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학회는 10월 28일 오후 1시, 관내 대구가톨릭대학교 중앙도서관 영상세미나실(지하 1층) 대강당에서 경산시 후원, 경산번영회, 경산자치신문, 경산신문, 경산인터넷뉴스 협찬으로 경산학 교육자료 개발과 경산 발전을 위한 “경산의 정체성과 미래비전”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성기중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번에 개최되는 “경산의 정체성과 미래비전” 세미나는 본 세미나를 통해 경산의 새로운 비전, 경산의 도시계획과 발전 전략, 삼국통일(三國統一) 전초기지 경산의 김유신 장군의 역할 등이 그동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재조명하고, 경산의 의병 활동을 연구하여 경산 시민이 자긍심을 가지게 하며, 행복하고 매력적인 도시 비전을 이루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한다고 피력하였다. 이어 축사에 나선 경산번영회 최재림 회장은 경산문화는 지나온 역사를 바탕으로 발굴하고 재조명하는데, 우리가 모두 앞장서야 한다며, 학계와 시민 모두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관건이라고 주문하였다. ▲ 발표 및 토론 후 기념 촬영 2022년도 경산학회 이번 학술 세미나는 모두 4개의 주제로, 4명이 발표하며, 이에 토론자는 주제별로 각 2명씩 모두 8명이 참여하였다. 첫 번째 발표는 경산학회 성기중(전, 경일대 교수) 회장의 “경산의 정체성과 미래비전”으로, 성 회장은 모두(冒頭)에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사결정과 미래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본의 조총 도입 과정과 개발 후 일본의 역사를 바꾼 사실과 당시 조선에서 조총을 처음 접하고 대처한 것과의 차이점에서 오는 결과를 동영상을 통해 설명하면서 발표를 시작하였다. 성 회장은 이어 경산은 역사, 문화, 사회, 산업적으로 훌륭한 지역적 가치와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동안 수많은 학생과 기업인이 스쳐 지나가는 도시로, 또 250만 대구의 위성도시로 일반인도 거쳐 가는 도시, 지역 중·고등학생까지도 지역에 대한 교육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경산의 정체성 연구 방법으로 역사 문화적· 사회환경적· 경관적· 산업적· 인위적인 연구 방법은 물론 동일성과 개별성의 변수로 분석할 것을 제안하면서, 시민의 의견과 전문가의 견해, 단체장의 의지 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래비전은, 조직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고 구성원의 참여를 이끄는 힘이라고 전제하고, 지역 특성이나 지역 정체성 등의 상황에 따라 강점, 약점, 기회요인, 위기 요인(SWOT)이 무엇인지 정확히 체크하고, 지역주민이 원하는 방향성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경산의 미래비전 달성,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반문하면서 경산의 재발견과 미래비전의 달성을 위해 경산의 고유한 특성과 정체성을 살리자고 주장하고, 가장 경산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경산학 연구를 통해서 묻혀있는 경산의 역사, 문화, 산업, 정치, 교육, 관광, 지리, 환경 등 경산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경산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미래를 위해 창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시민 중심, 행복 경산을 꽃 피울 수 있는 희망 경산의 더 큰 미래를 열자고 주문하였다. 또한, 성기중 회장은, 발표 마무리 부분에 이러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창의) 문화도시 추진에, 부응하여야 효과를 얻을 수 있고, 이제 문화도시 추진은 지속 가능한 미래 발전을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김정모 대구경제신문 대표는, 지방자치단체의 확고한 정체성 정립은 개인이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래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며. 산업화 이후 정체성이 쇠락(衰落)하는 한국의 중소도시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경쟁력을 갖기 위한 적절한 제안으로 발표자의 제안에 긍정적인 의견을 덧붙였으며, 서보근 전 경일대 교수는, 경산의 정체성은 과거와 현재의 경산사람의 삶과 지역적 특징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정체성은 경산사람의 삶과 지역이 여타 지역과 비교했을 때 객관적으로 특수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더불어 경산사람과 경산지역의 문물들이 개체 간의 일반적이고 공통된 특징이 공존해야 할 것이라 주문하였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윤대식 영남대 명예교수는, 도시철도와 연계 교통체계를 중심으로,“경산의 도시 비전과 발전 전략”을 발표하면서, 대구 도시철도 경산 연장에 따른 경산시의 여건 변화와 대구 도시철도 경산 연장에 따른 연계 교통체계 구축방안을 제시하면서, 대구권[구미~경산] 광역철도와 대구 도시철도 연계 방안을 제안하고, 본 사업들이 효율적으로 추진될 경우, 도시철도,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의 수송 분담을 증가하고, 자동차의 이용 감소로 인한 탄소배출이 감소하며, 도시개발 및 부동산개발 등의 잠재력 확대에 따른 시민들의 만족도가 증가되고, 대중교통 이용자들과 보행자들에게 편리한 도시교통환경이 조성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대구한의대 김연수(전 대구시 부시장) 교수는, 오늘 토론이 도시철도 경산 연장이 주된 주제는 아니지만, 경산~대구간의 다양한 노선의 대안 검토는, 현재 대구시의 도시철도 신설 관련 민원과 여론이 폭주 상태인 만큼, 실현 가능한 방법부터 구체적인 접근 방안과 전략이 필요할 것이라 주문하였다. 이어 최상용 경산인터넷뉴스 대표는, 경산시는 대구시의 위성도시로, 싸고 넓은 땅이 소요되는 대학, 산업단지. 근로자 아파트를 분담하며 성장해옴으로 직장·거주 불일치가 극심하여 시기별, 시간대별 교통 수요의 편차가 매우 크다고 지적하면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 개통을 앞두고, 연계 체계 구축 등에 관한 연구와 마스터플랜 마련이 시급한 실정으로 경산시의 교통 수요와 수요자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수요자 중심 경산 모델’의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세 번째 발표에 나선 김종국(전 시립박물관장) 박사는, “김유신 장군 압량주 입성과 경산병영사 지역축제 개발방안”을 제안하면서, 신라 삼국통일 전초기지 경산의 위상과 이에 따른 압량주 청장년들의 고귀한 희생과 충의, 이는 마땅히 경산병영사(慶山兵營史)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압량주 군주(軍主) 입성과 더불어, 스스로 압량주(押梁州)를 지키고자 하였던 압량주 청장년들의 구국 의지는 곧 신라 삼국통일의 단초(端初)가 되었으며, 이로써 백제에 함락된 신라 제1의 관문성인 대야성(大耶城)을 다시 탈환하였음은 신라통일의 금자탑(金字塔)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는 곧 덕장 김유신과 압량주 주병(州兵)의 삶과 죽음의 역사인 경산병영사가 아닐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대사건들은 곧 신라문화제(新羅文化祭),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와 대등한 경산병영사를 기존의 경산지역 축제에 아우르는 경산축제의 중심축으로 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존하는 3개소의 병영유적(兵營遺蹟)과 마이지(馬耳池), 부적(夫迪) 등 일대에 대규모 사우(祠宇) 건립과 함께, 희생자에 대한 구국대제(救國大祭)와 더불어 지금의 압량읍 소재지권을 행진하는 김유신(金庾信) 장군 입성(入城)과 압량(押梁) 주병(州兵)의 출정(出征) 행렬을 축제로 재구성하는 방안(方案) 등을 구체적으로 제안(提案)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공수동전포럼 이재성 (전 영남대 부총장) 대표는 경산병영사의 재조명은 곧 잊혔던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으로 이는 곧 경산인의 자존심이요, 긍지가 될 수 있다며 이를 지역축제의 중심축으로 개발하는 기획은 마땅히 동의하여야 할 사안이라 피력하였다. (사)나라얼연구소 박규홍(전 경일대 교수) 교수 또한, 이는 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 후 차근차근히 이에 대한 자료 수집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경산병영사가 재조명되기를 기대한다고 주문하였다. ◈지역에 뜻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경산병영사 추모제 봉행(2022. 10. 14) [제례 봉행] 선웅 스님, 성기중(경산학회 회장), 정호완(대구대 삼성현연구소 소장),김윤근 (전 관란서원 원장),전명수(전 대구시 교육청 간부), 류상열(전 경찰서장), 김종국(문학박사) 등 네 번째 발표에 나선 박승표 향토사학가는 “경산(慶山)의 의병(義兵) 활동과 최문병(崔文炳) 의병장(義兵將)”이란 주제로, 지난 수십 년을 발로 뛰는 향토사 연구를 통하여 현장(現場)과 문헌(文獻), 구전(口傳) 등을 익히면서 그간 소외(疏外)되어 왔던 경산지역 의병사(義兵史)를 수집 발표하였다.특히, 이번에 발표한 자인지역 의병장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선생은 자인향교의 유생으로 임란 발발과 함께 구룡산 물한동(勿寒洞)으로 이거(移居), 의병 창의를 주도하였던 인물로, 선생은 약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미리 산 넘어 경산지역과 연접한 청도 두곡·동창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므로 감히 왜적(倭敵)이 경산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영천 성 복성(復城)에도 권응수(權應銖) 장군의 좌 대장으로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이밖에 문천(文川) 회맹(會盟),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 등을 통해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라 소개하면서, 선생의 아들 둘도 화왕산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올렸다고 덧붙였다. 이후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 후 자인현(慈仁縣) 복설(復設)을 주장하다 경주부윤에게 호된 제재(制裁)를 받았다는 경주 양월 이씨 문중 고서 기록을 소개하면서〈성재선생실기〉에 수록되지 않은 부분을 본 고서(古書) 수록 내용을 인용,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43세에 세상을 떠난 성재 최문병 선생에 대한 뒷이야기와 아울러 경산지역 임란 창의 의병들에 대한 당국의 특별한 관심과 사우(祠宇) 건립, 현창(顯彰) 등을 강력히 주문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최승호 경산신문 대표는, 경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력군이 지나간 도시는 아니지만, 하양현의 신해와 황경림, 자인현의 최문병과 최철견, 경산현의 최응담과 박응성 장군이 왜군의 진주를 막고, 빼앗긴 성을 되찾고, 치열한 전투지역에 응원군을 보내는 등 나름대로 의병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그런데도 임란 의병과 관련한 사적은 구 하양읍사무소에 세워진 임진창의 비를 비롯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 지적하면서, 최문병 의병장의 말안장이 국가 보물로 지정돼 있고, 난포고택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최근에 자인면의 인지재(仁智齋)가 경산시향토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정도로, 나름 임란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인데도 삼성현, 임당유적 등에 비해 홀대받고 있다는 느낌이라 토로하면서. 임란 의병 창의자 들의 기록 재조사, 유물, 유품의 보존 시설 확충, 창의자 들의 묘소 안내문 게시 등 성역화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이번에 박승표 향토사 연구가의 최문병 의병장과 경산의 의병 활동에 대한 발표를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경산지역 의병 활동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며, 덧붙여 발표문 뒤 참고자료로 첨부된 ‘자인현 복현 운동 경과 자료’에서 최문병 의병장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사망 직전에 2차 복현 운동을 재개했다고 소개한 점과 1599년 4월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하고 8월 4일, 4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는 발표에서 발표자는 성재 선생이 비교적 젊은 나이인 43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한 근본 원인이 자인현 복현 운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제기와 발표자가 추정하는, 당시 경주부윤의 극심한 문초와 형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 제기에도 이에 관한 이후 연구 과정에서 본 가설의 인과관계를 한 번 더 확인해 줄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장의식(전 대구대학교 사범대학장) 교수는 박승표 선생은 지역의 향토사 연구가로, 이는 전문 사가들이 놓친 향토의 역사를 발굴하여 그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하는 가교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라 평가하면서, 본 발표 내용에서도 역시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하였으며, 관군(官軍)은 국가의 녹(祿)을 먹는 자로, 마땅히 국방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지만, 의병(義兵)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여야 하며, 어떠한 경우든 역사의 생명인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왜곡과 과장은 주의하여야 할 점이라 지적하면서,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냉정한 눈으로 다시 그 기록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경산학회(회장 성기중)는 본 학술 세미나 준비와 경산학 교육자료 개발을 위해 지난 10월 23일 학회 회원들과 함께 경산지역 항일운동 추모 현장과 지역축제 현장 등을 답사한 바 있다.
경산시립극단 제10회 정기공연 「내 사랑 춘향」이 오는 11월 30일, 12월 1일 양일간 오후 7시 30분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에서 전석 무료공연으로 펼쳐진다. 「내 사랑 춘향」은 고전소설 「춘향전」을 현대적 감각과 코믹함을 가미해 각색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열녀 춘향이 아닌 남자들과 몸싸움에서 가볍게 승리하는 무술 실력을 갖춘 씩씩한 춘향, 꽃을 사랑하며 소심한 성격의 몽룡과 많은 주변인이 등장해 장면마다 웃음을 자아내는 연극이다. 또한, 여러 상황에 어울리는 국악, 현대음악, 트로트 등의 음악으로 연극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대구·경북 지역 유명 배우 26명이 대거 출연하여 공연을 펼쳐 연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장의 생동감과 즐거움을 전할 예정이다. 본 공연은 무료공연으로 티켓링크(www.ticketlink.co.kr)에서 11월 21일 오후 12시에 예매를 시작하고, 각 공연일 전날까지 예매할 수 있다. 또한 잔여석에 대해 공연당일 천마아트센터 그랜드홀에서 공연 시작 60분 전부터 좌석 티켓을 선착순으로 배부한다. 공연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문화관광과(810-5359, 6668)로 문의하면 된다.
▲ 학술세미나 개최 장면(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대강당) 지난 10월 27일 오후 2시,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 대강당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성균관이 주최, 경주순창설씨대종회가 주관한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선생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 봉안(奉安) 10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대구대학교 삼성현연구소의 학술참여로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세미나는 손진우(성균관장), 조현일(경산시장), 설명환(경주순창설씨대종회 회장), 정호완(대구대학교 삼성현연구소장), 성기중(경산학회 회장) 및 경주순창설씨 대종회 회원, 경산시 3개 향교(한소현 경산향교, 장예덕 하양향교, 이희문 자인향교) 전교 및 지역유림대표(천기찬 성균관 전의, 조재환 경산시청년유도회장, 한병수 경산향교 유도회장, 이일근 하양유도회장, 최정숙 하양여성유도회장, 추성구 도동서원 원장)와 유림 등, 시민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김종국 박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본 세미나 개회식은 국민의례 및 삼성현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손진우 성균관장의 개회사, 조현일 경산시장의 환영사, 설명환 경주순창설씨 대종회 회장의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1~2부에 걸친 학술 세미나는, 발표자 6명, 토론자 7명이 참여한 가운데 홍유후 설총 선생의 탄생(誕生)과 행장(行狀), 학문(學問) 및 설총 선생의 어머니와 한국의 어머니상 비교에 대한 발표 및 토론이 오후 6시까지 진행되었다. 첫 번째 발표에 나선 이동근(대구대) 명예 교수는 “《홍유후선생실기》소재 설화 유형과 캐릭터적 성격”이란 주제로, 동 실기의 중요 부분 해석과 서지 등을 통하여 통일 신라는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와 이를 실천한 새로운 인물과 그리고 교육제도가 절실히 필요하였던바, 《홍유후선생실기》에 나타난 홍유후 설총은 바로 그러한 역할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신지식인이었다고 피력함으로써 참석자들로부터 관심이 쏠린 가운데, 토론자 손용주 박사는 《홍유후선생실기》를 토대로 자료를 분석하고, 설총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설화 중심으로 재구성한 독자적인 방법은 물론, 그 유형과 인물 구성을 재해석해 본 데 대하여 큰 관심을 보였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백두현(경북대) 명예 교수는, “차자표기법의 발달과 설총”이란 주제로, 고대 북방지역의 한문자의 유입과정과 삼국시대의 한문자 수용과 토착화, 차자법의 발달과정과 설총의 역할 등을 구체화하였고, 이에 토론에 나선 동 대학 안미애 교수는 고구려 차자표기법의 발달 지체 이유와 백제의 훈독법 존재 여부 확정 유보의 이유, 이두문의 분류 체계, 이두 창시자로 설총이 문헌에서 등장한 이유 등을 덧붙여 주문하기도 했다. 세 번째 발표에 나선 정호완(대구대, 삼성현 연구소장) 명예교수는, “설총선생의 공적과 발전 과제”란 주제로, 설총 선생의 출몰과 표준 이두(吏讀), 국학의 교육과정과 현대 교육과정을 통합하는 발전 방안, 화왕계의 교육 콘텐츠 등을 구체화하였고, 특히 발표 중 경산시의 남산면(南山面)의 행정 지명을 ‘삼성현면’으로 개칭을 제안함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이에 토론에 나선 김영희(동국대) 교수는, 향가 처용가의 새로운 해석을 발표하였고, 송의호(대구한의대) 교수는, 도동서원 정비와 삼성현문화박물관과의 연계운영을 주문하였으며, 삼성현이란 용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네 번째 발표에 나선 안대희(성균관대) 교수는, “설총의 유학자 성격과 〈화왕계(花王戒)〉의 해석”이란 주제로, 설총의 학문적 정체성과 불교 학인의 모습, 설총을 보는 시선과 유학자 의식, 〈화왕계〉의 논란과 작품의 분석, 〈화왕계〉의 간언(諫言) 방식과 설총의 유학자로서의 양상 등을 피력하였다.이에 토론에 나선 임채우(국제뇌교육대학원) 교수는 〈감산사 아미타상 조상기〉의 인용문과 번역 문제에 훈고학적인 이견을 덧붙였다. 다섯 번째 발표에 나선 이창식(세명대) 교수는, “화왕계의 가치와 스토리텔링”이란 주제로, 화왕계의 풍자적 가치와 외적 가치, 화왕계 유산의 풍자 스토리텔링 등을 통하여 설총 기념사업은 공감(共感)과 화쟁(和諍) 정신 구현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강석근(국제언어문학회장) 교수는, 화왕계는 한국 문학사에서 창작 우언설화로 평가되며, 유가의 구경을 이두로 읽어서 한국 유학사와 한국 문자사에 현저한 업적을 남겼지만, 학계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마지막 여섯 번째 발표에 나선 김종국(초대 경산시립박물관장) 박사는, “고전의 설총 어머니와 한국의 어머니상 비교”란 주제로 《홍유후실기목록》을 중심으로 하여 설총과 요석(瑤石) 궁주(宮主)의 모자 관계와 훈육, 요석궁주의 모성애와 진정성, 요석궁주와 한국 어머니상 비교 등을 통해 한국 유학의 종주인 설총 선생의 어머니 요석궁주는 마땅히 한국의 대표적인 어머니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시종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혜해(구룡산 반룡사 주지) 스님은, 우리나라의 어머니상을 시대적으로 논한다면 단연, 신라 화랑의 어머니가 본이 되어야 하며, 동시대에 설총 선생의 어머니 또한 비련의 왕녀로, 홀로 대학자인 홍유후 설총 선생을 양육(養育)하여 한국 유학의 종주로, 하늘을 떠받칠 인물로 후대에 평가받게 하였음은 선생의 어머니 요석궁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이에 한국의 본이 되는 어머니상으로 평가함은 지나침이 없을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이로써 오후 6시까지 이어진 홍유후 설총 선생 성균관 문묘 배향 10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는 종합토론을 거친 후 모두 막을 내렸다.
▲ 자인 시가지를 지나고 있는 호장장군 행렬 ‘2022 경산자인단오제’가 지난 6월 3일 성대한 개막과 함께 3일간을 일정으로 성황리 막을 내렸다. 특히 축제 중 마지막 날은 모처럼 단비마저 내려 가뭄에 시달린 농심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그간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2019년 이후 3년 만에 온전하게 개최되는 올해 단오제(端午祭)는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자인면 계정 숲 일원과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공원 등지에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 연일 운집(雲集)한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성공한 지역축제라는 평가를 받았다. 단오제 첫날(6월 3일)은 개막을 알리는 호장장군 행렬을 필두로 오전 10시 한 장군 대제가 계정 숲 진충묘에서 봉행 되었다. 이날 계정 숲 진충묘(盡忠廟)에서 봉행 된 한 장군대제(10:00~11:00)에는 초헌관(初獻官)에 최영조 경산시장, 아헌관(亞獻官)에 이기동 경산시의회 의장, 종헌관(終獻官)에 유오재 경산경찰서장이 소임을 하였고, 집례(執禮)에 최주근, 대축(大祝)에 손병한, 판진설(判陳設) 박승표·한용하, 사준(司樽) 장순남, 찬자(贊者) 안명욱, 알자(謁者) 김동용, 찬인(贊引) 최종수, 봉향(奉香) 최주호, 봉로(奉爐) 허호근, 봉작(奉爵) 김상해, 전작(奠爵) 황영기, 학생(學生) 김상봉 외 9명 등 모두 25명이 참례(參禮)한 가운데 엄숙히 봉행 되었다(한장군대제 집사분정기 참조). (사)경산자인단오보존회 최재해 이사장은, 지난 2019년 이후 그간 코로나19 여파로 그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지만, 그래도 경산자인단오의 핵심인 다섯 마당은 지난 2년간 시민 초청 없이 비대면으로 이어오면서 이를 유튜브로 중계할 수 있었다고 밝히면서, 2022년 자인단오제는 그간 못다 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반영하고자 하였다고 피력하였다. ▲ 자인단오 큰굿 굿판 장 이날 첫 행사는 오전 공연으로 버블 국악 공연(11:00~12:00), 악기 합주 공연(12:00~12:30), 자인단오 큰굿 순으로 이어졌으나, 무엇보다 관중들의 관심과 흥은 12:00~17:00 시까지 이어진 자인단오 큰굿 현장으로 몰리는 진풍경(珍風景)이 연출되었다. 올해 자인단오 큰 굿의 굿판은 예년과는 달리 계정 숲에 자리한 시중당 앞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특설무대는 시중당((使衆堂)을 중심으로 천장에 여러 가지 화려한 색의 아치 모양의 종이가 양 갈래로 드리워져 있고, 굿당 기둥에는 각기둥마다 오색으로 한 장군을 뜻하는 장군 모양의 종이 인형이 모셔져 있고 기둥 앞에서는 종이로 청사초롱의 역할을 하는 장식을 달아 놓고 정면의 제상 위에는 불교에서 상징하는 명부전의 10대 제왕을 모시고 있다. 또한 마당에는 작두 거리 소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 연행(사진 : 전명수 시인 제공) 오후 행사는 자인단오 큰굿과 함께 진량 보인농악 공연, 창포머리감기 시연, 계정들소리 공연, 여원무 공연, 경산시립교향악단 공연, 개막 축시 낭송, 개막식, 팔광대 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자인 계정들소리 시연 또한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최영조 경산시장은, 우리 지역의 전통 문화유산인 경산자인단오제가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현장에서 개최되는 만큼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흥겨운 단오제 정취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길 기대한다고 주문하였다. 축제 둘째 날(4일)에는 김천금릉빗내농악, 봉산탈춤 등 국가무형문화재 초청 공연과 국궁 시연, 군악대 공연이 이어지고, 대중가요로 구성한 팝콘서트와 경산아리랑제 경연 및 특별공연도 펼쳐졌다. ▲ 우중에 연행된 단오음악회(사진 : 박승표 자인면 번영회장) 마지막 날(5일)에는 오전 11시부터 긴 가뭄 끝에 모처럼 단비가 종일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국가무형문화재 강강술래와 영산줄다리기, 경산시립극단과 평양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팔광대가면 가왕가요제, 단오음악회 등이 성공리 마무리되면서 많은 시민 관광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축제 기간 계정 숲 행사장 곳곳에서는 창포 머리 감기, 민속놀이체험, 천연염색, 다도(茶道), 단오부채 만들기, 전통공예, 떡메치기, 신기전, 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전시·체험 행사들이 펼쳐지고 또, 부대행사로 계정 숲 예술전, 야생화 작품전, 독도 및 단오 사진·단오 음식 전시, 중방농악 페스티벌, 삼성현 백일장 및 미술대회, 자인단오 남녀 궁도대회, 자인단오 씨름대회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였다는 호평을 남겼다. [우리나라 단오제 유래] 단오(端午)의 어원(語源)은, 단오는 일명 수릿날 ‘술의 일ㆍ수뢰일’, 천중절, 중오절,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重午)는 오(午)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 사상에 따르면, 홀수 ‘기수’를 '양의 수'라하고, 짝수 ‘우수’를 음의 수라 하여 '양(陽)의 수(數)'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 사회의 절일로서 설(1월 1일)ㆍ삼짇날(3월 3일)ㆍ칠석(7월 7일)ㆍ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를 '길수'로 여기는 기수민속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릿날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 5월 조의 기록에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수리란 고ㆍ상ㆍ신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불렸다고도 하며, 일설에 의하면 단오의 유래와 더불어 중국의 초나라 사람 굴원이 수뢰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단오의 민속적 유래는, 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째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후 해마다 굴원(屈原)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와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단오의 풍속은, 입하와 소만을 지나 음력 오월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 간다. 오월의 절기로는 망종과 하지를 들 수 있다. 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기초를 둔 것이며,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망종은 보리나 벼와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거두거나 모를 내는 절기이며, 하지는 낮이 가장 긴 절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농사력은 《농가월령가》 오월 조의 농사 관련 부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일로는 5월 5일 '단옷날'을 들 수 있다. 단옷날은 고려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는 일 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 전통 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또 단옷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춧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옷날 창포 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벽邪)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단옷날 중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 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한다. 말려 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할 때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시에 뜯은 약쑥을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 수 있다. 그네뛰기는 단옷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 씨름대회가 있다. 씨름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된다. 한편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하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강릉지방의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민의 축제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 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 내의원에서는 옥추단과 제호탕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 "공조에서는 단오선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라는 궁중 풍속이 전한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신다. 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혜원 ‘신윤복’의 풍자한 단오풍경도(국보 135호)의 해석편에 의하면, 매 음력 5월 5일 단오는 무더운 여름의 초입에 서서 막 끝낸 모내기한 곡식이 별 탈 없이 익어 풍년으로 이어지기를 비는 날이기도 하고,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므로 한껏 양기를 북돋고 온몸으로 안는 날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날을 맞이하여 음식을 장만하여 창포가 무성한 못 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지 놀이를 하며, 창포 이슬을 받아 화장수로도 사용하고, 창포를 삶아 창포탕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기도 한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소담하고 윤기가 흐르며 잘 빠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한 그네뛰기와 씨름도 단오를 맞아 즐기는 놀이였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부녀자들에게도 이날만은 밖에서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되었다(중략).
▲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에 자리한 자인향교(사진 자인향교 모성루)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6호(1985년 8월 5일)로 지정된 바 있는 자인향교(전교 김상도)는 지난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 첫 번째 丁日)인 3월 5일(양력) 오전 10시에 춘계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였다. 이날 대제(大祭)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는 코로나19의 철저한 방역 수칙 준수와 함께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등 5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초헌관(初獻官)에 김상도(69) 현 자인향교 전교가, 아헌관(亞獻官)은 이원종(79) 탤런트 겸 현 경산시립극단 예술감독이, 종헌관(終獻官)은 최용석(77) 현 영천최씨 원당 문중회장이, 분헌관(分獻官)은 유학 이상정(68)씨와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67) 교수가, 집례(執禮)에는 전명수(77) 전 교육공무원이, 대축(大祝)에는 유학 최선교(77)씨, 알자(謁者)에는 유학 김영구(64)씨가 각각 소임하였다. 2002년 6월에 편찬된 자인향교지에 의하면, 자인향교는 본래 고려 공민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하였고, 1562년(명종 17)에 경주 부윤 이정(李楨)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5년(광해군 7)에 도천산(到天山) 아래에 이전하였다가 1728년(영조 4)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중수하였다는 대성전(大成殿)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였고, 1924년에 명륜당(明倫堂), 1926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현존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모성루(慕聖樓), 4칸의 동재(東齋), 평삼문(平三門), 4칸의 하당(下堂), 2칸의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건축 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남향한 경사면에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아래부터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으로 배치되었고, 대성전 왼쪽에는 서무, 뒤쪽에는 화계가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 내부에 진설한 제수와 제의 의례(초헌관 김상도 전교) 석전(釋奠)이란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다. 여기에 석(釋)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酋'는 술병에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이며, '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따라서 석전은 생폐(生幣)와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전(祭典)으로 석전제·석채·상정(上丁)·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이와 유사한 말로 석채(釋菜)가 있는데, 이는 나물 종류만 차려놓고 음악이 연주되지 않는 조촐한 의식이다. 석전의 의식절차는 홀기(笏記)에 의해 진행되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규격을 그 원형으로 하고 있다. 제관은 전일(前日)에 재계(齋戒)를 하는데,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을 행한다. ▲ 임인년 석전대제(춘) 집사분정기 봉행절차는 초헌관(初獻官)이 폐백(幣帛)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에 이어 초헌관이 신위전(神位前)에 첫 술잔을 올리고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 초헌례, 두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아헌례(亞獻禮),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초헌관이 음복위에서 음복잔을 마시고 수조하는 의식인 음복수조례(飮福受胙禮), 대축이 변과 두를 거두는 의식인 철변두(撤籩豆), 초헌관이 망요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태우는 것을 보는 의식인 망료례(望燎禮) 등으로 진행된다. 보편적으로 석전복식에는 금관제복과 유건도포(儒巾道袍)가 있다. 금관제복에는 금관·홀(笏)·수(繡)·중단(中單)·상(裳)·패(佩)·방심곡령(方心曲領)·흑각대(黑角帶)·말(襪, 버선)·이(履, 신)·폐슬(蔽膝, 무릎가리개)·대대(大帶, 큰띠)·의(衣, 겉에 입는 옷)이며, 유건도포에는 유건·도포·목화(木靴, 목이 긴 신발)·사대(紗帶, 도포끈)·행전(行纏) 등이다. 석전대제는 정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 제례악이 연주되고 일무가 추어지는 종합 예술적 성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는 집례가 읽어 내려가는 제의 진행 의례(사회 시나리오)가 모두 한자 원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적잖은 한문 실력자를 제외하고는 읽지도 해석도 어렵다는 점이다.▲ 한자 원문에 의한 진행(전명수, 77)과 알자의 안내를 기다리는 헌관 이에 대하여 자인향교 전교 출신인 천기찬(85) 성균관 전의는,“지금까지는 향교에 몸담은 60~70대 지역 유생들이 행사 때마다 답습적 학습을 통해 큰 무리 없이 집례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한문 세대가 아닌 청소년 세대들이 이를 전수해 나가기에는 충분히 고려하여야 할 사안임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이미 한자로 엮어진 불교 경전(반야심경)도 불교계에서 먼저 우리말로 바꾸어 나가는 예를 보더라도 앞의 제안은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
▲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 『인지재(仁智齋)』의 현상 경산시는 역사적ㆍ학술적ㆍ예술적ㆍ경관적 가치가 높은 지역의 비지정 문화유산을 보존ㆍ관리하기 위해 지난 2019년 ‘경산시 향토문화유산보호 및 관리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후, 다음 해 12월, 향토문화유산보호위원회를 열어 관내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소재 『인지재(仁智齋)』등 모두 3건에 대해 경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 의결하고 이를 지정 예고 후 지정 고시하였다. 이중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산 『인지재(仁智齋)』는 지난 2013년 6월 29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로 선정된 바 있으나, 동 문화재에 대한 보호구역 설정 과정에서 이를 신청 문중에서 취하함으로 보존에 어려움을 겪어온 경산지역 임란(壬亂) 관련 고건축물로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이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성재 최문병 강학소로 건립되면서 자인현역 의병 창의에 직접적으로 활용된 건물로, 이는 지역 의병사에 중요한 인물 및 장소성을 가진 역사적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성재 선생 실기에 의하면, 인지재는 1579년(조선 인조 12년) 당시 자인현이 경주부에게 속현되어 있을 때, 지금의 자인면 울옥리(당시 울곡동)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건립 당시 당호는 『인지정사(仁智精舍)』라 하였다가 1587년경에 『인지재(仁智齋)』로 개칭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동 기록에는 선생이 1589년부터 나라에 큰 국란을 예견하고 홀로 『인지재(仁智齋)』에 기거(起居)하면서 활과 화살, 칼 등의 무기를 수집, 닥쳐올 앞날을 크게 근심하던 중,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생은 스스럼없이 구국 대열에 나설 것을 맹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덧붙여『인지재(仁智齋)』가 현 원당리(元堂里) 소재로 이건(移建)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자인현(慈仁縣)이 경주부로부터 복현된 시기인 1637년에서 이후 30여 년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관리(新官里)에 소재하였다가, 현감 남궁옥南宮鈺)에 의해 신관리에서 원당리로 이건(이 무렵 울곡동에 세거하였던 영천최씨들 또한 지금의 원당리로 전거(轉居)하였다)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뜻밖에 원당으로 관아(官衙)를 옮긴 후부터 계속 우환(憂患)이 잦아들게 되자, 1699(숙종 25)년에 김시휘(金始徽, 1696~1699년) 현감이 지금의 자인초등학교 교정이 있는 북사리(이전에 표기한 ‘서부리’는 필자의 오기로 바로잡는다) 일대로 이건(移建)하였다. 이러니 지금의 『인지재(仁智齋)』가 소재한 부지(敷地)는 1666년 현감으로 부임한 남궁옥(南宮鈺)이 원당리로 관아를 옮기면서 이후 3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한 원당리 소재 자인 현청(縣廳) 부지였던 셈이다.▲ 『인지재(仁智齋)』의 주요 건축 부위 세부 실측도 영천최씨 원당문중 최용석(77)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 자리에 『인지재(仁智齋)』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1699년 현감 김시휘(金始徽)가 현청을 북사리로 옮기게 되면서, 당시 북사리 일대 영천최씨 소유 자산을 원당리 소재 구 현청 부지와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인지재(仁智齋)』의 이건 시기는 이후 1차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서 17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되면서 최초 원당리로 옮겨 세운 시기 또한 1710년경으로 유추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기록과 증언은 곧 고려 현종(顯宗) 재위 시부터 1637년까지 무려 600여 년간 경주부(慶州府)에 속현(屬縣)되었던 자인현(慈仁縣)이 복현(復縣)된 후 두 번째로 자리 잡았던 현청(縣廳) 소재를 입증하는 경산시의 중요 기록유산이요, 이에 『인지재(仁智齋)』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역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의병(義兵) 창의(倡義) 숙의(熟議)와 봉기(蜂起)를 도모하였던 교두보(橋頭堡)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료로, 길이 보존하여야 할 경산 임란 의병사(義兵史)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굴곡을 걸머쥔 체 4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지켜온 『인지재(仁智齋)』는 아래 사진에서와 보는 바와 같이 부서진 기와에는 빗물이 흘러 흉물스러운 천막(天幕)이 이를 가려주고, 10개의 초석(楚石)에 놓인 기둥은 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해 균형을 잃고, 그저 무심한 세월 소리는 산바람마저 지쳐 지나간다. 경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된『인지재(仁智齋)』는 경산시가 지정한 경산문화유산의 얼굴일 터인데 지정 3년이 지나도 그저 속수무책 치켜만 보고만 있는 지정(指定) 당국의 향후 대책이 아쉽기만 하다. 덧붙여,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경산지역(경산, 하양, 자인현역)에는 무려 3천 명이 넘는 현민(縣民)들이 창의(倡義)하여 오로지 우국충정(憂國衷情) 일념으로 초개(草芥)와 같이 목숨을 걸고 오늘의 경산(慶山) 땅을 사수(死守)하여 왔지만, 변변한 임란 추모 공간 하나 현창(顯彰)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문화정책을 훗날 경산사(慶山史)는 무어라 평가할까 두렵기만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 설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먼저, 고려의 태조 왕건과 관련된 설화에서와 같이 신령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영물로서 표현되는 경우이다. 왕건이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폭우를 피하여 동굴 속에서 친구들과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굴 입구에 나타나 으르렁거리며 잡아먹으려 하였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웃옷을 던진 뒤 던진 옷 중 물어 올리는 옷의 주인이 희생당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중 호랑이가 왕건의 옷을 물어 올려 약속대로 왕건이 굴 밖으로 나가니, 그 순간 굴이 무너져 간발(間髮)의 차이로 왕건이 살아나게 되었는데, 호랑이는 순간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었다 했다. 다음은,《삼국유사》권 제5, 감통(感通) 제7,『김현감호』편에서와 같이 호랑이가 자유자재로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과 교유한다는 기록이 있다. 즉, 흥륜사(興輪寺)에서 탑돌이를 하던 김현(金現)은, 한 소녀를 만났는데, 이 소녀는 둘로 변신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 소녀를 따라 호랑이굴로 들어가게 되어 소녀의 형제 호랑이에게 잡혀서 먹히게 된 것을 소녀의 기지(奇智)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형제호랑이의 살생에 대한 천벌이 멀지 않음을 감지한 소녀가 김현의 손에 죽음을 당하여 형제를 살리고, 김현에게 공을 돌렸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인간의 행위에 감동된 두 개의 인간을 도와주는 경우, 또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고 그 은혜를 갚는 경우이다. 이상의 유형이 호랑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랑이와 토끼의 설화는 호랑이의 어리석음을 희화적(戱畵的)으로 표현한 유형에 속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꾀 많은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게 되었다. 토끼는 꾀를 내어 먹을 것이 많은 곳을 가르쳐 줄 테니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어리석고 욕심이 많은 호랑이는 토끼를 따라 강변에 가서 꼬리를 물에 담그고 많은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점점 물이 얼기 시작하여 꼬리가 무거워지는 것도 모르고 더 많은 물고기가 달리기를 기다리다 결국 물이 얼어붙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이상의 설화에 나오는 호랑이상을 살펴보면,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무섭고 두려운 맹수이지만, 우리 생활에 밀접한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동물로서 여겨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어리석고 의뭉스러울지라도, 전혀 간교하지 않고, 오히려 우직함이 돋보이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곧 호랑이의 상징적 표현이다. 민화 속의 등장하는 호작도는 호랑이를 꾸짖는 까치를 해학적으로 풀이한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탐관오리를 풍자하지만 청렴한 까치가 있어 이에 물들지 않는다 하였고,《동국세시기》에서는“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하였다. 이러한 벽사의 염원은 호랑이삼재부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재는 곧 풍(風)·수(水)·화(火)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 것으로, 정초의 세화(歲畵)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행위의 완성을 꾀하려는 민중 속에 전승되는 지혜로 볼 수 있다. 또한 호랑이는 민중 속에 강력한 신앙적 존재로 아래와 같이 산신신앙의 신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호랑이는 사나운 맹수지만 때로는 범과 같이 온순한 존재로 인간들을 구제하는 친근한 존재로, 벽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참고로 인간의 띠 궁합론에는 호랑이띠 해에 개띠, 돼지띠, 말띠와는 서로 잘 소통되는 반면, 원숭이띠 뱀띠와는 서로 간에 이해와 배려가 요구되기도 한다는 풀이가 전제되고 있다. 그 원리는 설화적 풀이로, 개띠는 책임감이 강하고, 욕심이 적고, 현실에 만족하는 성격으로, 호랑이띠와 원만한 띠에 속하고, 돼지띠는 성실하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저돌적인 성향이 있어 호랑이띠와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고, 말띠는 행동이 앞서는 성격으로 행동적인 말띠와 용맹한 호랑이띠의 궁합은 무난하다는 평이다. 반면 원숭이띠와 뱀띠는 서로 주관이 강하여 양보하지 않는 궁합으로 서로의 장점보다 단점을 들추어내기 쉽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인간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기상과 같이 걸림 없이 모두가 건강하고 가정마다 행운이 가득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 경상북도청에서 사)대한노인회 경산시지회 대상 수상(원내 최재림 회장) 사)대한노인회 경산시지회(회장 최재림)는 2021년도 경로당 행복도우미사업 활성화 평가에서 경상북도지사(지사 이철우)로부터 대상을 받았다. 사)대한노인회 경산시지회는 2019년 10월 1일 경산시로부터 경로당 행복도우미사업을 위탁받아 올 12월까지 본 사업을 수행하면서 그간 행복도우미 20명, 파트타임 4명 등 총 24명의 인력을 확보, 관내 381개 경로당 중 260개 경로당을 대상으로 이를 운영하면서 지난 2월 말부터 코로나19로 인하여 프로그램 운영을 현실에 맞게 비대면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함으로 어르신에게 더 나은 삶의 질 향상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수시 방역 활동 및 경로당시설을 점검,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들에 대한 가정환경 정비 강화로 더욱 훈훈하고 활기 넘치는 경로당 문화조성에 공헌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에 최재림 회장은“우리 사회가 노인을 받들고 공경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인륜의 본이요, 행복이라 할 수 있지요”하면서 그동안 소임을 묵묵히 수행한 직원들을 위로하였다. 주요 실적을 살펴보면, 지난 2년여간은 코로나19로 인하여 많은 것을 제약받아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노인회 시지부의 독창성 있는 비대면 7대 사업을 운영, 이에 주목받기도 하였다. 이중“경로당 코디네이터”사업은 관내 381개소 전 경로당에 대한 매월 정기 시설점검과 위생용품 전달 등을 통해 쾌적하고 안전한 시설물 관리는 물론, 관내 취약한 오지 경로당 32개소에 대하여 위생적인 경로당 관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에 세부 사업으로는 관내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 162명에 대한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다양한 정보 제공은 물론,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 12가구에 대하여 관내 봉사단체와 협력을 통해 벽지 도배, 장판 설치, 주방기 설치, 주방 집기 청소 등을 통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특히 이번 대상 평가는 이 밖에도 자체 프로그램개발을 통해‘찾아가는 따르릉 학습지 운영’,‘어르신 일상 모습 영상물 보내기’,‘이 미용 봉사활동’등을 통하여 어르신과 함께하는 프로그램 운영과‘1:1 학습지 운영’,‘이·미용을 통한 위생적인 생활 분위기 조성’,‘코로나19로 대처방안’등에 대한 추진 실적에 높은 점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어르신과 함께하는 자연정화 활동 및 행복농장 운영을 통해, 매월 말 경로당별로 자연정화의 날로 정하여 읍면동별로 지난 3월부터 실시하여 총 8회에 240명이 참여하여 마을안길 등 환경 취약지에 대해 정비를 하여 깨끗한 거리를 조성하였으며, 또한 지역공동체 사업의 하나로 행복 농장에 고구마, 배추, 콩, 무 등 작물을 재배하여 어르신들의 공동체 의식은 물론, 소통하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조성함과 아울러 생산한 작물을 나눔으로 이웃을 배려하는 경로당 문화를 조성하였다는 후문이다. 이는 곧 평소 지회장의 적극적인 관심과 24명 행복도우미 모두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였던 그간의 노력에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 『자인의 역사』 출판물 지난 11월 25일 오후 2시, 이팝나무 군락지로 알려진 자인면 계정 숲 내 조선시대 자인현의 정청(政廳)인 시중당(使衆堂) 뜨락에서 한 국문학자(이홍우, 59, 문학박사)가 수년간 각고(刻苦)로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자인의 역사』란 제명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는 자인면 출신 이태희(61, 대주화학 대표·자인면 명예면장)·황성일(81, 동아P&P 회장)씨의 협찬과 류영태(61) 전 자인면장의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는 후문이다. 자인의 역사를 적은 서책은 과거 1800년대에 네 번에 걸쳐 읍지 형태로 출간되었으나, 공식적인 기록물은 1888년 자인현감으로 부임한 오횡묵(吳宖默)이 1889년 발간한 『자인총쇄록(慈仁叢瑣錄)』과 1932년에 출간된 자인 출신 근대 서화가인 희재(羲齋) 황기식(黃基式, 1905~1971) 선생이 집필한 『자인현읍지』가 전부다. 하지만 내용이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출간된 이홍우 박사의 『자인의 역사』는 무려 782쪽에 달하는 자인 사람의 삶과 생활 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당일 출판기념회에 참석(경산시 기관장 및 자인면민 100여 명)한 인사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시중당 앞에서 열린 『자인의 역사』 출판기념회 『자인의 역사』는 지난 2018년 1월부터 저자가 개별적으로 자료수집과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공식적으로는 2021년 3월 자인역사 편찬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신라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향토사 자료를 바탕으로 약 4년에 걸쳐 완성하였다고 귀띔하였다. 이 책은 모두 11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 중 미세하게 소상(昭詳)과 왜소(矮小)한 부분이 다소 없지 않으나, 전반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이종원 자인역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은 “그동안 자인의 역사 편찬을 위하여 애써 주신 자인면민과 출향(出鄕) 인사에게 감사드리며, 과거 자인현 구역에 포함되었던 남산(南山)·용성(龍城)과 진량(珍良)·압량(押梁) 일부 지역을 포함한 자인의 역사서 개정판이 발간되길 희망하며, 훗날 이 책이 새로운 역사서 발간에 유용한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피력하였다. 저자 이홍우 박사는 자인면 신도리 출신으로,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한 후 동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무천극예술학회 회장, 한국드라마학회 이사도 맡고 있다. 연구 저서로는 『한국 희곡과 극적 상황』, 『한국 현대 희곡론』, 『희곡의 이해』, 『희곡 원론』 등이 있으며, 창작 희곡집으로 『캄차카반도 4,750미터 클류체프스카야산의 하얀 웃음(연극과 인간)』이 있다. 한편, 자인면은 오는 12월 6일부터 각 기관, 공공도서관 및 대학도서관 등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책자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자인면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무료 배부할 예정이라 밝혔다.
▲ 본 세미나의 취지를 설명하는 성기중 회장과 발표자 노중국 교수 경산학회(회장 성기중)는 지난 12일, 관내 대구가톨릭대학교 요한보스코관(C9) 401호실에서 경산학회 창립 7주년 기념‘경산의 정체성과 발전전략’을 주제로 한 학술 세미나를 모두 3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먼저 성기중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번 경산의 정체성과 발전전략 학술 세미나는 모두 4개의 주재를 통해, 먼저 경산지역이 신라의 삼국통일 전초기지의 역할이 그동안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재조명하고, 문화도시 추진과 경산의 정체성, 경산 자인단오제의 재조명, 경산의 산업과 발전전략을 주제로 경산지역의 발전과 정체성 형성으로 경산시민이 자긍심을 가지고 행복하고 매력적인 도시를 이루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고 피력하였다. 이어 제2부 주제발표와 토론에서 먼저 노중국 교수(전 계명대학교 교수)는 ‘신라의 군사제도와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경산 병영지’란 주제로, 신라의 군사제도와 경산병영유적에 대한 학술발표에서 삼국시대 삼국 간의 전쟁상황과 아울러 당시 김유신 압량군주와 압량주병에 대한 발췌에서 압량유적은 우리나라 고대 유적 가운데 군사훈련시설이 사적(史蹟)으로 지정된 것은 현재까지 경상병영지가 유일하다 하였고, 그러나 이 병영지 유적에 대해서는 구전이나 설화만 남아있을 뿐 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 기록도 없고 발굴조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고고학적 자료도 없다 주장하고, 또 현장에는 훈련장만 있을 뿐, 군사들의 막사와 지휘관의 숙소, 무기를 보관하는 무고와 말을 관리하는 마사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강하게 지적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김종국(경산자치신문 문화부 국장) 박사는, 이미 경산병영유적은 사적 제218호로 지정된 만큼 인제 와서 급격한 도시화로 팽창될 대로 팽창된 이 일대에 대하여 구전·설화 등의 논리와 문헌 기록, 발굴조사 운운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적하면서, 지금은 학자들이 긍정적인 논리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합심할 때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장의식(전 대구대) 교수는 경산을 3성현의 고장이라기보다 김유신 장군을 포함한 삼성일웅(三聖一雄)의 고장이 바람직하다는 이색 제안을 하기도 했다.▲ 발표 후 종합토론에 앞서 발표자와 토론자가 한 곳에 제2 주제발표에 나선 성기중 회장은 문화 시대 등장과 문화도시와 지역발전, 법정 문화도시 만들기, 문화도시 지정사례 등을 피력하면서 이를 마무리하면서 경산의 정체성 재발견은, 시대적 사회적 요구로 이를 지역발전 전략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토론에 나선 박형(경산학회) 교수와 박승희 영남대 교수는 이에 대하여 “경산시의 문화 역량과 문화유산 자원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경산시의 새로운 성장 모멘텀이 될 독창적인 문화도시를 추진할 거버넌스로 경산문화재단 설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3 주제발표에 나선 한승희 대구가톨릭대학 박사는, 경산자인단오제의 현황과 한 장군의 실체 등 발표에서 토론에 나선 최주근(대구과학대) 교수와 안현경(경북대) 교수로부터 경산자인단오제를 재인식하는 자료로서 그 필요성은 인정하나 주신(主神)에 대한 논리(論理)는 지역정서를 고려하여야 할 사안이란 의견과 함께, 현 경산자인단오제 회원으로 활동 중인 최주근 교수는 발표내용이 대부분 기존 자료로 도출된 특이사항은 발견할 수 없었으나, SWOT 부문에서 한 장군의 실체와 실존적 인물론에 대한 지적은 우리가 모두 지속으로 연구해 나가야 할 과제라 지적하고, 여러 기록에서 이미 천명된 바와 같이 한 장군의 등장과 실존적 논의는 전설이기 이전에 지역의 양민을 구한 한 장군 신앙의 주체라는 데서 단오적 의미를 부여하여야 할 것으로 보며, 이를 통한 향후 브랜드적 가치는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나, 경산자인단오제 주신을 경산을 대표할 수 있는 김유신을 모티브 할 수 방안 제안에는 자인 지방의 정서와 환경 등을 고려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피력하였다. 제4 주제발표에 나선 우종현 (경일대) 교수는 경산의 산업과 발전전략이란 주제로, 경산시의 과거와 현안을 사례별로 구체화하였고, 이에 토론에 나선 김연수(대구한의대) 교수, 최상룡(경산 인터넷뉴스) 발행인은 특히 경산의 미래를 예측하는 인구 이동과 노령화 현상에 공감하였다. 이날 세미나는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만 참석하여 비대면으로 개최됐고, 본 세미나의 개최 상황은 원안대로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YMidMgm7b2s’로 방영되고 있다.
▲ 추석을 앞두고 북적거리는 자인 재래시장 오는 21일 추석(秋夕)은 설날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양대 명절(名節)에 귀향(歸鄕)하는 인파를 보고 민족의 대이동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이중 추석은 매년 음력 팔월 보름날로, 이는 신라시대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했다 전승되며, 예로부터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과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님께 차례(茶禮)를 모시는 의례를 갖추게 되며, 이를 다른 말로 가위·한가위 또는 중추절(仲秋節)이라 하기도 한다. 이때는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할 계절이라 음력 팔월 중순은 모든 것이 풍요롭기만 하다. 절기 또한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라 예부터‘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 하여라!’라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라 하였고,《삼국사기》권 지1, 신라본기 제1,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이사금] 때, 왕이 이미 6부를 정한 후 이를 두 부분(部分)에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에게 각기 부내(部內)의 부녀자를 거느리어 편을 짜고 패를 나누어 7월 16일부터 길쌈을 시작하여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고사(考査)하여 지는 편이 음주(飮酒)를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이에 가무(歌舞)와 온갖 유희(遊戲)가 일어나니,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고, 이에 진 편의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였던 음조(音調)가 훗날 회소곡(會蘇曲)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남아있는 가배(嘉俳)가 곧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가위·한가위고 추석이다. 집안에 따라 다소 달리할 수 있지만, 추석 전에 조상님 산소를 성묘하고 벌초를 마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추석을 맞이하며, 보편적으로 추석날 아침에 첫 번째 행하는 일은 수일 전부터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상님 음덕(蔭德)을 기리는 차례를 모시는 순으로 시작된다. 이때는 설날과는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제일 먼저 올리는 천신(薦新) 의례를 거치는 것이 전통적인 상례(常例)이다. 이는 곧 조상님의 음덕(蔭德)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 그리고 효에 근간(根幹)이 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조상님과 후손들의 교감(交感)은 이를 받드는 후손들에 제의(祭儀) 축문(祝文)에서 그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필자는 축문에 수록된 용어와 사자성어 등을 중심으로 이를 서술하고자 한다(본문은 기제사 제의 의례에 국한).한자로 차례(茶禮)는 다(茶)자를 쓴다. 즉 조상님께 차를 올리고 지내는 제사(祭祀)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즉 15일 단위로 4대조까지 모시는 사당(祠堂)에 차[茶]를 올리고 간략한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현상으로 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없지 않으나, 이는 최대한 간소화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제사와 차례의 가장 중요한 부문은“독축(讀祝)”이다. 즉 모든 제사상을 아무리 진수성찬을 올렸다 해도 제주(祭主)가 마음으로 받치는 축문(祝文)이 있어야 성대한 제사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사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듯, 신(神)도 제주(祭主)의 애달픈 문장과 목소리에 마음을 연다는 데 진정성을 두고 있다. 축문의 문장 구성에도 어딘가 모르게 절절하고 효가 묻어나 있다. 이를테면 제를 알리며 조상님께 알린다는 문장도‘효자 ○○ 감소고우(敢昭告于)’라는 사자성어로‘제주○○이 삼가 밝게 고한다’하였고, 돌아가신 분을‘현고·현비(顯考·顯妣)’라 높이고, 부군(府君)이라 하였으며, 해가 바뀌었다 하여‘세서천역(歲序遷易)’으로 조상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고, 기일(忌日)을 휘일부림(諱日復臨)이라는 애통(哀痛)함을 표했다. 또한 덧붙여 그 그리움을‘추원감시(追遠感時)’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각이 난다고 하였으며, 그 감정을‘호천망극(昊天罔極)’‘불승영모(不勝永慕)’라 하여 넓고 하늘 같은 조상님의 음덕을 기렸다. 이와 아울러‘근이(勤以)’‘청작서수(淸酌癙羞)’라하여 정성을 다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공신전헌(恭伸奠獻)’이라 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제사를 올린다고 하였으며, 종결문에‘상향(尙饗)’이라 하였으니 부디 조상님께서 흠향하시라는 간절함이 있다. 이 밖에도 축문에는 유시보우(惟時保佑), 실뢰신휴(實賴神休), 세천일제(歲薦一祭), 예유중제(禮有中制), 이자상로(履玆霜露) 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기제사의 축문은 다음과 같이 후손들의 애틋함이 글귀마다 묻어나 있다. 먼저 기일을 일깨우면서‘유세차(維歲次)’, 이는 애절한 마음을 여는 문장으로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는 발단부로 돌아가신 애통함 해를 맞이한다는 첫머리 문장이다. 이어지는 간지(干支)는 돌아가신 해를 의미하며, ○월 간지, 삭(朔)은 그달의 초하루 간지, 이후는 기일과 간지를 적는다. 이는 돌아가신 해와 돌아가신 날의 달과 그달의 초하루 간지를 적고, 이어 기일 날짜와 간지를 적은 후, 제주의 이름을 쓴다. 독축(讀祝)은 제주가 읽거나 대신 읽는 대축(大祝)이 있으나, 기제사나 제주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처럼 제의(祭儀)는 곧 후손들을 훈도하는 아름다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으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전통 축제를 통하여 효와 충을 일깨워 왔고, 이로써 반만년의 찬란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연면히 이어왔다.
경산시립극단 이원종 예술감독은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 여파로 관망하여오던 경산시립극단 제7회 정기공연을 오는 9월 2일(목요일)~9월 4일(토요일)까지 3일간 평일 19:30/주말 16:00시 예정으로 엄인희 작“그 여자의 소설”을 김도훈 연출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고 8월 20일 경산시립극단 측이 밝혔다. 이번에 올리게 된“그 여자의 소설”은, 일제강점기 치하에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시부모와 딸 조춘이를 데리고 근근이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주인공을 배경으로, 그녀가 살아가는 고난과 삶의 애환, 역경을 그
▲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 8월 5일(목요일) 13:30~17:30분까지 무려 3시간 30여 분(휴시시간 제외)에 걸쳐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가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사)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무형문화연구원(전북 전주시 덕진구 소재, 원장 함한희)이 주관한 행사로, 최재해 보존회장은‘지금까지 여러 번 학술대회를 가져왔다. 하지만, 발표 때마다 학자들 간에 여러 이견이 분분하여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를 함축시켜서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다시 시도하였다.’라며‘경산자인단오제를 문화재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경산 자인 고을에 있는 지역 공동체(共同體)의 큰 행사, 제사(祭祀)로 봐주셨으면 한다’라고 피력하였다.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는 어디까지나 경산자인단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한 장군 오누이에 대한 향토 사랑과 충절(忠節), 그리고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기 위한 제의(祭儀)를 근본으로, 이는 세시풍속(歲時風俗)에 따른 여느 단오절(端午節) 행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역축제(地域祝祭)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은,‘어디까지나 우리 것이 가장 한국적이요, 세계적이라 하듯, 자인 지방 단오 속에는 한 장군이란 지역 수호신(守護神)이 존재한다는 점과 그의 충절(忠節)이 이 고장을 지켜왔다는 점만으로도 축제(祝祭)로서의 독창성(獨創性)은 여느 단오절 제의 의례에 본이 된다고 자평하였다. 이를테면, 제의(祭儀) 이전에 지역에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진충묘(盡忠廟)에 이르는 호장행렬(戶長行列) 또한 제의(祭儀)를 앞두고 지역 수호신(守護神)인 한 장군 오누이를 맞이하려는 서막(序幕)이다. 이는 전날 도천산(到天山) 아래 검흔석(劍痕石) 부근에서 연행(演行)되는 영신의례(迎神儀禮)와는 차별화되고 있다. 이는《동국세시기》에 수록된 군위단오편에도 주신인 김유신(金庾信)과 부신인 소정방(蘇定方)·이무(李茂) 장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대제(大祭)에 앞서 고을 이방이 대신한 호장행렬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곧 강신례(降神禮)를 의미하는 행렬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강릉단오의 경우도 그 형식은 달리하고 있지만, 유사성은 없지 않다. 여기서 자인단오와 한 장군제 유래를 살펴보면, 그 출발점은 통일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자인읍지(慈仁邑誌)》에 따르면, 9세기 전후 신라 시대에 왜구(倭寇)들이 자인의 도천산(到天山)에 성(城)을 쌓고 기거하면서, 지역 양민들을 괴롭히자, 한 장군 오누이가 버들못[柳提]에서 여원무(女圓舞)와 배우잡희(俳優雜戱)의 놀이판을 벌여 이들을 유인(誘引), 섬멸(殲滅)하였다는 데서 설화적 발단부(發端部)와 전개부(展開部), 결과부(結果部)가 성립된다. 이에 증시부(證示部)는 한 장군의 충의(忠義)를 추앙(推仰)하여 여러 곳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단옷날에 추모제를 모신 후 여원무와 배우잡희, 무당굿, 그리고 단옷날 행사인 씨름, 그네 등, 다양한 놀이를 3~4일에 걸쳐 연행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이른바 완벽한 설화적 4단 구조가 갖춰진 셈이다. 이와 같은 축제 전통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전승력(傳承力)이 약화(弱化) 되었으나, 1971년 한장군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 한장군문화제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뒤 1991년에 한 장군을 추모하는 한묘대제(韓廟大祭), 여원무(女圓舞), 호장굿, 자인팔광대(慈仁八廣大), 무녀 굿이 자인 단오절에 본격 연행되면서 1996년부터는 경산시의 후원으로 경산자인단오 한장군축제로 개칭되어 오다가 2007년 3월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名稱)이 변경되었다. 이러니 자인단오의 뿌리는 곧 한 장군 축제이고, 한 장군 오누이가 중심 신체(神體)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역 전통 축제가 단오(端午) 세시풍속(歲時風俗)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단오(端午)라는 큰 틀 속에 한 장군의 존재가 동일선상에 종속된 축제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한 장군을 추모(追慕)하는 제의를 단옷날에 향사(享祀)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곧 기일(忌日)과 무관한 단옷날이 한 장군 신위(神位)를 받드는 날이란 뜻이 된다. 이날에 오신(娛神)과 유신(遊神) 행위로 등장하는 여원무와 자인팔광대, 자인 큰 줄다리기, 무녀 굿 등은 한 장군을 추모하는 종속(從屬)된 하나의 제의 의례의 진행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축제적 일련의 행위에 그간 학계에서까지 설왕설래하며 결론을 얻지 못한 부분을 이번에 무형문화연구기관에 의뢰하여 큰 틀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이다. 이에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회장 최재해)는 문화재라는 측면보다 자인의 큰 어른 한 장군에 대한 캐릭터를 부상(浮上)하고 이를 기리고자 하였던 것, 그 구상이 이른바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이다. ▲ 학술대회 개최 목적과 취지를 설명하는 최재해 보존회장 그 방안(方案)은 모두 6편의 논문(論文)을 통해 6명의 발표자와 6명의 토론자를 통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먼저 제1주제는, 무형문화재 정책과 경산자인단오제(발표 한국예술종합학교 허용오 교수)로, 발표자는 ①경산자인단오를 보는 두 시선, ②흥미로운 대상으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③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경산자인단오제, ④경산자인단오제 앞에 놓인 세 갈래 길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본고에서도 종래와 차별화된 논증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결론 부분에서 ①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시도, ②현재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제기된 문제점을 섬세하게 개선, ③현재의 국가무형문화재 운용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토론자(목포대학교 이경엽 교수)는, 보존회 앞에 놓은 세 갈래 길이 타당한 제안인지, 이런 식의 제안을 받을 이유가 있는지, 어떤 길을 수용할 것이지 등등, 보존회로써 선택하고 응답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하였다. 두 번째 주제는 지역 공동체 유산으로서 경산자인단오제로(발표 영남대학교 이은정 교수), 본고는, 서론 부분에서 자인단오와 연계한 구 자인현 내에 읍면을 달리한 마을 단위 당산제(堂山祭) 또는 동제(洞祭) 형식의 개별 한당을 지역공동체적 측면에서 진충묘(盡忠廟) 내 통합 흡수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발표자는 발표문 끝부분에 보존회가 경산자인단오제 내에서 한당 제사의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위상을 수용하고, 각 마을에서 한당 제사(祭祀)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유연하게 포섭(包攝)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발표자의 제안에 반박하고 나선 최주근 교수 이에 토론에 나선 대구과학대학교 최주근 교수는, 마을 단위 개별 사당은 지역단위 독창성(獨創性)과 개별 신앙적(信仰的) 개념(槪念)으로 존속되고 있는 바, 이를 단순 문화재적 한계로 보고 향후 통합 또는 포섭하는 방안은 바람직하지 못한 제안이라 지적하였다. 세 번째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호장장군행렬의 운용과 놀이 구현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제언(발표 진주문화연구소 남성진 교수, 토론 한양명 교수) 이다. 발표자는 본 발표에서 한 장군의 출현 시기를“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하였고, 호장행렬은 전설의 역사화 현상 즉, 자인단오의 의역사적(擬歷史的) 접속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과거의 전설적 인물을 현재의 실존적 시간 속에 불러와서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한양명 교수는, 호장(戶長)을 장군행렬로 보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호장행렬을 단오를 선전하는 길놀이로 보거나 단선적인 일회성 행렬 정도로 보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재현이 이루어진 것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네 번째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여원무 연구이다. 발표자(발표 계명대학교 이종희 교수)는 본고를 통해 경산자인단오제의 유래와 역사를 피력하고, 여원무와 여원화, 여원무의 특징, 여원무의 구성과 변천을 논하고, 이어 여원무의 전승 보존과 문제점 개선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안동대학교 전성희 교수는, 여원무와 여원화의 본질에 대한 의식 부족과 여원무 원형 연구 및 재창조 과정의 당위성 입장이라는 표현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다섯 번째 발표에 나선 석대권 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장은, 국가무형문화재 범주로서 자인팔광대의 전승과 과제를 제시하였다. 석 소장은 본고에서 특히 자인팔광대의 명칭과 대본의 문제를 제시하고 보존회의 적극적인 검토를 주문하였다. 이에 토론에 나선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는, 3가지 질문을 통해 발표자가 제시한 자인팔광대에 대한 문제 사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것을 요구하였으며, 자인팔광대에는 발표문에 지적되어 있듯이 이야기와 시대에 대한 통찰과 영남의 춤과 음악이 응집된 인간 위무의 종합예능인데 이 부분이 자인단오제에서 가볍게 다뤄지는 것 또한 경산자인단오제 성격을 잘못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마지막 발표 주제는 경산자인단오제 큰굿의 방향성 탐색이다. 이에 발표에 나선 경상대학교 홍태한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자인단오제 큰굿의 가치와 방향성, 향후 보존회의 역할 등을 역설하였고, 토론에 나선 윤동환 전북대학교 교수는, 자인 단오 큰굿의 제의적 복원 가능성에 대한 논의와 자인의 큰굿 형식에 대한 개인적 사견과 이를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전승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였다.▲ 종합토론에 나선 박승표 자인면 번영회장 본 발표를 마친 종합토론 시간에 무려 150분(주제당 25분)에 걸친 발표자와 토론자의 토론에 열중해온 자인면 번영회 박승표(향토사학가) 회장이 종합 토론자로 나서면서, 그간 답답한 심경을 대략 10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발표자의 진정성 있는 학술적 해명과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경산자인단오제는 개별적 연행이 아닌 5마당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②자인단오축제를 조선 시대 고을 축제로 표현함은 신라 시대부터 전승해 온 경산자인단오 축제에 대한 극단적 편견이다. ③호장행렬은 신라말부터 한 장군 제의를 최초 봉행한 해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조선시대로 표기함은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없다. ④호장행렬은 단순 가장행렬이고, 길놀이 문화의 행렬로 치부하는 것은 경산자인단오축제의 위상을 저해하는 극단적 표현이다. ⑤호장행렬은, 왜구를 물리치고 승전(勝戰)을 알리는 행렬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다. ⑥여원무 연구에서 한 장군은 구비전승되는 인물로, 이는 자인중학교 증축 시 고분발굴 시기로부터 추정된다는 의견은 근거를 왜곡한 발상이다. ⑦여원무 복제에 있어 설왕설래한 발표 내용은 발표자가 주장하는 발전적 방안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⑧팔광대에 등장하는 인물 소개가 갈팡질팡하였음은 체계적인 연구라 할 수 없다. ⑨한장군의 등장 시기를 이미 여러 읍지에 수록된바 같이“나대지유풍”즉, 신라 시대 풍속이라 하였는바, 이에 발표자가 신라말 또는 고려 초라 굳이 지칭함은 무슨 의미인지? ⑩팔광대를 유교적 바탕에서 생성된 1980년대 창작품이다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연구한 것인지, 이로써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은 무엇이란 말인가 등, 요목 조목 질의를 하였으나, 종합토론을 위한 시간적 제약 때문에 종합토론의 답변도 없이 끝마치게 되어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며. 이에 대한 토론자의 구체적인 답변을 요약하여 보존회측에 제시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 진행팀을 주목하게 하였다. 필자(김종국 박사)는, 본고를 정리하면서 2021 경산자인단오제 학술대회에서 제출한 경산자인단오제의 발전적 방안 모색을 표본으로, 경산자인단오제 보존회가 이를 어디에서 어디까지 원용할 것인가 대하여 최재해 보존회장의 통찰력을 기대해 본다.
▲ 여원무 연행 장면(비대면 연행) 천년의 역사를 아우르는“경산자인단오제”가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의 여파로 비대면 방식으로 연행되면서, 경산시와 경산자인단오제보존회(회장 최재해)는 좀처럼 주춤하지 않는 코로나19에 정면 도전, 새로운 트렌드(trend)인 온택트 문화 기법을 활용하여 경산자인단오제의 산실인 경산시의 역사문화와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한“자인단오TV”를 개발, 경산시민과 함께 전국의 문화애호가가 온라인을 통하여 소통하는 방식을 시도함으로 연일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었다는 평을 받았다.▲ 경산자인단오제 최재해 보존회장 본 온택트 방식을 기획한 최재해 보존회장은 경산자인단오제 연행의 최소한의 필수 요원과 영상 촬영 스텝만 참여한 가운데 철저한 거리두기와 비대면 수칙을 준수한 채 이를 총 3회에 걸쳐 온라인 형식의 유튜브 방송을 시도하였다고 회고하면서 내년에는 경산자인단오제의 원형과 예술적 가치를 보다 승화시킬 수 있는 빛나는 지역축제로 이끌어나가겠다 다짐하였다.▲ 신주 빚기와 숙성과정 안치 본 기획은 모두 3회에 걸쳐 주로 현장 중심으로 편집하여 유튜브 자인단오 TV로 방영하였다. 그 첫날은 한장군놀이의 발상지인 도천산 아래 버들 못[유제지]에 영신제를 올리고, 이어 한 묘(한 장군 사당)를 영상답사, 한 장군 꽃관 지화(紙花) 만들기, 향토 출신 가수 노래, 경산시 농특산물 소개 등 방송인 한기웅씨 진행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활용하였고, 둘째 날에는 방송인 이도현 진행으로, 단오장 이모저모와 신주(神酒) 빚기 등을 소개하고, 박인태 이수자의 한장군놀이 유래 소개, 경산특산물 알리는 순으로 진행하면서, 중간중간에 향토 출신 가수들이 주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자인면 원당리 진충묘(盡忠廟)의 한장군 영신(迎神) 의례 셋째 날인 단옷날에는 호장장군 행렬, 진충묘 한 장군 대제 봉행(초헌관 최영조 경산시장), 한 장군 묘소 참배, 보인 농악 풍물 한마당 등으로 이어졌고, 오후에는 계정들소리, 자인팔광대놀이, 한 장군 큰굿 순으로 실시간 중계형식으로 유튜브 영상이 방영된 후, 본 경산자인단오제 온텍트 유튜브 자인 단오 TV가 종영(終映)되자 전국의 많은 문화애호가의 환영 댓글과 함께 큰 박수를 받았다. 이번에 시도한 경산자인단오제의 온택트 방식의 영상기획은, 2억 5천만 원의 경산시 예산지원으로 추진되었는데, 여기에는 현 보존회 최재해(69) 회장과 안명욱(86) 전임회장의 지칠 줄 모르는 향토애와 협력으로 가능하였다는 후문이다.▲ 전통 신주 빚기 재현 현장을 지도하는 안명욱(86) 전 보존회장 안명욱 전 회장은 최재해 현 회장과 함께 재임 중 경산자인단오제를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을 이루어온 인물들이다. 그 중 안명욱 전 회장은 이전 경상북도 도의원, 자인농협장 등을 거친 지역에 큰 어른으로, 경산자인단오제의 역사와 지역문화에 자타공인의 노하우(know-how)가 있다는 정평과 함께, 그는 이번에 기획한 유튜브( YouTube) 방송 촬영을 위해 구순(九旬)을 앞둔 연세도 아랑곳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며 격려와 고증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평을 받았다.▲ 진충묘 한 장군 추모 대제와 한 장군 묘소 참배 경산자인단오제는 강원도 강릉단오제와 더불어, 경산시 자인면과 강릉시 대관령 일대는 국내 대표적인 단오 축제의 현장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과 범일(梵日) 국사를 추앙하는 강릉단오제에 비해, 경산자인단오제는 한 장군과 그의 누이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축제로, 이 지방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구 자인현에 5개소(용성면 대종, 가척리, 자인면의 원당리, 진량읍 마곡리, 계정숲 진충묘)의 한 장군 사당(祠堂)을 짓고, 장군과 한 낭자의 충의와 애향심을 길이는 실존했던 이 지방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장군 대제 봉행 후 오는 2022년을 기약하는 최재해 회장 인사 요약하면, 경산자인단오제의 한 장군놀이는, 신라 말경 자인지역에 왜적이 침략(侵略)하여 도천산(到天山)에 웅거(雄據)하면서 밤마다 지역의 양민을 괴롭히고 약탈을 일삼자, 어느 날 한 장군이 도천산 아래 버들지 앞에서 왜구(倭寇)를 섬멸할 것을 맹세하고, 지역에 의병을 모아 버들지로 유인 섬멸하였다는 전승유래로, 당시의 설화 현장에는 왜구를 참한 참왜석(또는 검흔석)이 있고, 버들지가 남아 있었으나, 급격한 산업화로 버들지는 자인공단 내로 편입되어 당시의 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공단 입구에 이를 축소한 모형만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 장군의 활동상은 자인 지방의 단오놀이로 승화되면서 당시 한 장군 오누이가 지역 의병들이 이 왜구를 유인하면서 꽃을 들고 화관(花冠)을 쓴 춤이 여원무(女圓舞)로 인정, 이를 국가 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 보존되면서 경산자인단오제 한장군놀이 연행이 본격화되면서 경산지방의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의산 정상 쇠말뚝 적출 언제부터인가 일제가 우리 민족정기를 끊겠다는 의도로 곳곳의 명당지혈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르면서 이와 같이하여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칭되었다는 지명(地名)을 지역민들의 제보를 토대로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본래대로 환원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속출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로,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쟁광리(爭光里)를 본래 일광리(日光里)라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경치 좋고 아름다운 일본(日本)의 '일광(日光)'과 똑같다며 강제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하였고, 대전광역시에 있는 계족산(鷄足山) 역시 애초 봉황산(鳳凰山) 이었지만, 일제가 봉황을 닭으로 격하시켜 이름을 계족산으로 고쳤다 하였고, 서울특별시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 경계에 있는 백운대(白雲臺) 역시 일제가 주민들의 기상을 꺾기 위해'백운봉(白雲峯)'으로 바꿨었다 하여 논란이 된 사례가 있었다. 이에 경산시 역시 관내 선의산 등에 박혀있는 쇠말뚝을 뽑아내고, 연이어 왜곡된 지명을 환원하는 방안을 당해 지역 주민들과 일부 지명유래 연구가들의 건의로, 지난 2007년, 용성면 쟁광리(爭光里)와 남천면 대명리(大鳴里)가 거명되었으나, 이중 남천면 대명리(大鳴里)는 한자의 음훈대로 “크게 운다는 뜻”이 아니고, 예로부터 이 마을을 수호하던 큰 학(鶴)이 마을을 떠나기 싫어 크게 울었다는 동학산(動鶴山)의 지명과 함께 마을을 이롭게 하는 지명(地名)이라 하여 철회되고, 지금의 용성면 일광리(日光里)는 경산시 지명위원회에 상정되어 당시 쟁광(爭光)을 일광(日光)으로 2007년에 개칭 의결하였다.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1984) 이에 대하여, 당해 주민들은 별 저항 없이 이를 수용하였으나, 여기에는 학계의 지적 또한 없지 않다. 먼저 1984년에 발간한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과 1990년 발간 경북 마을지에 하나같이 쟁광리는 본래 쟁광·쟁광골·소금뱅이·쟁광곡리라 하였고 1910년 이전까지 자인현 상동면에 속한 지역이라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점은 집필 당시 제보자가 일제 강점기에 일광리가 불렀다 하였으나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위의 기록(지명유래)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일광(日光)의 의미에 대하여, 음운론적으로 일본(日本)과 빛을 상징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지명유래 제보자의 제보와 같이 일제가 그 지명에 대하여 심술이 나서 일광이란 지명을 저지하였다는 표현은 합당하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음운적(音韻的) 의미에서도“태양의 빛”이란 곧 일본이란 존재적 의미를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제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경북마을지(1990) 실제 현존하는 일광리 이전의 쟁광리(爭光里)는 지형적으로 남으로 용성면의 주산인 용산(龍山) 자락이 오목천을 적시고, 그 사이에 금학산을 가득 메운 수만 평의 농지들은 쟁광 인들을 풍요롭게 하는 기름진 옥토로, 1970년대 이후 이 일대 대규모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약 200여 기에 달하는 지석묘(支石墓)가 군락을 이루었던 명당지지로, 이로써 용성면이 신석기(新石器)시대 이전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던 고장임을 입증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던 것이었으나, 경지정리로 무차별하게 부서지고 매몰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1700년대 영남읍지 70이 넘도록 이 마을을 지켜온 K모씨는 마을 앞 넓은 농지 속에 분포된 지석묘가 이 마을 농민들에게는 따뜻한 수온(水溫)을 유지하게 지켜주는 지킴이로 농신(農神)과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하였다. 이 증언은 곧, 조선 시대부터 끊임없이 이 마을을 지켜온 쟁광(爭光)이란 지명은 단순히 빛과 싸운다는 의미보다는 따가운 햇볕에는 거대한 지석묘가 수온(水溫)을 낮춰주고, 냉기가 지속되면 햇살을 품은 온기로 마치 청산도의 구들장 논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니, 넓은 들판에 산재(散在)한 지석묘는 때로는 햇살을 조정해 주고, 때론 빛과 부닥치는 쟁광(爭光)이었음은 이 마을을 처음 전거해 온 개척자만이 그려본 미래의 지명이었으리라.1800년대 자인현지 또한 여러 편의 자인현지, 읍지에서도 1899까지는 이 마을의 지명을 단 한 번도 개칭하지 않고“쟁광(爭光)”이라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편찬한 읍지(邑誌)에도 일광(日光)이란 표현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출간한 경산군지와 소화 7년(1932)에 출간한 황기식 저“자인현읍지 그 어느 곳에서도 쟁광(爭光)이란 지명 이외에 일광(日光)이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1800년대 자인군지 그렇다면 어찌하여 1984년 경상북도 지명유래 총람 편찬 시 ‘이 마을에는 소금장수들이 울산에서 대구까지 왕래 시 쉬어간 곳, 이라 하여 일광(日光)이라 불렀다는데, 하필이면 그 시대가 일제 강점기이고, 일본에 경치 좋고 아름다운 곳에 일광(日光)과 연계하여 일광리(日光里)가 잘사는 마을이라 하여, 셈이난 나머지 그때부터 쟁광리(爭光里)로 일제가 개칭하게 하였다는 논리의 제보는 그 어떤 변명도 언어도단이다.1889년 자인총쇄록 쟁광(爭光), 그 이름은 경산시 용성면의 역사요, 용성인의 삶의 흔적이다. 비록 지금은 또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지만 용성인들 가슴 속에는 쟁광(爭光)은 빛의 싸움보다는 광활한 농지에 풍년 농사를 일구어내기 위하여 햇살을 끌어모으는 이 지방 옛 선인(先人)들이 풍년에 거는 지혜요, 길이 후대에 남겨놓은 아름다운 메시지는 아닌가 싶다.
▲ 경산묘목조합 정희진 조합장 경산시는 경산 묘목의 기원과 향후 비전을 통한 경산 묘목 100년사 뿌리 찾기를 위하여 전국 최대 묘목 주산지인 경산 묘목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여 고증하고 바르게 홍보함으로써, 경산 묘목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천명하기 위하여 지난 2020년 1월부터 2021년 3월에 걸쳐 경산종묘산업 특구 내 경산종묘유통센터(경산시 하양읍 황새길 10)에 총사업비 5백만 원(국비 285, 시비 2백만 원)으로 223㎡(1층 118, 2층 105㎡) 규모의 경산묘목 홍보 전시공간(㈜디앤지예와가 기획) 조성 지난 4월 1일 준공식을 가졌다.▲ 경산종묘유통센터 내 조성된 경산묘목 홍보전시관 전경 2013년에 발표된 경산묘목의 기원과 향후 비전 학술 세미나 보고서에 의하면, 경산묘목의 출발 기준점은 1912년이다. 이는 지금의 하양읍 대조리에 일본인 과수 기술자 “고바야시”가 전거(轉居)하면서 상묘(桑苗)를 생산하게 되었던 동기가 곧 대조리 일대의 과수농가에 묘목재배란 새로운 영농과제가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일인(日人)“고바야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농기법이 도입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일본의 군수산업 정책의 하나로 장려되었던 누에치기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농업 제1정책으로 뽕나무 재배사업이 강력히 시도되었고, 이에 전국 농가에 양잠재배기술과 뽕나무 생산이 정책적으로 독려 되면서, 이의 필요 물량 충족을 위하여 경북 일원의 뽕나무 묘목재배와 공급에 일본인“고바야시”가 선봉에 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농업정책은 곧 경산지방에 금호강 연안에 질 좋은 사질양토가 1차적 적지로 검토되어 현 하양읍 대조, 환상 지구가 상묘(桑苗) 생산 적지로 결정되면서 그림 3-1일대를 중심으로 5,000여 평의 농지에 대한 뽕나무 묘목재배가 본격화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동 보고서에는 하양 대조리 일원에 뽕나무 묘목 생산이 본격화될 무렵인 1910년 전후의 경산지역의 묘목 생산에 대하여《조선 세시기》에는, 이미 뽕나무를 재배하여 양잠을 치는 기술이 최고에 달했고, 조선 시대부터 왕실에서도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 묘목재배에 관한 기술은 구체적이지 못하였으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미 상묘(桑苗)를 키우는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어 일인(日人)“고바야시”의 신기술 보급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일대 농가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라 하였다. 당시 경산지역은 오목천 상류 지점인 용성면 송림리에 한지 생산을 위한 닥나무 재배가 활발하였고, 오목천 중류 지점인 용성면 곡란. 곡신, 미산리 일대와 자인면 신도리, 압량면 신월리 일대에서 질 좋은 재래종 뽕나무가 생산되어 양잠 농가의 주 소득원이 되었다고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경산묘목의 100년사는 곧 경산묘목만의 독창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경산묘목의 신기술 보급은 지난 2007년 지식경제부로부터 이 지역이 경산종묘산업특구로 지정되면서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이에 정희진 경산묘목조합장은, 경산묘목 홍보전시관은 경산묘목 100년사와 경산묘목과 경산종묘산업의 독창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경산종묘산업특구 내 종묘산업의 유통 활성화와 신 소득원 발굴에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 피력하였다. 이 밖에도 경산묘목 우수성을 대내외에 파급하기 위하여 해마다 종묘산업특구지역 시민걷기대회와 묘목 나누기 운동 등, 다양한 홍보 효과를 전개하여왔으나, 이번 경산묘목 홍보전시관 개관은 경산묘목의 우수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경산인의 정신적 지주이신 삼성현(원효·설총·일연) 가운데 한 분이신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선생을 기리는 신축년(辛丑年) 춘향제(春享祭)가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소재 도동서원(道東書院)에서 엄숙히 봉행 되었다. 이날 제의(祭儀)는 최근 코로나19의 극성으로 방역 마스크 착용과 개인 거리두기 등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하에 초헌관에 정정호(77, 도동서원 원장), 아헌관 이희문(76, 유생), 종헌관 김재희(75유생), 집례 이순기(76, 유생), 축 최선교(76, 유생), 알자 김영구(61, 유생) 등 자인향교 출입 지역 유생 30여 명이 참례한 가운데 천기찬(千基燦) 성균관 전의(典儀)의 지도로 진행되었다.▲ 제의에 참례한 자인지역 유생들 특히 이날 제의에는 이 고장 출신(남산면 하대리) 영화배우 이원종(75)씨가 자리를 함께하여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홍유후 설총 선생은 자는 총지(聰智). 증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赤大公), 조부는 신라 17관등 중 11관등이던 내마(奈麻) 담날(談捺), 부(父)는 서당(誓幢), 모(母)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공주이다. 선생은 육두품 출신으로,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에 대해서는『삼국유사』「원효불기 元曉不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때, 즉 654∼660년 사이에 출생한 듯하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했으며, 우리말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더불어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삼국사기』에“우리말(方言)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하였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 했고,『삼국유사』에는“우리말(方音)로 화이(華夷)의 방속(方俗)과 물건의 이름을 이해하고 육경(六經)과 문학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海東]의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이가 전수(傳受)해 끊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또한 신문왕 때 국학(國學)을 설립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719년(성덕왕 18)에는 나마의 관등으로서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이 있었을 것이나『삼국사기』를 엮을 때 이미“글을 잘 지었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지금도 남쪽 지방에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으나,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가 없으니 끝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전하게 남은 게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한편, 오늘날 설총의 문적(文蹟)으로는 우화적 단편 산문인「화왕계 花王戒」가 당시 신문왕을 풍간(諷諫)했다는 일화로서『삼국사기』설총열전에 실려 전한다. 이「화왕계」는「풍왕서 諷王書」라는 이름으로『동문선』권53에도 수록되어 있다. 타계 이후에도 계속 숭앙되어 고려 시대인 1022년(현종 13) 1월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문묘(文廟) 동무(東廡)에 신라2현이라 해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진주 남악서원 제향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불과 서쪽 1km 지점에 삼성현을 기리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되었는데, 설총 선생의 배향 또한 본 역사공원으로 옮겨 세워 경산시민들이 함께 참례할 수 있는 제의 공간으로 조성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모이기도 하였다.
▲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함께 어우러진 경산동의한방촌 전경 경산동의한방촌은 다소 생소한 감이 없지 않지만, 경산시가 지난 2020년 3대 문화권 지역 전략사업으로(문화체육관광부의 3대문화권 권역별 문화ㆍ생태관광 기반「동의 참 누리원」 조성사업 근거 추진)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인접한 남산면 인흥리 352-2번지 일대(삼성현공원로 38) 49,447㎡에 연면적 2,691.94㎡(건물) 규모로 조성된 한방문화체험관이다. 총사업비 174억 5,100만 원(국비 61.5, 도비 8, 시비 104.5)을 들여 조성한 경산동의한방촌은 지난 2012년 첫 삽을 뜬 후 약 8년 만에 완공하여 2020년 11월 23일 개촌한 자연·전통·한방융복합형 명품체험촌으로 알려져 있다.▲ 향후 운영방침과 기대효과를 천명하는 최용구 촌장 경산동의한방촌 최용구(61, 대구한의대학교 총괄운영교수) 촌장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경산동의한방촌은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와 경산시의 문화에 기반한 한방 바이오 건강과 화장품 미(美) 뷰티 미래 신성장산업 육성과 시·도민의 한방·웰빙·뷰티·문화·창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8년여에 걸쳐 총 175억여 원 투입되어 조성된 한방문화체험관으로서, 경남 산청의 동의보감촌은 관광 중심형, 영천은 관람 중심형인 데 비해 이곳 경산동의한방촌은 한방과 뷰티 특성화대학인 대구한의대학교가 운영을 맡음으로써 대학의 전문인력을 활용한 직접 체험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며, 경산동의한방촌 촌장으로서 경산시와 경상북도의‘한방 바이오 건강미(健康美) 뷰티’미래 신성장산업 육성 목표와‘지역민과 함께 세계화를 선도하는 대구한의대학교’의 동반성장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대한민국 한방의 꽃이 되다는 슬로건 아래, 전문 교수진과 종사자 전원이 합심하여 직접체험형으로 제공되는 DHU SMART-Ex Model이 니즈(방문객)친화형, 지역적합형 성공모델이 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족욕(足浴) 체험장, 한방진료 상담(전문 한의사 주재) 경산동의한방촌은 치료시설인 한의원과 한방문화체험관이 있으며, 한방문화체험관에는 한약재 건강 족욕실, 바른 몸 체형검사실·운동실’, 한방과 미용이 연계된 뷰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한방미용원(네일케어, 스킨케어)과 화장품 전시판매장’, 약초의 효능과 일상생활 속 약초 이야기를 관람할 수 있는 40여 종의‘약초전시장’, 인터렉티브 기술을 활용해 약탕제조과정을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는‘약탕제조체험장’등을 갖추었다. 약초전시장에서는 세계의 약초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십전대보탕, 인삼양영탕 등에 쓰이는 한약재를 원형 그대로 볼 수 있어 한방에 대한 흥미를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며, 한방체험실과 한방화장품체험실에서는 한방차 만들기, 약초주머니 만들기, 한약재를 활용한 화장품 및 향수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경산동의한방촌 야외에는 계절별로 다양한 약초를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는 약초정원과 약초야생화원, 치유 숲, 명상원, 대오쌈지공원, 치유산책로 등이 조성되어있어 인근에 위치한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힐링의 명소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경산동의항방촌이 조성된 일대는 민족의 큰 스승이자 경산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는 화쟁국사(和諍國師) 원효(元曉)·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을 기리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경산의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경산 사직단(社稷壇)은 관광 차원에서도 그 시너지 효과가 높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밖에도 자연·전통문화·한방이 어우러진 문화체험·휴양형 관광지를 조성함으로, 시민의 웰빙욕구 충족, 여가선용, 지역 관광문화산업 발전 도모 다문화가족과 외국인 한방체험 기회 제공으로, 한방 글로벌화 확산 운영기관 대구한의대학교의 풍부한 한방 관련 전문인력 활용으로 시설 운영방안을 수립, 한방의 건강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다양한 한방 관련 아이템과 콘텐츠 개발 운영으로 욕구 만족도를 제고하고, 시설 운영 수익 효율화 방안 모색 등으로, 경남 산청의 동의보감촌(관광형), 영천시의 동의참누리원(관람형)과 차별화된 사업추진으로 경산동의한방촌(체험형)만의 독창성이 기대되고 있다. 한편, 본 경산동의한방촌은 지난 2020년 7월부터 오는 2023년 12월까지 대구한의대학교에 위탁운영되며, 이용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동절기 오후 5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이용요금은 프로그램별 10,000원(한의원 제외)이며, 일부 전시장은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코로나19 여파로 지쳐있는 시민들을 위해 새봄맞이 한방엔조이(Enjoy)운동을 펼치는 한편, 5월 가정에 달에도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하였다.
▲ 당선 소감을 밝히는 최재림(85) 제10대 회장 (사)대한노인회 경북 경산시지회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3월 8일 제10대 대한노인회 경북 경산시지회장 선거의 선거일을 공고하고, 3월 18일 양자 대결로 치러진 선거 결과에서 기호 2호 최재림 하양분회장(85세)이 총선거인수 382명 중 361명(투표율 94.5%)이 투표한 결과, 207표(57.3%) 득표로 당선되어 향후 4년간 (사)대한노인회 경북 경산시지회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앞서 최재림 당선인은 출마의 변에서, 건강한 사회 노인의 책임이란 캐치프레이즈로, ① 경로회장 수당제도 도입, ② 경로당 보조금 정산 문제 개선, ③ 경로당 보조금 지원제도 개선, ④ 노인 회원 복지 개선 등에 공약을 내걸고, 이제는 노인이 변화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건강하고 당당한 노인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최재림 당선자는 본지와 인터뷰에서도 특히“존경을 받아야 할 노인들이 당당히 존경받는 사회, 그리고 노인사회가 달라져야 우리 사회도 달라진다”라며, 노인의 명예와 의무(Noblesse oblige)를 강조하면서 당선 소감을 밝혔다. 최 당선인은 경산시 하양읍 한사리에서 태어나, 하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대학 병설 중학교와 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 사정이 여의하지 못하여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하양 중학교 행정담당 겸 체육 강사로 임용되어 21개월 동안 고향 학교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입대 영장을 받고 34개월 동안 육군병참학교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 후 복직하여, 20여 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공민 과목인 일반사회 수업도 곁들이는 등, 지역의 각종 단체에 봉사활동에도 솔선 참여했던 하양의 터줏대감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신임 최재림 회장의 다양한 사회적 참여 그는 팔십 평생을 그 흔한 승용차에 눈길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전거 하나에만 의존하면서, 1988년 하양여자중학교 서무과장에 이어 대구동부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선봉이 되어 서무과장으로 8년간 봉직하다, 예순을 앞두고 퇴직한 후 하양읍 체육회장, 대구상업고등학교 재경산동문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지난 2014년부터 경산시 유림연합회 회장, 하양향교 전교, 하양육영재 훈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경산시 번영회장, 경상북도 향교발전협의회 회장, (사)대한노인회 하양읍 분회장과 경산시지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특히 최 당선인은 지난 2020년부터 하양지역의 역사바로잡기 운동에 솔선 참여, 사단법인 임란충의하양현창회 이사장을 맡아 그간 “경동계”에서 발의된 하양지역 임란 창의 의사들의 충의를 기리는 현창(顯彰) 사업을 가시화한 인물이기도 하다.또한 당선인은 이를 위해 지난해는 관내 대학 학술기관인 경산학회와 협력하여“경산 알리기 순회 학술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열정을 보여 왔으며, 그밖에 80년 만에“하양읍지”출간에 진력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하양읍 조 모씨(70)는“한마디로 최재림 회장의 캐릭터는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소나무와 같은 분입니다.”하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향토 사랑과 일에 대한 열정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최 당선자의 대내외적 평가는 곧 교육부장관상, 경산시민상, 경북도지사 표창, 경북연합회장상 등 수상으로 이어졌고, 특히 지난 2020년 10월 15일, 제24회 노인의날 기념식에서 노인 여가활동 발굴 회원 화합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북 모범노인상을 받은 쾌거를 거두었다. 한편, (사)대한노인회 경산시지회는 회원 1만7,779명이 소속돼 있으며, 여기에는 경로당 프로그램 지원, 노인대학 운영, 실버봉사단 운영, 노인 재능나눔활동 지원 사업, 노인취업알선센터 운영 등 어르신들의 활기찬 노후생활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새로운 당선자에게 거는 회원들의 기대는 무엇보다 노인들에 대한 권익과 사회적 참여, 그리고 이 시대 어른으로서 진정한 역할과 편견 없는 인증(認證)은 아닌가 싶다.
지난해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소재 육영재(育英齋)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면서, 그간 소원(疏遠)하였던 하양읍 교리 소재 하양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가 명실상부한 조선 시대 하양지역의 지방 선비 양성을 위한 전문 교육 도장이었던 사실이 가시화되고 있다.▲ 하양향교 전경 하양읍 한사리 출신 최재림(85, 전 하양향교 전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명종 10년(1555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臨皐書院,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이 세워지면서, 하양읍 사기리 소재 환성사의 사전(寺田)이 임고서원에 관리권이 넘어갔고,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하양현(河陽縣) 유생 박서봉(朴瑞鳳)과 황윤중(黃允中)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하여 마침내 하양향교에 귀속되게 윤허 받았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재림 전 전교는, 당시는 조선 조정의 억불숭유 정책이 팽배한 시기라, 큰 사찰에 대한 사전(寺田) 관리는 이 밖에도 임고서원이 무려 5개 사찰에 대한 관리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양 유생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환성사 관리권이 하양향교로 돌아왔다며 당시의 경위를 설명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실제 당시 임고서원 소장(所藏) 전적 중, 환성사를 비롯한 5개 사찰과 임고서원과의 분쟁을 다루고 있는‘환성사결입안(環城寺決立案)’과 당시 하양향교와 임고서원의 유림이 환성사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상소한 결과, 조정으로부터 그 판결을 받은 기록문서인‘환성사결송문(環城寺決訟文)’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하고 있다. 하양향교에 관한 문헌은, 태학지(1785년,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와 경산군지(경산군, 1971),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등을 다음과 같이 축약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과 2005년에 편찬한 하양향교지를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하양향교 대성전 이 기록에 의하면,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길20길 12-5에 소재한 하양향교는, 1580년(선조 13)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에 대성전을, 1622년(광해군 14)에 명륜당을 각각 중건하였다 하였고, 그 뒤 1803년(순조 3)에 대성전을 중수하고, 1862년(철종 13)에 진사 손상봉(孫相鳳)이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했다. 이 밖에도 1903년, 도유사 김상룡(金象龍), 지현(知縣) 윤규선(尹奎善)이 교궁(校宮)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 도유사 조학기(曺學璣)가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4칸의 전사청(典祀廳), 기물고(器物庫),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내삼문·외삼문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기록해 두었다. 동 기록에는 일반적으로 동재와 서재의 위치는 명륜당 앞이어야 하나, 이 향교는 출입도를 정면으로 하고, 경사가 완만한데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명륜당(明倫堂) 뒤에 위치하는 특이한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대성전에는 5성위와 신라 2현, 송조 2현, 고려 2현, 조선 14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7호로 지정된 하양향교는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焚香)하고 있으며, 운영은 전교 1명과 장의 18명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허광열(75) 현 하양향교 전교는, 하양향교는 하양읍 소재지 중심권에 다소 벗어나 있지만, 하양 유생들은 임진왜란 때나 이후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엿하게 일어나 향토를 수호하여왔다 강조하면서, 최근에도 이들의 선비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청소년 충효 교실 등을 확대 추진하고 있다고 피력하였다. 또한, 하양읍 동서리에 소재한 하양 육영재(育英齋)는, 하양현의 영재교육을 위하여 조선 순조 23년(1823년)에 하양 현감 이태승(李台升)이 하양지역 향내 유림과 함께 기부금 등으로 당시 환성사(環城寺)에 축조되어 있던 안양실(安養室)을 옮겨와 세운 하양향교 부속 서당이라 설명하였다.▲ 육영재 전경 이에 허광열 전교는, 당시 육영재는 향내에 수학하는 수재(秀才)들을 선발하여 진학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에 학생 선발과 운용지침에 관한 건은 하양향교의 통제를 받았으며, 또한, 훈장은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분을 추대하여 강학(講學)을 맡겨, 성균관(成均館) 진학과 과거에 응시토록 양성하였다고 피력하였다. 또, 숙식과 학자금은 지역 유림에서 육영계(育英契) 및 보인계(輔仁契) 등을 결성하여 재정적인 어려움을 없애고, 학문정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덧붙였다. 또한, 육영재는 중간에 한때 양사재(養士齋), 모성재(慕聖齋)라 지칭했다면서, 이는 오로지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육영재는 하양의 자랑이며, 교육도시 경산의 위상을 부상(浮上)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강조했다. 이밖에 육영재는 <육영재기(育英齋記)>, <육영재 상량문(育英齋上樑文)>, <육영재 중수기(育英齋重修記)>, <모성재기(慕聖齋記)> 등 현존하는 관련 자료를 통해 창건과 변화, 그리고 운영 실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한편, 하양 육영재는 경상북도에 조선 후기 양사재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에서 민관이 함께 창건하고, 현재까지 그 구조와 규모가 큰 변화 없이 남아있어 고건축물로, 건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학·교육사·사회사 연구에도 중요 자료로 평가돼, 지난 7월 3일 열린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건축문화재분과)에서 경상북도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육영재 현장에서 증언하는 최재림 전 전교 이와 동시에 경산시는 지난 2020년 12월 8일부터 2021년 5월 30일까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특별전시실에서“하양 육영재 참된 선비를 기르다.”란 주제로 다양한 서책, 교지, 현판, 편액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여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