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진 구(자유기고가)


  무관심이 만든 집단 살인

  중국 후베이성에 사는 88세 노인 리다예씨가 집에서 1백미터 가량 떨어진 야채시장 입구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만 주위에 있던 많은 시민들은 누구 하나 그를 도와주지 않았으며, 1시간가량 지나서야 그를 찾아 나선 가족들에 의해 발견돼 뒤늦게 병원으로 후송됐다. 오랜 시간 쓰러져 있었던 탓에 코피가 그의 기도를 막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응급처치가 늦어 결국 사망했다.

  중국 퉁샹시 원화로 원화주택단지 재래시장에서, 마트의 셔틀버스가 5살 남자아이를 치고 지나갔는데 시장 주위에 있던 행인들 모두 아이를 구하기는커녕 방관했다. 방치된 아이는 뒤늦게 발견한 30대 청년이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지만 응급조치가 늦어 숨지고 말았다.

  정의의 기본마저 실종된 사회다.

  다행히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웃에게 이런 정도로 무관심하지는 않다.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최소한 응급조치를 위한 연락이나 조치는 취 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정의로움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시적인 사건에 대한 조치 정도에 국한되고, 사회 문제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기부문화 등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인이 정의로워야 한다.

  29세에 MIT대학 부교수가 된 세계적인 학자 노암 촘스키는 그의 저서 ‘지식인의 책무’에서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한다.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이런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자는 우리가 속한 지식인 계급의 기본적인 실천 원리가 이 기초적인 도덕률조차 거부하고 있다가 질책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낸 한완상 교수는 그의 저서 ‘민중과 지식인’에서 지식인을 ‘지식인과 지식기사’로 구분한다.‘지식기사’는 지식의 분석과 관찰에 그칠 뿐 인간과 사회의 아픔에는 무관심하다. 사실은 말하되 진실을 증언하지 않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식기사는 지배집단의 조역으로, 소위 딸랑이로 자리하게 된다.

  지식기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을 위해, 사회에서 배운 지식을 약자를 억압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지배 권력에 협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불의에 묵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아야 할 교수, 공직자, 전문직종 종사자, 기타 대학을 졸업한 많은 식자층들이 오히려 사회의 암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지식인’은 지식인은 서민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다소 무지한 국민들과 ‘진실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함께하고자 한다. 불의에 협조하지 않고, 침묵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습득한 지식이 명하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크고 작은 억압과 구속을 받는다.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점점 지식인이 줄어들고 지식기사가 판을 친다.

  심지어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주는 가르침도‘젊은이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개인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 너 개인에게 해로운 사회적인 정의는 피하도록하고 너 혼자라도 그런 자리를 피해라’고 가르친다. 어른이 가르칠 일이 전혀 아닌데 현실은 이러하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런 사회는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석유 매장량 세계1위로 경제가 미국과 스위스 수준이었던 남미의 베네수엘라, 미국과 힘을 겨루며 미국을 능가할 수도 있다던 소련, 영국의 부흥에 앞서‘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세계 해양 최강국 스페인, 이밖에도 로마, 베네치아 등 수많은 부국들은‘정의롭던 나라가 어느 순간 정의롭지 못하게 되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식인이 죽은 나라, 지식기사가 판치는 정의롭지 못한 나라로 변해가며 멸망해 갔던 것이다.

  대통령직선제 이후 군부 시절인 노태우 대통령까지도‘공약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하나 지키고자 하는 것이 없다. 군사정권 시절보다 민주화는 더 후퇴 되었다. 정책은 부자들을 향한다.

  즉, 정부가 소수를 위한 정책을 행하면, 종편을 중심으로 언론들이 찬양하고, 비판하는 세력은 국정원과 검경이 나서는 심각한 독재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침묵하는 모든 지식인들이 용기를 내어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지식인과 깨어있는 국민이‘용기’를 갖는 사회이다.

  비굴하게 잘 먹는 것 보다는 당당하게 적당히 먹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비굴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 보다는 당당하게 초야에 있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비굴하게 자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상사의 바르지 못한 명령에 비굴한 웃음으로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제안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지식인에게는 정의로운 사람에게 가해지는 크고 작은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는‘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나라가 선진국이다.

  선진국을 말하는 척도는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국민이 행하는 행동에 얼마만큼의 자유와, 정의와 진실이 담겨 있는냐’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는 삶의 질과 국민 행복지수로 이어져,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 가치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에 빠져 가까운 이웃조차 져버리는 중국 사람들은 중요한 하나를 잊고 있다.
 ‘나와 내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일은 멀지 않아 내 주위에 반듯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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