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2-08-19 23:15 (금)
이 한 몸 조국을 위해서
이 한 몸 조국을 위해서
  • 송학 김시종
  • 승인 2022.07.13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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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 김시종 제6회 송암문학상 수상 영남문학영남문학 신인상 수필 등단 제50회 민족통일 문예대전공모전에 대구광역시 협의회 회장 상 수상 한국경찰문학발전 유공 수상 시집[봄의지열](1958년) 영남문학 대회 협력이사, 수필과 지성, 이후문학 동인,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국제 펜 한국본부 대구회원
송학 김시종
ㆍ제6회 송암문학상 수상
ㆍ<영남문학> 영남문학 신인상 수필 등단
ㆍ제50회 민족통일 문예대전공모전에 대구광역시 협의회 회장 상 수상
ㆍ<한국경찰문학>발전 유공 수상
ㆍ시집[봄의지열](1958년)

  50여 수년 전 일이다.
  남과 북이 이념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냉전이 심각할 때다. 젊은 시절 문학과 영화 예술에 심취되어 서울 충무로와 사대문 안을 배회할 무렵 서울 인구는 600만 명이 채 되지 않았고 대구에는 80만 명이 살았다.

  서울시청 서편에는 조선호텔과 반도 아케이드(arcade)가 있었으며, 건너편에는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물산 본사 건물이 있었다. 유명시장은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있었지만, 외국 관광객이 찾은 곳은 고려민예사와 반도 아케이드였다. 그곳에는 귀중품과 한국 제품을 홍보하는 장소로 외국인이 많이 찾은 관광지이기도 했다. 왕십리 방향에 워커힐 호텔이 있었으나 그 일대에는 농민들의 농경으로 분뇨 냄새가 코를 찌를 듯 진동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이 북적거리는 거리로 단역 배우라도 출현키 위해 경쟁이 치열하였고, 300원짜리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는 시절이기도 했다. 정부는 청계천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고가도로 공사를 위해 전철 레일을 걷어내는 시기였다. 사대문 안쪽에는 미도 백화점과 화신 백화점이 유일하였다. 

  비록 휴전협정은 되었지만, 군사 분계선에는 피아간에 총성이 그치지 않았고 무장 공비 침투가 빈번히 출몰했었다. 정부에서는 경제 개발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차관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다. 당시 국내에 미군이 칠만여 명이 주둔할 때 도시와 농촌에서는 미군을 상대로 먹고살기 위해 가출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주한미군은 토요일이 되면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일본 오키나와를 찾아 미화를 뿌리며 일본 여성으로부터 위안받으며 군 복무를 할 시기였다.  

  5.16 쿠데타 후 군사 정부는 공직 사회에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사람을 추출하여 국토건설단에 편입시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도록 혁명 정부는 과감한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 시절은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고, 섬유공장이나 월부 책장사며 신문 배달 등으로 생업과 학업을 이어  간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과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백화점이나 수예점에서 외국으로 수출하는 인형에 고무 제품으로 만든 손가락 크기의 고무신을 납품했다. 

  특히 미군이 거쳐 간 아시아 지역에는 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생아가 많았다. 미국의 선교단체에서는 동남아나 한국의 사생아를 돕기위한 운동이 활발하였다. 맨입으로 모금하기보다는 소형 장식품인 인형 신발을 선물로 주면서 선교 할동에 도움이 되겠다고 선교사와 계약을 한 바 있었다. 본보기를 배편으로 미국에 보냈으나 현지 도착 때는 제품의 색상이 변질하여 파기 환송되었던 사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고무에서 나오는 아이나 성분이 분출되어 제품이 변색하고 말았다. 경험 부족으로 인한 사업 실패작이 되었다. 

  다양한 직업으로 전전해 보았지만 모두 신통치 못했다. 어느 날 임자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 아이도 있고 하니 올바른 직업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요”라는 말을 듣고 어떤 직업이 좋을까 싶어 고심하고 있을 때 임자가 무심코 던진말이 
 “당신사주에는 권세가 들어있으니 순사라도 하면 밥술 걱정은 안하여도 되니 순경 시험에 응시해 보라고 권유했다.” 듣고 보니 귀가 쫑긋해졌다. 

  30세가 되어 공무원으로 응시하기에는 늦었지만 주경야독하면서 도전해 보았다. 그 시대는 신체검사에 합격하자면 체중 55kg, 신장165cm가 되어야만 필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다행이 합격통지서를 받고 경북경찰학교에 입교하여 6주간 교육을 이수 후 조건부 순경으로 배명받아 임지로 떠났다. 당시만 하여도 시골의 읍 소재지에는 좀도둑과 폭력배가 득실 했다. 나는 제복을 입고 밤낮으로 범죄 예방과 교통정리도 하고 주민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치안 유지에 열중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주민과 지방 유지들로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다. 파출소에 김 순경이 부임한 후로 좀도둑과 폭력배가 없어졌댜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당시 경찰관의 정년퇴직은 50세이었다. 늦은 나이에 경찰에 입문하였지만, 범법자 검거, 병역 기피자, 인명구조, 첩보 수집, 기소 중지자 검거 등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기억이 새삼스럽다.

  비록 늦은 나이에 공직에 입문하였지만, 청년기에 문학에 심취되어 다양한 책을 다독과 정독한 것이 공무 집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분기별로 업무 실적 평가를 하여 우수한 직원에 대한 표창이 있어 표창도 많이 받았다. 새마을 사업 유공자로 지사 표창도 받았고, 범죄 검거 유공에 대한 치안 본부장 또는 내무부 장관, 국무총리 표창과 주민들로부터 감사장 등 많은 표창을 받았다. 

  사복 근무를 할 때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검거 송치 등으로 중앙정보부에서 건국 후 처음 실행한 우수 대공 요원으로 선발되어 산업 시찰하는 영광도 누렸다. 

  70년대에는 남북이 냉전과 긴장 상태에서 남파 간첩색출을 위해 동해안 2개면에 파견 근무할 때 강원도에서 경북으로 편입된 울진군에 상주하면서 월북자나 남파 간첩 색출에 몰두하며 국가 안보에 이바지한 공적도 많았다. 

  내가 공직 생활하는 동안 신념처럼 새기며 가슴에 간직한 좌우명이 있었다. 

  生爲組國生死爲民族死 (사는 것도 조국을 위해 살고 죽는 것도 민족을 위해 죽는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대과大過 없이 모범 경찰관으로 정년퇴임을 할 수 있었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