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성면 소재지 권역을 알리는 면 표지석
▲ 용성면 소재지 권역을 알리는 면 표지석

  고죽(孤竹)1리가 소재한 경산시 용성면은 본래 신라시대 노사화현(奴斯火縣), 기화(其火)라 하였고, 훗날 자인현의 상동면과 하동면 구역이었으나, 지형상으로 압독주의 최 동극(東極)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신라의 입성(入城) 통로이자 남쪽을 여는 관문(關門)이었다. 
  1914년 부군(府郡) 통폐합에 따라 자인현 상동면과 하동면, 그리고 청도군 일위면 석현리 일부를 합하여 용성면이라 하였다. 
  관할구역은 면소재지 당리(堂里)를 중심으로, 덕천(德川)·송림(松林)·부제(釜堤)·곡신(谷新)·곡란(谷蘭)·용산(龍山)·대종(大宗)·가척(加尺)·용천(龍川)·용전(龍田)·부일(夫日-掛日)·매남(梅南)·내촌(內村)·외촌(外村)·도덕(道德)·고죽(孤竹)·미산(美山)·고은(古銀-古方里)·일광(日光-爭光) 등 20개 마을이 구성되어 있으며, 면계(面界)로는, 동쪽으로 청도군 운문면, 남쪽으로 청도군 금천면, 매전면, 서쪽으로 남산면과 자인면 북쪽으로 진량읍과 영천시 대창면을 경계하고 있다. 
  용성면의 역사를 가름하는 자료로는 용성면 일대에 고루 분포된 수백 기의 지석묘(支石墓)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1960년대의 개간 사업과 70년대의 농경지 정리 사업으로 모두 훼손되어 현존하는 것은 150여 기에 불과하지만, 당시 사라진 지석묘를 모두 합한다면 300기는 훨씬 넘었다.
  또 출토된 많은 석기(石器)와 토기(土器) 등으로 미루어, 이 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부락(部落)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용성(龍城)이란 지명은 면의 주산인 용산(龍山) 정상에 축조된 산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산은 면의 서계(西界)인 남산면 갈지리와 용성면 곡신리, 용산리와 경계를 이루며, 이 산은 해발 435.2m에 불과하지만, 용산이란 지명은 이 산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오래전 설화를 근거하고, 또한 산성에서 옛부터 이 지역을 사수하였다고 하여, 용산 성에서 용산의 용자와 산성의 성(城)자를 발췌한 것이라 한다.
  용성면의 지형·지세는 동(東)으로 구룡산(九龍山)을 중심으로 남서(南西)로 반룡산(盤龍山), 용산(龍山)이 길게 띠를 이루며 우뚝 솟아있고, 북(北)으로는 금학산(金鶴山)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 용성면 소재지권 일대 전경
▲ 용성면 소재지권 일대 전경

  동쪽의 구룡산은 해발 674.8m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동서로 용산과 마주하고 있어 마치 용성인의 기개를 말해 주듯 육중한 자태이다. 
  용성은 소재지 서남쪽을 불쑥 솟아오른 용산과 동의 새벽을 여는 구룡산은 이른바 새 아침의 작열한 태양을 여는 관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죽1리는 면 소재지의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금학산 수계(水系)의 하류(下流) 마을이다. 
  이 마을은 1, 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1리는 조선 초기 천안(天安) 전씨(全氏)가 정착하여 개척하였다 하였으며, 고죽 2리는 조선말 김해(金海) 허씨(許氏) 허지수(許智壽) 일가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고죽1리 전경
▲ 금학산에서 내려다본 고죽1리 전경

  1984년에 출간된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에 의하면, 이 마을의 지명은 본래 마을 뒤에 큰 대나무가 자생하여 고죽이라 하였으나 그 후 죽전(竹田)이라 고쳐 부르자 마을에 환란이 잦아 다시 고죽으로 고쳤다 전승되고 있다. 성씨는 천안 전씨, 김해 허씨, 김해 김씨가 주를 이룬다.
  또한 고죽리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였다는 대흥사(大興寺) 사지의 흔적과 창건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이 마을을 개척한 천안(天安) 전씨(全氏)의 시조는 전섭(全聶)으로, 그는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우고,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이후 시조인 전섭(全聶)의 29세손인 고려 개국공신 전락(全樂)은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대구 공산전투에서 싸울 때,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던 인물로, 그 후 삼사(三司)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면서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이로부터 천안(天安)을 본관(本貫)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죽1리를 개척하였다는 죽계(竹溪) 전극창(全克昌) 선생은 무엇보다 19세에 임란 발발과 더불어 우국충정으로 지역 청장년과 규합(糾合)하여 의병을 창의하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서편 금학산 천안 전씨 선영에 조성된“조선국천안전공지묘(朝鮮國天安全公之墓)”의 묘갈문(墓碣文)에 의하면, 죽계 선생은 19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스스로 상투를 올리고, 뜻을 같이하는 일족을 뽑아 창의(倡義)하여 오목천(烏沐川)으로 밀려온 왜적(倭敵)을 자인현역 의병(義兵)들과 합세하여 물리치고, 이어 화왕산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 의병장 진영에 들어가 참모역을 맡아 군사를 도모함으로 큰 공을 세웠다 하였으며, 임란 정유재란이 끝난 후 고향 고죽에 돌아와 집을 짓고 원근의 벗들과 강론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했다. 
  선생은 이후 진사 취죽당 김응명(金應命)과 한강(寒崗) 선생의 문하에서 이석담(李石潭), 김익재(金懼齊) 등과 도(道)와 의리(義理)로 사교(社交)하다가 병술년(丙戌年) 모일 향년 73세에 별세하였다. 
  또한 천안 전씨 집성촌인 고죽1리에는 1970년대 한의원을 열어 인술(仁術)을 펼친 이재(易齋) 전해인(全海印) 의인담(義人談)이 남아있다.

▲ 전일재 앞에 세워진 이재 전해인 선생 인술 기념비
▲ 전일재 앞에 세워진 이재 전해인 선생 인술 기념비

  천안 전씨 재궁(齋宮)인 전일재(全一齋) 앞에 세워진 그를 찬양하는 기념비에는 당시 성균관 전학인 최규환이란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김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공의 사람 되심은 순후(淳厚)하시고 너그러워 셨도다. 몸가짐에 항상 조심하고 집안을 바로 다스리었으며 조상(祖上)을 높이 받들고 친척들을 사랑하셨다. 선영(先塋)을 수축(修築)하여 의례(儀禮)를 갖추시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祭祀)를 받드시고, 족보(族譜)를 만들어 간행(刊行)하시니 선조(先祖)들의 사적(事蹟)이 자세히 밝혀졌도다. 마음은 이미 높은 경지를 깨달으시니 글도 또한 문장(文章)이 되셨도다. 능히 인술(仁術)에 통달하시니 명성(名聲)이 사방에 떨치어 셨도다. 뭇사람들을 구제(救濟)함을 사업(事業)으로 삼으셨으니, 어느 누가 칭송(稱訟)하고 찬양(讚揚)하지 않았으리오. 온 일가를 단란하게 감싸 주시니, 화기(和氣)가 항상 온 집안 가득하였도다. 효성(孝誠)스럽고 우애(友愛)로우시고 충성(忠誠)스럽고 신의(信義)가 두터우시니 높은 덕망(德望)이 온 고을을 교화(敎化)하였도다. 이러한 뜻을 돌에 새김은 드높은 유덕(遺德) 자손만대에 전해지기를 바람이로다.”하고, 국역(國譯)은 영남대학교 이장우 교수가, 근서(謹書)는 이공우(李公雨) 향토 서예가가 맡아 1979년 청명 일에 천안 전씨 문중원 일동이 이 비를 세웠다 하였다.

  천안 전씨가 집거(集居)하고 있는 고죽1리는, 멀리 동극(東極)의 구룡산(九龍山)이 발원한 우백호(右白虎) 줄기가 금박산을 이루고, 그 금박산이 금학산(金鶴山)이 되어 이 골에 충의(忠義)와 인술(仁術)을 남겼으니, 어찌 천안(天安) 하지 않으리오.

  ※ 본 원고는 천안 전씨 문중원의 증언과 내 고장 전통(1982, 경산군),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산의병창의(2016, 김종국), 용을 그리는 사람들(2022, 김종국), 경산임란의병항쟁(1999, 경산문화원) 등을 참고문헌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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