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완 교수
  삼국통일로 인하여 갈라진 삼국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로 모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왕권을 이어받은 신문왕(681-692)은 10여 년 동안 신라를 진정한 통일국가로 거듭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새판을 짜야만 했다.

  신문왕은 당 나라의 중앙집권적 율령제를 시행하였다.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과감하게 신권정치의 애물단지였던 귀족 세력을 뿌리 뽑아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임금의 장인이었고 상대등이었던 김흠돌이었다. 아울러 병부령 군관 등을 일망타진했다.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하여 통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진골 귀족의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에 육두품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즉 육두품 귀족들은 학문적 식견에 의해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가 됨으로써 중요한 도우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장 믿을 만한 임금의 언덕이 설총이었다.

  설총(658-746)은 신문왕 시대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대학자요, 교육가였다. 마침내 신라의 석학으로 추앙받았던 설총은 육두품 귀족 출신으로 그 아버지가 원효다. 당대 유명한 승려였던 원효의 아들인 설총이 유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그는 처음에는 중이 되려다가 유학에 정진하였다. 이는 설총에게 정신적인 고민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대의 육두품 출신의 귀족들은 당나라로 가서 유학을 닦음으로써 출세하고자 했다. 그들이 가진 학문적 경륜으로 문장이나 짓고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비판하고, 나아가 왕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덕치를 베풀도록 하고 관료조직을 정비하여 특권층의 횡포를 억제하도록 실제적인 구실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통일 신라 이후 정치 사회적 변혁으로 국왕과 육두품 귀족들이 가까워졌을 때, 설총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신념을 왕에게 생각을 펴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신문왕과 설총이 손을 마주 잡은 것이다. 동지가 된 것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즉위하던 원년(681) 8월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의 반란 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이어서 신문왕 4년(684) 안승의 아들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처형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군에 분산하여 살도록 하였다. 당대의 권력 실세로 잘 나가던 병부령 군관에게도 죄를 물어 가차 없이 처형하였다.

  신문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아울러 신문왕 2년(682) 공평한 인재양성을 하여 등용하고자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국학에 경 한 사람을 뒀는바, 그가 백의정륜학사 설총이었다. 그는 개혁의 횃불이었다.

  무열왕이 외할아버지고, 문무왕은 외삼촌이니, 신문왕은 설총의 외사촌 형이다. 신문왕으로서는 설총이 고종사촌인 셈이다. 그러니 사사로이 술자리를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문왕은 녹음이 짙어가는 초여름 어느 날 쾌적한 정자에 앉아 설총을 왕궁에 들도록 명하였다. 설총이 예를 갖추어 황급히 신문왕이 쉬고 있는 편전에 이르렀다. 여기 나오는 화산이란 설총의 별호이기도 하다. 임금은 다짜고짜,

 “화산, 오늘은 비도 오고 바람도 선선하오. 비록 좋은 찬과 절절한 가락은 있지만 고상한 이야기와 좋은 웃음거리로 우울한 가슴을 푸는 것만 못한 것 같네. 그대는 반드시 그럴 듯한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터이니 나를 위하여 이야기해 주지 않겠나?”
라고 하였다. 그러자 설총은 잠시 고민하더니,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려도 될까요?”라고 하자,

  신문왕은 “어떤 이야기도 좋네.”라고 하였다.

  여기서 설총이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둘러댄 것은 임금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신하로서의 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설총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여기 모란은 화왕입니다. 그가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인간들이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습니다. 따뜻한 봄날 예쁜 꽃을 피우니, 어떤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러자 멀고 가까운 곳에 있던 여러 꽃들이 다투어 화왕을 뵈러 왔습니다. 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맑은 정기를 타고 난 탐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와서 문안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처럼 화왕에게 다가와 얌전하게 다음과 같이 아뢰는 자가 있었습니다.”

  “저는 백설의 모래밭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지냈습니다. 제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듣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몸을 받아 주실는지요?”

  여기 모란은 현실적으로 신문왕을 비유한 것으로 보이며 장미는 설총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아첨하고 모함하는 간신배다. 설총이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초야에 묻히도록 한 소판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 머리는 흰 백발을 한 장부 하나가 무거운 걸음으로 나와서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저는 서울 밖 한길 옆에 자리한 백두옹(白頭翁)으로, 일명 할미꽃이라고도 합니다. 아래로는 드넓은 들판을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모퉁이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좌우에서 보살피는 신하는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차 그리고 술로 수라상을 받들어 임금님의 입맛을 만족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드리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고리짝에 저장해 둔 양약으로 임금님의 원기를 돕지만, 한편으로 금석의 독약으로써 임금님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비록 명주 비단인 사마(絲摩, 명주실의 일종)가 있어도 군자 된 자는 왕골로 짠 관괴(菅?, 왕골 같은 거친 물건)라고 해서 버려서는 안 되고, 또 모자람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할미꽃은 비유적으로 간신배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설총 자신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옆에 있던 한 신하가 화왕께 아뢰기를,

 “두 사람이 왔는데, 임금님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화왕은,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나, 미인을 얻기도 어려우니 이를 어찌할꼬?”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뒷말을 흐렸다. 할미꽃의 실망됨이 너무도 컸다. 그러자 장부인 할미꽃이 앞으로 나와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제가 온 것은 임금님께서 정사에 밝으셔 모든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뵈오니 그렇지 않으십니다. 무릇 임금된 이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 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맹자는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고, 능력 있는 한(漢) 나라의 풍당(馮唐)은 낭관에 머물러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오니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할미꽃이 물러나려 하였다. 이에 화왕은 잠시나마 자기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뉘우치는 바가 있었다.

 “백두옹, 내가 잘못했소. 내가... .”

  화왕의 이야기를 다 들은 신문왕은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현 신라의 조정에서 자신의 왕도정치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충신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설총의 깊은 뜻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설총이 직접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가늠하였다. 설총 자신의 이야기를 화왕과 비유하여 드러낸 것이다. 이에 신문왕은 무릎을 치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이야기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있소. 글로 써서 후대 왕들의 거울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기를 바라오." 라고 하였다.

  신문왕은 자신에게 바른 정치의 길을 알려준 설총을 추천하여 한림학사란 존경 받는 자리에 임용하였다. 신문왕에게 들려준 설총의 <화왕계>는 우리나라 풍자 소설의 새벽을 열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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