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玄洲韻
                       金壽恒
自甘窮巷靜無依 門掩靑苔過客稀
每到夜深吟不寐 坐看窓月轉淸輝

차현주운
                       김수항
자감궁항정무의 문엄청태과객희
매도야심음불매 좌간창월전청휘

현주의 시에 차운하여
의지할 곳 없어도 스스로 만족하며 조용한 뒷골목에 살고 있으니
대문은 푸른 이끼로 덮여있고 지나가는 사람도 드물다
늘 밤이 깊도록 시를 읊어보지만 잠이 오지 않아
앉아서 창밖의 달을 보니 달빛은 한층 더 맑게 빛나네

곽종육(서예가)
  현주: 이소한(1598~1645)을 말함. 이소한李昭漢은 호가 현주玄洲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광해군 13년(1621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인조 때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수항(1629~1689): 조선 중기의 관료 학자 문인으로 호가 문곡文谷이며 본관은 안동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효종 2년(23세 1651년)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며 모두 다섯 번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고 난 후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당시는 남인과 서인 사이에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뜨거웠다. 예송논쟁은 효종과 효종비가 죽자 효종의 아버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두고 벌인 논쟁이다. 인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병지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패하면서 첫째 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 뒤 소현세자가 조선에 돌아온지 몇 달 만에 죽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뒤에 임금으로 즉위(효종)하였다. 효종이 죽고 나서 1차 예송논쟁(1659년)이 끝나고 뒤에 효종 비 인선왕후 장 씨가 죽자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2차 예송논쟁(1674년)이 발생하였는데 남인이 1년 복을 주장하는데 대해 서인은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보고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효종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적통을 이었다고 보고 남인의 1년 복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조정은 남인이 득세하게 되고 김수항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뒤에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후에 영의정이 되었다가 숙종 15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탄핵을 받아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후 숙종 20년에 사면복관되었다. 저서로 문곡집이 있다.

저작권자 © 경산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