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종은 -

 뒷 모습
                              - 윤종은 -

시댁이 서울인 나는 설 명절이라 서울로 향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들뜨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안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잠들고 조용한 차안에서 나는 남편의 졸음운전을 감시하고 있었다.

틈틈이 커피를 대령하고 껌을 입에 넣어 주며 둘도 없는 현모양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운전이라도 한 듯 남편과 같은 긴장 속에 있던 나는 슬슬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조촐한 살림살이를 실은 작은 용달차가 보였다.

요 며칠 강추위에 눈도 많이 내리고 했으니 젖을세라 비닐로 엉성하게 묶어둔 살림살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단출한 삶이 짐작된다. 그런데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 사이로 단단히 접어 한쪽 구석에 잘 끼워 세워둔 휠체어가 맘이 쓰인다.

한 달 전의 일이다. 층간 소음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층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면서 여태까지 보지 않던 신문을 구독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점점 자라 신문도 같이 보고 교육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신문사 아저씨는 일층이라 도난이 많다며 꺼려하셨지만 구독하게 되었다.
모닝커피 한잔과 신문 보는 재미가 쏠쏠해질 무렵 신문이 오다 말다 하는 것이었다.

신문사 아저씨와 통화를 했다. 꼬박꼬박 넣고 있다고 하셨다.
하루는 대문 앞 신문 주머니에 넣어 두고 또 하루는 우편함에 넣어 두기로 했지만 띄엄띄엄 없어지긴 마찬가지 이었다. 신문사 아저씨는 분명 넣었으니 도난당한 것 같다며 CCTV를 확인해 보고 대책을 마련하자고 하셨다.

누군가가 내 물건을 가져간다는 경험을 해 본적이 없던 나로선 두려움이 앞서는 상황이었다.
나는 CCTV를 확인하기에 앞서 경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에 ‘당신 것입니까? 남의 것을 왜 가져갑니까? 당신의 뒷모습 CCTV로 다 보입니다. 양심을 속이지 마시길……. ‘이렇게 두 장을 적어 엘리베이터에 한 장 붙이고 우리 집 대문에 한 장 붙여 두었다.

애들은 창피하다고 난리였지만 두려웠던 내 마음은 반복되는 도난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있었다.  3일간을 떼지 않고 붙여 두니 3일간은 신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알아들었겠지 싶어 종이를 떼어내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대문에 매달린 홀쭉해진 신문 주머니를 보자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것을 훔쳐간다는 기분은 이제 두려움을 뛰어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를 조롱하는 그 도둑을 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아파트 관리실로 당장 달려갔다.

관리실 직원께 상황을 이야기 하고 당장 오늘 새벽4시부터 7시까지 확인해 보았다.
다들 아직은 따뜻한 잠자리에 있을 이른 시간인지라 한참을 기척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쯤 되자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우유 배달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드디어 우리 집에 신문을 넣으시는 아저씨가 집 앞 우편함에 신문을 넣으셨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이라 그분의 얼굴은 확인이 안 되었지만 옆구리에 둘둘 말아 끼운 것으로 봐선 신문이 분명했다. 위층부터 차례로 내려오면서 넣으시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밖이 점점 밝아 오고 있었다.
우편함 쪽으로 가는 사람은 수위 아저씨로 보이는 한분과 키가 크지만 등이 약간 굽어보이는 남자. 두 사람 뿐이었다. 아침 7시까지 세 번을 돌려 확인해 보아도 그 두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우편함 쪽으로 가까이 가는 것은 보였지만 가져가는 모습은 정확하지 않으니 관리실 쪽에서도 난감하다고 했다. 그 날 이후부턴 아예 CCTV가 바로 찍히는 곳에 신문을 올려 두기로 하였다.
범인을 꼭 잡아야 하기에 신문 아저씨와 그렇게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 슈퍼 아저씨께 속상한 예기를 털어 놓으니 우리 라인에 치매 노인이 살고 계시는데 그 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다. 슈퍼의 물건들도 자주 들고 가시고 문 앞에 걸어 놓은 상가 열쇠도 가져가신 적이 있다고 하셨다. 열쇠 달라고 했다가 시비가 붙어 그 할아버지께 맞은 적도 있어 경찰도 불렀었다고 하셨다. 알고 보니 공직 생활을 오래 하셨었는데 퇴직 후 치매가 발병해 온 가족이 애를 태우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경고의 메시지를 보고도 훔쳐 가는 것을 보니 간이 큰 범인이거나 웬 사이코의 짓 일거라 철석같이 믿던 나는 왠지 모르게 맘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에 앞선 분노가 눈 녹듯이 녹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깜깜한 새벽 우리 집 신문 주머니에서 마치 자기 것 인양 신문을 꺼내 옆구리에 끼우곤 그 할아버지는 어디를 가시는 것일까?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 온 인생이 치매라는 병으로 말미암아 퇴색되어지고 귀찮은 노인네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처지를 알기나 하시는 걸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부디 당신 걱정에 밤 낮 마음 졸이고 빨리 완치하시길 바라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으셨으면 하고 부질없는 바람을 가져 본다.

이젠 신문 아저씨도 번거로웠는지 우편함과 신문 주머니에 따로 따로 2부를 넣어 두신다.
어떤날은 신문이 두 군데다 없어지기도 한다. 황당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젠 그 할아버지가 세상 소풍 끝내시는 날까지 지금 보다 더 나빠지시지 않기를, 마지막까지 가족은 기억하시며 행복하시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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