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2-09 15:25 (목)
곽종육의 新古文眞寶
곽종육의 新古文眞寶
  • 곽종육
  • 승인 2016.12.14 05: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登高
                       杜甫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廻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鬢 潦倒新停濁酒杯

등고
                      두보
풍급천고원소애 저청사백조비회
무변낙목소소하 부진장강곤곤래
만리비추상작객 백년다병독등대
간난고한번상빈 요도신정탁주배

높은 곳에 올라
바람 급하게 부는 높은 하늘에는 원숭이 슬피 부르짖고
물가 맑은 백사장엔 새들이 맴돌며 난다
나뭇잎 떨어지는 나무아래 낙엽 지는 소리 끝이 없고
장강의 거대한 물줄기는 세차게 흘러도 다함이 없다
가을을 슬퍼하며 늘 만리 밖 타향에서 묵고 있으니
평생 병이 많아 홀로 정자에 올랐네
고생한 것을 괴롭게 뉘우치지만 흰 귀밑머리는 많아지고
몸은 늙고 병들어 처음으로 막걸리 잔마저 멈추었네

서예가 곽종육
  두보(712~770):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가 자미子美이며 호가 소릉少陵으로 하남성 공현河南省 鞏縣 사람이다.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이두로 병칭되며 시성이라고 일컬어진다. 초당시기의 유명한 시인 두심언의 손자이기도 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숙모에게서 자라며 일곱 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사시험에 응시하지만 급제하지 못하고 뒤에 우위솔부주조참군 좌습유 등을 지냈다. 평생 궁핍한 생활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유랑하며 살았다.
안녹산의 난(755~763)이 발발하였을 때 수척하게 옷을 입은 채 스스로 부주에서 영무에서 즉위한 숙종의 행재소로 달려가다 도중에 반란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끌려가 연금되었다. 다행히 지인의 도움으로 장안을 탈출하여 지덕 2년에 황제가 있는 곳으로 가자 황제는 좌습유(황제의 간관)에 임명하였다. 몇 년 뒤에 관중과 장안 부근에 흉년이 들자 관직을 대수롭지 않게 그만두었으며 진주에서 기식할 때는 나무하고 밤과 도토리를 주우며 살았다. 또한 가족들이 부주에서 살 때는 가난에 시달리다 한 아이가 굶어 죽었다.
검남 지역을 유랑하다 성도교외 완화계에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마침 집안과 세교관계에 있던 엄무가 검남서천절도사로 부임하여 그의 도움으로 검교공부원외랑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뒤에 폐병과 중풍 당뇨 등으로 고생하며 강을 따라 유랑하다 뇌양을 거쳐 악사에서 일없이 세월을 보낼 때는 갑자기 홍수가 닥쳐 열흘이 지나도록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현령이 배를 준비하고 그를 맞아들여 구운 쇠고기와 백주를 베풀었는데 크게 취하여 그날 밤에 죽고 말았다.
두보는 전쟁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굶주리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사회의 모순을 시로 표현하였다. 그는 마음이 활달하여 남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하고 천하대사를 곧잘 논하며 고고하였으나 절실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잦은 난리로 어지러움을 몸소 겪으면서도 절개를 굳게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그의 시가는 시절을 근심하며 구부러지고 약하나 정은 임금을 잊지 않아서 사람들은 다 그를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깝도다! 좋은 고삐는 있으나 달려보지도 못하고 기이한 재주도 나란히 다하였으니 죽백에 색이바래 늘어선 무리에서 헛된말이 되고 말았다. 아 슬프도다! 옛날 사람들이 두보의 전중함과 이백의 표일함을 이르는바 신성한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은 두 선생만이 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 송나라 엄우는 두보와 이백을 가리켜 두 시인의 우열을 매길 수는 없고 다만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문집 60권이 전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