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댁구(宅口)가 산지댁이다.
 
  외가가 달서구 상인동으로 밀양 손 씨 제실(齊室) 채정(蔡亭)이 있는 마을이다 앞산(대덕산) 순환도로 끝자락 임휴사(臨休寺)밑 대곡동으로 가는 대로옆인데 지금은 대 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다. 옛날에는 논공가는 버스를 타고 경북기계공고앞 도로에 내려 낙동서원을 지나 십리길 산골로 걸어가야 했다.

  정확한것은 모르지만 외할아버지께서는 고향 숙부님 집으로 양자로 오시어 생활 터전을 마련 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상인동에는 단양 우 씨로 시집간 여동생과 외가 일족들이 아직도 많은데 산지 할머니는 경주이 씨로 경주산내에서 시집오셨다고 한다. 내 어머니는 1남 4녀중 둘째 딸이셨는데 이제는 그 형제분들 모두 고인이 되셨다. 딸만 넷인 집안에서 대동아재 외삼촌은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려 낳으셨다고 한다 3대 독자인데 영험을 얻어 탄생하셔서 그런지 인물이 준수(俊秀)해 하양읍 사진관에 액자로 진열되기도 했다.

  외가집은 동골 우리집은 서골 김씨 집성촌과 밀량 손 씨 몇집이 있어 부모님은 한 마을에서 중매가 되어 부부의 인연이 되었다고 했다.

  대동아재는 만주로 일본군 징용으로 가시어 광복군으로 탈출 제2지대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청산리 전투에서 지휘관의 한 분이었으며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지내신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 휘하에 배속되기도 했다.

  그런 그분이 해방과 더불어 환국하시어 그런 사실을. 늘 자랑으로 말씀하셨는데 외조부모님과 병영생활 사진이 외가집 벽에 걸려 있었다.

  한국 동란때에는 장교로 참전하셨고 휴전후 외조부모님에 적극적인 만류로 고향에 정착해 가정을 지켰셨다. 안마당. 바같마당이 있는 큰집과 큰머슴. 젖머슴을 둔 대농(大農)을 경영하시면서.과물(능금)협동조합 상근이사도 하셨다. 그러더니 새로 투자한 여러 가지 사업이 실패해 그 많던 농경지와 임야가 일순간에 풍비박산 나버렸다. 한 세대가 흥하면 한 세대는 쇠한다는 속담이 맞는 말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안타갑고 아쉬움만 남는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용두산에 있는데 유년시절에 외할머니 묘소에 성묘 한번 가보곤 그 이후는 간적이 없었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이제 산림이 울창하여 찾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외할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까막히 잊고 살아왔던 것이 요즘 자꾸 죄스럽기만 하다.

  어린 기억속에는 외할머니 쌈지주머니는 늘 보물단지였다. 외손자 줄려고 찐쌀. 감말랭이.사과말랭이. 강정. 엿가락. 감. 대추. 밤. 고구마. 감자. 자주오시어 간식을 주셨다. 외사촌도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서로 왕래가 끊어 진지 오래고 이제 모든 것이 무심한 세월되었다.

  추석에 얼굴도 모르는 친가 조부모님 산소는 성묘를 하면서 그렇게 사랑 받았던 외할머니 성묘는 왜 지나치고 살아 왔을까 부계쪽 혈통만 중요시 하는 우리네 인습 때문일까. 외할머니 죄송합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이번 추석에는 꼭 한번 찾아뵈옵겠습니다.

2012. 12. 13 외 손자 ( 김 헌 원)
대구 경북 문학예술 2014 제8집11/30 회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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