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6일부터 8일까지 경북 경산시 남산면 인흥리 소재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제45회 경북 예술제”가 성황리 막을 내렸다. 한국예총 경상북도연합회가 주최하고, 경상북도·경산시가 후원한 이번 예술제는 국악 경상북도지회, 무용협회 경상북도지회, 사진작가협회 경상북도지회, 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 미술협회 경상북도지회, 연극협회 경상북도지회, 연예 예술인협회 경상북도지회, 음악협회 경상북도지회가 주관했다. 이 행사를 주최한 한국예술 권오수 경상북도 연합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300만 도민과 경북 예술
최희욱 전 경산시장(사진)이 지난11월 8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8세. 최희욱 전 시장은 1935년 2월 7일,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일광리(당시 쟁광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최 전 시장은 고향에서 용성국민학교와 인접한 자인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학으로 1955년에,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처 1962년에는,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시장 재임 중)에는 동 대학 환경대학원을 졸업,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 영남대학교 졸업 후 경상북도 지방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
경북 경산시 점촌동 현성산(賢聖山) 선광사(禪光寺, 주지 선웅 스님))는 지난 9월 9일(토요일) 오후 7시 선광사 개산(開山) 1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는 산사음악회(주관 선광사, 후원 선광사 신도회)를 선광사 경내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무르익어가는 초가을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는 이 날 축제는, 선광사 개산 10주년 사적을 영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과 함께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주지 덕조(德照)스님과 본사 국장 및 말사 주지 다수와 권오홍 신도회장, 윤두현 국회의원, 배한철 도의회 의장, 경산시의원 다수와
8월 4일 오후 2시, 경산시 용성면 외촌리(이장 최준구, 63) 다목적 광장에서 『외촌리 창조적마을만들기사업』준공식 가졌다. 이날 준공식에는 조현일 경산시장, 윤두현 국회의원, 박순득 경산시의회 의장, 용성면 기관단체장과 지역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과 더불어 축하 음악회 등, 축제적 분위기 속에 섭씨 37도가 오르내리는 한더위 속에 더위를 식히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최준구 이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본 사업은 소외된 오지(奧地)마을에 대하여 “창조마을사업”이란 정부 지원 단체가 대전광역시에 소재하고 있어,
8월 5일 10시 경산시 용성면 고죽1리(이장 전유원, 73) 마을 입구 쉼터 앞에 고죽리 주민 일동 이름으로 『고죽리 마을 유래석』을 설치하였다. 전남 고흥에서 생산된 고흥석으로 조성된 이 유래비는 고죽리 출신 수필가 전명수(77) 씨가 글을 짓고, 금화석공예가 조각(彫刻)을 맡았다. 이 유래석에 적은 비문(碑文)은 A4 용지 2매 분량에 모두 3개 단락(段落)으로, 먼저 고죽(孤竹) 마을의 최초 형성 시기와 행정구역을 수록(收錄)하였고, 다음으로 마을 개척(開拓)과 집성촌(集姓村)의 구성(構成)과 고죽2리, 효가리(孝加里), 대
(사)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 최종규(76) 회장은 경북 경산시 자인면 읍천리가 고향이다. 그의 본관(本貫)은 양천최씨(陽川崔氏)로, 그가 사는 자인면 읍천리는 자연부락 상 1~2구로 나뉘어 있으며, 최 회장이 사는 읍천 2구는 전체 호수가 18가구로 이 중 16가구가 양천최씨로, 사실상 자인면 읍천리가 자인면 지역에 양천최씨 집성촌(集姓村)이기도 하다. 최 회장과 김해김씨 부인 사이 슬하(膝下)에는 토목기술자로 서울 유명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1남을 두었다. 그는 20대에 청운(靑雲)의 꿈을 꾸고 경북 포항시에 소재한 ㈜제철화학에 공채
김유신문화사업회(회장 유윤선)는 6월 27일 경산재향군인회관에서 약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김유신화랑정신을 기리는 사생대회 시상식을 가졌다. 제1회 김유신화랑정신을 기리는 사생대회는 지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6월 9일 경산 마위지 근린공원에서 ‘제1회 김유신 화랑정신을 기리는 사생대회(김유신문화사업회 주관, 경상북도, 경산시, 경산교육지원청, 경산재향군인회 후원) ’를 개최하였다. 유소년 작품 총 323점을 접수한 이번 사생대회는 외부 전문가 3인을 구성하여 김유신장
경산시립극단 제11회 정기 공연인 가요 뮤지컬 ‘울고 넘는 박달재’가 개막 첫날부터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을 가득 메웠다. 이날 열린 공연은 며칠 동안 지루하던 장대 장마로 무료하였던 시민들의 가슴 속에 열광과 희망을 안겨주는 뜻깊은 공연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에 경산시립극단 이원종 예술감독은 2023년 경산시립극단 제11회 정기 공연은 시대와 세대의 아픔을 〈삶의 근원과 모정〉이라는 주제를 통해 누구에게나 품어져 있는 고향의 향수를 그려낸 작품이라며, 전통가요에 열광하는 요즘 주옥같은 명작들을 한국음악의 정서와 현대적 음
(가칭)하양 6·25 전승 기념회(회장 최재림, 85)는 6월 25일 오전 10:00시 하양초등학교 교정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영천 전투에서 승리를 이끄신 고 유재흥 장군 전승 기념비(1956년 건립) 앞에서 회원 등 각계 시민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獻花), 분향(焚香) 등으로 참석자들의 뜻을 모아 나라를 구하고 지키기 위하여 의롭게 목숨을 바친 순국 전몰 용사와 참전용사의 명복을 비는 추모행사를 봉행했다. 이어 오전 11:00 시에는 하양새마을금고 회의실에서 6.25 전승 기념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는
(사)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최종규, 76)는 오는 6월 22일(목요일)부터 6월 24일(토요일)까지 3일간 경산시 자인면 계정 숲과 자인면 소재지 일원에서 2023년도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문화재)를 경산시와 경상북도, 문화재청 후원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지난 6월 12일 오전 10시 계정 숲 도천산 산신단(到天山山神壇)에서 산신제(山神祭) 봉행(奉行)을 시작으로 3일간의 일정으로 2023년도 단오제(端午祭)가 카운타운에 들어갔다. 금년도 경산자인단오제는 첫(목요일)날인 6월 22일 09:00~10:00까지 자인면 소재지 일원에서
자인향교(慈仁鄕校)는 2월 28일 오전 10시 자인향교 대성전(大成殿)에서공기(孔紀) 2574년 춘계 석전대제를 봉행했다. 이날 춘계 석전대제에는 지역 유림, 기관단체장, 시민 등 50여 명이 참여해 옛 선인들의 학덕을 유학 정신을 추모했다. 제례(祭禮)는 이희문(李熙文) 전교가 초헌관(初獻官), 유학 이승곤(李承坤)이 아헌관(亞獻官), 유학 송금목(宋琴穆)이 종헌관(終獻官), 유학 전명수(전명수), 유학 김재암(金在岩)이 분헌관(分獻官)을 소임(所任)한 가운데 엄숙히 봉행(奉行) 되었다.
이 마을은 영천 최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이다. 곡란리(谷蘭里)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의 개척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승되는 마을 유래에 의하면, 곡란리는 1320년쯤 밀양(密陽) 손씨(孫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후 1592년을 전후하여, 영천(永川) 최씨(崔氏)와 담양(潭陽) 전씨(田氏), 전의(全義) 이씨(李氏)가 전거(奠居)하였던 마을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는 영천 최씨 일가의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 선생과 그의 아들이 의병(義
지난 1월 13일(금요일) 오후 2시에 경산지역 3개 향교 원로 및 전교가 주관한 ‘경산군지국역발간편집위원회(위원장 서지수)’가 1933년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발간(發刊)된 것으로 알려진 한자판(漢字版) 3책 상·중·하 본(本)인 경산·하양·자인 지역유림 89인이 주도하여 발간(發刊)한 경산군지(慶山郡誌)를 경산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를 국역(國譯)으로 발간하였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주최 측 서지수 편찬위원장과 조현일 경산시장을 대신한 이강학 부시장, 최희욱 전 경산시장, 천기찬, 최재림, 송병수, 서상규, 유동식, 한효근,
경산시 용성면 곡신리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용산(龍山)의 동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개척한 후 흥해(興海) 최씨(崔氏)와 순천(順天) 박씨(朴氏)가 이주하여 살게 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역사적 인물은 임란 의병장(義兵將)이었던 죽은(최팔개), 죽포(최팔원)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이 마을은 열녀 남원(南原) 양씨(梁氏) 마을로, 조선 헌종이 1846년 사액(賜額) 정여각(旌閭閣)을 내린 곳이기도 하며, 마을 지명유래가 그렇듯 곡신(谷新)이란 용산(龍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십이지로 보는 토끼띠는, 12띠 중 네 번째 띠로, 묘년생(卯年生)을 가리키고, 시(時)는 묘시(卯時)로써, 오전 5시부터 오전 7시까지를 말하며, 방위로는 정동(正東), 달은 봄 2월, 계절은 2월 경칩에서 3월 청명 전까지, 오행으로는 목(木), 음양으로는 음(陰), 대응하는 서양 별자리로는 물고기 자리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보편적으로 토끼띠생은 착한 천품을 타고난 이상주의자로 평가되고, 감수성(感受性)이 뛰어나며, 유머가 풍부하여 예능 계통에 재능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토끼띠는 꿈을 중시하고, 항시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보다 재능(才能)만 믿고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결점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설화(說話)나 민화(民話)에 표현되는 토끼는 조그마하고, 귀여운 생김새, 놀란 듯한 표정에서 약하고 선한 동물, 그리고 재빠른 움직임에서 영특하고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동물로 묘사되는 반면, 매사에 양보보다 도전을 즐기는 단점 또한 없지 않다. 이는 거북이와 토끼의 설화에서도 거북이의 침착함보다 토기의 즉흥적이고 단순한 사고가 오히려 종례에 화가 되는 예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인간의 궁합에서도 실제의 12지에 등장하는 토끼를 대두시키며, 이에 대한 특징적 요소를 결합시키기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를테면, 토끼는 원숭이의 궁둥이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자기 빨간 눈알과 원숭이 궁둥이의 색깔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묘신원진(卯申怨嗔)이 된 이유이다. 이로써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느 곳에도 원숭이가 사는 곳에 토끼가 함께 공생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토끼는 돼지의 분비물 냄새와 힘을 부러워하고, 양(羊)의 초연한 청승스러움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해묘미삼합(亥卯未三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2023년 계묘년(癸卯年)의 癸는 열째 천간(天干) 癸의 음(陰)으로, 흑색(水)에 해당하는 “흑토끼”의 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해묘미삼합(亥卯未三合)을 익히고 배우는 지혜(智惠)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
본지 문화부 국장 김종국(사진 74) 박사가 지난 12월 10일 문화재 지정 및 전승 보존 유공자로 경북도지사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김 박사는 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을 역임한 민속학 정학예사(국립중앙박물관장 발행) 출신으로, 지난 2010년, 42년간의 공직을 마치고 그간 틈틈이 이 분야에 공부해 온 것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며, 부족하지만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찾아가 봉사하고 싶다고 소회(所懷)하였다. 그간 김 박사가 지정한 문화재(文化財)는 보물(寶物), 지방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등, 모두 30여 점에 달하며, 그 분야 또한 불화(佛畫), 불상(佛像), 불구(佛具), 고문서(古文書), 서책(書冊), 조각품(彫刻品) 등 다양하다.
▲ 용성면 덕천1리 동구(좌측 이 마을 당산목) 용성인의 상징인 거대한 용산(龍山)이 동북으로 아스라이 다가서는 이 마을은 경산시 최 동극(東極)인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는 오로천(烏鷺川)이 풍덕산(豊德山)과 우덕산(牛德山, 또는 有德山), 덕곡산(德谷山)을 포근히 감싸 안은 용성면 덕천1리이다. 덕천1리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이 마을의 지형 지세는 마을 앞 풍덕산과 마을 뒤 우덕산, 덕곡산이 포근히 감싼 배산임수(背山臨水) 격에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이다.덕천1리는 옛 자인현 하동면 구역에 속하였던 구역으로, 1949년까지 용성면사무소가 존치하였으나, 동년에 큰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당리로 옮겨졌다. 1984년에 출간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덕천1리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큰 덕을 바란다는 뜻으로 망덕(望德)이라 하였으나, 이후 망덕(望德)이 망덕(亡德)과 발음이 구분되지 않는다 하여 마을 앞 풍덕산과 마을 뒤 유덕산, 덕곡산의 3덕(德)자의 큰 덕(德)자와 오로천의 “내(川)”자를 따 덕천(德川)이라 고쳐 불렀다고 하나,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테면, 덕천1리는 앞에서와 같이 처음 망덕(望德), 즉 덕을 바란다는 유가적 의미가 있었으나, 그 발음이 여의하지 않음으로 바랄 망(望)자는 없애고, 큰 덕(德) 자는 살려 앞의 오로천(烏鷺川)을 상징화하여 큰 덕(德)이 냇물처럼 흘러 모이는 마을이란 지명 유래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 덕천1리 마을 전경 이는 곧 구룡산(九龍山)에서 발원하는 용(龍)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 마을 선인들의 지혜와 바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윗마을 덕천2리는 개척 당시 송림지(松林池)에서 흘러내리는 수로와 물줄기로 대부분 하천 중심에 밭을 일구고 있었으나, 이 물줄기의 흐름이 밭을 일구는 길이라는 의미를 붙여 도전(道田)이라 지칭하였다 전한다. 덕천1리는 경주김씨와 김해 김씨가 집성을 이루고, 덕천2리인 도전은 영천 이씨가 집성(集姓)한 가운데, 타성바지로 류씨(柳氏), 염씨(廉氏) 등이 함께 세거(世居)하고 있다. ▲ 구룡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마을 앞 오로천 여기에 덕천1리에 집성한 경주김씨 입향조(入鄕祖)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義兵) 활동을 하셨던 인물로, 자인현 율곡동(지금의 울옥리)에서 태어난 송재공(松齋公) 김우련(金遇鍊) 선생은 임란 후에 자인 복현운동에 앞장섰던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선생의 선고(先考)이다. 송재공 김우련 선생은, 백씨(伯氏) 김우용 선생과 경산 임란 창의의 금자탑을 세운 주역으로, 화왕산 곽재우 진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로, 임란 당시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慶州府)에 속한 관계로, 김우용 선생과 김우련 선생은 경주황성공원의 ‘경주임란전적비’에 그 공적이 새겨져 있다. 이에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 선생은 김우련 선생의 아들로 조선 인조14년(1636), 청 태종이 한양에 침범한 이른바 병자호란 당시 경주 부윤의 압정 속에서도 재빨리 의병을 모아 자인현민 백현룡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구국 대열의 선봉에 섰고, 또 경주부에 속현 된 지 실로 620년만인 1637년(인조15년)에 자인현 복현 운동에 앞장섰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선생은 병자호란 때 왕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이 식량부족으로 청에 화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삼락봉(三樂峯) 밑에 띠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푸른 대나무 천 그루를 심으며 통곡하였다 하여, 스스로 자신의 호를 취죽당(翠竹堂)이라 불렀다는 애달픈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덕천1리 소재 취죽당 김응명 선생을 배향하는 남천서원 훗날 김응명 선생을 기리는 재당(齋堂)을 1700년에 지금의 남산면 하대리에 지역유림에서 건립하였던 것을 대원군(大院君)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손되어 선생의 후손들이 대부분 덕천 1리로 전거(轉居)한 후라 일제강점기 이후 용성면 덕천1리 유덕산 기슭으로 이운(移運)하였다 한다. 당시만 해도 경주김씨의 100여 호에 달하는 가구가 운집하였는데, 지금은 이농(離農) 현상이 극심하여 60여 호 남짓이다. 이중 경주김씨가 40여 호, 그밖에 김해 김씨, 청도 김씨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동구 밖에 서 있는 고목은 이 마을의 당산목(堂山木)으로, 경주김씨와 김해 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각성(各姓)바지와 화합·소통을 위해 심었다는 회화나무가 어언 40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을 포근히 감싼 뒷산 준령은 마치 큰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우덕산(牛德山)이라 하였고, 이에 대한 향약(鄕約)도 엄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근대 덕천1리 출신 경주김씨 위선사(爲先事) 인물로는, 초대 용성면장을 역임한 김성호(金聖鎬, 재임 1910~1928)씨가 경주 숭혜전(崇惠殿) 105대 전참봉(殿參奉)을 역임한 바 있으며, 제146대 숭혜전 전참봉으로 도임(到任)한 김상조씨가 2번째이다. 이외에도 관계(官界), 학계(學界), 법조계(法曹界), 지역 유림 대표, 문학인(文學人)으로 거명되는 인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전거(奠居)한 김해 김씨와 소수의 타성바지로 청도 김씨, 남원 양씨가 세거(世居)하였는데, 1949년, 면사무소(덕천1리 소재)가 원인모를 방화로 소실될 당시 화염(火焰) 속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 용성면의 호적부를 안전하게 대피시켰다는 이 마을 출신 공직자 김해 김씨의 후손과 공군사관학교 출신인 양모 준장(准將), 이밖에 관계, 학계 등에 소수 인물이 경주김씨 이외 이 마을을 빛낸 인물로 거명되고 있다.
▲ 내 사랑 춘향 공연장을 찾은 천마아트센터 입구 로비 경산시립극단의 제10회 정기공연‘내 사랑 춘향’이 11월 30일과 12월 1일 이틀에 걸친 공연이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에서 성황리 펼쳐졌다. 이번에 공연된 ‘내 사랑 춘향’은 고전소설 춘향전을 뮤지컬 형식의 현대적 감각과 퓨전(fusion)을 가미한 해학적 표현을 가미한 작품으로, 이틀에 걸친 공연을 통해 1,500여 관객들에게 모처럼 마음을 여는 큰 박수를 받았다. 여기에는 대구·경북 지역 유명 배우 26명의 열연과 함께 국악, 현대음악, 트로트 등 다양한 음악들이 무대를 가득 메움으로 그간 코로나19로 마음에 문이 닫혔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장을 여는 활력소가 되었다. ▲ 영남대학 천마아트센터 중앙무대 이에 이원종 경산시립극단 예술 감독은 이번 작품은 두 달여 동안 배우와 스태프진 40여 명이 관객들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였다는 소회를 밝히면서 모처럼 쌀쌀한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공연장을 가득 메워준 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를 지켜본 문화계 한 관계자는, 이번 작품의 주요 화소(話素)는 주인공인 춘향이와 이몽룡에 고전적 이미지를 춘향의 거친 캐릭터와 왜소하고 샌님 같은 이몽룡의 캐릭터로 반전시킴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장르마다 삽화(揷話)되는 세련된 뮤지컬은 관객들의 막힌 가슴을 활짝 열게 하는 대역전으로 한껏 돋보이는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 내 사랑 춘향 속에 뮤지컬 한 장면 이틀 동안 총 2회에 걸친 이번 공연은 혹한(酷寒) 공연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관객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관객은 모두 손을 모아 큰 박수를 보냈다. 한편 공연이 끝난 후 공연장 입구를 떠나지 못한 관객들은 이번 공연이 이로써 막을 내림을 못내 아쉬워하며, 이와 같은 공연이 상설화될 수 있는 공연장과 문화예술 부분의 지속적인 지원 방안을 관계 당국에 주문하기도 했다.
▲ 용성면 소재지 권역을 알리는 면 표지석 고죽(孤竹)1리가 소재한 경산시 용성면은 본래 신라시대 노사화현(奴斯火縣), 기화(其火)라 하였고, 훗날 자인현의 상동면과 하동면 구역이었으나, 지형상으로 압독주의 최 동극(東極)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신라의 입성(入城) 통로이자 남쪽을 여는 관문(關門)이었다. 1914년 부군(府郡) 통폐합에 따라 자인현 상동면과 하동면, 그리고 청도군 일위면 석현리 일부를 합하여 용성면이라 하였다. 관할구역은 면소재지 당리(堂里)를 중심으로, 덕천(德川)·송림(松林)·부제(釜堤)·곡신(谷新)·곡란(谷蘭)·용산(龍山)·대종(大宗)·가척(加尺)·용천(龍川)·용전(龍田)·부일(夫日-掛日)·매남(梅南)·내촌(內村)·외촌(外村)·도덕(道德)·고죽(孤竹)·미산(美山)·고은(古銀-古方里)·일광(日光-爭光) 등 20개 마을이 구성되어 있으며, 면계(面界)로는, 동쪽으로 청도군 운문면, 남쪽으로 청도군 금천면, 매전면, 서쪽으로 남산면과 자인면 북쪽으로 진량읍과 영천시 대창면을 경계하고 있다. 용성면의 역사를 가름하는 자료로는 용성면 일대에 고루 분포된 수백 기의 지석묘(支石墓)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의 개간 사업과 70년대의 농경지 정리 사업으로 모두 훼손되어 현존하는 것은 150여 기에 불과하지만, 당시 사라진 지석묘를 모두 합한다면 300기는 훨씬 넘었다. 또 출토된 많은 석기(石器)와 토기(土器) 등으로 미루어,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부락(部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용성(龍城)이란 지명은 면의 주산인 용산(龍山) 정상에 축조된 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산은 면의 서계(西界)인 남산면 갈지리와 용성면 곡신리, 용산리와 경계를 이루며, 이 산은 해발 435.2m에 불과하지만, 용산이란 지명은 이 산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오래전 설화를 근거하고, 또한 산성에서 옛부터 이 지역을 사수하였다고 하여, 용산 성에서 용산의 용자와 산성의 성(城)자를 발췌한 것이라 한다. 용성면의 지형·지세는 동(東)으로 구룡산(九龍山)을 중심으로 남서(南西)로 반룡산(盤龍山), 용산(龍山)이 길게 띠를 이루며 우뚝 솟아있고, 북(北)으로는 금학산(金鶴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 용성면 소재지권 일대 전경 동쪽의 구룡산은 해발 674.8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동서로 용산과 마주하고 있어 마치 용성인의 기개를 말해 주듯 육중한 자태이다. 용성은 소재지 서남쪽을 불쑥 솟아오른 용산과 동의 새벽을 여는 구룡산은 이른바 새 아침의 작열한 태양을 여는 관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죽1리는 면 소재지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금학산 수계(水系)의 하류(下流) 마을이다. 이 마을은 1, 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1리는 조선 초기 천안(天安) 전씨(全氏)가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였으며, 고죽 2리는 조선말 김해(金海) 허씨(許氏) 허지수(許智壽) 일가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고죽1리 전경 1984년에 출간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이 마을의 지명은 본래 마을 뒤에 큰 대나무가 자생하여 고죽이라 하였으나 그 후 죽전(竹田)이라 고쳐 부르자 마을에 환란이 잦아 다시 고죽으로 고쳤다 전승되고 있다. 성씨는 천안 전씨, 김해 허씨, 김해 김씨가 주를 이룬다. 또한 고죽리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대흥사(大興寺) 사지의 흔적과 창건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천안(天安) 전씨(全氏)의 시조는 전섭(全聶)으로, 그는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우고,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이후 시조인 전섭(全聶)의 29세손인 고려 개국공신 전락(全樂)은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대구 공산전투에서 싸울 때,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던 인물로, 그 후 삼사(三司)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면서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이로부터 천안(天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죽1리를 개척하였다는 죽계(竹溪) 전극창(全克昌) 선생은 무엇보다 19세에 임란 발발과 더불어 우국충정으로 지역 청장년과 규합(糾合)하여 의병을 창의하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서편 금학산 천안 전씨 선영에 조성된“조선국천안전공지묘(朝鮮國天安全公之墓)”의 묘갈문(墓碣文)에 의하면, 죽계 선생은 19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상투를 올리고, 뜻을 같이하는 일족을 뽑아 창의(倡義)하여 오목천(烏沐川)으로 밀려온 왜적(倭敵)을 자인현역 의병(義兵)들과 합세하여 물리치고, 이어 화왕산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 의병장 진영에 들어가 참모역을 맡아 군사를 도모함으로 큰 공을 세웠다 하였으며, 임란 정유재란이 끝난 후 고향 고죽에 돌아와 집을 짓고 원근의 벗들과 강론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했다. 선생은 이후 진사 취죽당 김응명(金應命)과 한강(寒崗) 선생의 문하에서 이석담(李石潭), 김익재(金懼齊) 등과 도(道)와 의리(義理)로 사교(社交)하다가 병술년(丙戌年) 모일 향년 73세에 별세하였다. 또한 천안 전씨 집성촌인 고죽1리에는 1970년대 한의원을 열어 인술(仁術)을 펼친 이재(易齋) 전해인(全海印) 의인담(義人談)이 남아있다.▲ 전일재 앞에 세워진 이재 전해인 선생 인술 기념비 천안 전씨 재궁(齋宮)인 전일재(全一齋) 앞에 세워진 그를 찬양하는 기념비에는 당시 성균관 전학인 최규환이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김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공의 사람 되심은 순후(淳厚)하시고 너그러워 셨도다. 몸가짐에 항상 조심하고 집안을 바로 다스리었으며 조상(祖上)을 높이 받들고 친척들을 사랑하셨다. 선영(先塋)을 수축(修築)하여 의례(儀禮)를 갖추시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를 받드시고, 족보(族譜)를 만들어 간행(刊行)하시니 선조(先祖)들의 사적(事蹟)이 자세히 밝혀졌도다. 마음은 이미 높은 경지를 깨달으시니 글도 또한 문장(文章)이 되셨도다. 능히 인술(仁術)에 통달하시니 명성(名聲)이 사방에 떨치어 셨도다. 뭇사람들을 구제(救濟)함을 사업(事業)으로 삼으셨으니, 어느 누가 칭송(稱訟)하고 찬양(讚揚)하지 않았으리오. 온 일가를 단란하게 감싸 주시니, 화기(和氣)가 항상 온 집안 가득하였도다. 효성(孝誠)스럽고 우애(友愛)로우시고 충성(忠誠)스럽고 신의(信義)가 두터우시니 높은 덕망(德望)이 온 고을을 교화(敎化)하였도다. 이러한 뜻을 돌에 새김은 드높은 유덕(遺德) 자손만대에 전해지기를 바람이로다.”하고, 국역(國譯)은 영남대학교 이장우 교수가, 근서(謹書)는 이공우(李公雨) 향토 서예가가 맡아 1979년 청명 일에 천안 전씨 문중원 일동이 이 비를 세웠다 하였다. 천안 전씨가 집거(集居)하고 있는 고죽1리는, 멀리 동극(東極)의 구룡산(九龍山)이 발원한 우백호(右白虎) 줄기가 금박산을 이루고, 그 금박산이 금학산(金鶴山)이 되어 이 골에 충의(忠義)와 인술(仁術)을 남겼으니, 어찌 천안(天安) 하지 않으리오. ※ 본 원고는 천안 전씨 문중원의 증언과 내 고장 전통(1982, 경산군),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산의병창의(2016, 김종국), 용을 그리는 사람들(2022, 김종국), 경산임란의병항쟁(1999, 경산문화원) 등을 참고문헌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