고 싶다고 한다. 또 발해역사관과 박물관도 건립하고 한옥마을을 조성하며 대조영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 한다. 또 대조영 영정을 모신 고황전 사당도 큼직하게 마련하고 그 뒤쪽에 대나무 산책길을 만들어 역사교육 관광지로 가꾸는 '발해마을종합계발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 한다. 마른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 따듯한 방안에 앉아 발해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태재욱 회장님은 생동감이 넘치며 기백과 사명감을 갖고 보람 있는 일을 추진함에 참으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하니 신바람이 나는 삶인듯하다. 흔히들 경산에는 문화관광자원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이곳에 발해마을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삼성현공원과 압량의 김유신장군의 군사 훈련장인 경산병영유적, 자인 한장군 유적, 구룡산 반룡사, 용산산성 등과 더불어 관광 벨트화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된다. 밖으로 나와 태재욱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고황제 대조영을 모시는 추모재 및 사당과 조형물을 살펴보았다. 정부 기관이나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민간차원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발해마을을 가꾸어나가는 그의 일상이 언제나 평화롭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린다. (2020. 12. 29. 화) 발해국 대씨의 뿌리 및 민족사 고황 대조영 장군상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2020년 연초부터 시작한 코로나 19는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환란을 만들고 있다. 현재 전 세계 감염자수는 2억 명이 훨씬 넘었다. 바이러스의 진행 조짐도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성도 우한에서 사스로 의심되는 질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우한 중심병원 의사 리원양은 최초로 우한폐렴 발생이 간단한 질환이 아님을 경고했다. 인구 1,100만 명의 우한은 중국 중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정치, 경제, 금융,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래서 세계 각처에서 왕래자가 많은 곳이다. 발병의 첫 출발은 2019년 12월 31일 중국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환자 27명이 발생한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이어 우한 당국은 2020년 1월 9일, 우한 폐렴의 원인이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임을 발표했다. 중국이 아닌 첫 해외의 환자는 1월 14일 태국 방콕에서 발생했다. 61세 여성인 그녀는 중국 우한에서 입국했다. 일본의 첫 환자는 1월 16일로 우리나라 보다 약 4일 정도 빠르다. 한국의 첫 번째 환자는 1월 20일 우한에서 인천으로 입국한 35세 중국여성이었다. 이어 그해 21일 미국에서도 첫 환자가 발생하는데, 그 자도 우한을 다녀온 사람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코로나 19로 정식 명칭을 갖게 된 것은 2020년 2월 11일 이후이이다. '신종코로나 감염증' 혹은 '우한폐렴'으로 정확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코로나 19는 중국의 확진자 4만 명, 사망자 1천 명, 한국의 확진자가 27명이 나온 2월 11일 이후 정식 명칭 "코로나19" 를 갖게 되었다. 유사 이래 지구촌의 전인류를 향해 무차별 감염을 시키고 있는 무서운 바이러스성 질환 코로나19 는 이제 감염기간이 1년 반을 훌쩍 넘기고 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세계의 전문가들이 대체로 발병 후 2년을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의 조짐으로는 당초의 예상보다 감염기간이 길어질 전망이다. 그 이유 중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코로나19 가 끊임없는 변종 바이러스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알파형, 베타형, 감마형, 델타와 델타 플러스에 더하여, 유형을 알 수없는 변이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 4 차 대유행기에 들어 있는 지구촌은 코로나19 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휴교령이 내린 학교는 텅 비었었고, 재택근무로 인해 사무실도 비었었다. 도시의 거리도 한산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상식화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비 대면이 뉴 노멀이 되는 사회이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며, 통신매체로 의사소통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걸 피하고 있다. 오프라인 사업장이 장사가 안 되고, 공연장, 스포츠경기장, 연회장에도 손님이 적다. 영화관이나 공공장소, 놀이공원도 텅 비고 한적 하다. 어떤 병원은 90% 정도로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한다. 비대면 사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업장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모든 질서가 고장 난 엔진처럼 속도가 줄고 맥이 빠진 듯도 하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졌고, 거주와 이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지만, 어디든 함부로 갈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분명 현재의 이 위기는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위기이다. 도쿄 하계 올림픽을 일 년을 연기하여, 겨우 겨우 개최했지만, 관중이 없는 경기가 되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들이 작년 일 년은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금년 들어 겨우 미약한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혼쭐이 났던 1997년 IMF경제위기 보다, 미국 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보다 몇 갑절 어려운 위기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세계 GDP의 10%가 줄어드는 지구촌 경제상황이 바로 작년이었으며 아직도 크 충격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재난지원금을 주는 방법을 두고 나라마다 시끄럽지만, 나라의 구제사업은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국민들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지켜주는 국가가 있음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선별지원도 있어야 하지만, 전 국민에게 위로를 주는 격려금도 필요하다. 정파를 떠나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은 경제를 살리고, 애국심에 득이 된다. 물론 국가가 주는 재난지원금 재원은 국민이 낸 세금이다. 부자들은 많은 세금을 내었다. 결국 지원금의 대부분은 부자들이 낸 돈이다. 부자를 쓸데없이 미워하는 생각은 과거형 낡은 사고방식이다. 부자는 가난한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직한 사회라면 부자가 인정받는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의 바른 길이다. 남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된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다. 그러나 이 코로나19 의 환란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코로나 19가 가져오는 수많은 변화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탈세계화, 디지털화, 개인주의화 그리고 집중화이다. 첫째, 탈세계화는 지금까지 지향해온 세계화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유자본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경쟁적으로 자원을 무제한 사용함으로써, 과도한 자원사용이 자연의 리싸이클리닝(재생) 능력을 불가능하게 했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밝히듯이 이제 자유방림주의는 수정되어야 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모델을 모색하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둘째, 세계는 지금 디지털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CCTV카메라에 스스로도 모르게 찍히고, 디지털이 관리하는 문화 속에 확인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을 보호하며 감독하는 자동화 시스템에 순응하는 반듯한 삶을 살아야 하고 적응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셋째, 연대적 개인주의 사회이다. 코로나 이후에는 누구든 서로를 위해 갖추어 진 조건으로 만나야 한다. 세상은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연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개인주의가 기본이지만,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긴밀한 고리로 얽혀진 연대적 개인주의 사회이다. 디지털로 만나고, 비대면 온라인 거래에서 대부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서로 간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연대적 개인사회에 익숙해져야 한다. 넷째, 집중화는 코로나 위기를 어느 나라들이 잘 대처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집중화가 잘된 나라들이다. 일본의 어떤 정치가는 한국이 집중력이 높은 나라라고 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코로나19 대응능력이 높은 나라라고 한다. 개인과 전체를 위해서 가능한한 잘 협조하고, 절제된 자유의식이 필요하다. 위기는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 밀턴 프리드만은 "오직 위기만이 새로운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고 했다. 현재의 생활방식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보건생활을 상식화 하고, 모든 행동에서 남을 생각하며, 조직과 전체를 생각하는 겸손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행복의 개념과 기준도 변해야 할 것이다. 많고, 크고, 높고, 화려한 외형의 것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빨리 가고, 많이 소비하고, 화려하고 빛나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닌, 작은 행복이 참된 행복이다. 일상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삶임을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가 19는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업임을 인식하고, 작은 욕심으로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통해 세상의 자원을 아끼고 절약하는 작은 경제학이 새로운 행복경제의 명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자연과 공존하면서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자연의 순응자가 되어, 세상과 더불어 사는 가족중심의 진실한 사랑의 삶이 포스트 코로나의 새로운 행복모델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박 치 민 넘어지기 전에 지팡이 짚는다. 화를 입는 것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 해야함을 말한다. 앞날의 계획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이지만, 특히 화재는‘예방 행정’을 통해 앞으로 발생할 화재를 미리 파악하고 막을 수 있기에‘예방 행정’을 소방행정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현장에서 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이 소방시설 등에 대하여 평상시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소방특별조사’분야가 있다. 예방행정의 현장요원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조사대상을 선정하여 조사하고 있다. 다가오는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 추석 음식을 준비하려고‘전통시장’에 사람들이 붐빌 것으로 예상되기에 지난 8일부터 관내 전통시장 5개소, 대형판매시설 2개소를 긴급 소방특별 전수조사의 주요 대상으로 선정하여 실시하고 있다. 전통시장에 특별조사를 하는 중점적 계기로는 지난 9월 4일(토) 새벽 3시반경 경북 영덕군 소재 영덕시장에서 전기적 요인으로 화재가 시작돼 구조적인 문제인, 내장재 컨테이너와 반자 위의 보온재인 스티로폼을 타고 삽시간에 불이 번져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추석 대목 장사를 노리던 시장 상인들이 임시시장을 설치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3년간 경북소방본부 화재 현황 분석에 따르면 평균 3건의 화재가 발생하였고 계절별로 봄철 또는 겨울 초입인 늦가을에 화재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 현 시점에서‘화재발생율’이 가장 높다. 물론 긴급 소방특별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화재발생의 여지를 두지 않도록 하고, 소방력을 항시 대기하여 대응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나 소방대상물에 관계인과 근무자들이 소방 안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각 처소에서 본인이 점검자가 되어‘소방 점검’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전통시장과 대형 판매시설에는 어떤 취약점이 있을까? 첫째, 전통시장의 주요 화재취약 요인사항으로는 노후 건축물과 소규모 점포 등 밀집도가 높아 대형 화재에 우려가 있고, 개별 장기 노후화된 전기시설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화재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며, 공설·사설·임대차 등 복잡한 관리권한으로 안전관리 의식이 저하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둘째, 대형 판매시설에도 취약점으로 다량의 의류, 플라스틱류 상품 보관, 전시로 화재하중이 높고 에스컬레이터 등 열린 공간으로 상층부 연소확대 우려가 상존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소방에서는 현장 조사를 나갈 때 관계인에 대한 눈맞춤 안전 교육을 병행 할 것이다. 주요 내용은 소방대상물의 관계인들이 문어발식 전기코드를 사용을 하지않도록 하는 것과 화기 취급 장소엔 소화기를 항시 비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추석명절 모두가 안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소방대상물 관계인 그리고 나부터 우리 주위의 안전을 위한 소방시설 점검에 눈을 떠보면 어떨까?
경산소방서장정 훈 탁 코로나19를 극복하고자 국가와 전 국민이 상방설법(想方設法)으로 애를쓰는 가운데 어느덧 성큼 명절 추석(秋夕)이 다가왔다.‘사회적 거리두기’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지들에게‘주택용 소방시설’을 전달하며‘안전’을 선물해 보면 어떨까? 현재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라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늘면서‘주택 안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자녀의 비대면 원격수업과 직장인의 재택근무 확대 등으로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사람이 많고, 실내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 계시는 어르신들에게도‘주택 안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주택용 소방시설은‘단독경보형감지기’와‘소화기’이 두 가지를 말하는데 소방시설법인「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8조」에 따라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 연립·다세대 주택 등에 의무 설치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화재 초기에 매우 유용한 소방시설이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열이나 연기, 불꽃 등을 감지해 내장 음향 장치로 위험을 알려주는 장치다. 주택 내 배선 작업 없이 배터리의 힘으로 평균 8~10년 정도 사용이 가능하고 화재 발생 초기에 위험을 알려 신속한 대피가 가능하다. 또한 주변에서도 빠르게 인지할 수 있어 대피를 돕거나 대신 화재를 신고해줘 초기 대응에 매우 효과적이다. 소화기 역시 화재 초기 신속한 진압에 큰 도움을 준다. 차례 음식 등을 많이 요리하는 주방에서는 주방용 소화기를 배치할 것을 권유한다. 작년(20년도) 경산 관내에서 화재건수는 총 196건으로 이 중 주거화재가 31건(15.8%)을 차지하고 있어 경산 내 화재저감을 위해서라도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는 필수이다. 경산소방서에서는 화재 저감을 위하여 8월 말부터 경산 이마트 및 경산시외버스터미널에 랩핑 홍보 방법으로 주택용소방시설을 홍보중이다. 그리고 지난 8일부터 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이 소방시설 등을 평상시에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자체·전기·가스안전공사 등 유관기관과 합동으로 전통시장, 다중이용시설 소방특별조사를 추진 중이다. 소방특별조사의 세부 내용은 ▲노후 배선 교체와 멀티탭 등 전기코드 문어발식 사용 금지 안내 ▲관계인 소방안전의식 고취를 위한 현장 소방안전 교육 등 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두 번째 추석인 만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에는 가정마다 소방시설을 설치·점검하고 경계하므로 우리나라 대표 명절인 추석을 최고로 안전하게 보내길 바란다. 참고로 주택용 소방시설을 인터넷과 관내 대형마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김미숙 젊은 농부 최진원 씨는 경산시 고향이 아니다. 하지만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이십여년 가까이 아이들을 낳아 키웠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고향과 별반 다름없다. 그의 나이 올해 지천명에 들어섰다. 농사짓는 나이로 보아서는 젊은 축에 들어간다. 대부분 퇴직을 하고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농사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젊은 시절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고, 보증까지 잘못 서는 바람에 느닷없이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 왔다. 그는 군 제대를 하자마자 이불 도매상을 하게 됐다. 전국을 무대로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지갑에는 현금을 두둑하게 넣어 다니면서 물 쓰듯 살았다. 세상이 온통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 들었다가 원단을 염색하는 것을 보게 됐다. 염색하는 것까지 손을 대면 지금보다 몇배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장 염색사업에 손을 뻗쳤다. 하지만 자신이 염색한 원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단에 얼룩이 생겨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이불을 판매한 돈으로 원단을 다시 사들였지만 마음먹은 대로 염색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새로 작업을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부도를 맞았고 보증까지 서면서 하던 일을 정리하게 되었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는 보증을 서 줬던 친구와 한집에 살았다. 친구는 자신의 잘못으로 부도를 내고서도 백화점을 들락거렸지만, 그는 보증을 섰다는 이유로 매달 이백만 원씩 갚아야 했다. 월급을 받으면 한 푼도 써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남의 손에 넘겨줘야 하니 가슴이 쓰렸다. 옳은 사람살이 하나 없는데다가 게딱지처럼 붙러 있는 차압 딱지를 볼 때면 울화가 치밀었다. 키우던 네마리의 개도 손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봤을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도피 샌활로 원양 어선을 탔다. 돈에 시달리다 보니 숨어 있을 곳을 찾은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배를 타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택시 운전을 하게 됐다. 십여 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월급은 고스란히 보증 선 대가로 넘어 갔다. 아내가 번 돈으로 겨우 생활을 했으니 삶에 재미가 붙을 리가 없었다. 그는 모든 생활을 접고 평산에 들어왔다. 그에게 집주인이 포도와 복숭아 농사를 지어보라고 했다. 밤에는 택시 운전을 했고 낮에는 포두 순을 땄다. 콩만큼 자란 포도 알맹이도 속아냈다. 농사라곤 처음 해 보았지만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농사가 즐거웠다. 일하는 즐거움 뒤에 그동안 그끼지 못했던 행복함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첫해 육백 평 지은 농사가 대박을 이루었다. 팔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통장으로 입금됐다. 신이 난 건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듬 해 농사는 실패였다. 그해는 날씨가 고르지 않아 병 해충의 피해를 많이 봤다. 그때 그는 알았다. 농사는 어느 정도 하늘이 도와줘야 잘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이듬해에 이웃으로부터 노는 땅 구백 평을 무상으로 임대했다. 산비탈이어서 오르내리는 것만 해도 헉헉 숨이 찼다. 게다가 가시덤불로 우거진 밭이었다. 하늘이 보이는 비탈은 고개만 들어도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그는 아내와 어린 묘목을 심었다. 나무을 부지런히 가꾸고 보살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나무는 대견스럽게 우뚝 자랐다. 오 년째 접어들던 해였다. 국가에서는 FTA 협상으로 과수 폐원 지원 사업상 복숭아 나무을 뽑으면 보상을 해 준다고 했다. 밭 주인은 보상을 받기 위해 한창 수확할 복숭아 나무를 뽑아냈다. 그는 몇 년 동안 나무를 키운 보람도 없이 말 한마디 못하고 주인에게 빼앗겼다. 농사짓는 이십 년 가까이 그런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태 전에는 복사아밭 오천 평을 농사짓게 되었는데 다음해 주인은 말도 없이 계약을 파기했다. 토양 개량제와 유기질 비료를 듬뿍 뿌려 놓았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해버렸다. 복숭아 농사가 잘되니깐 없는 사람을 상대로 세를 더 받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소독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만오천 평 되는 과수원을 소독하려면 일주일 이상 걸렸고, 온도와 습도가 높은 날 약을 치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했다. 농사는 소독과의 전쟁이다. 얼마만큼 병해충을 잡느냐에 따라서 농사를 잘 짓는가에 대한 판가름이 난다. 몇 년 동안 그들 부부가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그보다 아내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늘 긍정적이고 밝은 미소로 남편의 일을 묵묵히 도와주는 그의 아내는 타고난 일벌레다. 같이 일하는 날이면 손이 얼마나 재빠른지 흉내도 내지 못한다. 남편과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투정을 커녕 오히려 일 욕심을 더 많이 낸다. 그 덕분에 이십년 가까이 땅 한평 없이 농사를 짓던 그들은 삼년 내리 땅을 사서 자신의 명의로 올렸다. 젊은 날 부도가 나고 보증을 섰던 것은 그의 인생이 걸림돌이었지만 긴 인생을 볼 때는 디딤돌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젊었을 때 닥쳐왔던 시련이 지금까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한다. 앞으로 그는 농사에 관한 정보나 농업에 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으면 달려 간다고 한다. 저 사람은 정말 농사꾼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포부라고 한다. 그는 이제 2억의 수입을 올리는 농사꾼이다. 농부라면 누구나 원하는 꿈이 아닐까. 그도 이제는 경산을 지키는 온전한 농부이다.
시인 박승표(70) 경북 경산시 자인면 아시아 서석문학 시 등단아시아 서석문학 이사영남지회 회원 자인면 번영회장 향토사학가 발자취초록물 떨어지는현성산 도들 양지오색구름 덮힌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나신 분성사원효(聖師元曉) 당신을 찾아걸음걸음 더하여탑곡 천년바위 마애불 앞에서설레임으로 만납니다구도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어젯밤 해골물 한 모금으로“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지요원망도 괴로움도 훌훌 털어버리고걷고 춤추었던무애(無㝵)의 한 자락에 녹인 채연원한 꽃이 되어해동석가로 이름하니감실(龕室) 같은온 세상을 위로하시더이다
송하 전명수 모처럼 봄의 훈기가 감도는 화사한 날 고향에 소재한 절집을 찾아 나섰다. 경산시 용성(龍城)의 주산인 용산을 바라본다. 어린 시절에 매일 쳐다보고 소풍도 자주 갔던 산이다.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 비오재(飛烏岾)를 넘어 청정 미나리 단지를 지나 반룡사로 향하였다. 구룡산 반룡사는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1길 60(용전리)에 위치해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무열왕 7년(661)에 경산 출신인 원효성사(元曉聖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한 호국도량으로 우리나라 삼대 반룡사 중 영남의 고찰로 알려져 있다. 구룡산을 아우르는 반룡산은 신라시대부터 지금의 경산인 압독국(押督國)이 동반관계를 이루면서 신라 제5대 파사왕, 제6대 지마왕, 제7대 일성왕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곳 반룡사가 소재한 왕재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642년과 653년에는 김유신과 김인문이 압량주의 군주와 총관으로 부임하면서, 또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압량에 주병을 모아 백제 대 정벌에 참여하였던 입성 통로로 이 고개를 왕재(王峴)라 하였다. 고려시대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운문사를 중창하고 문득 반룡산하에 이르러 빈산의 칡넝쿨을 걷어내고 허물어진 사지(寺址)를 일으켜 신흥사라 하자 전국에 수많은 석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한다. 이때 당대의 석학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선생도 반룡사에서 낙조의 아름다움을 엮은 산거(山居)라는 시를 통하여 산사의 고즈넉함을 애절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1637년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慶州府)에서 복현(復縣)되자 초대 현감인 임선백(任善伯, 1637-1641)은 이 모두가 선현의 공덕이라 하여 옛 조사와 성사의 은덕을 찾아 구룡산 아래 허물어진 사지를 일으키고 인조 14년(1641)에 계운, 명언으로 하여금 선당(禪堂)을 세우게 하여 이로써 60여 년에 걸쳐 27대의 현감에 이르도록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무려 5개의 산내 암자와 26동의 대 가람을 완성하니 이에 반룡이 승천한 격이라 이름하여 반룡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하여 웅장하였던 옛 가람은 소실되었으나 현재 사찰은 1997년 이후 복원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천불전, 산령각, 요사채, 종무소, 누각이 있으며 마당에는 최근에 세운 삼층석탑이 서있고 반룡사 석조유물(石造遺物)이 한자리에 정리되어 있다. 대웅전은 1999년에 건립하였는데 겹처마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측면 3칸의 전각이며 특이한 서체로 쓴 대웅전 현판은 현주지 혜해 스님의 스승인 일타 스님의 글씨라 한다. 법당에는 철불(鐵佛)로 개금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옥돌로 개금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데 모두 1999년에 조성하였다. 석가모니불 뒤편에는 영산회상탱이 결려있고 그 좌우에 칠성탱과 신중탱이 걸려있으며 우측 벽면에는 지장탱이 걸려있다. 외벽에는 원효성사의 행적을 담은 당나라 구법의 길인 토감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불전(千佛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익공식 양식인데 단청이 화려한 모습이다. 내부에는 철불로 개금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역시 철불로 조성, 개금한 관음보살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반룡사는 동해의 낙산사와 남해 보리암, 서해의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4대 관음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산령각 뒤편 높은 곳에 백의관음보살 입상이 큼직하게 세워져 있다. 산령각(山靈閣)은 앞면, 측면이 각 1칸의 작은 전각으로 내부에는 1989년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걸려있다. 오래전 대웅전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청도 대운암에 봉안되어 있어 회수코자 노력 중이라 한다. 그리고 보물 제11-1호로 지정된 청하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사인 비구의 작품으로 이곳 반룡사 동종이라 종신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절집의 사연이다. 언제인가는 알 수 없으나 절집 살림이 어려워 주지승이 이 동종을 팔았는데 지금은 보경사에 소장되어 있고 서운암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급 동종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으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대웅전 앞마당 남쪽에는 반룡사지 석조유물(盤龍寺址 石造遺物)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데 대략 70여 점으로 바라보인다. 이 석조부재(石造部材)는 인조 14년(1637)에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복현되자 초대 현감 임선백이 이곳에 선당을 짓게 하였으며 그 후 60여 년 만에 대가람을 조성하였는데 이때 조성된 석탑과 석등, 당간지주, 부도, 비석 등의 부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석조부재는 반룡사의 번창기와 더불어 배불정책의 폐해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화마로 모두 부서지고 그 일부가 석축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2008년 천불전을 해체 복원할 때 이를 수습하여 한자리에 정돈해 놓은 것이다. 본 석조물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조각과 조형으로 석면에 새겨진 연화문양과 금석문은 조선중기의 불교미술과 조형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설명해 놓았다. 이 가운데 화문면석 부재 10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5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산 반룡사 화문면석 부재(慶山 盤龍寺 花紋面石 部材)는 주불전의 기단 면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꽃문양이 새겨진 면석 부재로 17세기 영남지역 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석재로 주목된다. 그 사례가 흔하지 않은 유물로서 통도사 대웅전, 범어사 대웅전 등 사격(寺格)이 높은 조선후기 사찰의 주불전 건축에 적용된 사례가 있을 뿐이다. 이 화문면석 부재는 반룡사의 사격이 반영된 중요한 유물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영남지역에서 전개된 화문부조 가구식 기단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화문면석 부재를 살펴보고 대웅전 옆 승방 앞을 지나는데 고려중기의 석학인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선생이 이곳에 와서 남긴 산거(山居)라는 시가 걸려있다. 春去化猶在(춘거화유재) 봄은 가도 꽃은 아름답게 피어 있고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맑은 하늘 깊은 골에 그늘은 저절로 지네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두견새 맑은 노래 대낮에도 지저귀니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깊은 골에 간직한 마음을 비로소 느끼게 하네. 반룡사는 설총(薛聰) 선생이 성장한 곳이라 구전되어오고 있는데 여러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는 등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관음 기도처로 널리 알려진 영험 도량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 높은 곳에는 백의관음 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설총이 우리 고유의 이두(吏讀)를 만들기 전까지 아직도 신라는 어려운 중국의 문자를 쓰고 있었으며 이를 타파할 새로운 문자의 창안이 시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효 스님과 요석공주의 아들로 잘 알려진 설총이 이두를 고안해내어 신라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까지 깊이 연구하게 돼 국가의 기틀을 잡아 나가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 우리 선인들의 문자 생활을 비롯한 우리 문화의 발전을 한층 앞당겼다. 이는 원효성사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전 저자거리를 돌며“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즉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세우리라. 고 노래했던 그 의미는 아들을 낳아 나라의 기둥을 삼고자 염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설총이 화왕계를 지어 스스로 백두옹을 자처하고 임금에게 간하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 원효성사의 뜻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동량인 설총을 키워낸 반룡사도 원효 스님과 깊은 인연 때문에 설총의 유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정신적 귀의처인 사찰이 국가의 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신라의 임금과 왕후가 인근 왕재(王峴)를 넘어 이곳에서 설총 모자와 함께 불공을 드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반룡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반룡사는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억불정책과 화재로 인해 쇠락(衰落)을 거듭해 왔다. 일제 격변기를 거치며 거의 멸실되다시피 한 반룡사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제3의 중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하촌인 용전마을까지 모두 반룡사의 사역에 속해있었던 이곳 절집은 고작 480여 평 정도의 공간만 남아있으나 가람을 하나둘 중건하고 구룡산 자락에 작은 길도 내어 평양, 고령, 경산에 소재한‘해동 3 반룡사’라는 명성을 이어가는 토대를 닦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반룡사는 고향에 소재한 절집이며 친구가 이곳 반룡사 신도회장을 맡고 있어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다녀갔지만 반룡사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상세한 문화재에 대하여 살펴보지 못했는데 오늘 구석구석 살펴보니 우리 역사에 걸출한 인물인 원효성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조이며 남편을 그리워하였던 요석공주의 애절한 마음도 읽어 보았다. 반룡사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낙조(落照)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하는데 언제 청명한 날 다시 올라와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해 보고 싶어진다. 그동안 이곳 절집 살림살이가 어려워 보였는데 군데군데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가꾸고 다듬은 손길의 흔적이 엿보인다. 수많은 불자와 문화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행복한 웃음을 거두어가길 빌어보며 발길을 돌린다.(2021. 2. 28. 일) * 참고자료: 영남읍지 자인총쇄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21세기는 지식정보사회 또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지식이 새로운 자원으로 인식되고, 문화가 질 높은 삶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는 사회이다. 일찍이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 (Peter Drucker,1909~2005)는“지식노동자(intellectual worker)”라는 표현을 썼다. 기존의 생산요소의 개념인 자연, 자본, 노동 그리고 기술을 넘어 지식이 생산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시대를 말한다. 지식이 중요한 생산요소라면 문화는 지식이 만들어낸 피조물로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21세기는 지식정보와 문화적인 감각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문화의 근원은 지식에 예술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며, 지식이 세련되게 다듬어져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이 바로 문화라고 볼 수도 한다. 그래서 문화란 곧 인간정신의 산유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가치의 본질은 정신적인 부분에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사유의 결과를 수준 높은 예술이나 문화의 형태로 표현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의 의식체계와 삶의 형태를 표현하고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랜 세월을 통해서 반만년 역사를 지닌 문화강국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아 왔지만, 근년에 이르러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주도하는 지식계와 문화예술계가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질 높은 문화상품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이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높아가면서 세계인들의 문화수요도 과거에 비해 상당 수준으로 높아지고 늘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K 컬쳐( Korean Culture :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흐름을 창출하고,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 우리국민들에게 자존감을 주며, 나아가 높은 문화적 향수능력을 지닌 한국인들의 행복감을 높이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 K 컬쳐로 표현되는 한국 문화는 한국적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 모든 예술·문화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대중예술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고전음악과 한국의 판소리, 사물놀이, 그리고 예술스포츠로 불리는 피켜 스케이트와 영화, 비디오 아트 등 모든 공연예술, 무대예술, 디지털 예술을 포함한다. 이 모든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 한류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대중가요계의 BTS(방탄소년단)의 노래나 스크린의 예술인 영화, 성악, 뮤지컬, 지휘 등은 물론 K 컬쳐로 표현되는 다양한 분야가 세계예술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은 예술스포츠계인 피겨스케이트와 그 밖의 스포츠 문화에도 확대 되고 있다. 문화는 삶의 모습에서 자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삶의 질이 개선되었다거나 좋아졌다고 얘기할 때, 그 의미는 문화적인 수준이 높아졌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문화는 삶의 표현이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만들어내는 산물이기에 삶의 질 및 인간의 행복과도 직결되는 요소이다. 문화는 그 어떤 곳에서나 창의력과 예술 감각을 근거로 하여 사회전반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眞, 善, 美의 가치를 발현하는 수단이자 방편이 되기도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환경이 더욱 보편화 되고, 문화의 국제적 중요성도 더욱 높아졌다. 지구촌의 삶이 고질화 되어 갈수록 문화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이제 문화는 일상적인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기업경쟁력, 나아가 국가경쟁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도시환경의 재구성, 산업제품의 디자인, 의상 및 생활미술, 건축물의 디자인과, 마케팅을 포함한 쇼핑센터의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문화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드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문화는 상품생산과 소비 등의 경제의 전 분야와 기업의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 필수조건으로 인식되어 온지 오래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각국들은 문화정책의 고도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힘써 왔다. 우리나라도 한때 정부차원에서 문화예술정책을 주요 정치적 과제로 보고, 국가발전을 위한 중심정책으로 제시한 적도 있었다. 박근혜정부가 내걸었던 창조경제란 결국 문화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제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경제적 우위의 확보가 나라발전의 요체가 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경쟁력의 확보는 절대적인 요소이고,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해 나가는 것이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국가경영에는 물론 기업 및 산업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며, 그 근원은 문화예술적인 감각과 창의력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들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문적인 분야를 포함해서 모든 산업적인 분야에서도“새로운 아이디어( new idea)”개발을 핵심적인 과제로 인식해 왔다. 결국 국가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경제의 핵심사업의 하나는 문화콘텐츠의 개발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정책의 핵심은 곧 문화 콘텐츠 즉, 문화적 내용을 가진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의 개발인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K 컬쳐라는 말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각 분야에서 한국의 문화 컨텐츠들이 세계적인 주묵을 받고 있다. 대중문화를 포함하여 영화, 비데오, 스포츠, 의약바이오, 생명공학 등 다양한 분야가 서로 관련성을 맺으면서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K 컬쳐는 지구촌을 휩쓰는 지구촌 문화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이제 문화는 단순한 즐김의 수준을 넘어서는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경쟁력 있는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에는 반드시 문화의 개념이 내포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재 문화예술계에 새롭게 등장한 우리나라의 문화적 창의성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고, 그것이 곧 새로운 21세기 비젼 코리아의 미래를 여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지금 지식과 정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분야와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소위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것이 향후의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한국어 곡“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으로 사상처음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고, 계속해서 나오는 신작들이 매번 빌보드 차트 1위의 히트곡이 되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올해 7월 9일에 발표한 뮤직비디오 신곡“Permission to Dance”는 지구촌 15억 명의 청각장애인을 위해 안무에 수어를 곁들어 세계인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클래직 성악의 소프라노 조수미를 비롯한 정명훈의 지휘, 김연아의 예술 스포츠 피겨와 스포츠 분야의 축구선수 손흥민, 골프의 박인비와 고진영 등의 코리언 스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가는 것도 거대한 한류 즉, K 컬쳐의 파워를 예상하는 한국의 저력이다. 일찍이 한국은 88올림픽과 2002월드컵 축구 등을 통하여 레드 컬쳐의 강한 힘을 경험한 바 있다. 문화는 한 시대와 사회를 이끄는 강력한 에너지이며,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국가적 자산이다. K 컬쳐가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예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며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자긍심을 느끼며, 우수한 문화를 생활속에서 넉넉하게 향유할 수 있는 한국인의 삶의 질과 행복감 끊임없이 증가할 것이다. 문화적 감각이 바탕이 되는 생명과학과 반도체를 비롯한 IT 또는 AI분야와 쇼프트웨어를 포함한 지식산업분야에서도 한국의 위상은 이미 세계의 톱 클레스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의료기술 역시 K컬쳐의 산유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많은 외국의 환자들이 한국병원에서 치료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외국의 의료전문가들이 한국에서의 의료연수를 원하는 한국은 오늘날 의료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화와 지식수준이 세계 선두권에 있는 한국인들의 뛰어난 지적, 문화적 능력이 21세기 새로운 국제환경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하여 물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화적 욕구를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여유로운 삶을 말하고 있다. 행복한 삶이란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좋은 음악을 듣고, 멋진 영화를 보며,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뮤지컬을 즐기는 등 문화상품의 향수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K컬쳐를 즐기는 한국인들의 행복감은 문화의 향수 량 만큼 커질 것이다. 일찍이 문화를 애호하는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의 무덤과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문화는 삶의 향기이며 생명의 빛이다. 대중음악 BTS의 노래, 영화 <기생충>, <미나리> 그리고 무대예술과 디지털예술로 이어지는 K컬쳐는 한국인의 행복감을 키우는 민족적 자긍심이며, 효율성 높은 행복경제학이다.
경산소방서 119구조구급센터소방장 우희석 우리는 지구 온난화 등으로 환경변화로 인해 앞으로 어떤 기록적인 재해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보내야 하므로 체감 더위가 높아지면서 온열질환 발생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폭염은 일반인도 견디기 힘들지만 고온에 취약한 고령자, 어린이, 임산부 등은 체온조절 기능이 약해지므로 더욱 주의해야 한다. 마스크 착용은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무더운 실외에서는 심박수, 호흡수, 체감온도를 상승시켜 신체에 부담이 된다. 따라서 실외에선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게 좋다.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면 충분한 거리두기가 가능한 장소를 찾아 마스크를 벗고 휴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열사병이나 일사병 증상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먼저 119에 신고하고 그늘진 곳으로 옮긴 후 옷을 느슨하게 해 편안한 상태를 유지해준다. 의식이 있다면 물이나 스포츠 음료를 제공하고 의식이 없다면 그늘진 곳에서 119를 기다려야 한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폭염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수칙 준수와 현명한 대처로 우리 모두 건강하게 여름을 무사히 지낼 수 있길 바란다. 국가안전시스템이 아무리 잘 갖춰진다 하더라도 결국 안전의 주체는 시민 개개인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면 인ㆍ물적 피해를 줄일 뿐 아니라 안전문화 정착과 사회 안전망 구축에 크게 이바지할 거라고 믿는다.
경산경찰서 청문감사관실이 승 환 경장 “우리 아이와 우리 가족을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잘 견뎌 낼게요. 경찰관님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엔 밝은 모습으로 뵙도록 노력할게요.” 얼마 전 강제추행 피해 학생의 어머니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피해 상황은 끝났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아직도 어두운 터널 속을 걷듯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견뎌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피해자전담경찰관은 잘 알고 있다. 아침까지 인사를 하고 나간 내 아이가 갑자기 범죄피해자가 되었다면 어떤 심정일까? 대부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사건에 대한 거부감으로 피해 지원 관련 개입도 반기지 않으며, 급성 스트레스장애(ASD) 혹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보이게 된다. 특히, 강제추행의 경우 눈으로 관찰 가능한 외상보다 피해자와 가족이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초기 정신과적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 사건 피해자와 그 가족 역시 엄청난 정신적 충격으로 삶의 의욕조차 보이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울음으로 버티고 있어 신속하게 대학병원으로 연계하여 전문적 치료를 받도록 의료지원(200만원)과 일자리조차 잃은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지자체 일자리 지원 연계와 상담 전문기관의 심리상담(12회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의 생계비(300만원),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학자금(90만원) 지원 등 심리적·경제적지원, 재판 과정에서 도움을 줄 국선변호인과 법정 동행 등 법률 지원까지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피해자 가족은 사건 이전의 생활로 차츰 회복하고 있다. 범죄 피해 회복의 궁극적인 목표는‘범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해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여러 분야 즉 경제적, 심리적, 법률적 지원 등 다각적 지원과 함께 주변의 작은 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경찰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심리적·경제적·법률적 지원, 전문가의 진단·평가 후 사건기록에 첨부하여 피해자의 입장(Voice)을 형사절차에 반영하는『범죄피해평가제도』, 필요시 112시스템 신변보호 등록, 맞춤형 순찰(생활 패턴 고려), 주거지 CCTV 설치, 스마트워치 지급, 가해자 경고를 하는 신변보호 등 피해자를 위한 다양한 지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피해자의 회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피해자 홀로 회복하기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만큼 주변에 범죄피해로 힘들어하는 친구, 동료가 있다면 피해자전담경찰관을 찾도록 안내해 주길 바라며, 끝으로 피해자 곁엔 항상 피해자전담경찰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김이대ㆍ자유문예등단ㆍ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뜰작가협회 회원ㆍ동해 남부시 동인 활동신록신록은 잠이다꿈꾸는 잠이다뭉게뭉게 피어오르는먼 나라의 동화다그리운 연인들이 돌아 왔다가슴이 설레고상처가 곱게 아문다신록은 마음에 써 놓은초록 시집순수한 말이 영혼에 닿고햇빛 드는 정원에 숲이 자란다천지에 가득한 초록의 함성산과 들이 일어서서손짓하며 부른다몸에도 마음에도 초록이 물들고먼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송하 전명수교육행정질 공무원 정년퇴직전)계명문화대학교 출강전)대구.경북 범죄예방위원전)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대구문화제짐이회회원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저서:수필집[실개천에 부는 바람]외 다수녹조근정훈장 수훈 대구에서 경산시가지를 거쳐 고향 땅 용성으로 가는 길목인 자인면 소재지 들머리에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고등학생 때와 젊은 시절 자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산책을 즐겼으며 수 없이 드나들었던 숲이라 친숙하기도 하다. 오늘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옛날 생각을 하면서 계정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 장군 묘소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길옆에는 경상도 관찰사, 자인 현감을 비롯한 관리들의 송덕비, 공적비, 불망비 등 수많은 비석이 도열해있다. 아마도 이 지역의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비석을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경산 자인계정숲(慶山 慈仁桂亭숲)은 경북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68번지 외 12필지, 43,237㎡의 면적에 이팝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말채나무, 느티나무, 굴참나무, 참느릅나무 등 약 500여 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는 천연의 숲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산 자인계정숲은 구릉지에 남아있는 천연 숲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 숲인데 나무의 나이는 10∼250년으로 추정된다. 이 숲은 우리나라 온대 낙엽활엽수림의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평지림으로서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나무가 모여서 혼효림(混淆林)을 만들고 있어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경산 자인계정숲은 과거 경산시 일대에 어떤 나무들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자연 유적지이며, 우리 조상들의 자연사랑과 자연을 보호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숲이다. 그래서 천연적인 숲 자체의 가치는 물론 조상들의 정신과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가꾸고 다듬어 나가기 위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계정 숲은 이곳 사람들이 개장지 숲이라 불러왔고 계림(桂林)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650년경의 문헌에 계정서록(桂亭西麓)이란 기록이 있고, 또 금석문에도 계정록으로 기록되어있어 이것을 바탕으로 계정 숲이란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민족 항일기에는 자인면사무소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서림(西林)으로 개칭하였는데 학창 시절에 흔히 서림 숲이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군함의 갑판용으로 수많은 노거수가 벌채되었다. 그런데도 지금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일대에는 속칭‘말 무덤’이라 부르는 고분이 산재해 있다. 이 숲의 어귀에는 당나무가 서 있으며 오월 단오 전후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금줄이 쳐진다. 숲 전체가 제사 마당이 되는 것이다. 이 숲은 한 장군을 모시는 성지이며 자인 단오굿의 굿판으로서 향토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그래서 이 숲은 생물학적, 역사적, 민속적으로 높은 가치를 담고 있는 곳이다. 누이와 함께 여원무(女員舞)를 추면서 왜구를 물리친 한 장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 자인면 교촌리 북쪽에 자리 잡은 도천산에 왜구가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히자 한 장군이 누이와 함께 화려한 꽃으로 꾸민 관을 쓰고 도천산 아래 버들 못으로 왜구를 유인한 후 칡 그물로 가두어 검흔석(劍痕石)에 올려놓고 참수시켰다는 한 장군의 묘이다. 1968년 8월 자인중·고등학교 본관 신축을 위해 공사 중 석실묘가 발견되어 발굴조사를 한 결과 두개골이 포함된 유물과 은으로 제작된 갑옷과 투구, 녹슨 철제 창 등 수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묘를 한 장군의 실묘(失墓)라 확정하고 출토된 부장품은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옮겼으며 유해는 1969. 5. 10 이곳에 옮겨 한 장군 묘를 조성하여 매년 단오절에 한 장군 대제를 올리고 있으며 지금은 그 부장품이 2011. 12. 29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 소장하고 있다. 어느 왕릉에 버금갈 정도의 봉분과 봉분의 호석에는 십이지상을 새겨놓았으며 상석과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고 문·무인석이 호위하고 있다. 앞에는‘증 판서한장군묘’라 새긴 비석을 세워 두었다. 계정 숲에 서 있는 진충묘(盡忠廟)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된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의 주인공인 한 장군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다. 한 장군이 죽은 뒤에 이 지방 사람들이 세운 것이며 정충언 현감이 중수한 바 있다. 애초에 한 장군 신위를 모신 사당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그들이 신사를 세웠다. 광복 후 호장굿과 여원무를 중심으로 한‘한장군놀이’가 복원되면서 북사리에 있던 한당(韓堂)을 이곳으로 이건(移建)하여 현재의 진충묘가 되었다. 한 장군은 지역민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서 그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매년 단오절에 제를 올린다. 진충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사당이다. 진충묘 옆에 시중당이 서 있다. 시중당(使衆堂)은 인조 15년(1637)에 자인현이 복현되어 현감 임선백(任善佰)에 의해 자인현의 정청(政廳)으로 자인면 신관리에 세워졌다가 관아가 옮겨짐에 따라 원당리와 북사리로 이건되었다. 지금의 시중당은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하양, 자인, 경산이 경산군으로 통합된 후 자인중·고등학교 안으로 옮겨와 교실로 사용하였다. 자인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도서실, 과학실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학생 간부회의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요산정(樂山亭)이라 하였는데 일명 무금헌(撫琴軒)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뜻있는 자인 지방민들이 건물의 훼손을 안타깝게 여겨 1980년 한 장군 사당 옆으로 이건하였다. 현재 시중당 현판은 목각한 것인데 영조 39년(1762) 정충언(鄭忠彦) 현감이 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넓은 대청과 커다란 방이 곁들어져 굵직굵직한 기둥과 더불어 간결하고 온건한 풍취를 자아낸다. 시중당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현대식 2층 건물의 한장군놀이 전수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자인계정숲은 경산자인단오제의 주 무대이다. 경산자인단오제는 경산시 자인면 일원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단오 행사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신라말, 고려초기에 왜적이 침입하여 도천산에 웅거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이 꾀를 내어 여자로 변장하고 누이동생과 함께 꽃으로 화려하게 꾸민 관을 쓰고 춤을 추어 버들 못으로 유인하여 의병들과 함께 왜적들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한 장군이 죽은 뒤에 이 고을 주민들이 한 장군의 사당을 짓고 해마다 단옷날에 제사를 지내고 성대하게 놀이를 즐겼다고 전해온다. 경산자인단오제는 모두 다섯 가지 연행(演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군을 위해 진충묘에서 지내는 제사인 한 장군 대제, 단옷날 아침 마을의 향리를 비롯한 일행이 한 장군 대제를 지내러 가는 호장장군 행렬, 한 장군과 누이동생이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재현한 춤인 여원무, 한 장군 대제를 지낸 다음에 여흥으로 벌이는 팔광대 춤, 주민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단오 축제 마지막 날 진충묘에서 무당들이 벌이는 단오굿 등으로 짜여있다. 한 장군 대제는 유교의 제례 형식으로 진행되며 한 장군 대제를 올리기 위하여 진충묘로 향하는 호장장군 행렬이 이색적이다. 넓은 잔디광장에서 펼쳐지는 여원무는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무형유산이다. 여원무는 한 장군이 여장(女裝)을 하고 누이와 전신을 가린 화관을 쓰고 춤을 추며 잡희(雜희)로 꾸민 여고생 300여 명이 등장한다. 한 장군 남매가 쓰는 화관의 높이가 3m나 되고 종이로 만든 조화가 무려 500여 송이나 달리며 춤사위도 매우 독특해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이다. 축제가 종료되면 관객들은 이 꽃송이를 서로 먼저 가져가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고 한다. 여원무 화관의 꽃을 집에다 두면 모든 액운이 사라지고 가정이 편안해지며 바라는 바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의 광대놀이는 오광대가 보통인데 이곳에는 팔광대가 무대에 오르며 줄타기는 공중에 줄을 매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줄을 깔아놓고 공중에서 줄타기하는 몸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며 흥미진진하게 광대놀이가 펼쳐진다. 한 장군의 남매를 기리며 올리는 대제나 여원무와 팔광대 놀이 그리고 단오굿 등은 오랜 세월 동안 자인지역 주민들이 대대로 이어받아 전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을 전후하여 크게 축제를 열고 있다. 보인동 농악대가 한바탕 풍물놀이를 하고 계정들소리 공연도 빠질 수 없는 프로그램이며 지역 출신 가수들의 열창은 더욱 흥을 돋운다. 그네뛰기, 씨름대회, 줄 당기기는 필수적인 행사이다. 고향길을 오고 가면서 자주 바라만 보며 지나가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자인 계정숲 속으로 들어가 아련한 옛날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한 장군 오누이 이야기와 자인단오제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확실하게 익히고 돌아선다. 경산자인단오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일과는 별도로 여원무와 자인팔광대 놀이는 좀 더 매끄럽게 다듬어 각각의 국가나 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했으면 좋겠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 눈부시게 바라보았던 노거수 이팝나무에 하얀 꽃이 지금도 그대로 피어 있다.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문화 예술은 인간의 행복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까? 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비교적 가까운 시대에도 문화와 경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관계로 이해되었다. 즉, 문화와 경제는 상극의 관계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문화는 인간정서의 산물인 반면, 경제는 인간의 합리성과 논리에 비탕을 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경제학의 창시자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문화의 향수능력이 경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그는 문화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했다. 그는 금전적 평가기준으로 인간이나 산업을 평가하는 것을 비판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경제학은 인간의 비즈니스 행위는 물론, 생산과 생활 등이 모두 돈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금전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산업이나 기업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같은 평가기준이야 말로 인간의 생명, 자연미, 역사적인 문화재의 가치와 인간의 품위를 빼앗아가는 최대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 같은 러스킨의 주장은 당시의 상식에 대한 도전이며 가치관을 뒤엎는 충격이었다. 그는 금전을 최고로 생각하는 경제학에서, 인간의“생명과 삶”을 최고로 생각하는 경제학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콘힐 매거진>이라는 잡지에 썼는데, 독자들의 저항이 물밀 듯 하여 게재를 중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늘날은 생명과 생활이 너무도 당연하게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경제=금전적가치’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으므로, 문화나 예술 가치를 경제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러스킨의 생각은‘돈벌이’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러스킨은 상업적인 비즈니스나 이윤추구 자체를 비판했다기보다는 문화 예술이나 인간성을 존중하는 비즈니스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러스킨은 부(富)의 원천을 재화의 내재적인 성질로 보았고, 그것을 그는 고유가치(intrinsic value)라고 했는데 이는 그 재화가 인간의 생활과 생명에 얼마만큼의 공헌을 하느냐를 두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이 교환가치나 희소성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이 고유가치론에 의하면 문화 예술성이 없고, 인간의 생명과 생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재화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고유 가치와 향수능력이 동반될 때 부(富)는 기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한필의 말이라도 탈 수 없거나, 한 폭의 그림이라도 감상할 수가 없다면 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생이 없으면 부가 존재하지 않는다(There is no wealth but life.)”라는 표현으로 부의 생명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화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정신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산물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 예술품을 보고 인간은 경탄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오래전부터 얘기해왔다. 왜 문화의 세기인가? 문화적인 측면이 삶의 질을 결정하고 인간의 행복수준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인 향수능력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며, 또한 글로 발 경쟁력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발전과 경제성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안전과 행복이라고 볼 때, 그것의 실현은 문화적인 이해와 발전에 의하여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문화 예술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적 인지능력과 예술적인 향수능력을 모두 포함하는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문학단체, 연극 오락 단체, 교향악단, 오페라, 무용 그리고 미술관 등은 모두 광범위한 문화적 목적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기구와 조직을 통해서 인간적 소양을 향상 시켜간다.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眞·善·美의 가치와 종교가 추구하는 聖스러움의 가치도 문화적인 소양의 함양을 통해서 성숙한다. 문화가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던 원시적인 삶에서는 인간가치 또한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자하는 행복경제학은 경제적인 여건들이 인간의 행복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경제성장, 실업,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경제발전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자 한다. 문화경제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측정가능하다고 보는 행복경제학은 그 전제를 과거 신고전학파경제학의 분석틀인 서수적 효용이론(theory of ordinal utility)으로 간접적인 행복측정을 시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론체계)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행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행동경제학이다. 경제학은 사실상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부를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이윤을 얻기 위해서, 고용을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어떤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지 연구하고 그 가치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 과거의 과학적 실증주의와 논리적 심미주의에 빠진 현대경제학자들의 논리적 조작주의를 탈피하고 인간의 실체적인 삶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경제의 문제를 보려는 학문이 바로 행복경제학이다.‘행복의 연구가 21세기 경제학의 지평을 바꾼다’라는 케치 플레이즈를 내걸고 있는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을 인간행동의 일환으로 보고 행복을 얻기 위한 인간행동을 분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인간이 행복을 의식하는 데는 문화적인 요소가 상당히 작용한다. 인간은 의식주를 해결하게 되면 여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여가를 보다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고자 한다. 흔히들 행복은 돈으로 사지도 측정하지도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행복은 풍요하고 바람직한 경제생활과 문화적 욕구의 충족을 통해서 실현가능하다. 현대인들의 행복은 결코 경제와 문화에서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은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에 의해서 실현된다. 일찍이 사회학자 김경동 교수(“한국경제성장의 사회적이해”,KDI-제도경제학회 세미나 논문, 2010)는 행복한 개인을 위한 조건으로 목적가치를‘자아의 실현’에 두고 이를 위한 하위가치로 자아의 완상(자아실현), 수단적 가치로 삶의 질적 향상과 삶의 기회확대를 들었다. 인간은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을 딛고 사는 존재하고 했다. 머리는 이상과 이성의 대명사이고, 발은 현실과 실존을 상징한다. 행복은 풍요한 문화예술과 경제적인 성과가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가치이다. 세계의 유명한 도시들이 다양한 전략으로 문화예술에 투자해서 지역민들에게 질 높은 삶을 제공한 예는 적지 않다. 프랑스 파리는 퐁피두 대통령(1911~1974)과 미테랑 대통령(1916~1996) 시기에 문화 대프로젝트를 통하여 바스티유감옥 부지에 오페라극장을 세워 음악애호가들을 들였고, 루블 박물과 앞에 세계적인 건축가 아 엠 페이(I. M. Pei)가 세운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세계적인 문화관광지를 만들었다. 영국은 1981년 템즈 강 주변에 공해문제로 방치되었던 발전소를 외형은 그대로 둔 채로 내부를 현대미술관으로 바꾸어 한해 4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탈바꿈한 스페인의 빌바오 시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립하여 구겐하임 효과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수도인 빌바오(Bilbao) 시는 인구 35만의 소도시였다. 1997년 철광 이외에는 먹거리가 없던 빌바오 시는 미국 구겐하임 미술재단에 부탁하여 1억 달러를 주고 미술관을 짓게 했다. 건축비와 전시미술품을 총합해도 1억 3천 유로 남짓한 돈을 들여 개관 첫해 관람인구가 136만명, 처음 2년간 관람객이 뿌린 돈이 4억 3,300만 유로였는데 이중 2,340만 유로가 미술관에 쓴 돈이다. 국가와 개인의 삶이 윤택해질수록 문화와 예술은 부와 행복의 결정에 중요한 팩트가 된다. 행복을 위한 문화기술에는 문화의 비물질적이고 무형적측면에서의 소프트웨어적인 기술과 문화의 물질적이고 유형적 하드웨어적 기술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가 행복실현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본다. 경제행복도지수를 소비, 소득, 분배, 그리고 경제안정 등의 요소로 평가 한다면 대체로 경제행복도 지수는 경제성장률지수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지수비교 결과는 경제와 행복이 비례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요즘 새롭게 학문적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는 행복경제학은 문화산업과 환경을 고려한 지속성장을 모색하고 있어 향후 인문학, 사회과학, 공학, 심리학 등과 통섭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안숙자 지금부터 15년 전 화장품 대리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키가 크고 생활력이 강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판매사원으로 들어왔다. 처음 해보는 일이기 때문인지 그녀의판매 실적은 늘 저조하였으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하였다. 그런 부지런함이 가상하여 물심 양면으로 지원해주면서 그녀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더니 나를 무척 따랐고 어느덧 우린 친한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녀 가족으로는 세 살 연하인 남편과 초등 5학년인 아들과 3학년인 딸이 있었다. 남편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라고 했다. 때문에 그녀가 가족을 부양해야할 처지였다. 그녀의 집 형편은 세간이라고는 겨우 밥 끓이는 취사도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단칸 월세에 살고 있었다. 생활이 그녀를 억척으로 만들었을까? 그녀는 지독하다고 할 만큼 성격이 단호했고 자기 방어심이 철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대단히 엄격하여 기가 죽은 듯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아이들 모습은 가엾게 보일만큼 그늘져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새벽으로 신문 배달을 하라고 했다.‘저 어린 것이 어떻게 새벽마다 신문 배달을?’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서 "아직은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하고 말해보았지만 화를 버럭 내면서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잔인하게 보일만큼 비정하게 굴었다. 어느 날 남편이 내게 하소연을 했다. 자기가 집에 있을 때는 일부러 궁색하게 보이려고 쌀을 한 되씩만 사고, 연탄도 한 장씩 사서 쓴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끼니때면 남편 몫은 남겨 놓지 않고 다 먹어버리고 연탄불에 데워 놓은 세숫물조차도 남편이 쓸 물을 남겨 두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은 남편 몰래 이사를가버려서 집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겨우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남편에게 소금을 뿌리며 쫓아내더라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지 그녀는 친구도 없는 것 같았으며 내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내가 화장품 대리점을 정리하고 광고기획사를 할 때였다. 거래처가 어느 정도 확보 되어 있을 때였으므로 그 친구를 도와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자본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꽃집을 해보라고 권했다. 내 사무실 근처에 가게를 얻어 꽃집을 하게 되면서 거래처를 소개시켜주고 내 차로 배달도 도와주며 적극 협조해주었다. 아무 상식 없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열심히 하였고 겨우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되는 듯하여 다행스럽게 생각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가 아는 거래처 사람과 사귀고 있다고 말했다. 그 무렵부터 그녀에게는 너무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표독하고 고집스럽기 짝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말투나 겉모습이 우아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장하는 것부터 달라지더니 표정이며 헤어스타일 또한 우아하게 바뀌면서 말하는 억양도 나긋나긋하게 품위가 철철 넘치고 있었으니 갑작스런 변화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사랑을하면 예뻐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말소리조차 바뀌는 그녀가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무엇이 사람을 그토록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는데 뒤늦게야 그녀를 그토록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되었다. 친구가 사귄다는 그 남자는 가족이라고는 노모 한 분과 아들 하나 뿐인 독신이었으며 어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그녀에게 쏟는 정성이 지극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꽃집을 하는 그녀의 문 앞에 곱게 포장한 장미 한 송이를 놓고 갔으며 가게에서 심심할 때 들으라고 오디오를 사주고 온갖 시디를 사다 나르는가 하면 읽히고 싶은 책을쉴 사이 없이 사주고 시원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를 사들이고 우유며 빵이며 과일을떨어지지 않게 했다. 장거리 출장을 가면 휴게소에서 별별 군것질을 잊지 않고 사왔으며, 손님과 식사를 할 때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사들고 와 그녀가 먹는 것을 즐겁게 바라본다. 옷이며 머플러 구두 등을 사주며 그녀를 가꾸는 것에도 온갖 정성을 쏟았다. 휴일이면어김없이 그녀를 데리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여행을 갔으며 출퇴근 때면 늘 그녀 집 앞에 또는 가게 앞에 먼저 와서 기다렸다가 태워다 주었다. 아마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그토록 지극한 사랑을 처음 받아보았을 것이며 처음 누려보는 호강이며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나이가 많은 남편 후처로 들어와서 놀고 있는 남편 대신젊을 때부터 시장에서 야채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늘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 대신딸로는 맏이인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시장에 내다 팔 나물을다듬고 삶는 일까지 해야 했다. 성질 사나운 그녀의 할머니는 일을 잘 못한다고 어린 그녀를 늘혹독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녀는 살림 사는 것이 너무도 지긋지긋하여 앞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아들이었던 지금의 남편이 그녀를 좋아하자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집을 도망쳐 나오듯이 얼른 결혼해버렸다고 한다. 남편이 직장도 없이 놀고 있었으므로 결혼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수차례이사를 다니면서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억척스럽게 생계를 꾸려왔지만 결국 마약중독자인 남편과는 마음마저 단절 된 채로 고달픈 역경의 나날이었던 그녀의 결혼생활은 마치 여우 굴을피하니 호랑이 굴이 닥쳐온 격이었다. 그렇게 암울한 생활로 지쳐있을 때 공주처럼 떠 받들며 사랑해주는 이의 출현은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의 출현이요 자신은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 아니었겠는가? 그녀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사랑이 불륜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그렇게라도 가여운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음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뭔가 음식을 잘 못 먹은 듯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체한 것 같으니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버티는 그녀를 그 남자가 겨우 설득하여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녀는 위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 때가 15년 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난그 친구를 놀려주려고 전화를 했다. “지금 네 가게 건너편 식당이야. 같이 점심 먹으려고 와있으니까 빨리 와서 먹고 가“라고 거짓말을 했다. "알았어요." 라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한참을 지났는데도 속았다고 금방 전화가올 줄 알았는데 전화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깔깔 거리며 투정을 해야 할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심각하게 들렸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하는 말은 자기와 내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는 먹고 살아야 할 처지이므로 만우절 같은걸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다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난 무안하기도 하고 민망하여 미안하다는 말만 겨우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나 위암이래요.”“엉? 만우절이라고 그런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하냐? 하하 난 안 속지.”“아니 아무려면 내가 목숨을 가지고 거짓말 하겠수? 정말이라니까. 오늘 병원 갔다 왔어요.“야, 솔직하게 말해, 그런 거짓말은 하는 거 아니야.”이렇게 다그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훌쩍 거리며 우는 것이다.그제야 난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멀쩡한 네가 무슨 암이야? 아니야, 오진일 거야 우리 다른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 받아보자. 절대로 아닐 거야.”다리가 후들 거리며 눈물이 범벅이 된 채 그녀를 데리고 다른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했으나역시 위암이라고 한다. 물론 그의 남편은 까마득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며 남편에게는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녀는 수술을 받기 위해 영남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그녀 연인의 간병은 극진하다 못해 처절했다. 병원비는 물론이며 잠시라도 병마를 잊게 해보려고 코믹한 책과 비디오테이프를 사오기도 했으며 서울로 가서 저명한 암 전문의를 만나 상담하는가 하면 암에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다 구해오는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수십 년 같이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는 못할것 같았다. 어느 날은 어딘가 같이 가 달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철학관에 가서 그녀가 몇 살까지 살 수 있는가를 묻는 그를 보면서 '얼마나 간절하면 저럴까? 저런 남정네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술을 했는데 이미 암 3기였다. 수술을 받고 1개월 만에 퇴원하는 날 그 남자는 그녀에게 화사한 드레스를 선물했으며 장미 백 송이를 안겨주었다. 그 순간 죽음을 앞두고 있는그녀의 마음은 안타까움도 컸겠지만 행복도 느꼈으리라. 그녀는 평소에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25평 아파트를 사서 세를 주었는데 아들에게 남겨줄 것이라고는 그 것밖에 없는데 그 마저 남편에게 뺏기게 될까봐 그 남자 앞으로 설정해줄것을 부탁했다. 그의 연인은 쾌히 승낙하고 자기 앞으로 설정을 해두었다. 그로부터 4개월 후그녀는 고단한 병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그녀의 생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너무 보고 싶다고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자신의 흉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한사코 만나주지 않았다. 마지막엔 그녀 자신도 살아날 수 없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 듯 그 남자와내가 얼마간의 돈을 모아 약값으로 쓰라고 주었으나 이제는 필요 없으니 자기가 죽고 난 뒤에부조나 하라고 했다. 내가 만들어간 음식도 가지고 온 정성을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한 숟갈만먹겠다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전등불을 끈 채 겨우 한 숟갈을 떠서 먹던 눈물겨운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기어이 가버리고 말았다. 상여 차를 타고 화장터로 가는 도중 훌쩍 거리며 우는 내 울음소리 외에는 어느 누구도 곡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더니 갑자기 그녀의 시누이들과 시댁 친척들이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 마약 복용으로 수감되어 있는 곳이 지금 막 지나고 있는 바로 곁에있는 구치소라는 것이다. 살아생전 남편 구실 한번 제대로 못하더니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배웅하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이 미우면서도 한편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연인은 그녀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내 남편인 것처럼 가장하고 화장터까지 따라 갔다.살아 있는 자들의 오열이 뒤엉킨 망자를 보내는 이별 역은 갖가지 죽음으로 복잡했다. 드디어그녀의 앙상한 뼈가 나오는 찰나였다. 아! 애써 먹고 가꾸었던 뜨거운 피, 아름다운 살, 아무 것도 흔적 없는........... 웃음도 슬픔도 행복도 추억도 과거도 미래도 한 점 묻어 있지 않은........다만 스스로의 파란으로 삭아버린 듯한 저 저 하얀 뼈!............ 도저히 볼 수 없었는지 그는 획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의 슬픔과 애틋한 마음의 깊이는어떤 것이었을까? 나 역시 난생 처음 보는, 더욱이 친한 친구가 뼈가 되어 나오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넘을 수 없는 유한의 경계에서 쫓겨나듯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조차 모르게밖으로 나왔다. 장사를 치룬 사흘 뒤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있는 납골당을 같이 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제사를 올릴 음식 일체와 빨간 샤쓰를 입고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 한장을 가지고 왔다. 그는 사진을 세워놓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채운 다음 내게 종이 한 장을내밀었다. 그녀에게 바치는 헌시였다. 대신 낭송해달라고 한다. 슬퍼하지 말고 아름다운 곳에 미리 자리 잡고 기다리고 있으면 꼭 찾아 가겠노라는 애절한사랑의 헌시였다. 내가 울먹이는 소리로 시를 낭송하는 동안 그 남자는 시종일관 엎드려 소리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 후 그 남자는 비오는 날이면 꼭 그녀를 찾아 갔고 그녀의 아들과 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돌봐주었으며 졸업 후 두 아이의 직장까지 알선해 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할 무렵 그녀의 집을 그녀의 아들 명의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떤 것을 가리켜 지고지순한 사랑이라일컫는지 몰라도 나는 이들의 사랑이 그야말로 지고지순하게 느껴졌으며 감히 순애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누가 이들의 사랑에 불륜이라고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참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언젠가 그 남자가 내게 들려 준 말이 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받고 싶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애욕이다”정말 그 남자는 주는 것만으로도 진정 행복했나 보다. 나는 해마다 목련꽃 피는 사월이면 잊을 수 없는 만우절과 함께 잠깐 화사하게 피었다가 몇 겹 해원의 손짓을 털며 허허로이 떨어져버리는 하얀 목련꽃 같은 이들의 사랑을 떠올린다.
송하 전명수- 경산시 용성면 고죽리 출생- 교육행정직 공무원 정년퇴직- 계명문화대학교 출강(전) - 대구·경북범죄예방위원(전) - 유네스코대구협회 부회장(전) - 대구문화재짐이회 회원 - 대구생명의전화 상담원-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회원 - 녹조근정훈장 수훈 - 저서: 수필집 「실개천에 부는 바람」 외 다수 기온이 연일 30℃까지 오르내리는 초여름 날씨가 이어진다. 오늘은 한낮의 더위를 피하여 고향으로 달렸다. 언제 어디서 바라보아도 육중하며 넉넉한 용성의 진산인 용산(龍山)를 바라보고 슬픈 전설이 배어있는 비오재(飛烏峴)를 넘어 육동의 대종리에 닿았다. 육동은 구룡산이 뻗어내려 이어진 반룡산이 품고 있는 분지의 마을이다. 부일, 용전, 용천, 괴일, 대종, 가척 등 여섯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육동은 해발 약 250m의 준고랭지이며 오염원이 전혀 없는 오지라 공해가 없으며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청정 미나리가 자란다. 지하 150m에서 암반수를 뽑아 올려 무농약으로 미나리를 재배하므로 생미나리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육동에서 제일 위쪽에 자리 잡은 부일리의 옆 계곡에 위치한 육동지 옆으로 난 도로변에는 왕벚나무를 심어 가로수를 조성하였는데 왕벚꽃이 만발할 때는 새로운 볼거리로 명소가 되었다. 또 가족 여행지로 이름난 곳인 산촌생태마을이 조성되어있고 이곳에는 산채 체험장, 해맞이공원, 산촌생태체험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용천리에는 육동 마을 행복센터가 자리 잡고 있어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산촌의 삶을 느껴볼 수 있다. 용전리에는 신라 천년고찰인 반룡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많은 육동의 으뜸 동네 대종리(大宗里)에는 특별히 볼거리와 전설이 전승되고 있어 찾아오게 되었다. 구룡산과 반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부일천를 가로지르는 대종2교(大宗二橋) 옆 들판에 진충묘(盡忠廟)가 자리 잡고 있다. 진충묘는 신라 말기에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북쪽의 도천산에 은거하며 약탈과 살생을 일삼는 왜구의 무리를 한 장군과 그이 누이가 이들을 버들못으로 유인하여 처단하여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는데 주민들은 그의 사후에 한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추앙하는 전각이다. 자인면 서부리의 계정숲에는 한 장군의 묘소와 진충묘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옷날에 진충묘에 제를 올린다. 경산 자인 단오제에 한장군놀이를 삽입하여 더욱 성대하고 뜻깊은 단오제가 진행되고 있다. 한 장군 거리행렬과 여원무(女員舞)는 경산 자인 단오제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계정숲의 한 장군 묘소 옆에 마련된 진충묘와 별도로 자인면 원당리, 용성면 가척리와 이곳 대종리, 진량면 마곡리에 한 장군과 그의 누이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한당(韓堂) 또는 한묘(韓廟)라 부르기도 한다. 진량면 마곡리에는 한 장군의 누이동생인 한 낭자를 모시는 사당이며 다른 곳은 모두 한 장군을 모시는 진충묘이다. 전각의 규모는 조금씩 달라도 한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경산 자인 단오 행사 때 각 지역에 소재한 사당에 제를 올린다. 이곳 대종리의 전각은 규모가 작으나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앞면 1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기와를 이었고 옆에는 눈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풍판을 달아 놓았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전각의 주변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사당 처마에는 초롱을 달아 놓고 금기(禁忌) 줄이 처져 있었다. 앞으로 4일 후면 음력 5월 5일 단옷날이라 지금부터 주민들이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들이는 모양이다. 신라 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오는 진충묘 제례 행사는 또 다른 하나의 우리 전통문화라 하겠다. 자인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백성들을 괴롭혀온 왜구를 무찌른 공로가 지대한 한 장군을 추앙하며 기리는 일은 당연하다 하겠는데 어떻게 하여 용성에 그의 사당이 둘씩이나 세우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곳의 유력한 토호가 현감의 허락을 받아낸 결과라 여겨진다. 장군의 사당을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척리도 그렇고 자인면 원당리와 진량면 마곡리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이렇게 진충묘를 살펴보고 그 주변의 풍광을 돌아보았다. 대종리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로 향하는 도로변에는‘5연대’와‘4연대’라는 명문의 바위와 비석이 있다. 五連臺(오연대)라 새긴 큼직한 글씨 옆에는 작은 글씨로 崔晩海五兄弟五月五日遊賞之所也(최만해오형제오월유상지소야)라 새겨져 있다. 四連臺(4연대)라 새긴 빗돌 오른쪽에는 張基植四兄弟遊賞之所也(장기식 사형제 유상지소야)라 새겼고 왼쪽에는 1964년 갑신 4월 초 8일이라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의좋은 최씨의 5형제와 장씨의 4형제가 각각 시절이 좋은 봄날에 이곳에 와서 즐겁게 놀다간 흔적을 남겨놓은 듯하다. 이곳 주변은 세나벌이라 알려져 있는데 오지의 산촌치고는 제법 넓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부일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데 개천에는 물고기가 많은지 이름 모를 새들이 연신 물속으로 잠수하는 광경이 바라보인다. 마을 앞에는 300년은 됨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고 팔각정 정자가 세워져 있다. 부일천 계곡 옆의 산 중턱에는 큼직한 거북바위가 있는데 목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새나벌의 전설이 전승되어오고 있다. 세나벌 전설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를 장자계 전설이라고도 하는데 인간은 편협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말해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이 전설은 조선 중기 때 일이다. 이곳은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던 작은 동네였는데 마을 앞의 산 중턱에 거북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의 앞산은 구룡산 줄기가 흘러 모여 마을을 지키는 형상을 하고 있어 명당이라 한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아도 산수가 수려하고 들판이 넓으며 계곡에는 맑고 풍부한 물이 흘러내려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명당이라 전해 온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동네 사람들은 거북바위의 덕으로 모두가 넉넉한 살림을 꾸려갔고 그 중 세나벌 바위를 정면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김첨지는 가장 큰 부자였다. 김첨지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도무지 쓸 줄은 모르는 위인이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안에서 거느리는 식솔들마저 배불리 먹이지 아니하였으며 소작을 얻은 일가들도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라 하였다. 마을 사람들과 일가들의 재산도 김첨지의 돈 모으기에 짓눌려 논과 밭을 하나둘 그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김첨자는 집성촌의 대지주가 되었다. 일족들도 욕심이 많은 김첨지를 지주로 모시며 살아가야 하였다. 이러한 김첨지를 미워했지만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가 부자인 것은 세나벌의 거북바위가 김첨지 집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를 증오하여 세나벌 거북바위를 부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천둥 번개가 일고 비바람이 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인근의 반룡사에 올라가 주지승에게 김첨지가 큰 시주를 하겠다며 거짓으로 알리자 주지승은 믿지 아니하였다. 천하의 구두쇠가 절에 시주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한 탁발승은 세나벌 김부자 집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김부자가 문전을 들어서며“우리 집에는 아무것도 시주할 거라곤 없으니 돌아 가시요.”하자 탁발승은 재빠르게 김부자를 향해 정중히 예를 올리며 “김부자께서 큰 시주를 하신다기에 이렇게 찾아 뵈옵게 되었습니다.”하니 김부자는 버럭 화를 내며“나는 시주할 것도 없고 시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머슴 막쇠에게 안으로 들어가 쇠똥 구정물을 가져오게 하여 문간에 서 있는 탁발승을 향해 구정물 한 바가지를 냅다 뿌렸다. 시주는 얻지 못하고 구정물 세례만 받은 탁발승은 어이가 없어 얼굴을 훔치고는 김부자 집을 나서는데 며느리가 스님에게 사과하며 쌀을 시주하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탁발승에게 매달려 김부자의 나쁜 행실을 고치려면 거북바위를 깨어버리는 일이라며 그렇게 해주기를 간곡히 애걸하자 탁발승은“거북바위를 부수면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못살게 되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김첨지의 처신이 너무나 못마땅하여 우리는 못살아도 좋으니 꼭 거북바위를 깨부수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탁발승은 반복하여“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바위를 향해“이얍!”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거북바위는 목이 잘려 나갔고 갈라진 바위 사이에는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스님은 김부자 집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며느리는 새벽길을 나서 마을을 떠나가다가 뒤에서 큰 소리가 나 뒤돌아본 순간 바위로 변하였다고 한다. 그 후 김부자는 이름 모를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 추운 겨울날 이승을 하직하였다. 그는 홀로 쓸쓸하게 죽어 상여조차 하지 못하고 일꾼의 지게에 얹혀 산으로 올라가 한 평의 땅만 깔고 눕게 되었다. 호화스럽던 김첨지의 집도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김첨지의 집에 불이 나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불을 끄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부자 김첨지의 욕심은 허망함만 낳았는데 욕심을 부리면 그 결과는 허망함을 안겨준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대종(大宗)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풍기는 점이 예사롭지 아니하다. 앞뒤 산의 준령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으며 부일천의 맑은 개울 물가에 박혀 있는 너럭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바라보이는데 금방이라도 한 마리의 용이 하늘 높아 승천할 듯 강력한 느낌이 스쳐 지나간다.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난 구룡산의 정기가 이곳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먼 옛날 왜구들의 약탈과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한 장군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동포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곳 진충묘에서 새롭게 느껴보았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과학의 문명 속에 살아가면서도 천년이 넘게 이어오는 진충묘를 다듬고 지키며 제례를 올리는 정성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게 생각을 하며 가척리에 소재한 한당을 찾아 발길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