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杜少府之任蜀州
                王勃
城闕輔三秦 風煙望五津
與君離別意 同是宦遊人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無爲在岐路 兒女共沾巾

송두소부지임촉주
                 왕발
성궐보삼진 풍연망오진
여군이별의 동시환유인
해내존지기 천애약비린
무위재기로 아녀공첨건

임지인 촉주로 가는 두소부를 보내며
삼진이 돕고 있는 장안의 대궐문에서
바람과 안개 자욱한 오진을 바라본다
생각건대 그대와 함께 이별하는 것은
같이 벼슬살이하는 나그네이기 때문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가까운 이웃과 같으니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아녀자같이 수건을 적시지 말자

곽종육(서예가)
  두소부: 두 씨 성을 가진 왕발의 벗이며 소부는 관직이름이다.
삼진: 옹 새 적 세 나라.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옹 새 적의 세 나라로 나누고 장한 사마흔 동예를 왕으로 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오진: 양자강에 있는 다섯 개의 나루터 즉 백화진 만리진 강수진 섭두진 강남진을 말한다.

왕발(650~676): 당나라 때의 천재 문인으로 자가 자안子安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다. 양형 노조린 낙빈왕과 함께 초당사걸로 불린다. 왕발은 여섯 살에 문장을 잘 지어 그로 인해 유명하게 되며 20세가 되기 전에 조산랑을 제수 받았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관의 노비를 숨겨준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이 샐까봐 두려운 나머지 그 자를 대수롭지 않게 죽인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서 죽게 되었으나 다행히 사면이 되어 명부에서 이름이 빠졌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왕복치가 이 사건에 연좌되어 교지령(교지: 지금의 베트남 지역)으로 좌천되었다. 왕발은 이에 아버지를 살피러 가던 길에 남창을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 도독 염공이 새로 등왕각의 수리를 완료하고 9월 9일에 손님을 초청하여 크게 회합할 때 그기에 참석하게 되었다. 등왕각서는 이때 지은 시문이다. 그 후 염공으로부터 비단 백 필을 선물 받고 그곳을 떠났으며 남방의 더운 곳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파도에 의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왕발의 문장은 아름답고 화려해서 그에게 글을 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그 대가로 받은 금,은 비단이 집안에 가득 쌓였다고 한다. 등왕각은 당 태종의 동생 이원영이 도독으로 있던 시기인 653년에 강서성 남창현에 지은 누각으로 이원영이 등왕이었기 때문에 등왕각이라고 불려진다. 등왕각서는 제갈량(181~234)의 출사표 이밀(224~287)의 진정표 왕희지(307~365)의 난정서 한유(768~824)의 제십이랑문 소식(1036~1101)의 적벽부와 함께 명문으로 손꼽힌다.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은 호북성 무한의 황학루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와 함께 중국의 3대 누각이다. 문집 30권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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