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장춘의 눈 덮인 대평원의 길을 달린다. 차는 원의 중심에 서 있을 뿐 봄이 오는 벌판의 지평으로 사라져 가고.. . 더러 마을이 보인다. 눈 내린 논과 밭, 논이 보이는 마을은 거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미루나무 가로수 길로 접어들어 이제 곧 길림시역으로 들어왔다. 길림이 계림과 같은 소리이고 뜻이라고 중국 사료에서 본 듯, 어쩐지 마음이 짠하다.

  십여년 전에 찾아 왔을 때나 다름없는 길이었다. 언제 길을 손 봤는지 울퉁불퉁한 길의 반은 도로, 반은 그냥 흙길이 오히려 옛날의 정취로 다가온다. 어렸을 적 어쩌다 자동차가 보얀 먼지를 날리며 마을 앞을 지나가노라면 아이들과 먼지 속으로 가솔린 냄새를 맡으며 자동차 꽁무니를 좇아서 다름박질 하던 시절이 문득 그림처럼 떠오른다. 한 이삼십 분 지났을까 시내를 굽이돌아 흐르는 송화강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강변길을 따라서 올라간다. 강물의 발원지가 백두산 천지라 생각하니 참으로 단군조선의 이야기를 흘려듣는 듯.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를 보면, 송화강의 송화(松花)를 만주말로 숭가리우르라 하여 ‘하늘못’이라는 뜻이라 하였다. 하늘 못이면 그것이 곧 천지(天池)가 된다. 겨레의 성산, 백두의 뜨거운 심장으로 이어지는 천지, 만주벌에 물을 대고 뭇 목숨들을 길러 삶의 모꼬지를 이루게 하는 강. 흑룡강의 본류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그 숱한 지난날의 아픔을 씻어 흘러내리는 듯 그렇게 오늘도, 지금도 넓은 세상 동해로 흐른다.

  주작산(朱雀山, 817m)으로 이어지는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송화호(松花湖)의 풍만댐이 나온다. 발전소가 있다. 얼음위로 눈이 쌓인 풍만댐 주변으로 총을 멘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아주 추울 텐데.. . 아랑곳 없다. 송화강 십여 리 길에 겨울이 오면 상고대 꽃이 버드나무에 핀다고 한다. 무송(霧淞)이라고도 하는바 오늘은 상고대 꽃을 볼 수가 없구나. 중국의 4대 기관 가운데 하나라고 들었는데.. . 점심 무렵 주작산 삼림공원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볕바른 양달에는 눈이 녹아 길바닥으로 물이 흘러내린다. 이 산골에도 봄은 오는구나. 우리 돈 이천원 씩 두 사람의 입장료를 받더니 뭐라고 설명을 한다. 말하자면 주차비를 이천원 받아야 하는데 멀리서 나이 많은 분들이 왔으니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생각 밖이었다. 저네들은 짠돌이가 아닌가. 행여나 금개구리를 못 볼까 어쩔까.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 헛바퀴를 돌며 차가 미끄러운 길을 헉헉 거리며 올라간다.

  한 십여 분 올라갔을까. 길섶에 차를 세워놓고 내려서 산위를 올라다 보자 눈에 들어오는 금빛의 개구리 바위가 나를 반기는 듯.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작은 글씨로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주작산은 전설에 따르면, 태양조(太陽鳥) 산이라 했다. 뒤에 주작산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태양조라, 해 속에 산다는 새면 필시 삼족(三足烏)가 아닌가. 삼족오를 뒤에 주작(朱雀)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주작도 남쪽을 상징하는 새일 터. 하필이면 주작의 작(雀) 곧 참새라니. 물론 ‘주작’은 검붉은 새를 이른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해부루(解夫婁) 왕이 와서 산천제를 지내러왔다가 큰 바위 밑에 금빛 개구리(金蛙)를 보고 거두어 나중에 왕자로 삼아 대를 잇게 했다는 것이니 참으로 영험한 산이다.

  양달이라 돌계단을 올라 가파른 바위길을 기어오르듯 숨차게 올랐다. 함께 온 윤선생은 조심하라며 나를 챙긴다. 어쩌나 싶었던 모양... .

 “조심하세요. 바위까지 괜찮겠습니까. 내려가지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그냥이야 갈 수 있겠소?”

 “그래도요... . 겨울산이라 미끄럽고 위험하거든요.. ”

 “.... ”

  말은 안 했지만, 내 그래도 어렸을 적 산골내기로 살아오며 험한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토끼 몰이도 다니던 사람인데.. . 약초 캐는 집에 가서 보름씩 눈 밭에 살던 사람인데.. . 저나 잘 하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헛일, 벌써 오십년이 넘은 지금은 내 몸 하나 추스르기가 힘들 뿐이다. 통풍까지 찾아오고.. .

  겨우 금개구리 바위 바로 위에 세운 쉼터에 올랐다. 얼핏 보니 돼지 머리 같기도 했다. 아니 다를까. 현지에서는 신령한 돼지 바위라고 신저석(神猪石)이라 해서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돼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눈퉁이 부분이 개구리처럼 튀어 나왔다. 그냥 와서(蛙石)이라고도 옆에다 적어놓긴 했지만. 내 보기에는 금개구리가 맞을 듯했다. 그러니까 해부루 왕이 이곳에 산제사를 올리러 왔다가 금개구리 같이 생긴 귀한 아이를 얻게 된 것으로 보았다. 소리를 이어내기로 하면, ‘금와-그마-고마’가 된다. 곧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뛰어난 인재를 만났던 것이다.

  숨을 돌렸다가 송화강이 휘돌아 가는 길림의 물돌이 길을 가슴에 안고 산을 내려왔다. 얼핏 보면 한국의 산야에 와 있는 듯. 이 산골짜기에도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웅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내려오다 시내로 들어 가는 길 목에 무슨 작은 광장 같으나 세워놓은 돌기둥에 무슨 조각을 해놓아 마치 산천에 제를 올리는 제단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 돌기둥 그림에 삼족오가 그려져 있었다.

 “저기 삼족오 그림이 그려 있지요?”

 “그렇네요... .”

 “주작산을 본디 태양조라 했으니 우리식으로 읽으면 삼족오가 될 가능성이 있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돌기둥 너머로 까마귀 몇 마리가 와서 운다. 삼족오가 맞다고 답이라도 주는 듯 했다.

  신라 고구려 가야가 모두 그 시조들이 새의 알에서 나왔다. 어디선가 철새처럼 날아와서, 민족이동을 하여 그것도 쇠(새) 곧 철기문화를 갖고 따듯한 남쪽나라로 날아들고 나아가 바다를 건너 일본의 아스카 문화 곧 비조(飛鳥) 문화를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주작산은 삼족오 산이다. 해 곧 해부루의 겨레들이 저 드넓은 만주 벌판을 이동하면서 일으켰던 문화영토가 아니던가. 눈 위에 바람이 분다. 맵차다. 봄바람에 여우도 눈물을 흘린다던데...

 

  회한을 씻으라고 강물은 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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