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남천면지역에 전승되는 효(孝)문화의 전승양상-


  본지는 2017년 기획 특집으로 경산지방에 전승되는 효문화를 현장과 설화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현존하는 정려각에 세워진 기문을 통해 이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경산지방의 효사상은 곧 나라와 부모를 섬긴다는 근본이념에서 생성된 것으로, 대부분 자신의 몸을 위해(危害)하는 희생효가 경산지방의 효문화의 근간이 되고 있다.
  본고는 지난 호에 이어 경산시 남천면지역에 전승되는 희생효열편을 정여각과 비석에 명문화된 기문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① 정석권 선생 효행
  정석권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도심재(道心齋)는 경산시 남천면 대명 1리 82번지에 소재하며 축조 시기는 1946년 5월, 초계 정씨 문중에서 선생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재당으로 건축양식은 4칸 겹집에 익공형 처마위에 토기와를 얹었다.

  (효행기문)
  군의 남쪽 협석리는 초계 정씨가 대대로 살아온 집이 있는 곳이다. 옛날 조선조의 현종과 효종대왕 시절에도 이곳에 도심재가 있었다. 나의 6대조였던 처사 부군의 이름은 석권인데 도심재는 그의 서재였다. 부군께서는 벼슬길에 나아감을 구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글 읽기를 생업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므로 조상을 위하여 별묘를 짓고 종가의 모자란 일손이나 물자를 도왔다. 이어 도심재를 계속하여 짓는 일을 주관하였다. 재실을 활용하여 자제들을 모아 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오송공의 이름은 시환인데 부군의 가운데 아들로서 선친의 가르침을 이었다. 문장으로 명망이 있으며 효행이 아울러 세간에 뛰어났다. 이 분은 나의 5대조 어른이었다. 관찰사 서공 희순이 이런 소문을 듣고 지나다 들렀다. 이런 아버지와 이런 아들이 있음을 찬미하였다.
  오늘날 세월이 흘러 도심재가 폐허가 되고 기문도 역시 전하지 않는다. 재실 이름의 의미도 소상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히 생각한 끝에 밝혀낸 바, 도심이란, 이는 성인의 지극한 공력을 이름이요, 초학자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이 배우는 까닭은 오히려 성인의 언행을 배우고자 함이다. 배우지 않음은, 역시 성인을 배우고자 아니하는 까닭이다. 그런즉 도심 이 두 글자를 표방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그 이름의 뜻이 바라는 바를 알게 함에 있다.
  어찌 선조를 위하여 정당한 길을 감에 일조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시절에는 과거시험을 위한 문장을 숭상하였으니 능히 그의 배움은 이러한 마음에 있음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
  관원들의 관심은 이와 같은 것이다.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벼슬길에 나아간 맏아들인 조환으로 하여금 선조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오송공을 거느리고 세거지의 서남쪽 동학산 아래 대명리로 이사를 오도록 했다. 그로부터 오송공 후손들이 이 마을에서 살았다. 유업으로 대를 물려 오늘날에 이르도록 가문의 효려를 보존하였다. 다만 선대의 재실의 터는 쑥대밭이 되었다. 나의 조상이 살았을 때는 일찍이 재실을 다시 세우고자 하였으나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마을의 공부방이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뜻을 모아 설치 운영을 하였다. 세상이 많이 변한 뒤로는, 옛날에 마을에는 공부방이 없었다 함은 거짓이라고 하였다. 이 재실 역시 장차 보존하기 어렵다. 신미년 겨울에 이르러 여러 아우들과 상의하여 이 마을에 숙사는 실로 선인들의 이루어 놓은 자취라. 어찌 형을 헐어 내리고 헐지 않겠다는 모략을 참겠는가. 선인들이 이루지 못한 뜻을 뒤에 이룸은 가상한 일이다. 끝내 착함으로써 바탕을 삼아 우리 집안의 터전을 삼았다. 있는 것은 도의의 바탕으로써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아침저녁으로 조용히 사모함에 더욱 편하게 함이 마땅하다. 다만 재실의 여러 당과 실은 합하여 겨우 삼 칸이 된다. 초가에서 매양 학업을 위한 회를 하려니 매우 어려웠다. 중수하고자 하다가 벌써 한 세대가 지났다. 올 봄에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비로소 계획을 하여 여러 종친들이 다 기꺼이 응하여 재력에 따라서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곧 두 칸을 더 짓고 다섯 개의 서까래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
  초가지붕을 벗겨 내고 기와로 잇자니 몇 달에 걸려 공사를 마쳤다. 옛 집에 비하여 좀 더 넓어지고 또 온전하게 되었다. 슬프다. 선조들은 사람의 도덕을 생각하고 배움에 진실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명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달라 정의 깊고 얕음이 같지 않다. 하물며 친한 사람에게서랴. 혹은 지금에 와서 이 재실을 복원하려함은 장차 덕목을 배워 잊지 않게 하려 함이라. 중국의 진후산의 덕목을 보면 따르는 바가 없음을 생각하라. 먼저 나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재실을 지음은 어렵지 않고 이를 전하여 지킴이 어렵다. 나의 후손을 위하여 조상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아서 더욱 오래오래 없어지지 않고 재실이 썩지 않기를 바란다. 병술(1946) 5월 상순 6대손 기섭 경기

  ② 석효부 황씨기적비 (黃氏紀蹟碑)
  석효부 황씨기적비는 효부 황씨 부인의 정려각과 함께 경산시 남천면 금곡리 입구 도로변(금곡리 370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축조 시기는 1966년 3월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정려각은 도로보다 약 2m 정도 높은 지점에 시멘트 옹벽을 넘어서는 지점에 축조되어 출입 시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오르내려한다.
  건물의 구조는 아래 사진에서와 같이 사방 1.8m의 4개의 기둥위에 단조로운 맛배혀지붕을 올리고 좌우 벽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 효부 황씨 부인의 정려각과 석효부 황씨 기적비
 

 

 

 

 


  (효행기문)
  황씨의 본은 창원이고, 충주인 석인수의 아내로 시집을 갔다. 석씨의 본은 충주다. 중간에 경산으로 이사했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효순하고 정숙하였다. 나이 열아홉이 되기 전에 남편이 죽었다. 부인은 곧 따라 죽으려고 하였지만, 시부모가 살아 계시므로 부모를 받들어야 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기에 죽고 싶은 것을 참고 슬픔을 머금고 시부모 음식 봉양을 하였다. 그러다 시어머니는 별세하고 홀로 시아버지와 더불어 사니 자신이 홀로 된 과부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늘 한 가지로 시아버지의 뜻을 맞추었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따듯함과 서늘함의 여부를 힘써 챙겼다. 시아버지 역시 아들을 보는 듯 자신이 홀아비이며 홀로 된 사람임을 잊어버렸다.
  이와 같이 30여년을 지냈는데 시아버지가 늙어 눈이 멀고 또한 불치병에 걸렸다. 마침내 자리에 누워 몸을 움직이려면 곧바로 반드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했다. 부인은 온 몸이 시아버지의 손과 팔이며 귀와 눈이 되어 행동거지를 돌봐야 했다. 오로지 시아버지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면 메아리치듯 응답을 하였고 밤낮 없이 옷을 입고 지내기 16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시아버지의 병이 악화되어 곧 깨어나기를 여러 차례 혼미한 중에 찾는 것이 자라탕이었다. 때는 가물어 냇물이 다 마르고 어디라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인은 냇가 축방 아래로 내려가서 돌을 안고 크게 울었다. 문득 돌 밑에서 철벙거리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았다. 자라가 튀어나와 잡아다 탕을 해 드렸다. 병이 나서 소생시켜 90세까지 천수를 누리게 하였다. 부인 역시 60여세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곧 진정을 하여 고을의 관아와 암행어사에게 포상해 줄 것을 제안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종 임금 병인년과 갑술년 무렵이었다. 벌써 백년이 흘렀다. 공의로 칭송함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하였다. 마을 유림이 그 사실을 들어 글방이나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유림들이 한 목소리로 포상할 것을 제안한즉 오늘에서야 임금이 까닭 없이 마을의 공의를 폄하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가히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 으뜸가는 뜻이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세상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쇠퇴하였구나. 이에 석씨 문중의 여러 족친들이 의논하여 돌을 깎아 그 행적을 새겨 마을 어귀에 세웠다. 그 족친 중에서 증손 진균이 그 전후 사적을 갖고 와서 불민한 나에게 글을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옛날 일컫는 효행을 하였던 사람들은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어려운 바가 있었다. 하물며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일이 의리에 합당하게 함은 더욱 어렵다. 순탄한 경우도 어려운데 하물며 일찍 과부가 되어 한갓 시아버지를 걱정하고 성의껏 수십년 모심에 특이한 공감을 준 것은 하늘에서 낸 것이 아니라면 할 수가 없고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는 예전에도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어찌 진실한 효부가 아니겠는가. 마땅히 아름다운 행적을 오래도록 보존해야 한다. 선비들이 함께 여러 족친들이 해야 할 바로 발의하여 그 역할을 다 함으로써 퇴폐해가는 풍속을 경계하고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들은 대로 이를 쓴다. 부인은 순조 갑자년에 태어나서 고종 기묘년에 별세하였다. 부인의 나이 76세로 혈육이 없어 조카 학정을 후계로 삼았다. 이르러 말하였다.
  예로부터 효자 열부라 일컫는 이들은 많으나 효부라 하는 이는 적다. 어찌 남편의 효행으로 그 마음을 갖지 않고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도리를 이어 가겠는가. 아, 황씨 부인이 며느리가 되어 가히 아들의 구실을 다 하였고 남편을 대신하여 효행을 성실히 하였도다. 남편을 위한 경우는 열녀가 되고, 시아버지를 위하여 효행을 하였으니 효부라 할 것이다. 두 가지를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후세 사람의 본이로다. 자신을 버리고 부모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니 어찌 이런 효행이 후세에 거울이 되지 않겠는가. 화산 권용현 지음

  ③ 한경조(韓景祚) 선생의 효행
  한경조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동강재는 경산시 남천면 금곡리 597번지 효부 황씨 정려각을 조금 지나 장미공원 쪽으로 우회하는 오능지(저수지) 좌측 길섶에 자리하고 있다. 이 동강재는 1995년 8월, 한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높은 시멘트 기단위에 화강석을 붙인 후 그 위에 4칸의 겹집을 세워 놓았다.

  (효행기문)
  한씨는 장산의 명망이 있는 씨족이다. 학문과 효행으로 알려져 있다. 대대로 그 집은 현청의 남쪽 동곡산의 분지 같은 언덕에 직면해 자리하였다. 넉자 정도 높이의 커다란 무덤이 있다. 이는 그들의 선조인 유계 선생의 봉분이다. 새해 첫 머리에 제단을 살피면서 삼가 향을 피우며 제를 올리는 일을 수백 년 동안 끊이 지 않았다. 병인년 무렵, 후손들이 서로 상의하여 말하였다. 우리 조상에게 재실이 없다 함은 불가하다. 곧 무덤으로 들어가는 볕바른 곳에 오가삼간의 집을 짓고 동강재라고 제액을 달았다. 이에 제례를 준비할 주방과 재를 올릴 방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정성껏 선조를 모실 수가 있다. 집안의 여러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젊은이들의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이 해 봄에 공의 종손인 인식이 그의 조상인 동유군의 글을 갖고 내가 사는 석산의 골짜기를 찾아와 기문을 청하였다. 아. 어느 사람이라서 부모의 선대로 조상이 없을까. 어느 사람이라고 하여 사당이 없이 받들어 선조를 넉넉하게 모실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숭모할 곳에 바로 정성스레 추석을 놓고 거기서 제례를 모셔야 한다. 이를 일러 성의를 표했다고 할 수 있다. 조상이 물려준 성심의 준법으로써 행실을 다스리는 바, 전해오는 뿌리가 깊은 것이다. 이런 뜻 깊은 지혜를 물려줌으로써 후손이 능히 뜻만 가지고 받들어 지키는 일은 거의 없게 된다. 한씨 가문은 이를 하고자 하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함을 알고 있다.
  듣건대, 공은 성실함으로써 부모를 섬기며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조상의 산소에 기일이면 묘소 앞에서 반드시 곡을 하니 무릎이 닿았던 자리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의 묘가 너무 멀어 가지 못할 때는 앞서 살펴 조상의 모습을 그려놓고 아뢰었다. 부모상을 함께 치른 형제들의 효행도 마찬가지였다. 재실에서는 계속하여 말이 없으나 효행과 우애를 실천한다.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오히려 공은 독서를 하면서 정한강의 제자로서 받은 학업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인격수양의 요체로 삼았다. 서악재와 정우복, 그리고 이석담 같은 제현들과 교유하며 도의를 갈고 닦았다. 그로써 학문과 문장의 정도를 걸었다.
  공의 아버지는 광해군이 패륜하던 날에 시로써 비판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찬남은 몇 년을 유폐 당하였다. 공은 아버지의 화를 당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끝에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접고 과거를 보지 않았다. 남계로 가서 시를 지어 마음으로써 뜻을 드러냈다. 병을 얻은 지 1년 만에 타계하였다. 이로써 하늘이 준 이성을 지녀 깨달음으로써 위대한 인륜의 큰 절개를 보였다. 장사의 선비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의를 연마하고 담론함이 쇠퇴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손의 경우야 말할 필요가 없다.
  재실에서 머물고 쉬면서 공의 효행과 인성 도야의 효험을 잊지 않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겸양과 효행의 아름다움이 조상의 뜻을 이어가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걱정을 밝힌즉 오늘날의 처신할 바로 삼는다. 몸과 마음을 삼가고 가지런하게 하여 죽더라도 지켜야 할 유일한 장소로 삼아야 한다. 선조의 심정으로 마음을 먹고 한씨 문중의 행실과 학문으로 오랫동안 유지해 간다면 그지없이 이어 갈 것이다. 마음을 모아 이른다. 효자는 그지없으니 오래 가도록 그대에게 이 글을 주노라. 갑술 중추 하순 야성 송준피 근기

 

  ④ 해주 오씨(海州吳氏) 효열각
  해주 오씨의 효열각은 남천면에 소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장을 찾아내지 못하고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만 본고에 수록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효부 해주 오씨는 조선조 경산의 효부로, 충정공(忠貞公) 두인(斗寅)의 후손으로 주태(胄泰)의 따님으로, 김해인 김원두(金垣斗) 선생의 아내로 알려지고 있다. 평소 성정이 어질고 온순하여 정성껏 시어른을 모셨고, 공경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고 한다. 나이 스물에 남편이 아무런 증세도 없이 위급한 병증이 있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마시게 하여 연명을 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남편은 타계하자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시어른을 모시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집안에 슬픈 울음소리가 없게 되었다 하였고, 생전에 정성껏 시부모님을 모시고 돌아가시자 가장이 되어 예의로써 아이들을 가르침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남편에게 열행을, 형제와 이웃에게는 자애로움의 표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현장 확인 자료가 명확하지 않아 이를 소상히 하지 못하였음을 밝혀 둔다.

  이밖에도 남천면 지역에 전승되는 효열행자는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와병 중 산을 헤매면서 지근을 얻어 완치 시켰다는 박은 강만희 선생, 17세에 시집와 시아버지 중풍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는 김해 김씨, 아들의 지극 정성으로 눈먼 부친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순오 석해수 선생, 20세에 모가 중병에 들어 분뇨를 맛보고, 사후에는 시묘살이를 하였다는 죽산 김성재 선생, 15세에 시집와 시부모를 봉양하고 일가를 일으켰다는 초계인 변씨, 19세에 시집와 20세에 남편이 출전하여 전사함으로써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 봉양하였다는 옥산인 전씨와 같은 효열행자가 남천면의 효문화를 전승하여 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음편은 최종회로 남산면편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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