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은
                                                  이다은

  고향은 생각만 해도 포근하고 아련한 추억이 꿈틀거리는 곳이다. 내 고향은 경주시 광명동이다. 골 깊은 곳에 동네가 있어 ‘골안’ 이라 불렀다. 7남매 막내인 아버지로부터 5남매 막내로 태어나 40대 초에 부모님과 남편을 잃은 채 버거운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늘 부모님이 그리워 향수에 젖어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칠 남매 중 고모 한 분만 ‘방네’로 시집가고 큰집, 작은집, 고모 집까지 이웃 되어 살았다. 서로에게 따스한 울타리가 되고 쉴 그늘이 되어주며 사랑과 돌봄 속에 인정이 넘쳤다. 마당 가장자리에 큰 솥 걸어놓고 도토리묵, 메밀묵, 두부까지 집에서 만들었다. 엄마와 언니가 마주 앉아 맷돌 돌리던 모습이 아련하다. 큰 솥뚜껑 뒤집어 부친 호박전, 김치전, 부추전을 부치며 매캐한 연기와 함께 먹거리를 즐기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농번기에 힘드셨던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큰집, 작은집, 고모 집을 순회하시면서 막걸릿잔에 정을 나누며 고단함을 이겨내셨다. 지금은 모두가 떠나고 80 넘은 사촌 올케 둘만 고향을 지키고 있다. 대구, 경북권에서만 살다가 용인에서 8년 동안 인생 유학을 마치고 경산으로 돌아왔다. 자동차 시동만 걸면 30분에 갈 수 있는 고향이 지척에 있지만 그리운 얼굴들이 사라졌다. 

  부모님과 큰오빠도 돌아가신 후에는 언니가 부모 맞잡이다. 나와 띠동갑인 언니가 팔순을 지나더니 추석 전에 엄마 산소에 갔다가 집에도 한 번 가 보자고 했다. 언니는 내가 여덟 살 때 경주시 현곡면으로 시집을 갔다. 6.25를 겪은 가난 속에 살던 때라 시조부모까지 모시면서 고생을 많이도 했다. 세월의 연륜 앞에 머리는 흰 꽃이 만발하고 달팽이 허리가 되었다. 엄마가 손수 바느질하여 만든 목화솜 이불 싣고 산 너머 시집가는 날 언니 치맛자락을 놓지 않고 울며 보채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언니처럼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다. 

  동생 온다고 대파와 무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인 소고깃국을 먹고 언니와 함께 부모님 산소로 향했다. 추억의 목화밭에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가 나란히 누워계신다. 저만치 경부선을 달리는 차량 안전을 기원하시며 온종일 따스한 햇볕 비추는 동산에 영원히 잠드셨다. 오랜만에 부모님 산소를 찾게 된 언니는 무덤을 어루만지며 서럽게 울었다. “나도 이제 엄마 아부지 만나러간다”라면서 흐느끼는 언니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불효자는 가슴이 아려왔다. 

  고향 집에 들어서니 정든 집은 철거되고 동서남북을 점령한 호박이파리만 부채 손을 내밀었다. 언니와 함께 순식간에 설계도면을 완성하며 추억의 앨범을 넘겼다. 과연 이곳이 그곳인가 모두가 어디를 갔나? 다시 와서 옛날로 돌아가 살아보고 싶었던 내 고향이 아니던가! 앞집, 옆집, 아랫집까지 모두 철거된 채 폐기물만 쌓여있다. 부자로 살았던 뒷집 귀호댁에는 타지에서 오신 분이 새 단장하여 살고 있었다. 

  어릴 적 고향 마당에 깔려 있던 그 멍석이 그립다. 솔가지 위에 쌀 등겨를 붓고 도랑에서 막 베온 풀 한 아름 갖다 덮으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깃불도 정겹던 곳이 고향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고구마, 감자, 옥수수 삶아 먹고 정을 나누며 살았다. 청명한 하늘에 별이 가득 내려앉는 밤, 소녀는 밤하늘 별을 보며 시인의 꿈을 키우며 자랐다. 오빠 언니 따라다니며 가재 잡고 메뚜기 잡고 놀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엄마 따라 텃밭에 들어서면 윤기 나는 풋고추, 상추, 오이, 가지, 호박, 부추 허름한 소쿠리에 금방 채워진다. 엄마표 된장찌개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돈다. 누렁소 앞세워 쟁기질하시고 돌아와 지게를 받치고 헛기침하시던 아버지가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다.

  언니와 사촌 올케를 뒤로하고 친구들과 놀던 추억을 떠올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정든 골목길이 내가 그리던 그림과 달라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명절에는 해마다 아랫마을 윗마을 줄다리기도 하고 까까머리 아이들 시끌벅적 굴렁쇠 돌리며 놀던 그 넓은 골목이 왜 그리 좁아졌는지, 땅따먹기 줄넘기하며 놀던 친구 집 흙담 너머에도 잡초만 무성했다. 

  여기저기 폐가 흔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허허롭기 그지없는 내 고향, 막내 오빠 친구가 외지에서 돌아와 소를 키우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나마 든든하고 고마웠다. 대가족이 좁은 공간에서 북적거리며 살던 내 고향이 점점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당산나무 아래 놀이터는 마을버스 주차장으로 변하고 아기 소리가 멀어진 지는 수십 년이 지났다. 

 손자 셋을 두고 70 고개를 바라보는 이제야 효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부모님 살아생전 자식 키우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가 보지 못한 회한에 다가오는 추석 앞에 가슴이 시려온다. 아무리 후회한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부모님! “어-화 능차 어-어화” 꽃 상여 타고 가신 엄마 아부지 추석이 다가오니 왜 이리 그리운지… 꿈속에서라도 찾아오신다면 철없이 속 썩였던 지난날을 사죄하고 꼭 안아드리며 사랑표현도 하고 싶다. 한 번 가신 그 길이 그리도 멀고 먼지 아직도 돌아올 줄 모르신다. 

  철거되었거나 폐가 된 집 너머에 팔십 전, 후 노인만 지키고 있는 내 고향, 2025년에는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에 도달하여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다는 통계가 실감 나는 현장, 허허롭기 그지없다. 부모님 부재중인 고향이라도 명절 앞에 더욱 그리워지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고향 땅을 밟고 온 것이 향수병의 치료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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