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해석을 바로 잡자

김 민 구 해동문학 편집위원, 해동문인협회 부회장 겸 대구․경북지회장.미래문학자문위   원,국제펜 한국본부 대구지역위원회 (전)이사.(현)사무국장. 한국 복지문학    예술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 문화사랑 연대 이사. 국   사광복국민운동본부장.
김 민 구
해동문학 편집위원
해동문인협회 부회장 겸 대구․경북지회장
미래문학자문위원
국제펜 한국본부 대구지역위원회 (전)이사, (현)사무국장
한국 복지문학 예술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 문화사랑 연대 이사
국 사광복국민운동본부장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대해서는 누구나 학창시절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어봤고, 또한 반복해서 공부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은 1443년(세종 25년)에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되었는데, 반포 당시의 공식 명칭으로서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을 소개하면서, 세종은 책의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를 놓고 교과서에서나 또는 일반 학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현대어로 해설한 것을 볼 수 있다.

  원문 해설 
 “나랏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자주정신],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애민정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실용주의 정신]

  이와 같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와 목적을 밝혀 놓은 것을 두고서 학교에서 반복하여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표면상의 해석일 뿐, 실제적으로는 다른 차원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반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이기에, 이 같은 해설과는 달리 다른 각도에서 다시 풀어보면서, 또한 이 어지(御旨)의 해석에서 부분적인 중대한 오류(誤謬)를 범하고 있는 것을 먼저 지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의 異乎中國이란? 가운데‘中’字와 나라‘國’字이니 당연히‘나라 안에서도 서로 말이 달라’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예를 들자면 지금은 학교 교육에 의해 표준말이 전국 어디서나 다 통하지만, 과거에는 육지 사람들이 처녀, 달걀, 마늘이라 하는 것을 제주도 사람들은 비바리, 독새끼, 콥데산이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의사소통이 가능했겠는가?
  이렇게 지역과 지역끼리의 토속적인 방언으로서는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불편함을 해결하는 데는 문자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로써 서로 소통하고자 하나 어려운 한자보다는 쉬운 문자가 필요했으니, 그 대안으로 내어 놓은 것이 훈민정음이었다고 보면, 마땅히 ‘나라 안에서도 서로 말이 달라’라고 해야 옳은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옛 문헌에 보면, 세종 이전에도 中國이란 기록은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이때의 中國은 국호가 아니라, 가운데‘中’字와 나라 ‘國’字이므로,‘나라의 중심’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나라의 중심이란 임금이 계시는 곳이니 수도(首都) 즉 도성(都城)이란 뜻이기에, ‘나라 안에서도 수도(서울)의 말이 각 지방의 말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라고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라고 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둘째 :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랏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란 말 자체를 놓고 분석해 볼 때, 이는 ‘나랏말(조선말)이 중국말과 달라’로 본다면, 조선 사람과 중국인이 서로 소통하고자 하나, 어려운 문자인 한자로서는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결국은 세종께서 조선과 중국의 양국 간 백성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해 훈민정음을 내어 놓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와 같은 풀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나랏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란 대목을 놓고 볼 때, 교과서에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며, 또한 이를 두고 자주(주체)정신이라고 보는 것도 옳지 않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어지(御旨)의 미화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달리 다른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를 놓고 보면, 세종은 보기 드문 영명한 군주였지만 사대(事大)의 뿌리를 내리게 한 과오(過誤)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세종 편)에 의하면, 세종 이전에는 명나라에 대해 3년에 한 번씩 조공하던 것을 세종이 1년에 세 번씩 조공할 것을 명하자, 이에 김수온이라는 신하가 “지금 백성들의 살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조공의 횟수를 늘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곡히 반대하자, 세종은 노발대발하면서 “백성들의 삶이 어려운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명(明)에 대한 사대는 더 시급하고도 중한 것이니 더 이상 거론 말라”고 단호한 엄명을 내렸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세종을 두고 어찌 자주정신을 운위(云謂)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한 애민과 실용정신이란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보다는 실제적인 목적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 그것은 바로 조선의 개국이념(開國理念)과는 달리 세종과 세조의 불심(佛心)에 의한 불교 보급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왜 그런가 하면 조선은 공식입장에서 유교이념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이와는 달리 세종은 건국이념인 유교라는 국시(國是)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무수한 유생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불사(佛事)를 적극 벌였던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 초기에는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가 망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교라는 국시(國是)를 받들면서도 내심 백성들의 심성에는 여전히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고, 이와 같은 이원구조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세종은 은근히 불교의 대중화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에까지 불교를 널리 보급하자면, 불경(佛經)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을 느껴 어려운 한문보다는 어리석은 백성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써, 불교의 보급운동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간접적인 증거로 세종 이후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의 문헌은 65% 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를 볼 때나, 특히 어지(御旨) 자체의 짜임새에 내포된 숨어 있는 의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을 참고하여 어지의 체제를 살펴보면,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을 함께 지적함과 동시에,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월인석보』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그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이와 같은 김 교수의 지적은 놀라운 탁견이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글 어지 108자, 월인석보 제1권도 108쪽이다.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이는 세종의 깊은 불심을 반영하기 위해 필시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불교에서 신성시 되고 있는 이 108이란 숫자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깊고도 오묘한 불교적 세계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108번뇌(煩惱)는 중생의 근본 번뇌인 바, 108번뇌는 육진(六塵)과 서로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이니, 즉 6진(塵 : 色, 聲, 香, 味, 觸, 法)×三受(好, 惡, 平等)=18번뇌, 6경(境)×3수(苦, 樂, 捨-不苦不樂: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18번뇌. 이를 합하면 36번뇌이고, 이 36에다 3世(과거, 현재, 미래)를 곱하면=108번뇌가 되는데, 이때의 육진(六塵)과 육경(六境) 또는 육근(六根)은 다 뜻이 같은 말이다.
  그리고 6根[눈(眼), 귀(耳),코(鼻), 혀(舌), 신(身), 의(意)]에 각각 3수(苦, 樂, 捨)가 있어 6x3=18번뇌가 되고, 또한 6근(根)에 각각 3가지 감정(好, 惡, 平)이 있어 6x3=18번뇌가 되니, 이 둘을 합치면 총 36번뇌가 되고, 이 각각의 번뇌가 3세(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일어나므로 36x3=108번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6진을 상대할 때 먼저 좋다[好]·나쁘다[惡]·좋지도 싫지도 않다[平等]는 세 가지 인식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바, 좋은 것은 즐겁게 받아들이고[樂受], 나쁜 것은 괴롭게 받아들이며[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게 방치하는[捨受] 것이다. 곧 6근과 6진의 하나하나가 부딪칠 때 좋고[好]·나쁘고[惡]·평등하고[平等]·괴롭고[苦]·즐겁고[樂]·버리는[捨] 여섯 가지 감각이 나타나기 때문에, 6×6=36, 즉 서른여섯 가지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이 36번뇌를 중생은 과거에도 했었고, 현재에도 하고 있고, 미래에도 할 것이기 때문에, 6×6=36에 삼생(과거·현재·미래)을 곱하여 108번뇌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108번뇌가 쌓여서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이루게 되고, 그 번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수히 왔다 갔다 하면서, 마음을 흩트려 놓기 때문에 중생은 번뇌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8번뇌는 108번의 절을 하는 동안 스스로 순화되어 삼매의 힘으로 변화되기에, 이 108배 속에는 번뇌를 좇아 흘러 내려가는 삶을 일심의 원천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다. 유전이 아니라 환멸의 삶, 번뇌 이전의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 부처님과 하나 되는 삶, 곧 성불(成佛)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지만, 번뇌는 끊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108배의 절은 번뇌를 끊는 의식이 아니라, 깊은 삼매(三昧)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방편이다. 삼매와 환멸과 성불! 이것이 우리가 108배를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또한 삼계(三界)의 견혹(見惑)=88사(使)와, 삼계(三界)의 수혹(修惑)=10혹(或)과, 여기에다 무참(無懺), 무괴(無愧), 혼침(昏沈), 악작(惡作), 뇌(惱), 질(嫉), 도회(掉悔), 수면(睡眠), 분(忿), 부(覆)의 10전(纏)을 합하면 108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불가(佛家)에서는 108번뇌, 108배, 108염주, 108계단, 108사찰, 108기도 순례 등과 같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8이란 숫자는 불교적 세계관을 함축한 숫자이니, 훈민정음의 글자 수와『월인석보』에 나타난 쪽수는 결코 우연(偶然)이 아니라, 불교적 가치관을 중시했던 세종의 종교관을 반영한 의도적인 맞춤의 숫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해진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을 내세우고는 있으나, 실제적인 목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니, 불교를 신봉했던 세종과 세조는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실천하려는 수단으로써 훈민정음을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서 지적한 바대로, 세종 이후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의 문헌은 65% 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세종 어지(御旨)를 통해서 본 훈민정음의 근본정신을 결론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교과서의 가르침대로 자주정신을 비롯한 애민정신과 실용주의 정신이란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기에 교과서의 풀이를 뛰어넘어 당시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사실의 논증을 통해 분석하면서 다시 새로운 눈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볼 수 있다.
  첫째, 어지(御旨)에 나타난 “異乎中國”의 해석을 ‘중국과 달라’로 보고, 중국에 따르지 않고 중국과는 달리 우리 식이라는 뜻을 내포한다며 주체성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달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중국과 달라’로 본 것은 해석 자체부터 잘못 되었고, 더구나 세종은 백성들의 어려움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를 우선하여 중시한다는 세종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자주정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둘째, 특히 애민정신이란 것에 주목해 보면, 세종은 어느 군주보다도 애민 정신에 투철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선왕조실록(세종편)에 의하면, 세종은 그 편안한 강녕전(康寧殿)을 두고도 서민들의 생활상을 이해하기 위해, 궁궐 안에 서민들의 집과 꼭 같은 초가집을 지어놓고서 강녕전에서 자는 것보다 그 초가에서 더 많이 잤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각별한 애민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어지의 명분으로 볼 때는 애민정신으로 볼 수 있으나, 앞에서 보았듯이 명나라에 대한 세종의 사대적(事大的)인 발언을 놓고 보면, 자기 나라 백성보다 사대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사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크게 가지고 있었으나,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만큼의 애민정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자주정신이니 애민정신이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명분으로 내세워 세종의 업적을 미화하여 과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실용주의 정신을 놓고 보면, 불교의 보급을 위해 훈민정음을 활용한 측면에서는 부분적인 실용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 외에는 실용정신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농경시대인 당시의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농업관련 서적이나 또는 의학서 등에 관한 서적을 훈민정음으로 발간했거나, 혹은 훈민정음으로 된 서당 교재를 만들었다면 마땅히 실용정신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어지에 나타난 훈민정음 정신이 실제로 애민정신과 실용정신에 부합했던가에 대해서, 그 실례(實例)를 통해 분석해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으로여겨,당대의『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석보상절(釋譜詳節)』과『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그 예(例)로 들어 보겠다. 우선『용비어천가』의 구성을 보자면, 1~2장의 서사(序詞)에서 조선 건국의 원대한 염원을 담고 있으며, 3~109장의 본사(本詞)에서는 천명(天命)에 의한 건국 찬양을 하고, 110~125장의 결사(結詞)에서 후왕에 대한 권계(勸戒)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이『용비어천가』는 정인지와 안지 그리고 권제가 지었던 바, 그 창작 동기는 조선왕조 개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밝혀, 조선 건국의 합리화를 홍보할 목적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천명(天命)임을 널리 알려 민심을 귀순케 하고자 하는데 있었으며, 또한 후대의 왕들을 권계(勸戒)함으로써 왕통의 확립과 경천근민(敬天勤民)의 정신과 자세를 심어 주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창업과 왕덕(王德)을 송축(頌祝)한 노래일 뿐이다.
  그리고 또한 교과서에서는 훈민정음을 실험함으로써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존엄성은 물론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창작했다고 그 동기를 설명하고 있으나,『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악장(樂章) 문학의 대표적 작품인『용비어천가』는 종묘제향(宗廟祭享)이나 궁중연락(宮中宴樂)에 사용했던 궁중음악으로 활용했던 노래임을 감안해 볼 때, 실용성을 시험하기 위해『용비어천가』를 지었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왕실 주변의 귀족계층에 한정된 문학의 대상에 불과했으니 실용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지은『석보상절』(세종 29년) 역시 마찬가지다.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一代記)를 주(註)와 함께 설명해 놓은 책인데,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왕명을 받아 훈민정음으로 지은 책으로, 세종의 비(妃)이자 수양 대군의 어머니인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월인천강지곡』(세종 31년)도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장편의 노래(상․중․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 수록)로 이는 불교 보급과 연관이 있다할 것인데, 이 모두가 백성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주로 사대부들과 왕실 내에서만 이루어졌으니 이 실용정신이란 것도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용정신과 연관을 지우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을 백성들에게 권장하는 칙서라든지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려는 기관의 설치와 같은 노력과 의지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불교와 관련된 서적에 주로 활용하였던 바, 훈민정음으로된『용비어천가』와『석보상절』과『월인천강지곡』등은일반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이 의도적 목적을 가진 필요성에 의해, 왕조 자체 내의 특권층에 국한된 활용에 그치고 말았다.
  만약에 훈민정음을 과거(科擧)의 시험과목으로 채택했거나, 또는 훈민정음으로 된 서당 교재나 농업과 의학 등과 관련된 서적을 훈민정음으로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배려를 통해, 일상생활의 편의를 도모했더라면 마땅히 실용정신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훈민정음의 활용이 특권계층의 전유물에 그친 것으로 볼 때, 어찌 실용정신을 교과서의 가르침만큼 그렇게 강조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異乎中國”에 대한 해석의 오류를 지적함과 동시에, 훈민정음 해설서인 해례본의 어지(御旨)를 풀이해 놓은 것을 두고서 자주정신과 애민정신 그리고 실용정신을 운위하는 것은, 어지의 내용을 과장된 미화로써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추호라도 어지의 정신을 폄하(貶下)하거나 훼손(毁損)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당시의 기록(실록)을 토대로 하여 어떠한 가감(加減)이나 과장과 미화(美化)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를 놓고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눈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세종 어지의 왜곡(歪曲)된 해석을 바로 잡아 보자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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