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는 은막에서 평생을 노역만 맡았었나!

▲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이원종(75) 씨
▲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이원종(75) 씨

  이원종(李元鍾, 75), 그는 1944년생으로,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148번지에서 태어난 토박이 경산사람이다.
  그는 1970년 3월, 26세의 나이로 전국에 3,500여 명의 응모자 중 30명을 선발(1/116대)하는 KBS 공채 9기생으로 당당히 합격한 경산 출신 탤런트이다.
  그로부터 그의 49년 연기 생활을 통해 토지, 젊은이의 양지, 왕릉일가, TV문학관, 산 너머 남촌을 비롯한 450여 편의 작품을 남겼고, 이로써 KBS 우수프로그램 연기상, SBS 연기대상 우수조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칠순을 반이나 훌쩍 넘긴 팔순을 앞두고 연극에 불모지인 자신의 고향 경산을 찾았다.
  배우이자 연극인인 이원종씨는, 전의(全義) 이씨(李氏)로, 고려?태조?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세운 공로(功勞)로 태조(太祖)로부터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통합삼한개국익찬(統合三韓開國翊贊) 2등에 책훈(策勳)된 후 전산후(全山侯)로 봉작(封爵)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 성절공(聖節公) 태사(太師) 이도(李棹) 선생의 30세손이다.

  또한, 그는 당시 대구를 오가면 운송업을 하던 부모님 슬하에 4남 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를 따라 지금의 대구동인초등학교를 3년간 다니다가 부모님이 고향 남산면 하대리로 정착함에 따라 남산초등학교를 거처 삼성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하였고, 중·고등학교는 자인중학교와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우연히 아버지를 따라 대구 시내 모 극장에서『에밀레종』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면서 아기를 용광로 속으로 집어넣는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배우 이원종씨의 어린 시절 회고이자, 그가 연극인이자 배우로 발돋움하게 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계기가 되었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에는 틈만 나면 고향마을(남산면 하대리) 지금의 도동서원 마루에 담요로 막을 치고 책에서 사본한 시나리오를 들고 친구들과 함께 신파극을 연습하였던 청소년기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저는 오로지 연극이 저의 전부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를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학 2년째가 되던 해, 갑자기 고향 부모님으로부터 송금되어오던 등록금과 하숙비가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제가 공부는 하지 않고 딴따라패에 들었다 해서 부모님이 강제로 공부를 못하게 했지요.”
  하는 수 없이 그는 남은 1년을 교수들의 배려로 청강생으로 마치고, 이듬해 육군 입대로 3년간이라는 공백기를 가져야 했고, 1969년에 제대는 하였지만, 고향에서 농사짓기에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무조건 서울로 상경하였던 것이 험난한 배우 이원종의 제2의 인생 여로가 되었다.
  그는 1970년 3월 공채 9기생으로 KBS에 입문하기 이전까지 서울극단(창조극단)에서 연극을 배웠다.
 “당시 저는 이 길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다. 고향에도 다시 갈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무조건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이듬해 동갑내기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은 하였지만, 살기는 너무나 막막하였다는 그는 KBS에 입문은 하였지만, 6개월 동안 교육 기간을 제하고는 아무런 보수도 없이 스스로 배역을 찾아 헤매어야 했고, 그 후 1년여간 방송 데뷔 첫 작품이라는 게 고작 엑스트라로, 또 출연자들의 그림자 노릇만 했지만 그나마 7~8천원의 출연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당시는 흑백 TV라, 26세에 입사한 저는 언제나 단역인 80대 노인역만 맡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우연히 저에게도 행운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당시 KBS 주말극인“고향”에 3개월 동안 출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여기서 제3의 연기 인생이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당시 김연진 연출가가 내 연기를 사보에 대서특필하게 되면서 이번 드라마는 노역자 발굴이라 논평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다음작인“여로”에 문중할배로 출연하여 이후 1년간의 생계는 해결되었다는 그는 또다시 3년여의 시련기로 한강 뚝섬에 천막을 짓고 체육관에 봉사(태권도 당시 공인 5단)하여 왔으나 이마저 접어야 했고, 그나마 작은 프로그램에도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는 후배들에 밀려 배역 맡기는 실로 하늘에 별따기 못지않았다 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70년대 중반에 우연히 저에게“전우”라는 프로에 3년간 1인 3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인민군 병사로, 또 한국군 하사역을 맡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게 되면서 이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 TV문학관에“토지”,“왕릉일가”와 미니시리즈 30부작에서 술주정뱅이 홍씨역을 맡아 최주봉, 박인환씨와 더불어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배우 이원종씨!
  그는 26세 때부터 80대 노인으로 살아왔고, 팔순을 앞둔 지금도 80대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도 젊은 청춘역을 맡아 열렬한 사랑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캐릭터는 언제나 80대에 그치고 있으니”
  하면서 잠시 회안에 잠기기도 하였으나, 금방 환하게 웃는 그는 천생 광대 같은 배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배우라기보다 자상한 이웃집 아저씨 모습이다.
  그가 고향 경산에 내려와 경산시립극단을 창단하고 예술감독을 맡게 된 이유 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고향 경산에서 평생을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살아보고픈 작은 소망에서 스스로 메가폰을 쥐고 고향 선후배와 함께 고향의 정겨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것이라 했다.
  지금까지 창단 이래 6회에 걸친 정기공연을 통해 그의 풋풋한 인간미와 이 땅에 남기고자 진솔한 이야기를 그의 연기 인생 속에 고스란히 담아가고 있다.
  그의 포부는 경산의 삼성현과 이 땅을 지켜온 옛 선현들의 경산사랑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고 싶다 하였다.
  연극인 이원종은 국민배우이자 자랑스러운 경산인이다.
  하지만 연중 2~3편의 정기공연과 찾아가는 공연 20~30회(학교, 복지관, 마을회관 등)에 소요되는 예산 5억여 원마저 예산사정이란 미명으로 모두 확보하지 못하여 내년도 공연에 차질이 우려된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1조 원 시대 경산시 예산에서 경산발전 10대전략“창의문화도시”건설을 위한 과감한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과 할애를 주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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