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인류는 오랜 역사를 두고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그러나 유사이래로 이 불평등의 문제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해결한 시대와 나라는 없었다. 과거 이상적인 나라로 지칭되던 중국의 요순시대나 공산주의 국가들이나 유토피아를 꿈꾸던 그 어떤 나라들도 결코 이 불평등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불평등의 아이러니는 모두가 가난한 빈국이 될 때나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한 때 미국의 소득분배론의 권위 있는 경제학자였던 아델만 교수는 한국의 소득분배를 분석하면서 6.25 동란 직후 우리나라의 분배상태가 매우 양호한 것으로 나타남을 분석한 바 있다. 그 의미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의 국민소득은 모두가 가난하여 저소득 상태로 평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상대적으로 균등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풍요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도 나라마다 구조적으로 발샌하는 불평등의 문제와 싸우고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는 불평등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헌상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을 낳을 수 있는 요인들은 많다. 능력의 차이, 부의차이, 선택의 차이, 정보의 차이, 기회의 차이 그리고 개인적인 성격 즉 근면과 나태, 검약과 낭비 등이 모두 빈부의 격차를 가져오고 불평등을 낳는 요소들이다. 민주와 자유가 보장되는 자본주의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들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선대가 부자여서 부의 좋은 조건을 태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조상이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아 태생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있다. 우수한 두뇌와 건강한 체격 등 좋은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변변치 못한 건강과 별다른 재능이 없이 태어나서 부를 축적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의 선택에서도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고, 별로 돈을 벌수 없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삶은 기회와 선택의 연속인데,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선택을 잘 못하는 경우도 있다. 부를 얻을 수 있는 정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정보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천성적으로 기회의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배움의 차이, 능력의 차이가 기회의 차이를 가져오고, 그것이 이어져 수많은 차이와 불평등을 낳는다. 민주주의사회에서 기회의 차이는 불평등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은 기회의 차이를 없애고자 노력한다. 교육의 기회평등은 우리사회가 평등지지향의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회 환경이나 구조의 변화는 그러한 인위적인 노력의 크기 만큼 불평등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전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가진 능력에 의하여 거대한 부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의 능력에 의하여 유능한 사업가가 되고, 세계적인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어 큰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그 시대에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선택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 수도 있다. 세상살이에서 완벽한 평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사회를 생동감 있게 하고, 한층 더 재미있는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불공정한 사회의 룰이 구조적으로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불합리한 부의 분배가 빈부의 격차를 야기한다면, 사람들은 그걸 용납하기가 어렵다. 이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나 제도는 부당한 격차나 불공정을 없애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도 오랜 세월동안 그러한 노력을 해왔음에도 부의 격차나 불평등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자연현상의 변화나 이를 대처하는 능력의 차이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발생할 수가 있다. 요즘은 코로나19 가 세계 각국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CNBC 방송이 밝힌 바에 의하면 미국의 상위 10% 계층이 주식 90%를 소유하여, 코로나19 이전에 비해서 빈부의 격차를 커지게 하는 요인으로 코로나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도 코로나19의 어려움 속에서 부동산 값이 오르고, 특정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소득격차가 발생하여,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다. 경제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수로 많이 알려진 지니계수란 것이 있다. 1912년 이탈리아의 인구통계학자 코라도 지니가 개발한 지수인데 소득분배가 균등한지 또는 불균등한지를 판단하는 지수이다. 이는 전체국민소득을 각각의 개별국민들이 얼마나 나누어 가지는지를 지수로 나타내는 것인 그 값이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고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다고 보고 있다. 보통 그 값이 0.4이하 이면 양호하고, 그 이상이면 불균등한 것으로 이해한다. 최근 우리나라는 2017년 이후 2019년까지 대체로 0.34 정도 수준을 보여 비교적 근로소득이 균등한 나라였으나, 최근 코로나19 가 덮치고 집값이 폭등하면서 점차 불평등이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불공정이 원인이 되는 불평등은 국민의 마음을 분열시키고 계층간의 갈등과 위화감을 증가시켜 사회의 행복지수를 떨어뜨린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속성 때문에 부득이하게 불평등을 감내하면서 살고 있지만, 불합리한 룰(rule)에 의하여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으려고 한다. 정치는 공동체의 행복을 극대화 하기 위하여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최소화 시켜나가야 하며, 사회의 불평등 평등을 줄여나가는데 뜻을 모아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성장을 위해 경제의 효율화도 이루어나가야 하고 분배 또한 균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세계경제의 공통점은 시장의 법칙에 방치된 상태에서는 게임의 룰이 시장실패를 가져와 불평등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대에 국가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여 국민의 행복을 극대화하는데 있다. 시장메카니즘이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극대화하고 국가 발전을 지속한다는 기본원리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국민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시장기능의 실패현상이나 한계점이 노출되어 국민의 행복지수를 떨어뜨리는 경제제도의 운용은 수정되어야 한다. 무작정 시장을 신뢰하는 사고는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낡은 성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시대가 되어 감을 예측하고 있다. 정책 당국은 국리민복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제정책발굴에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잘사는 나라는 국민 개개인의 행복파이가 커짐을 통해서 국가전체의 총량적 행복이 극대화 되는 정책의 실현을 통해서 실현가능하다고 본다. 행복경제학은 부가 국민다수에게 골고루 배분되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행복의 크기가 키지는 사회라고 보고 있다. 총량적으로 같은 액수의 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부의 부유계층에 집중되어 있기 보다는 저소득층 다수에게 나누어져 있는 상태가 총행복의 크기를 높여 보다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위기로 엄청난 소득감소 및 생산, 소비감소의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서민생활의 불행은 현저하게 커졌다. 시장이 만들어낸 다양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더불어 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구체적이고도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할 시대라고 생각한다.
김 이 대ㆍ자유문예등단ㆍ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뜰작가협회 회원ㆍ동해 남부시 동인 활동 구절초 김이대 가을 속에 구절초 피어 꽃 속에 그 얼굴 피어 바람에 흔들린다 너는 가고 나는 오고 바쁘게 돌아보며 헤어졌는데 이제 너를 울리면 더 멀리 멀리 가고 있는가 하늘 속으로 우리 그때 함께 태우던 가을 눈 감으면 사진 찍혀진 서러운 꽃 한 묶음씩을 들고 있었지 오늘은 가을인가 구절초 꽃 보며 멀리 멀리 참 이별을 하고 있구나
김미숙 농협에서 수십 년 동안 근무하다 퇴직을 한 이재권씨를 만났다. 자그마치 삼십 오 년을 한 곳에서 일했으니 회사를 위해 한평생 산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 없이 순탄하게 보냈다. 특별한 굴곡이 없었고 자식들도 모두 별 탈 없이 자랐다. 2남 1녀의 삼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그는 퇴직을 하면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남아 있는 인생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딱히 할 만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퇴직 전에 특별히 준비한 것도, 생각해 놓은 일도 없었다. 농협에서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땅을 밟으며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게 되었다. 그의 고향은 용성면 매남이다. 그곳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이 400여 년간 13대에 걸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는 일찍 도시에 나와 학교를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농협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퇴직을 하고서 부모님이 물려준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그는 천 평에 털복숭아나무를 심었다. 이듬해는 조경수로 벚나무 삼백오십 주를 심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어서 서툴고 힘이 들었고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았다. 직장 다닐 때 받았던 스트레스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직장 생활이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면 농사는 육체적인 노동의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시골의 한적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퇴직 후 자신이 원했던 생활과 딱 맞아 떨어졌다. 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그는 혼신을 다하여 과일 농사에 몰두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결과가 나왔다. 농사는 이론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고 수십 년 지은 전문가라고 해도 해마다 수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무는 말이 없으니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년 후 복숭아나무에서 약간의 수확을 했다. 자신이 심고 가꾼 나무에서 처음 수확을 하니 기쁨이 가득했다. 복숭아를 따서 주변의 이웃과 친인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잠시 이듬해가 되자 삼 년생이 된 나무는 키가 커서 관리하기가 힘들어졌다. 과수 종목 변경을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었다. 블루베리 농가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왔다. 시작 단계라 뜨고 있고 일하기도 쉽다고 하니 한 번쯤 해 볼 만하다고 화면 속의 농부가 말했다. 그는 육체적으로 힘이 덜 들 것 같은 블루베리 농사로 바꾸기로 했다. 농업진흥청에서 재배와 관리하는 교육을 받고 농장 여러 곳을 기웃거렸다. 복숭아를 베어내고 블루베리 삼백오십 주를 구입해서 화분에 심었다. 똑같은 크기의 화분에 심어 놓은 분재는 새순을 밀어내며 자랐다. 그해 겨울, 하우스 안의 블루베리는 추위를 탔던지 나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흙을 파서 뿌리를 봤더니 원뿌리가 썩었다. 살릴 수 없을 정도였다. 묘목을 다시 구입했다. 구입한 나무에 퇴비를 밀어 넣은 다음 영양재를 섞어서 다시 심었다. 가끔 냉해를 입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무는 잘 자랐다. 사 년 정도 되자 까맣게 익은 열매가 나뭇가지마다 조롱조롱 달렸다. 그해, 수백 그램 정도의 수확을 하여 천만 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농사를 짓고 이 정도의 수입을 올리기는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수백만 원의 돈이 들어갔지만 현금화되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문제는 이듬해에 일어났다. 배수 불량으로 인하여 나뭇가지가 마르기 시작했다. 더 두었다가는 나무를 모두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이 쓰렸다.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삼분의 이 이상의 나무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었다. 이미 뿌리가 상해서 옮겨 심어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묘목을 구입해서 다시 심었지만 겨울이 되자 나무는 또 얼었다. 농사는 나무를 심고 캐내고 또 심고 캐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사람 사는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년에는 잘 짓겠지, 내년엔 더 많은 열매를 따겠지 하는 각오로 매년 다음 해에 희망의 메시지를 거는 게 농사와 사람의 인생이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가 생각난다. 블루베리를 심어서 언제쯤 얼마만큼 수입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그를 보며 지금 이 시간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6월 초였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올해는 다행히 추위에 피해가 없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결실이 잘되었다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검게 익은 블루베리가 오종종하다. 수확하는 그의 얼굴에 땀이 흥건하다. 일하거리가 있는 노년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코로나 위기로 인해 재난지원금을 5차례나 받게 되었다. 일반 국민들도 서민이라면 작년과 올해 걸쳐 평균 세 번 정도는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지금까지 일찍이 역사에 없었던 전대미문의 일이다. 1997년 11월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당시 외환위기 때는 경험적인 데이터로 네 집중 한 집이 망했다. 4형제의 집안이라면 그중에 한 형제는 망하는 꼴이었다. IMF의 강력한 구조조정 요구에 의해 공공, 기업, 금융, 노동의 4개 부문에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이 이루어졌고,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1999년 2월에 실업자 수가 근 200만명을 육박해 10%대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래도 정부가 그때는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줄 생각을 못 했다. 빈곤인구가 전체인구의 4%에 머물던 나라가 8∼20%(빈곤통계 및 기준차이에 따른 빈곤규모의 차이)로 급증함으로써 빈곤문제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지금 코로나19의 충격은 그때보다도 더하다고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서민 경제 상황은 참으로 어렵다. 식당, 목욕시설, 여가 및 위락산업은 거의 폐업의 위기에 이르렀다. 비교적 OECD 가입국 39개 가운데서도 그런대로 우리나라가 코로나 위기를 가장 잘 대처하고 있다고 하지만, 취약계층과 코로나 쇼크에 충격이 큰 자영업자들은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범국민적으로도 이동이 제한되고, 만남이 제약되는 가운데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질환이 주는 구속지수는 참으로 크다. 무언가 자꾸만 움츠려들고, 일상의 만남이 위축되고 귀찮아진다. 만남이 자유롭지 못하니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가 없고 외톨이 행동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모임이 없으니 대중음식점과 관광 여행사, 스포츠, 목욕탕, 영화관, 놀이시설 등 일상생활과 관련이 있는 전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다. 지구촌 전체가 한꺼번에 겪는 위기이고 보니, 그 고통의 총량적인 크기가 그 이전의 개별국가들이 겪었던 고난시기 보다 훨씬 그 충격이 크고 넓으며 또한 깊다. 그러다 보니 세계 각국들은 저마다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어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한다. 마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내 로라 하는 선진국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을 위한 재난극복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정부가 주는 재난지원금정책을 두고는 정파간, 국민간 논란이 뜨겁다. 국민들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주장을 펼치며,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이를 태면 왜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느냐에서 부터, 자영업자, 저소득자를 중심으로 집중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줘도 된다는 주장까지 실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정부는 88%까지 주자고 한 5차 재난지원금을 경기도는 100%까지 주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그러나 재정적자가 높으니 아예 일반국민들에게는 재난지원금을 줄 필요도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는 좀 더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재난지원금의 재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부터 따져보자. 재난지원금의 재원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이 내는 세금이다. 세금은 누가 낸 것인가? 국내의 모든 기업과 근로 현장에 종사하는 소득창출자인 기업과 개인이 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금은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층이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저소득자는 적게 낸다. 소득이 낮아 한계소득권에 있는 근로자는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세금은 절대적으로 결국 부자 기업과 부자 개인이 내는 돈이다. 우리나라 조세구성을 보면 대기업들과 고소득자, 고재산가들이 내는 세금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하고 합리적으로 살아서 부자가 되었고, 그 결과로 나라에 세금을 많이 내는 애국자이며, 국민경제의 혁혁한 공로자들이다. 그들은 세금을 많이 낸 댓가로 국가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 사실상 국가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은 없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고액납세자에 대한 여러 가지 혜택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혜택이 없다. 우리는 아직도 부자를 쓸데없이 미워하고 헐뜯으려는 성향이 있다. 물론 나라가 어려울 때 저소득자나 충격이 큰 자영업자들을 국가가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전대미문의 대 환란이 왔을 때, 고난을 함께 이기기 위해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를 위해 수많은 경제적 기여를 한 부자를 포함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드리는 차원에서 주는 재난 지원금은 국민의 사기를 올리고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소득증가와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가 있다. 일찍이 대공황기에 구원의 경제학자 John Maynard Keynes는 경기회복을 위한 유효수요의 증가를 주장하면서 국제회의의 위해 숙박하던 호텔에서 새 타월을 몇 장이나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제가 여려운 시기에는 돈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은 돈을 써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자영업자들도 회생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재난지원금은 결국 부자들이 낸 세금으로 나라가 국민들에게 베푸는 시혜인 셈이다. 그 돈은 위축된 경기를 살려 경제의 활기를 찾는 역할을 한다. 경기를 회복시키고 경제를 살려 국민소득을 높이고, 고용을 증가시켜 경기도 부양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재난지원금은 두 가지 형태로 지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민의 사기를 돋우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보편적 재난지원금과 특정계층을 위한 차별적 재난지원금이 그것이다. 재난지원금 정책에 대하여 지나치게 경제적 약자지원이라는 제한적 목적 한 가지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또한 재난지원금으로 재정적자가 커지는 것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염려할 필요도 없다. 국가재정은 가정 살림과는 다르다. 재난지원금을 주어 경제를 회복시켜 차년도의 국민소득을 올려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부채를 줄이면 될 일이다. 국가는 나라의 사정에 따라 어려운 시기에 국민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후일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부자들에게 세금을 좀 더 거두어 보충하면 된다. 우리나라 부동산가격 급상승으로 가계부채는 높지만, 우리나라의 재정상황은 세계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크게 나쁘지 않다. GDP대비 50% 선이다. 일본의 220%, 미국의 180%에 비하면 아직은 좋은 편이다. 물론 적자가 없는 건전재정이 좋을 테지만, 그렇다고 항상 건전재정이 가장 좋은 선택은 아님을 경제학은 이미 오래 전에 밝혀왔다. 단순한 도덕적 인식과 과도한 정파적 정쟁이 보편적 재난지원금에 대하여 지나친 비판과 부정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책운용자들이 재난지원금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않고, 무작정 실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해와 불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5차 재난지원금의 용처를 밝히고 있는 언론 기사를 보면, 이번 추석연휴에 재난지원금이 국민의 행복지수를 올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는 생물이다. 경제는 생명체처럼 순환해야 살아가는 생물인 것이다.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재난지원금으로 적절히 순환되는 사회는 행복경제를 창조하다고 생각한다.
김미숙 경상북도 울진이 고향인 황익수 씨를 만났다. 그는 몇 년 전 복숭아 동호회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다 최근에 동호회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시로 나왔다. 도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는 몇 년 동안 일에 파묻혀 살았다. 공무원은 안정된 직업이었지만 일을 해도 어딘가 허한 느낌이 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사표를 내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았던지 삼성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대로 쭉 나가길 바랐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게 없는 모양이었다. 인터넷 쇼핑이 활발해지면서 대리점은 차츰 하향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왔다.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했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차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식품공장 하는 일에 뛰어 들었다. 그 일은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불러왔다. 스트레스로 인해 어떤 때는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벌어 놓은 돈은 사업 자금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로 쓰일 곳이 많은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앞날도 막막했다. 오십대 초반, 그는 우연하게 농사에 발을 디뎠다. 지인의 소개로 도시의 근교에서 농사짓는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던 농사는 하우스 안에서 야채를 길러 직접 도매상으로 내다 파는 일이었다. 상추 농사가 짓기 쉽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시작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던 부부는 하우스 안에서 적응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쪼그리고 앉아서 상추를 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랭지에서 8년 동안 팔천 평과 씨름하느라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가물했다. 사업을 하면서 전 재산을 탈탈 털린 악몽을 잊기 위해 일에만 전념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그들은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농사짓는 일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일도 못하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서로에게 의지하며 견뎌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태풍 매미가 들이닥쳤다. 하우스의 파이프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비닐은 여기저기 흠집을 내고 달아났다. 하우스 안에 있던 상추는 만신창이가 된 채 쓸모없게 되었다. 야채 농사는 이제 그만 지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복숭아 농사로 길을 바꾸었다. 원래 그는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한때 사업이 잘나가던 중에도 틈을 내어 방송통신대학교에 다녔다. 그때 원예학을 전공하면서 농업의 전반적인 지식을 쌓았고 애정도 가졌었다. 경산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은 아내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옮겨서 처음 시작했던 농사는 천도복숭아였다. 천칠백 평의 빈 땅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때는 복숭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주변에서 추천해 준 품목을 심었는데 삼 년 후에 다 익은 복숭아 맛을 보았다. 그들이 원하는 과일 맛이 아니었다. 너무 시고 텁텁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맛이 나지 않았다. 맛없는 복숭을 눈속임으로 시장에 갖다 내놓기 싫었다. 저도 가족도 먹지 않는 과일을 농사지어서 판매할 수는 없었다. 그해 가을 그들은 삼 년생인 복숭아나무를 뽑아냈다. 이듬해, 다시 백도와 황도를 심었다. 명품이라고 하는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들이 원하는 품종이 또 아니었다. 품종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오 년이 지난 후에 알았다. 묘목 키우는 사람이 장난을 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착오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몇 그루의 품종 중에서 스물세 그루를 뽑아냈다. 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또다시 묘목을 심었다. 나무를 심어 놓고 수확할 때까지 수입이 나오려면 몇 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8년 동안 키웠던 스물세 그루의 나무는 돈으로 따지면 그들 부부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수확은 없고 투자만 계속했으니 십 원짜리 하나라도 아껴야 했다.그들은 다른 농부에 비해서 농사가 많지는 않았다. 규모는 작았지만 품질 좋은 복숭아를 생산하는 게 꿈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밭에 들른 적이 있었다. 나무를 예술 작품처럼 키워 놓았다. 작년에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보았던 나무처럼 분재를 해 놓은 것 같았다.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밭을 둘러보는 내내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또 천 평의 땅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했다. 그곳에 산딸기를 심었다. 복숭아 수확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초처럼 커야 하는 딸기를 수확할 때면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뻘뻘 흘렸다. 부지런한 그들 부부는 잠시도 놀 틈이 없었다. 힘든다고 그만두려고 했던 딸기를 뽑지 못하는 이유는 돈의 회전이 빨랐다. 그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고 아이들 학비도 댈 수 있었다.시간이 흐르자 두 가지 일이 겹쳐졌다. 딸기를 매일 따서 납품을 하다 보니 복숭아 열매를 솎지 못했다. 나무를 심고 첫 수확 하는 해는 복숭아를 하나도 따내지 못했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가 없었다. 농번기의 시골은 시간과의 싸움인데 딸기를 따는 족족 도매상으로 직접 갖다줘야 하니 일하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복숭아 아카데미 일 년 과정을 마쳤고, 경북기술원 농민사관학교의 일 년 과정도 수료했다. 지금은 영남대학교 2년 마이스터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복숭아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공부를 끝없이 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다. 요즘은 농번기가 따로 없다. 공부와 농사를 병행하다 보니 일 년이 눈 깜짝할 시간이라고 했다. 농사는 어느 정도 기반이 있으면 짓기가 수월하지만, 호미자루 하나 없이 시작한 그들 부부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직 정상적으로 수입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에게서 행복의 씨앗이 엿보인다. 그들 부부는 큰 욕심이 없다. 이웃 사람들과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면 그만이라고 했다.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 그들의 얼굴에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순을 갓 넘긴 너털웃음이 삶의 여유를 말하는 것 같다. 참 행복해 보이는 부부의 모습이다.
한국복지사이버대학교임승환 부총장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제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한지 76 주년 되는 국경일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께서 온몸을 던져 목숨바쳐 구한 이 나라 우리가 함께 고마워하고 기뻐해야할 오늘 전국민은 연일 2천명을 오르내리는 코로나19로 어수선한 삶이 되어 버렸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불안감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백신공급이 제때 안되어 2주 이상 지연되는 것은 물론 예약을 받기위해 폰을 들고 정보의바다를 헤메는 현실입니다. 소상공인ㆍ자영업자는 한숨이 눈물로 바뀐지 오래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철저한 개인위생 준수와 사회적거리두기 이젠 정말 지쳐가고 있네요.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백신접종 하라. 개인위생 철저히 하고 마스크 착용하라. 4인 이상 모이지마라. 거리두기 하라. 시간 지켜 영업장 문닫아라. 이와중에 K방역 자화자찬이란 말이왠말입니까. 언제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지. 특히 자영업자ㆍ소상공인들 언제까지 얼마 안되는 지원금으로 경쟁력을 상실시킬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속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든든하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세계 최고의 국민백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명의 확진자라도 제대로 치료해서 코로나19 종식을 위해 온몸을 던진 자랑스런 그리고 존경하는 세계최고의 의료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얻은 광복절인 오늘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코로나19여 우리 국민들 더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조용히 지구를 떠나거라.
이 재 희1949년 경북경산출생(전)역도선수(현)대구 해안농약사 대표갓바위 가는 길고요와 적막 사이참묵과 여백 사이꽃무릇 이냥 지고꽃대궁만 남은 기슭단풍은 아직 설들어더없이 곱기만 하고근엄한 부처님 얼굴가을 햇살에 찬란하다지나가는 꽃구름도삼배를 올리고 가는데인간사 백팔번뇌를홀로안고 애태우시네
고황 대조영 장군상 경자년 금년 한해는 지나온 세월 중에서 가장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아니하고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 한 해를 허송하게 보낸 것이다. 중국 우환에서 들어온 폐렴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지금도 지구상의 전 인류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 2월 10일 첫 확진자가 나타난 이후 전국적으로 감염시키고 있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그 기세가 조금 수그러지는 듯하다가 늦가을부터 다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동호인을 만나거나 여행도 마음 놓고 떠날 수 없으며 친구나 친인척의 모임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연말이 되니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에 접어들고 추위가 점점 심해진다. 그래도 오래 만에 오늘 하루만 포근한 날이 될 거라는 일기예보에 따라 길을 떠나본다. 오늘 찾아 나선 곳은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의 발해마을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마을 입구에는 큼직한 바위에‘발해마을’이라 새겨 놓았으며 도로변에는 태극기와 발해마을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울은 오래전에 복개를 하여 넓은 길이 나있고 농산물집하장 앞에는 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담벼락에는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 장군과 기마부대가 만주벌판을 누비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이곳에 와사 농촌계몽운동이랍시고 한 달 동안 살았던 곳인데 동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보인다. 발해마을을 다듬고 가꾸어 나가는 발해왕조제례보존회장 태재욱 선생을 만나 발해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발해국(渤海國)은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로 고구려 역사의 연장을 의미하고 있다. 698년부터 926년까지 15대의 왕위를 계승하며 229년간 존속한 나라로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북국 시대가 열렸는데, 남은 신라, 북은 발해를 이르는 것이다.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존속하였으며 수도는 발해 성왕 이후로 상경 용천부로 정하고, 초기에는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나 고려라 불리기도 하였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698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이 동모산 부근에서 건국하였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를 확장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건국할 당시 대조영이 진국(震國)이라 하였으나, 713년 당나라로부터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명목상 책봉을 받은 후 국호를 발해(渤海)라 하였다. 926년 발해는 갑작스럽게 멸망했는데, 그 이유는 백두산 폭발, 거란의 침입, 지도층의 내분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가 명확하지는 않다. 발해국이 멸망한 이후 고왕 대조영의 후손들이 대거 옛 고구려 땅에 유민으로 정착하였다. 그 이후 영순태씨 일족은 상주, 문경지역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대조영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오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미명으로 2001년부터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이 고대 중국 정부의 동북 지방에 속했다는 역사 왜곡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행태에 대해 태씨 문중의 일족이 똘똘 뭉쳐 역사바로세우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견하며 그의 용기가 대단해 보였으며 나라와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추진하고 있음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태재욱 회장은 영순태씨 43세손으로 1942년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 721번지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을 하다가 1990년 초에 귀향하여 문중 재실을 관리하던 중 대조영을 모시는 사당과 영순태씨 입향조에 대한 내력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1년부터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인 발해에 대하여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 왜곡 사실을 접하게 되어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의 근간을 흔들고 있음에 참을 수가 없었단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대조영의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중국의 역사 왜곡을 반박하기 위하여 종인들의 중지를 모아 발해국의 대조영 후손들이 사는 마을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복원하기로 하였다. 역사 자료를 수집해 나가면서 장기적으로 발해마을 종합계발계획을 추진하였으며‘발해왕조제례보존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곳 송백2리를 발해마을이라 한 배경을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일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라서‘발해마을’이라고 부른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고 발해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다. 이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의 18세손인 중시조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르면서 지금 문경 일대인 영순현 고을을 하사받아 다스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중상의 31세손이며 통전대부를 지낸 태순금이 피난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영순태씨는 북한 지역에 많이 정착하였고, 국내에는 이곳 발해마을이 유일한 태씨 집성촌이라 한다. 1950년 중반에는 송백리에만 60여 가구가 살 만큼 번성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27가구에 40여 명 정도이고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약 9천여 명이라 한다. 그런데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이 어떻게 태씨(太氏)인지 궁금하여 문의하였더니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다. 두 글자는‘크다’라는 의미인데 대(大)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太)로 썼을 뿐이다.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설명을 들어보니 궁금증이 풀린다. 이어서 발해마을을 가꾸어 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발해마을은 2016년 농촌건강장수마을에 선정되었고, 2017년 농촌진흥청 주관‘전국 어르신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 참가하면서 대조영 후손들이 살고 있는 태씨 집성촌이라는 역사 콘텐츠를 발굴, 적극 활용해 그해 9월에 발해마을 입구에 대형 마을 표지석을 세웠고 신도비, 발해고황 대조영 장군상 제막식을 가졌으며 마을벽화, 기마상 조형화, 안내표지판, 발해 상징 로고 깃발과 태극기 게양, 마을 스토리 지도 등으로 마을환경을 정비하는 등 경산을 대표하는 농촌 관광마을을 조성하였다. 2017. 11. 28일‘전국 어르신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동안 고황제 대조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2015년부터 춘분과 추분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 처음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가, 2015년 영순태씨와 협계태씨를 합치면서 다시 왕조 제사로 부활하여 지내고 있다. 2018. 3. 21일 사당에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모시고 발해왕조 춘분 대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발해국 태씨의 뿌리 및 민족사'란 대형 유래석을 세움으로 발해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발해국의 역사와 명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게 하였다. 대조영의 영정을 모시는 추모재(追募齋) 앞 정원에는 발해마을 안내판, 발해국 태씨의 뿌리 및 민족사 유래석, 대조영 흉상, 석등 등이 조성되어 있다. 대조영의 표준영정을 제작한 과정도 이야기해 주었다. 대조영의 표준영정은 얼굴 박사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전국의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사진을 찍어 특징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숙명여대 권희연 교수가 영정을 그렸다고 한다.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다. 태씨 일족의 남성은 한국인의 평균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 점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단다. 발해마을을 더욱 다듬고 가꾸어나갈 포부도 들려주었다. 2013. 5.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에 발해 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 되 퍼 와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 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두고 싶다고 한다. 또 발해역사관과 박물관도 건립하고 한옥마을을 조성하며 대조영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 한다. 또 대조영 영정을 모신 고황전 사당도 큼직하게 마련하고 그 뒤쪽에 대나무 산책길을 만들어 역사교육 관광지로 가꾸는 '발해마을종합계발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 한다. 마른 장작으로 군불을 지핀 따듯한 방안에 앉아 발해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태재욱 회장님은 생동감이 넘치며 기백과 사명감을 갖고 보람 있는 일을 추진함에 참으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하니 신바람이 나는 삶인듯하다. 흔히들 경산에는 문화관광자원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 이곳에 발해마을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삼성현공원과 압량의 김유신장군의 군사 훈련장인 경산병영유적, 자인 한장군 유적, 구룡산 반룡사, 용산산성 등과 더불어 관광 벨트화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된다. 밖으로 나와 태재욱 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고황제 대조영을 모시는 추모재 및 사당과 조형물을 살펴보았다. 정부 기관이나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민간차원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발해마을을 가꾸어나가는 그의 일상이 언제나 평화롭기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린다. (2020. 12. 29. 화) 발해국 대씨의 뿌리 및 민족사 고황 대조영 장군상
대구대학교 명예교수박 천 익 2020년 연초부터 시작한 코로나 19는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환란을 만들고 있다. 현재 전 세계 감염자수는 2억 명이 훨씬 넘었다. 바이러스의 진행 조짐도 단시일에 끝나지 않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성도 우한에서 사스로 의심되는 질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우한 중심병원 의사 리원양은 최초로 우한폐렴 발생이 간단한 질환이 아님을 경고했다. 인구 1,100만 명의 우한은 중국 중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정치, 경제, 금융,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래서 세계 각처에서 왕래자가 많은 곳이다. 발병의 첫 출발은 2019년 12월 31일 중국 우한에서 원인 불명의 환자 27명이 발생한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이어 우한 당국은 2020년 1월 9일, 우한 폐렴의 원인이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임을 발표했다. 중국이 아닌 첫 해외의 환자는 1월 14일 태국 방콕에서 발생했다. 61세 여성인 그녀는 중국 우한에서 입국했다. 일본의 첫 환자는 1월 16일로 우리나라 보다 약 4일 정도 빠르다. 한국의 첫 번째 환자는 1월 20일 우한에서 인천으로 입국한 35세 중국여성이었다. 이어 그해 21일 미국에서도 첫 환자가 발생하는데, 그 자도 우한을 다녀온 사람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코로나 19로 정식 명칭을 갖게 된 것은 2020년 2월 11일 이후이이다. '신종코로나 감염증' 혹은 '우한폐렴'으로 정확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코로나 19는 중국의 확진자 4만 명, 사망자 1천 명, 한국의 확진자가 27명이 나온 2월 11일 이후 정식 명칭 "코로나19" 를 갖게 되었다. 유사 이래 지구촌의 전인류를 향해 무차별 감염을 시키고 있는 무서운 바이러스성 질환 코로나19 는 이제 감염기간이 1년 반을 훌쩍 넘기고 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세계의 전문가들이 대체로 발병 후 2년을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지만, 지금의 조짐으로는 당초의 예상보다 감염기간이 길어질 전망이다. 그 이유 중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코로나19 가 끊임없는 변종 바이러스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알파형, 베타형, 감마형, 델타와 델타 플러스에 더하여, 유형을 알 수없는 변이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 4 차 대유행기에 들어 있는 지구촌은 코로나19 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휴교령이 내린 학교는 텅 비었었고, 재택근무로 인해 사무실도 비었었다. 도시의 거리도 한산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상식화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무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비 대면이 뉴 노멀이 되는 사회이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며, 통신매체로 의사소통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걸 피하고 있다. 오프라인 사업장이 장사가 안 되고, 공연장, 스포츠경기장, 연회장에도 손님이 적다. 영화관이나 공공장소, 놀이공원도 텅 비고 한적 하다. 어떤 병원은 90% 정도로 수입이 줄어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한다. 비대면 사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업장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모든 질서가 고장 난 엔진처럼 속도가 줄고 맥이 빠진 듯도 하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졌고, 거주와 이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지만, 어디든 함부로 갈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분명 현재의 이 위기는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위기이다. 도쿄 하계 올림픽을 일 년을 연기하여, 겨우 겨우 개최했지만, 관중이 없는 경기가 되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들이 작년 일 년은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금년 들어 겨우 미약한 성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혼쭐이 났던 1997년 IMF경제위기 보다, 미국 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보다 몇 갑절 어려운 위기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세계 GDP의 10%가 줄어드는 지구촌 경제상황이 바로 작년이었으며 아직도 크 충격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여기서도 통한다. 재난지원금을 주는 방법을 두고 나라마다 시끄럽지만, 나라의 구제사업은 국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다. 국민들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지켜주는 국가가 있음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선별지원도 있어야 하지만, 전 국민에게 위로를 주는 격려금도 필요하다. 정파를 떠나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은 경제를 살리고, 애국심에 득이 된다. 물론 국가가 주는 재난지원금 재원은 국민이 낸 세금이다. 부자들은 많은 세금을 내었다. 결국 지원금의 대부분은 부자들이 낸 돈이다. 부자를 쓸데없이 미워하는 생각은 과거형 낡은 사고방식이다. 부자는 가난한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직한 사회라면 부자가 인정받는 사회가 자본주의사회의 바른 길이다. 남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된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다. 그러나 이 코로나19 의 환란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코로나 19가 가져오는 수많은 변화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탈세계화, 디지털화, 개인주의화 그리고 집중화이다. 첫째, 탈세계화는 지금까지 지향해온 세계화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유자본주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경쟁적으로 자원을 무제한 사용함으로써, 과도한 자원사용이 자연의 리싸이클리닝(재생) 능력을 불가능하게 했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밝히듯이 이제 자유방림주의는 수정되어야 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모델을 모색하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둘째, 세계는 지금 디지털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CCTV카메라에 스스로도 모르게 찍히고, 디지털이 관리하는 문화 속에 확인 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을 보호하며 감독하는 자동화 시스템에 순응하는 반듯한 삶을 살아야 하고 적응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셋째, 연대적 개인주의 사회이다. 코로나 이후에는 누구든 서로를 위해 갖추어 진 조건으로 만나야 한다. 세상은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연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껴야 한다. 개인주의가 기본이지만, 서로간에 보이지 않는 긴밀한 고리로 얽혀진 연대적 개인주의 사회이다. 디지털로 만나고, 비대면 온라인 거래에서 대부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서로 간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는 연대적 개인사회에 익숙해져야 한다. 넷째, 집중화는 코로나 위기를 어느 나라들이 잘 대처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집중화가 잘된 나라들이다. 일본의 어떤 정치가는 한국이 집중력이 높은 나라라고 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코로나19 대응능력이 높은 나라라고 한다. 개인과 전체를 위해서 가능한한 잘 협조하고, 절제된 자유의식이 필요하다. 위기는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 밀턴 프리드만은 "오직 위기만이 새로운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고 했다. 현재의 생활방식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보건생활을 상식화 하고, 모든 행동에서 남을 생각하며, 조직과 전체를 생각하는 겸손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행복의 개념과 기준도 변해야 할 것이다. 많고, 크고, 높고, 화려한 외형의 것만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빨리 가고, 많이 소비하고, 화려하고 빛나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닌, 작은 행복이 참된 행복이다. 일상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삶임을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코로가 19는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업임을 인식하고, 작은 욕심으로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통해 세상의 자원을 아끼고 절약하는 작은 경제학이 새로운 행복경제의 명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자연과 공존하면서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자연의 순응자가 되어, 세상과 더불어 사는 가족중심의 진실한 사랑의 삶이 포스트 코로나의 새로운 행복모델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박 치 민 넘어지기 전에 지팡이 짚는다. 화를 입는 것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 해야함을 말한다. 앞날의 계획을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이지만, 특히 화재는‘예방 행정’을 통해 앞으로 발생할 화재를 미리 파악하고 막을 수 있기에‘예방 행정’을 소방행정의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현장에서 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이 소방시설 등에 대하여 평상시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소방특별조사’분야가 있다. 예방행정의 현장요원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조사대상을 선정하여 조사하고 있다. 다가오는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 추석 음식을 준비하려고‘전통시장’에 사람들이 붐빌 것으로 예상되기에 지난 8일부터 관내 전통시장 5개소, 대형판매시설 2개소를 긴급 소방특별 전수조사의 주요 대상으로 선정하여 실시하고 있다. 전통시장에 특별조사를 하는 중점적 계기로는 지난 9월 4일(토) 새벽 3시반경 경북 영덕군 소재 영덕시장에서 전기적 요인으로 화재가 시작돼 구조적인 문제인, 내장재 컨테이너와 반자 위의 보온재인 스티로폼을 타고 삽시간에 불이 번져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추석 대목 장사를 노리던 시장 상인들이 임시시장을 설치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3년간 경북소방본부 화재 현황 분석에 따르면 평균 3건의 화재가 발생하였고 계절별로 봄철 또는 겨울 초입인 늦가을에 화재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나 현 시점에서‘화재발생율’이 가장 높다. 물론 긴급 소방특별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화재발생의 여지를 두지 않도록 하고, 소방력을 항시 대기하여 대응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나 소방대상물에 관계인과 근무자들이 소방 안전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각 처소에서 본인이 점검자가 되어‘소방 점검’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전통시장과 대형 판매시설에는 어떤 취약점이 있을까? 첫째, 전통시장의 주요 화재취약 요인사항으로는 노후 건축물과 소규모 점포 등 밀집도가 높아 대형 화재에 우려가 있고, 개별 장기 노후화된 전기시설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화재위험이 상존하고 있으며, 공설·사설·임대차 등 복잡한 관리권한으로 안전관리 의식이 저하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둘째, 대형 판매시설에도 취약점으로 다량의 의류, 플라스틱류 상품 보관, 전시로 화재하중이 높고 에스컬레이터 등 열린 공간으로 상층부 연소확대 우려가 상존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소방에서는 현장 조사를 나갈 때 관계인에 대한 눈맞춤 안전 교육을 병행 할 것이다. 주요 내용은 소방대상물의 관계인들이 문어발식 전기코드를 사용을 하지않도록 하는 것과 화기 취급 장소엔 소화기를 항시 비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추석명절 모두가 안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소방대상물 관계인 그리고 나부터 우리 주위의 안전을 위한 소방시설 점검에 눈을 떠보면 어떨까?
경산소방서장정 훈 탁 코로나19를 극복하고자 국가와 전 국민이 상방설법(想方設法)으로 애를쓰는 가운데 어느덧 성큼 명절 추석(秋夕)이 다가왔다.‘사회적 거리두기’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지들에게‘주택용 소방시설’을 전달하며‘안전’을 선물해 보면 어떨까? 현재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라 집에 거주하는 시간이 늘면서‘주택 안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특히 자녀의 비대면 원격수업과 직장인의 재택근무 확대 등으로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사람이 많고, 실내공간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 계시는 어르신들에게도‘주택 안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주택용 소방시설은‘단독경보형감지기’와‘소화기’이 두 가지를 말하는데 소방시설법인「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8조」에 따라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 연립·다세대 주택 등에 의무 설치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고, 화재 초기에 매우 유용한 소방시설이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열이나 연기, 불꽃 등을 감지해 내장 음향 장치로 위험을 알려주는 장치다. 주택 내 배선 작업 없이 배터리의 힘으로 평균 8~10년 정도 사용이 가능하고 화재 발생 초기에 위험을 알려 신속한 대피가 가능하다. 또한 주변에서도 빠르게 인지할 수 있어 대피를 돕거나 대신 화재를 신고해줘 초기 대응에 매우 효과적이다. 소화기 역시 화재 초기 신속한 진압에 큰 도움을 준다. 차례 음식 등을 많이 요리하는 주방에서는 주방용 소화기를 배치할 것을 권유한다. 작년(20년도) 경산 관내에서 화재건수는 총 196건으로 이 중 주거화재가 31건(15.8%)을 차지하고 있어 경산 내 화재저감을 위해서라도 주택용 소방시설 설치는 필수이다. 경산소방서에서는 화재 저감을 위하여 8월 말부터 경산 이마트 및 경산시외버스터미널에 랩핑 홍보 방법으로 주택용소방시설을 홍보중이다. 그리고 지난 8일부터 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이 소방시설 등을 평상시에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자체·전기·가스안전공사 등 유관기관과 합동으로 전통시장, 다중이용시설 소방특별조사를 추진 중이다. 소방특별조사의 세부 내용은 ▲노후 배선 교체와 멀티탭 등 전기코드 문어발식 사용 금지 안내 ▲관계인 소방안전의식 고취를 위한 현장 소방안전 교육 등 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두 번째 추석인 만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에는 가정마다 소방시설을 설치·점검하고 경계하므로 우리나라 대표 명절인 추석을 최고로 안전하게 보내길 바란다. 참고로 주택용 소방시설을 인터넷과 관내 대형마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김미숙 젊은 농부 최진원 씨는 경산시 고향이 아니다. 하지만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이십여년 가까이 아이들을 낳아 키웠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고향과 별반 다름없다. 그의 나이 올해 지천명에 들어섰다. 농사짓는 나이로 보아서는 젊은 축에 들어간다. 대부분 퇴직을 하고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농사를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젊은 시절 잘나가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고, 보증까지 잘못 서는 바람에 느닷없이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 왔다. 그는 군 제대를 하자마자 이불 도매상을 하게 됐다. 전국을 무대로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지갑에는 현금을 두둑하게 넣어 다니면서 물 쓰듯 살았다. 세상이 온통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에 들었다가 원단을 염색하는 것을 보게 됐다. 염색하는 것까지 손을 대면 지금보다 몇배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장 염색사업에 손을 뻗쳤다. 하지만 자신이 염색한 원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단에 얼룩이 생겨서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이불을 판매한 돈으로 원단을 다시 사들였지만 마음먹은 대로 염색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새로 작업을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부도를 맞았고 보증까지 서면서 하던 일을 정리하게 되었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는 보증을 서 줬던 친구와 한집에 살았다. 친구는 자신의 잘못으로 부도를 내고서도 백화점을 들락거렸지만, 그는 보증을 섰다는 이유로 매달 이백만 원씩 갚아야 했다. 월급을 받으면 한 푼도 써 보지 못하고 그대로 남의 손에 넘겨줘야 하니 가슴이 쓰렸다. 옳은 사람살이 하나 없는데다가 게딱지처럼 붙러 있는 차압 딱지를 볼 때면 울화가 치밀었다. 키우던 네마리의 개도 손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봤을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도피 샌활로 원양 어선을 탔다. 돈에 시달리다 보니 숨어 있을 곳을 찾은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배를 타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택시 운전을 하게 됐다. 십여 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월급은 고스란히 보증 선 대가로 넘어 갔다. 아내가 번 돈으로 겨우 생활을 했으니 삶에 재미가 붙을 리가 없었다. 그는 모든 생활을 접고 평산에 들어왔다. 그에게 집주인이 포도와 복숭아 농사를 지어보라고 했다. 밤에는 택시 운전을 했고 낮에는 포두 순을 땄다. 콩만큼 자란 포도 알맹이도 속아냈다. 농사라곤 처음 해 보았지만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농사가 즐거웠다. 일하는 즐거움 뒤에 그동안 그끼지 못했던 행복함이 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첫해 육백 평 지은 농사가 대박을 이루었다. 팔백만 원이라는 거금이 통장으로 입금됐다. 신이 난 건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듬 해 농사는 실패였다. 그해는 날씨가 고르지 않아 병 해충의 피해를 많이 봤다. 그때 그는 알았다. 농사는 어느 정도 하늘이 도와줘야 잘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이듬해에 이웃으로부터 노는 땅 구백 평을 무상으로 임대했다. 산비탈이어서 오르내리는 것만 해도 헉헉 숨이 찼다. 게다가 가시덤불로 우거진 밭이었다. 하늘이 보이는 비탈은 고개만 들어도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그는 아내와 어린 묘목을 심었다. 나무을 부지런히 가꾸고 보살폈다. 해가 거듭될수록 나무는 대견스럽게 우뚝 자랐다. 오 년째 접어들던 해였다. 국가에서는 FTA 협상으로 과수 폐원 지원 사업상 복숭아 나무을 뽑으면 보상을 해 준다고 했다. 밭 주인은 보상을 받기 위해 한창 수확할 복숭아 나무를 뽑아냈다. 그는 몇 년 동안 나무를 키운 보람도 없이 말 한마디 못하고 주인에게 빼앗겼다. 농사짓는 이십 년 가까이 그런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태 전에는 복사아밭 오천 평을 농사짓게 되었는데 다음해 주인은 말도 없이 계약을 파기했다. 토양 개량제와 유기질 비료를 듬뿍 뿌려 놓았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해버렸다. 복숭아 농사가 잘되니깐 없는 사람을 상대로 세를 더 받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소독할 때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만오천 평 되는 과수원을 소독하려면 일주일 이상 걸렸고, 온도와 습도가 높은 날 약을 치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했다. 농사는 소독과의 전쟁이다. 얼마만큼 병해충을 잡느냐에 따라서 농사를 잘 짓는가에 대한 판가름이 난다. 몇 년 동안 그들 부부가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그보다 아내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늘 긍정적이고 밝은 미소로 남편의 일을 묵묵히 도와주는 그의 아내는 타고난 일벌레다. 같이 일하는 날이면 손이 얼마나 재빠른지 흉내도 내지 못한다. 남편과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투정을 커녕 오히려 일 욕심을 더 많이 낸다. 그 덕분에 이십년 가까이 땅 한평 없이 농사를 짓던 그들은 삼년 내리 땅을 사서 자신의 명의로 올렸다. 젊은 날 부도가 나고 보증을 섰던 것은 그의 인생이 걸림돌이었지만 긴 인생을 볼 때는 디딤돌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젊었을 때 닥쳐왔던 시련이 지금까지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한다. 앞으로 그는 농사에 관한 정보나 농업에 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으면 달려 간다고 한다. 저 사람은 정말 농사꾼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포부라고 한다. 그는 이제 2억의 수입을 올리는 농사꾼이다. 농부라면 누구나 원하는 꿈이 아닐까. 그도 이제는 경산을 지키는 온전한 농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