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子吟
孟郊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유자음
맹교
자모수중선 유자신상의
임행밀밀봉 의공지지귀
수언촌초심 보득삼춘휘

나그네 되어 짓다
자애로운 어머님은 손 안의 실로
나그네가 될 아들에게 입힐 옷을 만드네
떠날 때 임하여 촘촘하게 꿰매는 것은
늦게 돌아올까 봐 두려워하는 뜻이네
누가 말했던가? 한 치 풀의 마음이 어떻게
석 달 봄햇살을 알아 은혜에 보답하리

곽종육(서예가)
  맹교(751~814):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가 동야東野이며 호주 무강湖州 武康 사람이다. 50세 때인 정원 12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율양위 등을 지냈다. 율양현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있어서 맹교는 때때로 가서 물 부근에 앉아 술에 운명을 맡기고 거문고를 타며 종일 시를 짓거나 배회하여 그만 관청의 업무가 많이 해이해졌다. 현령이 이를 고을에 아뢰자 위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을 임시로 보내고 맹교의 봉급을 반으로 줄여버려서 이에 관직을 사퇴하고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맹교는 생업의 일에는 서툴러서 가난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갖옷과 솜옷은 떨어져 실로 단단히 매어 합친 것이었다. 이런 맹교의 청빈한 삶을 두고 명나라 사람이 쓴 몽초시화에는 맹교와 가도가 모두 가난하게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한다고 하나 믿을 수 없다. 아마 시는 반드시 궁핍한 사람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공교로와질 뿐이다고 하였다. 그의 시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많이 근심하고 해마다 집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힘써 괴로워하는 것이 기이하고 껄끄러워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지 않게 하였다. 같은 것으로 차거借車라는 시에 수레를 빌려 이삿짐을 실으니 이삿짐이 수레보다 적네라고 하였다. 함지집 10권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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