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희 -

다시 만나는 당신
- 김영희 -


저는 당신을 언제부터 만났던 걸까요? 아장아장 걸음마 떼던 그 때부터 일까요? 학교 다녀오면 미숫가루 한 그릇 먹여 들로 데려가시던 그 시절부터일까요? 대학시절 처음 나온 타향에서 그리운 마음에 전화하면 “그래, 잘 있으면 됐다.”고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으시던 그 무렵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언제부터 만났던 걸까요?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엉거주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수화기를 든다. 통화 시간은 1분 남짓. 그는 가는 귀를 먹었다. 자식들의 목소리는 알아듣지만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 못하는 일이 잦다. “진지는 잘 드셨어요?”에 대한 대답은 “그래, 나는 잘 있지.”로 돌아올 때가 다반사다.
초창기에는 수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자식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며 그의 동문서답을 받아들인다.
환갑을 지난 후부터 그는 병원 출입이 잦았다. 대부분 구급차에 실려 급히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때마다 자식들은 하던 일을 팽개치고 서둘러 병원으로 뛰어갔다. 병원 한 번 가자고 사정을 해야 못이기는 척 따라나설 정도로 병원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기도 하셨지만 병원에 갈 만큼 크게 이상이 있은 적도 없었다.
그런 분이었기에 자식들은 더욱 놀랐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했던가? 동맥경화, 고혈압, 뇌진탕, 등등의 이유로 일 년에 두세 번 입원하시기를 10년 넘게 반복하다 보니 이제 그가 웬만큼 아파도 자식들은 큰 걱정을 않게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꽃놀이다, 온천욕이다 하며 하하호호 무리지어 다녀도 그는 들에서 살았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면 괭이며 호미를 들고 들로 나섰다.
하루 세 끼를 모두 들에서 해결하고 어둠이 온 동네를 휩싸고서야 빈 밥그릇이 담긴 보자기를 들고 집으로 들어서곤 했다. 그런 그에게 자식들은 그가 세상을 사는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 속에서 자식들만은 제대로 키워 내겠다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그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말하곤 했다.
“내 속옷만 남겨 놓고 다~ 가져가라.” 자식들이 조금만 어긋나도 그는 회초리로 다스렸다.
그는 회초리 속에 엄하고도 깊은 사랑을 담아낼 줄 알았다. 그의 모습은 항상 위풍당당했고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내 할 일 다 했다. 그만 쉬련다.” 오남매의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그의 칩거는 시작되었다.
밤낮으로 하던 농사도 접고 TV를 친구삼아 방 안에만 머물렀다. 노는 방법도 배워야 하는 것인지 그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줄도 몰랐다. 그 무렵 그의 자식바라기도 시작되었다. “나는 너희들이 자꾸 보고 싶다, 언제 오냐?” “이번 주도 바쁘냐?” 매일매일 걸려오는 자식들의 전화로는 자식에 대한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았다. 보면 특별히 할 말도 없으면서 그는 자꾸 자식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당신은 저의 우상이셨습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저를 무릎 꿇리시고 천자문을 가르치시던 당신, 학교에서 아무리 좋은 상을 받아도 칭찬 한 번 하지 않으셨던 당신. 하지만 저는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눈빛은 “역시 내 자식이야.”라고 말하고 있었거든요. 언제나 당당하고 곧으셨던 당신. 학교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얘기하라면 저는 언제나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은 제게 그런 분이셨습니다.
지금 당신은 참으로 솔직한 분이십니다. 젊은 시절 자식들을 키우며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셨던 속내를 이제야 내보이십니다. “나도 너희들의 조막만한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걷고 싶었다.” “우뚝우뚝 커 가는 너희들을 마음껏 칭찬해주고 싶었다.” 이제 당신은 제가 당신의 앙상한 손을 잡아도, 당신의 허연 머리칼을 쓰다듬어도 빙그레 웃기만 하십니다. 제가 지금 만나는 당신은 지금 그대로 솔직한 나의 아버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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