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김문규
  한국동란은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경 북한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군사작전을 전개한 대한민국 동족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한국전쟁(6.25) 발발 5년 전 독립을 한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국의 남한군정과 소련의 북한군정이 끝난 후 우리나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 되었다.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해서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앞잡이인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노렸고, 미국은 세계3차 대전을 우려해서 미 군사 고문단 500여명만 남겨놓고 철수하는 실수를 범했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에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의 좌익정당, 김구 선생의 국내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만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김규식 선생 등은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양파를 중재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장덕수 선생 암살사건으로 인해 이승만과의 사이가 벌어진 김구 선생이 동참해 힘을 얻는 듯 했으나,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이승만정부의 대한민국과 내각총리였던 조선인민공화국 김일성이 각자 자기주도의 민족통일을 이루고자 다툼이 있을 때 38선 부근에서 간헐적인 국지전이 벌어지고 하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대한민국에 대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기습적인 침공이 감행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전장으로 하는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서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또 도시는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던가, 민족상잔 이라는 전무후무한 비극 속에서 죽어난 것은 우리 국민들이었다. 강대국들은 자국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우리 국민을 이용했고, 소위 정치인들은 자신의 위상만을 위해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면서까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결국 죽어난 것은 국민이고 좁은 국토는 두 동강이가 났다. 현재 우리나라는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6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휴전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휴전이후에도 우리나라와 북한 간의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세계2차대전 이후 반공진영과 공산진영 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폭발한 사례로 냉전인 동시에 실전이며, 국지전인 동시에 전면전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뛰고 있다. 한반도를 지나는 38도선 이북지역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38도선 이남지역을 대한민국이 각각 점유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중국 마오쪄둥과 소련연방 스탈린의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설득해 협의와 지지를 얻어 치밀한 계획 하에 소련의 전차를 앞세워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을 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경 38도선과 동해안연선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다. 북한의 남침은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파문은 참으로 엄청났다. 연합군은 미군을 주축으로 7월7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평양에서 압록강까지 점령했으나 중국인민군이 개입함으로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북한군은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모두 휩쓸었다. 남한은 포항을 비롯한 의성, 영천, 경주지역 등 조그만 땅만 남아 있었다.

  그 전쟁 중에도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이 일어났다. 3년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고,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결과적으로 남·북간에 적대적인 감정만 더 커졌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인해 군사분개선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전쟁은 중단되었다. 현재까지 서류상은 정전상태지만 지금도 쌍방 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소련과 중국에서 반대했던 6.25전쟁은 김일성의 집권의식이 낳은 재앙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3대 세습이 이루어진 나라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뿐이다. 그만큼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김일성이었다. 그에게는 국민과 나라는 자기의 권력기반일 뿐이다.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고기잡이배 납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그 집단이 있는 이상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없다. 정치가들의 지배욕에 36년 여 만에 겨우 맞이한 독립이 분단70년으로 남아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남·북이 통일되어 힘을 합쳐도 주변국을 누르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 동족끼리 싸우다 주변국에게 또 당할까봐 걱정이다. 우리 국민은 남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유학산, 다부동, 가산산성 등에서 북한군 3개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격퇴 함으로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다두동이 무너졌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을 수도 있다. 그만큼 절박한 전투였으며 일진일퇴의 포화 속에서 산화한 젊은 영웅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전되는 전환점이 된 또 하나의 전선이 있었다. 영천-안강 지구전투는 북한군15사단이 치명타를 입고 물러났을 뿐 아니라 국군이 총 공세를 단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전투다.

  영천-안강 사이 지금의 휴게소 근처에서 산화한 수많은 학도병과 유엔군의 사체처리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완결되었을 정도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지켜낸 곳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젊음을 바친 영혼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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