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曲
             李益
汴水東流無限春 隋家宮闕已成塵
行人莫上長堤望 風起楊花愁殺人

변하곡
              이익
변수동류무한춘 수가궁궐이성진
행인막상장제망 풍기양화수살인

변하의 노래
변하의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봄 정취 무한한데
수나라 문벌의 화려한 궁궐은 이미 티끌 되었네
행인들은 긴 둑에 오르더라도 멀리 바라보지 말지니
바람 일어 버들개지 날리면 사람을 시름겹게 한다네

곽종육 - 서예가
  이익(748~829): 당나라 때의 관료 시인으로 자가 군우君虞이며 감숙성 무위시甘肅省 武威市 사람이다. 대력 5년(769년) 진사에 급제하여 태자빈객 예부상서 등을 지냈다. 변하는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운하로 북경에서 절강성 항주에 이르는 중국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와 연결되어 있다.
  북주의 개국공신 양충의 장남인 양견(수 문제 재위 581~604))은 그의 사위인 선제가 죽고 나이 어린 정제가 등극하자 섭정을 하다가 황제의 가문인 우문 씨와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하며 마침내 북주의 마지막 황제인 정제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581년) 양견의 둘째 아들인 양광(양제 재위 604~618)은 심복인 장형으로 하여금 아버지 양견을 살해하고 수나라의 2대 황제가 된 후에 대운하를 건설하면서 둑을 따라 버드나무를 심고 여기에 40여 곳의 이궁을 지어놓고 향락을 즐겼다. 그러나 6년간 550여만 명이 동원된 대운하 건설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3년에 걸쳐 500여만 명이 동원된 3차례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하면서 수나라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양광의 외가 쪽 인척인 태원유수 이연(당 고조)이 장안을 함락한 후에 양제는 태상황으로 물러나 있다가 이듬해 50세의 나이로 호위무사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었다. 이연은 양제의 손자인 양유(공제)를 임시황제로 내세웠다가 이듬해 양제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양유로부터 황위를 선양받음으로써 수나라는 3대째 38년 만에 막을 내렸다. 변하곡은 수나라의 멸망과 권력의 무상함을 읊은 회고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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