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숙
                                             김미숙

  친구가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다니던 직장엔 휴직을 내고 아이들은 친정 부모님한테 맡겨두었다.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몇 개월째 별거 중이었는데 인도를 다녀와선 미뤘던 이혼서류를 법원에 넣을 참이었다. 그곳에 가면 무언가 삶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에게 아이들이 잘 있는지 가끔씩 그녀의 친정집에 들러 봐 달라고 부탁했다.  

  두 달 만에 그녀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차 한 잔 마시자며 연락이 온건 입국 다음날이었다. 결이 고왔던 긴 머리는 윤기가 다 빠진 듯 푸석했고, 지적이던 하얀 얼굴은 거무스름하게 그을렸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어느 때보다 맑고 투명해 보였다. 

  오랜 여행에서의 피곤함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않을 것이며 남편과 죽을 때까지 같이 살겠노라고 했다. 두 달 만에 확 바뀐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침을 튀겨 가며 남편과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던 그녀였기에 달라진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의 부정적이었던 생각이 긍정적인 사고로 바뀐 바람에 나는 죽을 때가 되었느냐는 농담까지 했다. 삶에 대한 애정도 샘솟는 듯했다. 자신이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남편에게 잔소리만 늘여놓았던 것을 후회했고 아이들에게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너무 줬다며 자책했다. 

  그녀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여행 중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이 많았다고 했다. 불가촉천민은 인도의 카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개나 고양이보다 못한 천대를 받는단다. 그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이제껏 너무나 편하게 살았는데 그 행복함을 모르고 살았다며 여행하는 동안 살아온 인생을 조용히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며 부드럽고 편한 표정을 내비치었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 친구는 골 깊었던 남편과의 오랜 싸움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했다.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던 그녀의 가정도 웃음이 넘쳐나는 집으로 바뀌었다. 

  그해 가을 남편의 발령으로 가족이 모두 서울로 떠났고 이듬해 봄날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삶이 궁금해졌다. 그 후 우연히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인도 근현대사의 순간들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리얼하게 구성되었다. 주인공 다무의 삶을 따라가면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핍박받는 불가촉천민의 생생한 일상이 그려졌다. 작가가 그의 부모님이 겪은 삶을 글쓴이가 소설처럼 풀어놓은 이야기였다. 높은 계급의 사람과는 접촉은 물론 물도 함께 마실 수 없다고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짐승보다도 더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의 계급주의는 말도 되지 않는 허튼 소리 같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다며 그들의 삶이 가엾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친구의 마음을 책을 통하여 헤아리게 되었다. 가슴이 막히는 울부짖음도 느꼈고 가슴 벅찬 환희도 맛보았다. 자식에게만은 자신의 계급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한 작가의 삶이 너무나 처절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을 바꿔서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만 다무처럼 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친구는 인도 곳곳을 여행하면서 몸소 느꼈던 것이다. 인도의 계급주의는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결합되었지만 다른 곳의 계급과는 다르다는 것을. 중세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면서도 카이스트 제도가 사라졌다지만 불가촉천민은 여전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의 아버지인 다무는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났지만, 카스트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목숨 값으로 몇 명이나 되는 자식들 모두가 지독한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영웅으로 탄생한 것이다. 

  신도 버린 사람들’, 신도 버렸다는 불가촉천민. 다무는 불가촉천민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버렸고, 친구는 가족을 위해 혼자 잘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편과 아이들을 선택했다. 불가촉천민들의 아픔과 고통과 억압이 눈에 밟혀서 밥이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지 않는다던 친구! 

  눈망울 글썽이며 콧물까지 흘리던 친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던 그들이 무척이나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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