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성면 덕천1리 동구(좌측 이 마을 당산목)
▲ 용성면 덕천1리 동구(좌측 이 마을 당산목)

  용성인의 상징인 거대한 용산(龍山)이 동북으로 아스라이 다가서는 이 마을은 경산시 최 동극(東極)인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는 오로천(烏鷺川)이 풍덕산(豊德山)과 우덕산(牛德山, 또는 有德山), 덕곡산(德谷山)을 포근히 감싸 안은 용성면 덕천1리이다.
  덕천1리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이 마을의 지형 지세는 마을 앞 풍덕산과 마을 뒤 우덕산, 덕곡산이 포근히 감싼 배산임수(背山臨水) 격에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이다.
덕천1리는 옛 자인현 하동면 구역에 속하였던 구역으로, 1949년까지 용성면사무소가 존치하였으나, 동년에 큰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당리로 옮겨졌다.
  1984년에 출간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덕천1리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큰 덕을 바란다는 뜻으로 망덕(望德)이라 하였으나, 이후 망덕(望德)이 망덕(亡德)과 발음이 구분되지 않는다 하여 마을 앞 풍덕산과 마을 뒤 유덕산, 덕곡산의 3덕(德)자의 큰 덕(德)자와 오로천의 “내(川)”자를 따 덕천(德川)이라 고쳐 불렀다고 하나,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테면, 덕천1리는 앞에서와 같이 처음 망덕(望德), 즉 덕을 바란다는 유가적 의미가 있었으나, 그 발음이 여의하지 않음으로 바랄 망(望)자는 없애고, 큰 덕(德) 자는 살려 앞의 오로천(烏鷺川)을 상징화하여 큰 덕(德)이 냇물처럼 흘러 모이는 마을이란 지명 유래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 덕천1리 마을 전경
▲ 덕천1리 마을 전경

  이는 곧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는 용(龍)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 마을 선인들의 지혜와 바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윗마을 덕천2리는 개척 당시 송림지(松林池)에서 흘러내리는 수로와 물줄기로 대부분 하천 중심에 밭을 일구고 있었으나, 이 물줄기의 흐름이 밭을 일구는 길이라는 의미를 붙여 도전(道田)이라 지칭하였다 전한다.
  덕천1리는 경주김씨와 김해 김씨가 집성을 이루고, 덕천2리인 도전은 영천 이씨가 집성(集姓)한 가운데, 타성바지로 류씨(柳氏), 염씨(廉氏) 등이 함께 세거(世居)하고 있다. 

▲ 구룡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마을 앞 오로천
▲ 구룡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마을 앞 오로천

  여기에 덕천1리에 집성한 경주김씨 입향조(入鄕祖)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義兵) 활동을 하셨던 인물로, 자인현 율곡동(지금의 울옥리)에서 태어난 송재공(松齋公) 김우련(金遇鍊) 선생은 임란 후에 자인 복현운동에 앞장섰던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선생의 선고(先考)이다.
  송재공 김우련 선생은, 백씨(伯氏) 김우용 선생과 경산 임란 창의의 금자탑을 세운 주역으로, 화왕산 곽재우 진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로, 임란 당시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慶州府)에 속한 관계로, 김우용 선생과 김우련 선생은 경주황성공원의 ‘경주임란전적비’에 그 공적이 새겨져 있다.
  이에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선생은 김우련 선생의 아들로 조선 인조14년(1636), 청 태종이 한양에 침범한 이른바 병자호란 당시 경주 부윤의 압정 속에서도 재빨리 의병을 모아 자인현민 백현룡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구국 대열의 선봉에 섰고, 또 경주부에 속현 된 지 실로 620년만인 1637년(인조15년)에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선생은 병자호란 때 왕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이 식량부족으로 청에 화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삼락봉(三樂峯) 밑에 띠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푸른 대나무 천 그루를 심으며 통곡하였다 하여, 스스로 자신의 호를 취죽당(翠竹堂)이라 불렀다는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덕천1리 소재 취죽당 김응명 선생을 배향하는 남천서원
▲ 덕천1리 소재 취죽당 김응명 선생을 배향하는 남천서원

  훗날 김응명 선생을 기리는 재당(齋堂)을 1700년에 지금의 남산면 하대리에 지역유림에서 건립하였던 것을 대원군(大院君)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손되어 선생의 후손들이 대부분 덕천 1리로 전거(轉居)한 후라 일제강점기 이후 용성면 덕천1리 유덕산 기슭으로 이운(移運)하였다 한다.
  당시만 해도 경주김씨의 100여 호에 달하는 가구가 운집하였는데, 지금은 이농(離農) 현상이 극심하여 60여 호 남짓이다. 이중 경주김씨가 40여 호, 그밖에 김해 김씨, 청도 김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동구 밖에 서 있는 고목은 이 마을의 당산목(堂山木)으로, 경주김씨와 김해 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각성(各姓)바지와 화합·소통을 위해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어언 40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을 포근히 감싼 뒷산 준령은 마치 큰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우덕산(牛德山)이라 하였고, 이에 대한 향약(鄕約)도 엄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근대 덕천1리 출신 경주김씨 위선사(爲先事) 인물로는, 초대 용성면장을 역임한 김성호(金聖鎬, 재임 1910~1928)씨가 경주 숭혜전(崇惠殿) 105대 전참봉(殿參奉)을 역임한 바 있으며, 제146대 숭혜전 전참봉으로 도임(到任)한 김상조씨가 2번째이다. 이외에도 관계(官界), 학계(學界), 법조계(法曹界), 지역 유림 대표, 문학인(文學人)으로 거명되는 인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전거(奠居)한 김해 김씨와 소수의 타성바지로 청도 김씨, 남원 양씨가 세거(世居)하였는데, 1949년, 면사무소(덕천1리 소재)가 원인모를 방화로 소실될 당시 화염(火焰) 속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용성면의 호적부를 안전하게 대피시켰다는 이 마을 출신 공직자 김해 김씨의 후손과 공군사관학교 출신인 양모 준장(准將), 이밖에 관계, 학계 등에 소수 인물이 경주김씨 이외 이 마을을 빛낸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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