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성면 곡란리 전경
                                                           ▲ 용성면 곡란리 전경

  이 마을은 영천 최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이다.

  곡란리(谷蘭里)는, 용성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의 개척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승되는 마을 유래에 의하면, 곡란리는 1320년쯤 밀양(密陽) 손씨(孫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후 1592년을 전후하여, 영천(永川) 최씨(崔氏)와 담양(潭陽) 전씨(田氏), 전의(全義) 이씨(李氏)가 전거(奠居)하였던 마을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는 영천 최씨 일가의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 선생과 그의 아들이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여 큰 공을 세운 마을로 알려져 있다.

  곡란리의 자연부락은, 수동, 남역, 북역, 산대, 상작, 두곡마을로 분포되어 있으며 지금도 100여 호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 마을에 정착한 최씨의 본관(本貫)은, 전국적으로 대략 30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대부분 그 본관은 후손들에 산거(散居) 지명(地名)을 나타내는 것일 뿐, 이중 시조(始祖)를 분명히 밝히고 후손(後孫)들은 30여 본에 지나지 않으며, 최씨(崔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말의 문창공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문창공(文昌公) 고운 최치원 선생은, 신라 이후 삼최(신라 최치원, 후백제 최승우, 고려 최언위)로 꼽히는 인물로, 진성여왕 재위 시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양하는 비판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저술한 신라의 대학자로,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장원 급제 이후, 유교(儒敎)와 불교(佛敎), 도교(道敎)에도 깊은 이해가 있어 많은 글을 남겼다.

                             ▲ 대전 뿌리 공원 경주 최씨 조형물과 시조 고운 최치원 선생
                             ▲ 대전 뿌리 공원 경주 최씨 조형물과 시조 고운 최치원 선생

  이로써 현재까지 대부분 최씨의 분파(分派)가 최치원 선생을 1세로 하는 경주(慶州) 최씨(崔氏)에게 연원되고 있다. 

  하지만,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는 최씨(崔氏)의 전모(全貌)를 이로써 파악하기엔 쉽지 않다.

  이는 다만, 범 최씨의 선대 세계 미분파 연원을 체계화한 경주 최씨 상계 세보(世譜)에 의하면, 최치원 선생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3대손으로,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린 본관으로 개성(開城)·삭녕(朔寧)·동주(東州: 철원)와 전주(全州) 최씨(崔氏)의 군옥파(群玉派)가 있고, 그 외에는 최치원의 자손에서 분파(分派)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보(世譜)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과 이론이 있지만,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와 최치원 선생을 잇는 신라 이전 사람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 마을에 집거한 영천(永川) 최씨(崔氏) 시조 최한(崔漢)은, 고려 중엽 행예부판 소감으로 후에 영의정에 증직된 최 식(崔 寔)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로 고려 의종∼명종 때에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 神號衛 上將軍)을) 지냈고, 나라에 유공(有功)하여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책봉됨으로써 영천에 식읍을 받아 세거하였는데, 이때부터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영천(永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이후 3자(三子) 호(湖)는 곡강부원군(현재 흥해), 4자(四子) 익(瀷)은 호산부원군(현재 순천)으로 각각 분파되었다. 현재 시조공(始祖公)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軍威郡) 송현(松峴)으로 전해지고 있다.

  곡란리에 전승되는 후손들의 행적은, 앞에서와 같이 임란 이후로 여기에는 영천 최씨와 흥해 최씨 문중의 임란 창의와 난포 최철견 공의 가옥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최철견 가옥은, 조선 선조 때 전라도도사를 지낸바 있는 영천 최씨 일족의 최철견 선생이 명종 원년에 지었다는 난포고택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 난포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 난포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이 집은‘난포공실기’에 의하면, 임진왜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았다고 전해오며, 건축양식이나 축조기법으로 보아 대략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건립된 가옥으로 추정된다.

  모두(冒頭)에서와 같이 난포 최철견 선생은, 영천 최씨 사람으로, 임진왜란 당시 손자 인수와 증손 준립과 함께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하였으며, 70세의 고령임에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영천의 권응수와 합류해 영천·경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특히 경주 아화산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였다. 

  다음은 마을 서편 용산 기슭에 세워진 용산서원이다.

  용산서원의 전신인 영모재(永慕齋)는 자인사림들에 의해 인조 13년(1635)에 창건해 임진왜란 공신인 죽은(竹隱) 최팔개(崔八凱)와 그의 동생 죽포(竹圃) 최팔원(崔八元)을 배향했다.  

                                            ▲영천 최씨에서 분파된 흥해 최씨 용산서원
                                            ▲영천 최씨에서 분파된 흥해 최씨 용산서원

  이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조선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용산서원으로 재건했다. 

  후손 최성달에 의하면, 1977년 용산서원 수임으로 있던 현풍 곽상문의 발의로 1987년에 유림에서 서원 향례로 행사하도록 결의한 후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고 했다. 

  현재도 당시 청도 김상대가 쓴 용산서원 편액(扁額)이 강당(講堂)에 보관돼있다. 

  최팔개와 최팔원의 묘갈명(墓碣名)에 의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자 마을 장정을 모아 동래로 가던 도중 지금의 언양군과 양산시에서 적을 만나 물리쳤다. 

  이후 동래성에서 적장 2명을 사살하고 동생은 전사(戰死)하고 형은 돌아왔다.

  현존 건물(建物)로는 정면(正面) 4칸, 측면(側面) 1칸 반 규모 팔작지붕 건물인 강당(講堂)과 그 뒤에는 사당(祠堂)인 3칸 규모(規模)의 맞배지붕인 경의사(景義祠)가 있다.

  이 밖에도 곡란리는 이 마을 풍년 농사를 지켜주는 남쪽 깊은 계곡 끝자락에 자리한 회곡지(回谷池)와 이 마을 사람들의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산(龍山), 그 용산에 골골에 남아 전하는 이야기들은 이야기마다 우국충정이니, 정산에 남은 용산산성과 그 아래 무지개 샘은 곧, 이 마을 옛 선인들이 살아온 이야기요,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였던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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