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은
                                                  이다은

  3남 2녀 중 막내인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둘째로 태어난 띠동갑 언니는 시집갈 때까지 머리를 길러서 허리춤까지 내려왔다. 그 긴 머리를 시집갈 때까지 한 번도 다른 손에 맡기지 않고 땋아주신 분이 있다. 바로 우리 아버지다. 그런 자상하고 따뜻했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진다. 

  내가 일곱 살 때 장질부사(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겪었다. 죽도 먹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며칠을 먹지 못했지만 먹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런 나를 아버지가 미음을 끓여 먹이셨다. 음력 2월이 되면 내 고향 경주에 민속놀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랫마을, 윗마을 편 갈라 줄다리기하는데 엄청 재미있다. 요것만 받아먹으면 업고 구경 갈게” 하시면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어린 딸을 부추겼다. 안 먹으려고 하는 자식에게 미음 한 숟갈에 간장 한 번 찍어 먹이는 것이 그렇게도 힘드셨다. 애간장을 태우셨던 아버지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기름이 떨어져 가물거리는 호롱불처럼 죽을 고비에 미음 몇 숟가락과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살렸다.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나선 적이 있었다. 아버지를 화나게 한 사연은 기억나지 않는다. 동네 끝까지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아부지 다시 안 그라께 한 번만 봐 주이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그런 어린 딸을 본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셨는지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하시면서 나를 앞세웠다. 막내라고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던 나는 매를 맞지는 않았지만 서러웠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집 앞까지 울고 갔다. 딸의 마음을 읽으신 아버지는 안쓰러워 등을 토닥여 주셨다. 회초리를 든 호랑이 아버지가 따뜻한 사랑의 아버지로 변했다. 그것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본심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농사 짓는 과정을 많이 보고 자랐다. 놉을 해서 모내기하던 모습과 탈곡기로 벼를 훑어 죽담에 가마니를 쌓던 기억이 남아있다. 풍작이 되어 지난해보다 소출이 많이 나면 아버지의 얼굴은 보름달이 되고 우리 집은 잔칫집이 되었다. 그날 저녁 일꾼들과 함께 멍석에서 저녁을 먹고 막걸릿잔을 주고받으며 행복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당에는 풋내가 가득했고 닭장에서 나온 닭들도 살이 올라 포동포동했다.

  

  아버지가 모내기 준비로 쟁기질을 하셨다. 엄마가 경주 시장에 잡곡과 채소를 팔러 가면서 아버지 새참을 해 드리라고 시켰다. 참이라야 막걸리뿐이었다. 엄마가 고두밥 쪄서 누룩 넣고 삭혀서 직접 담은 술이다. 엄마가 시킨 대로 부엌 구석에 있는 술 항아리에서 두 국자를 떠내어 받쳤다. 찌꺼기는 물을 부어 주무르고 짜서 주전자에 부었다. 안주라야 김치 쪼가리와 멸치 두서너 마리가 전부였다. 엄마가 갖다 드릴 때는 아버지가 눈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한 번쯤 흔들며 쉬었다 마시던 막걸리를 물 마시듯이 들이키셨다. 지금 생각하니 싱거웠던 것인데 아버지는 나무라지를 않으셨다.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아버지 참을 해다 드렸다는 자부심에 가득차 수양버들 춤추는 길을 따라 딸깍거리는 빈주전자의 장단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농사일을 잘 못해 엄마 애간장을 태우셨다. 벼 베는 실력도 엄마보다 못했다. 콩밭을 맬 때도 아버지는 반고랑도 못 따라가셨다. 가장이 일을 못 하다 보니 엄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려면 남자가 힘이 세고 일을 알아서 해야 하는데 7남매 막내셨던 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요즈음처럼 농기구가 발달했더라면 엄마 구박 안 받아도 되었을 텐데 일 못 한다고 엄마 잔소리 듣고 사신 아버지가 측은하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귀한 유산이 있다. 겸손과 배움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일일부독서면 구중생형극이라.’(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이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겸손을 가르치셨고 하루라도 읽고 쓰지 아니하면 입 가운데 가시가 돋친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칠순을 맞이하는 지금도 겸손을 염두에 두며 배움의 현장에 있다. 시문학, 수필 문학, 캘리그라피다. 3년 전부터 문단에 등단하여 글을 쓰다 보니 전에는 잔소리로 들렸던 아버지의 교훈이 그 어떤 유산보다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일 년 동안 밖 안 출입을 못 하셨다. 곡기라고는 거의 막걸리로 연명하셨다. 그래도 병원 한 번 가신 적 없던 아버지가 일흔두 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모심기가 한창일 때였다. 오빠가 있어도 외지에 살다 보니 사촌 오빠가 주도해서 모심은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에 아버지는 엄마 손을 잡고 “나는 이제 좋은 데 간다”라면서 천장을 몇 번 쳐다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둔 채 무지개다리를 건너가셨다.

  아버지의 장례는 엄숙했다. 혼백을 담은 함이 앞서고 펄럭거리며 따라가는 몇 개의 기와 꽃상여가 그 뒤를 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막내딸의 울음은 산천이 떠날 정도였다. 상여꾼들은 흰 수건을 두르고 앞,뒤,양옆에서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올라간다. 요즈음처럼 캐딜락이 운구하고 화장장으로 바뀌는 간단한 장례문화와는 달랐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화 넘자 어화...’ 상두꾼들의 노래에 실려 아버지는 다시 올 수 없는 길로 떠나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석 달 만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멀쩡하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호미 들고 밭에 나가시다 쓰러져서 일주일 만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아버지가 농사일에 서툴다 보니 엄마가 두 사람의 몫을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영감 죽으면 뒷산에 가서 춤출 것이다”라고 하시던 엄마가 그렇게 아버지 뒤를 따라가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석 달 간격으로 부모님을 잃고 나니 불효라는 단어가 가슴을 찔렀다. 남편을 일찍 잃고 남매를 키우느라 내 살기에 급급해서 효도 한 번 하지 못한 불효자는 효도의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다. 세상에 후회하고 반성해도 소용없는 것은 한 번 가신 부모님은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금은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사이좋게 누워 계신다. 엄마와 함께 목화 따러 다니던 목화밭이다. 살아생전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하면 인생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언니의 댕기 머리 땋아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에 파도처럼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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