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2-05-21 01:50 (토)
[독자기고] 난포고택(蘭圃故宅)
[독자기고] 난포고택(蘭圃故宅)
  • 편집부
  • 승인 2022.03.16 2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난포고택 솟을대문
▲ 난포고택 솟을대문

  어제가 경칩(驚蟄)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개구리는 번식기라 알을 까는 시절이다. 그런데도 봄이 올듯하면서 멈칫거리는 모양새다. 햇살은 따사로운듯하면서 찬바람이 손을 시리게 한다. 귀촌이랍시고 고향에 들어온 지도 3개월이 지나고 있다. 고향은 항상 포근하고 편안하다. 언제 쳐다보아도 넉넉한 진산이 용산(龍山)이다. 용산의 동쪽 자락에 깊은 골을 이루고 옹기종기 집을 지어 촌락을 이루고 있으니 곡란리라 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멋진 숲이 반기는데 왕버들,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30여 그루가 곡란숲을 이루고 있으며 아름답게 꾸민 정자가 서 있다. 

  배산임수형인 곡란마을의 이름은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골안 또는 고란이라 부르다가 곡란(谷蘭)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동네가 넓고 주민이 많이 살고 있어 옛날부터 용산, 두곡, 산대, 수동, 북녘, 남녘 등 7개의 동네를 이루고 있다. 난초 골짜기라는 뜻의 곡란리는 대부분 평지로 이뤄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풍수학으로 보면 곡란리의 지세는 전체적으로 청룡인 남쪽이 높고 북쪽의 백호가 완만하게 낮아지는 형국이다. 그래서 동남쪽 골짜기의 용산지와 회곡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을 앞 개울을 지나 외백호 끝자락에서 수구를 이루고 이 수구는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백호의 끝자락에 수구막이 나무를 심어 비보림(裨補林)으로 삼았다. 곡란 숲은 비보림이자 방풍림이라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며 가꾸어 나간다. 

▲ 안채
▲ 안채

  마을 중앙을 거쳐 소천 고개를 넘어가면 운문댐과 운문사나 언양, 울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연결되어있다. 이 도로변에 난포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난포고택은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운용로 792(곡란리)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고택이다. 곡란은 필자의 외가 동네라 어린 시절에 자주 놀러 왔던 곳이지만 난포고택은 그저 부잣집쯤으로만 알고 지냈는데 문화재 공부를 하다 보니 고향에 소재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난포 선생을 새롭게 만나 뵙고 고택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오늘 걸음을 하게 되었는데 난포 선생의 후손인 최주근 박사가 친절하게 안내와 설명을 해주었다. 

  고택 앞에는 쇄석을 깔아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있고 솟을대문이 앞을 가린다. 솟을대문은 두리기둥을 세웠고 출입문을 중심으로 한쪽은 방이고 다른 쪽은 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 앞에는 큼직한 바위에 난포고택이라 새겨 놓았다. 난포고택은 경산에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민가 고택으로는 유일하며 평지에 다소곳하게 자리하여 편안함을 안겨준다. 당초에는 12채의 집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주택 중앙으로 도로를 내면서 주택의 규모가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되었으나 6백 년을 이어온 고택이라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하여 1975년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수오당
▲ 수오당

  난포고택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사로 전주를 방어했던 난포 최철견 선생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명종 원년(1545)에 지었다고 하는데, 건축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17세기 전후의 집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도 참화를 입지 않았다고 난포공실기(蘭圃公實記)에 전한다. 가경 14년이라고 쓰진 막새기와와 상량문의 중수기록이 있어 순조 9년(1809)에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09년에 중수한 상량문에 후손들에게 남긴 덕담이 담겨있다.“수우후곤 불고불후개이 경복 어우사천(垂雨後昆 不故不朽介以 景福 於寓斯千) 너희 후손들이 대대로 내려가면서 쇠퇴하지 않고 모두 복되게 만사형통하여 잘 살아야 한다.”난포고택은 길지 중의 길지로 손꼽힌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임명받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전국의 길지를 조사한 후 난포고택을 대표적인 주택 36개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난포고택은 정침, 아랫사랑, 중사랑, 방아실, 행랑채와 마루 그리고 사당 등이 고루 갖추어진 대규모의 양반집이었으나, 지금은 안채, 행랑채, 사랑채, 사당, 수오당(守吾堂)이 남아있다. 재실인 수오당(守吾堂)은 최근세에 용산(龍山)에서 이건(移建)한 건물이다. 넓은 마당에 서향한 안채가 있고 좌측에 남향한 아래채, 안채, 뒤쪽 동남으로 사당이 서 있다. 안채는 –자형으로 앞면 7칸, 옆면 1칸 반의 규모이며 향 좌측에서부터 부엌 2칸, 안방 1칸, 대청 2칸, 작은방 1칸, 마루방 1칸 순이다. 가운데 5칸은 옆면이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양쪽 1칸씩은 눈썹지붕을 덧달아서 팔작지붕처럼 만들었다. 안채 맞배지붕의 끝을 장식하는 눈썹 처마는 난포고택의 백미라 하겠다. 사람의 눈썹을 닮아 눈썹 처마라 부르는데, 들이치는 비바람도 막고 햇볕도 가리기 위한 장치라 하겠다. 난포고택에서 본 눈썹 처마는 한옥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대청은 들문을 달아 막았으며, 뒤쪽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방과 이어지도록 하였다. 간반통(間半通)으로 앞면에 퇴칸을 두었고 안방 뒷벽엔 고미다락을 설치하였다. 이 집의 특색은 마루 앞에도 문을 달았다는 점이다. 마당에서 바라보면 부엌은 널문, 안방과 건너방은 머름 위에 두 짝 띄살창, 대청은 두 짝의 띄살 분합문, 마루방은 외짝 살대문이다. 행랑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인데 지금 한창 복원공사 중이다. 사당은 맞배지붕에 정면 2칸, 측면 1칸 앞퇴가 없는 가묘형이다.

 안채 뒤뜰에는 수백 년이나 묵은 배롱나무 아래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큰 고인돌이 보존되어 있다. 곡란리에는 곳곳에 고인돌이 많았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고인돌을 들어내거나 땅속 깊숙이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고인돌은 고택의 뒤뜰에 자리 잡고 있어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된다. 이곳의 고인돌은 사당의 조상님과 함께 난포고택은 물론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 사랑채
▲ 사랑채

  솟을대문 담장 옆에는 능소화가 자라고 사당과 수오당 담장 옆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뒤뜰의 배롱나무와 함께 철철이 뿜어내는 각각의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단풍은 고택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 줄 듯하다. 마당에는 대를 이로 지켜온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맷돌과 말(馬)을 매는 돌이 특이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안채 죽담에는 흙으로 빚은 조각상이 흥미롭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손자와 곤히 잠든 손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 할머니의 모습이다. 정겹고 포근하고 미소가 머금어지는 상이며 조손(祖孫)간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상이다. 어느 여성 후손이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는데 할머니와 함께하였던 추억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한다. 난포고택의 후손들은 이 집 구석구석에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자취와 역사를 이어온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최철견(崔鐵堅, 1548-1618) 선생은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의 14세손이며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구(應久), 호는 난포(蘭圃), 몽은(夢隱)이며 부친은 증 호조참판  최력이다.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을 시조로 하는 최씨의 후손은 경주최씨, 영천최씨, 흥해최씨, 전주최씨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난포 선생은 금호의 최무선 장군이 중시조이며 금호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난초가 무성한 밭’이라는 뜻의 난포를 호로 지은 것도 이 마을 전체에 난초가 많았지만, 특히 이 집에 밭을 이루듯이 난초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난포 선생은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감찰,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1590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찰사 이광(李光)이 패주하자 죽기를 맹세하고 전주 사민(士民)에 포고하여 힘껏 싸워 전주를 수호하였다. 그의 나이 70세 고령인데도 의병을 창의하여 대장이 되고 손자 최인수(崔仁壽), 증손자, 최준립(崔竣立)과 함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의병과 합세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597년 수원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599년 내자시정(內資侍正), 1601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임되었다.

  1604년에 춘천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저서로 몽은집(蒙隱集)이 전해오고 있다.

  매화는 곱게 피어있고 개구리는 알을 낳았는데 봄은 가까이 오지 않아 손이 시리고 메모하기조차 힘이 들었으나 외가 쪽의 선현 한 분을 만나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나라와 백성의 안녕과 복리를 위하여 7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창의하여 왜구를 무찌른 고귀한 정신을 배우고 담아간다.  (2022. 3. 6.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