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경산에 정착한 발해국 후예이다.
  남천면 송백리 태재욱씨

 
  태재욱(74세)씨, 그는 얼핏 보아도 북방계열의 얼굴을 속 빼 닮았다. 불쑥 들어간 눈까풀에 짙은 눈썹, 그리고 크지 않는 몸매가 그를 그렇게 본 것이다.

  그가 오매불망하는 일은 1089년 전에 흩어진 발해국 고왕 대조영의 뿌리를 하루 빨리 현창(顯彰)하는 일이다.

  그는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이일에 몰두하였는지 전국 유수의 대학마다 발해사 연구학자는 빼놓지 않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언제부터인가 발해사 연구에 백의종군(?)하는 후손이란 닉네임까지 붙었다.

 “마을에 사는 집안 동생들까지 이젠 이 일에 손을 때라하지요.”

  그의 푸념 같은 하소연에는 작은 트라우마(trauma)가 있었다. 그의 학력은 경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는 학력을 초월한 발해마을 집성촌인 남천면 송백리에 대를 이어 살아온 발해박사이다.

  ▲ 고왕 대조영의 신위를 봉안한 추모제

 “내가 이일로 뛰어 다니니, 마을에선 혹 우리 마을이 문화재로 묶어져 땅값이나 내리지 않을까 그것을 걱정하지요.”

  왜소한 얼굴에 굵게 파인 주름살, 그 속에 수심이 가득한 70대 중반에 태재욱씨, 그의 걱정은 집성마을 동성바지들의 그러한 의식이 무엇보다 겁이 난다 했다.

  ▲ 영순 태씨 집성촌인 경산시 남천면 송백 2리

 “어제도 또 타성바지가 이주해 집을 짓고 있어요.”

  근래 그의 아내가 큰 병원에서 수술하고 퇴원했다는 데. 그는 가족의 안위보다 각성바지가 한 두세대 영순 태씨 집성촌으로 전거해 오는 것이 더 걱정이란다.

 “이러다간 수년 내로 각성바지 마을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산업화, 그리고 급격한 이농현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가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을 일가가 모두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문제는 달라 질 수 있겠지만, 지가(地價)가 상승 할수록 그에게는 걱정이 앞선단다.

 “정부의 배려로 여기에 문화마을이라도 조성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발해국 황제국의 후손이라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발해 사랑에는 무엇이든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한, 중국당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얼토당토 않는 역사 왜곡 발언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발해국의 역사는 고구려국의 연장을 의미하고 있다.

  발해국(渤海國)은 서기 698년~926년간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이다.

  발해의 건국으로 정식적인 남북국 시대가 열렸는데, 남국은 신라, 북국은 발해를 지칭한다. 이후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서 존속하였다. 수도는 발해 성왕 이후로 상경 용천부로 전하고, 초기는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으로 정하였으나 이후 해동성국이나 고려라고 불리기도 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거란족의 반란을 틈타 탈출하였고, 698년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대조영이 동모산 부근에서 건국한 자주국이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를 확장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건국할 당시 대조영이 앞에서와 같이 진국(震國)이라 하였으나, 713년 당나라로부터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명목상 책봉 이후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으로서 고려라는 국호도 사용하였는데, 당시 발해국이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는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고, 일본도 발해를 고려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926년 발해는 갑작스레 멸망했는데, 그 이유에는 백두산 폭발, 요 태조(거란)의 침입, 지도층의 내분 등 다양한 학설이 제시되고 있으나 모두가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발해국이 멸망한 이후 고왕 대조영의 후손들이 대거 옛 고구려 땅인 고려의 유민으로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후 지금의 영순 태씨는 대씨와 태씨로 분성 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으로 이거 하였는데, 이중 영순 태씨는 상주, 문경지역에서 임진왜란 직전에 지금의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전거하였다는 것이다.

 
  ▲ 마을 입구에 세워진 발해마을 집성촌 유래비

  1592년 당시 조정에서 통정대부를 지냈던 그의 입경산 선조 태순금이 당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당시 송천동)로 전거(奠居)하여 개척한 마을이 지금의 영순 태씨 집성촌이라 한다.

  마을 개척 당시는 약 100여 세대에 가까운 씨족이 집거하고, 전답도 400여 ha에 달하는 부촌이라 전한다. 하지만 당시 이 마을에 정착을 결정한 그들의 선조 태순금이 어떤 연유에서 북향마을을 그들의 집성촌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전하는 바 없다. 하지만 마을 앞에 불쑥 솟은 안산과 좌우를 두른 선의산 준령의 지형지세는 곧 언젠가 북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갈 기상이다. 그러니 그들은 정착 당시 여기 송백 땅을 그들이 그리워하는 고왕 대조영이 이룬 발해국으로 연상하고 향수를 그렸으리라는 후손들의 추측도 그리 허무맹랑하지는 안을 듯싶다.

 “김교수님! 제가 적은 글을 윤독해 주실 수는 없을 까요?”

  70노구에 수줍음까지 곁들인 그의 제안에는 어딘가 모르게 당당함이 있었다. 그가 필자에게 내민 논문이란 것은 작은 보고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그가 평소에 쏟아 부운 발해 사랑의 끈질간 집념이 담겨져 있었다.

 “이 글로 오는 9월, 경산양현회에 발표 자료로 활용할 것입니다.”

  내용이야 어떻던 너무나 당당해 보이는 그의 눈빛 속에서 필자는 그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나의 작은 소망은 우리 마을에 고왕의 위패를 모신 제대로 된 숭모전과 고왕의 능을 축조해서 위선하는 사업을 생전에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기에 소요되는 부지는 내 소유의 땅을 기꺼이 내놓겠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발해국 역사바로잡기에 70평생 한결 같은 마음을 모았던 태재욱(74)씨가 사는 모습이자, 인간상이다.

 “일족이라도 선뜻 나서지 않아요. 그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죠.”

  하지만 그에게는 토·일요일이면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고향집을 찾아 부모의 일손을 도맡아 처리해 주는 두 아들이 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고부터 선조님들께서 내 자식들을 보우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언제나 매사에 긍정적이다. 얼마 전까지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두 아들 내외가 금년 과일 농사는 모두 자식들이 도맡았다고 자랑했다.

 “우리 내외에게는 농사일을 못하게 해 놓고 주말이면 두 자식들이 몰려와 과실농사를 죄다 지었답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가득하다. 그것은 자신이 조상을 받드는 만큼, 별도 훈육 없이도 자식들이 스스로 효를 익히고, 실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는 이제 앞에 두 가지 목표만 이룰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칠순의 태재욱씨는 언제나 이 일에는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비록 그는 작은 키에 작은 자동차를 타고 동분서주하지만, 발해국을 현창하겠다는 그의 집념만은 영순 태씨들의 큰 바위 얼굴이다.

  이는 그만의 의지라기보다 국가가 참여하고, 지역자치단체가 동참하여야 할 우리 모두의 과업이기에 그가 나서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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